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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을 듣는다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06
오르한 웰리 카늑 지음, 술탄 훼라 야크프나르 여.이현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평점 :
서른 여섯에 요절한 시인의 직접적인 사인은 뇌출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빠르게 세상과 격리시킨 원인을 술에서 찾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시인이 늘 취해 있었다 하니 그런 추측이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언제가 죽게 되니 어찌 죽으나 뭐 그리 대수로울까 싶지만, 이건 말이 그렇지 어떤 이들은 그 죽음의 과정과 이유마저도 특별할 수 있다. 이건 시를 읽고 난 후 자발적으로 동의한 생각이다. 또한 그의 생애에서 사랑도 빼놓을 수 없다고 하는데, 이도 뭐 그리 대수로울까 싶지만 그도 그리 말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역시 시를 읽고 난 후에 든 생각이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그의 삶과 죽음이 갑자기 특별하게 느껴진 건 순전히 그의 시를 읽었기 때문이고, 그만큼 시인의 시가 특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인생에 대해 뭘 좀 안다고 말하는 자신이 화끈거렸기 때문이다. 물론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말이다.
터키에서 시인의 시는 모더니즘시 운동의 상징으로 꼽힌다고 한다. 시인은 형식적인 혹은 상투적인 어떤(터키의 서정소곡) 시작법을 벗어났고, 현실 참여를 주장하는 리얼리즘과도 다른 길을 갔다고 한다. 감히 짐작하건데 시의 세계에 있어 양대 산맥을 벗어났으니 눈 밝은 독자는 즐거웠겠으나 시인은 외로웠을 것이라 짐작만 한다. 분석은 내 몫이 아니고, 분석할 깜냥도 없기에 그저 나는 짐작만 한다. 더 나아가 시인의 시를 읽고 이렇게 깜짝깜짝 놀라며 즐겁고 외롭게 뒹굴 뿐. 시는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닐까 위무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뭔가 좀 아쉬워 옮긴이의 말을 또 다시 옮겨보면 이렇다. "오르한 웰리가 하층 민중들의 삶을 그들의 표현 방식을 그대로 빌려 시로 노래했을 때 문학의 후원자임을 자처했던 부르주아 계층은 이를 모욕처럼 받아들였으나 그의 시는 곧 젊은이들의 영혼을 사로잡았고 열렬히 환영받았다. 그의 시에는 어떤 과장된 영탄의 효과도, 화려한 수사도, 부풀린 이미지도 없다. 정제된 운율, 미리 결정된 형식과 리듬, 점잖은 듯 감추는 시어들에 거역하면서, 단순한 삶의 진실을 제시하고 때로는 감상적으로 보일 만큼 간결한 문체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한다" 오호, 내 말이! 여튼 이제 시를 좀 읽자.
나는 오래된 물건들을 산다
나는 오래된 물건들을 사서
그것으로 별을 만든다
음악은 영혼의 양식이라지
난 음악에 흠뻑 빠진다
나는 시를 쓰고
그것으로 오래된 물건과 바꾸고
또 음악을 산다
아, 내가 라크 술병 속 물고기라면
시를 써서 오래된 물건과 바꾸고 그것으로 별을 만들고 음악에 취한 시인을 상상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시인이 속한 식어가는 세계(오래된 물건으로 별을 만든다면 식어가는 세계가 아닐까)와 별빛 아래 흐르는 음악은 어찌 좀 와닿는다. 어쩌다가 이 구절이 내게 절로 다가와 별처럼 반짝이는지 설명은 불가하나 중요한 것은 어쩌면 영원히 반복될 지도 모를 절망을 이제는 좀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이것도 폼을 잡는 일일 수도 있으나 그럴 수 있다,는 뭐 그런 물고기같은 마음이라면 스스로에게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또 이 시는 어떤가.
아름다운 날들
이 아름다운 날들이 나를 망쳤지
이처럼 아름답던 어느 날에 일을 그만둔
나는 성실한 관리였네
이런 날에 처음 담배를 배웠고
이런 날이면 나는 사랑에 빠졌었지
집으로 빵과 소금을 가져가는 것도
이런 날에는 잊고 말았으니
으레 이런 날이면
시를 쓰려는 아픈 마음이 생겼네
나를 망쳤네,
이토록 아름다운 날들이
살다보면 정해진 일인지 그것과 무관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과거의 나와 작별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좀 더 편하게 설명하면 그렇게 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직감하게 되는 살 떨리는 날이 있다. 아찔하고 비루하고 혹은 쓸쓸하고 여튼 예전의 나와 작별하게 되는 어떤 그날. 아름다운 날들이 나를 망쳤네, 라고 쓴 시인의 저 아름다운 날들이 내가 기억하는 뭐라 명명하기도 묘한 그저 살 떨렸던 그날들과 닮아 있을까. 모르겠다. 그저 나를 망친 그날들마저 이제는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 혹은 세련되게 조작되어 있으니 뭐가 뭐였는지 도통 알 수 없을 뿐.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나마 시를 쓰려는 아픈 마음은 내게 없었다는 것. 그러니까 마지막 정신줄, 창피해지는 일은 스스로 막았다는 것이 그저 대견할 뿐이다. 아니다. 이 문장을 쓰고 있는 내 속내는 그런 아름다운 날에 시를 쓰려는 아픈 마음이 생긴 시인이 그저 부러울 뿐이라는 것.
시집은 오르한 웰리가 1945년 이스탄불에서 쓴 『이방인』을 위해,라는 작가의 글도 읽을 수 있고, 새로운 시 정신을 선언한 「이방인」의 서문도 볼 수 있고, 옮긴이의 자세한 설명도 읽을 수 있다. 모두 다 아껴 읽은 글들이었으나 여기에 옮길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시가 굳이 어떤 해석들을 기반으로 존재할 이유없고, 예술이 어떤 옹호들로 안전지대를 찾을 필요없겠다,싶은 마음이라면 이것도 개폼일까. 그래도 할 수 없고.
제일 중요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집을 처음 펼치면 「게믈릭으로」라는 시가 나온다. '게믈릭'은 에게 해 연안의 항구도시란다. 시의 전문은 이렇다. 이런 건 옮겨야 한다.
게믈릭으로
게믈릭으로 가면
바다를 볼 수 있을 거요
그때 놀라지는 마요
「게믈릭으로」라는 시는 오르한 웰리 카늑의 시집 <이스탄불을 듣는다>를 가장 확실하게 설명하는 시다. 그러니까 "<이스탄불을 듣는다>를 펼치면 / 시를 읽을 수 있을 거요 / 그때 놀라지는 마요" 로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야기는 또 여기서부터. 시인의 시가 어떻게 나를 유혹했는지 밝혀두고자 한다. 뭐랄까 "안 넘어갈 수 없었어요"라고 말하면 "왜요?"라고 물을 사람들을 위해서다. 시가 이렇게 쓰여있고, 이렇게 읽히는데 어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취향이 영 다르면 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래서 또 이렇게 옮긴다.
요염히 눕다
그녀는 몸을 늘이고 나른히 누워 있다
그녀의 치마가 조금 말려 올라갔구나
그녀가 팔을 올리니
살며시 겨드랑이 비치는데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보듬는구나
나는 안다,
그녀 안에 나쁜 마음이 없음을
나는 안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품지 않음을
그러나......
저러면 안 되네
저렇게 요염히 누워선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