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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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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의 새책 [역사의 공간]을 접하기 얼마 전, 나는 지인과 함께 한국인의 [빨리빨리]라고 불려지는 습속에 대해 논쟁을 한 적이 있었다. 내 주장과 지인의 주장은 달랐는데, 나는 우리사회가 [빨리빨리]라는 사회적 리듬에 젖게 된 시점을 일제 강점기로 보았고, 지인은 군인에 의해 산업화가 본격화된 시점을 그 계기로 판단했다. 그때 나는 [빨리빨리]라는 것이 시간의 개념이라는 것을 주장의 근거로 가져왔었다. 분침과 초침으로 명확히 계산되고 누적될 수 있는 시간! 새로운 시간! 즉, 원형적 시간이 아닌 선형적 시간이 언제 역사의 공간에 등장했는지, 선형적 시간의 개념이 무엇을 목적으로 유포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초기 자본을 끌어들인 침략국 일본은 노동을 착취해 생산잉여를 극대화하려고 새로운 시간의 개념을 민중에게 강요했을 것이고, 근대화되지 못한 신체를 근대적 리듬으로 포섭하기 위해서 [근면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제시했고, [빨리빨리]라는 사회적 리듬을 강제했을 것이다,가 내 주장이었다. 이진경의 [역사의 공간]은 이 개인적인 논쟁에 온전한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은 아니었지만, 내 주장을 뒷받침해 줄 광범위한 사유를 던져주었다. 이 아니 어여쁠쏘냐! 

[역사의 공간]은 필자가 밝힌 것처럼 역사, 시간,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등의 공동성을 역사의 공간안에서 사유한 책이다. 필자의 사유가 워낙 광폭이고 또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어, 책에 실린 모든 내용을 소화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시공간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욕망을 새로운 시간 혹은 역사가 요구하는 욕망의 구도로 어떻게 편입시켰는지를 보여주는 부분과, 어떤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건 그 사회안에서 소수로, 타자로 존재했던 사람들을 향한 억압과 착취 그리고 혁명을 사유하는 부분은 선험적 지식의 양과 무관하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공포의 정치로 기억되는 시절을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정확히 기술할 수 없다. 70년대에 태어났지만 70년대와 80년대를 버텨냈다고 할 수 없기에 나는 공포정치를 체험했다고 할 수 없다. 몸과 마음을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권력이 어떤 유효성을 제시해 대중을 포섭하고 길들였는지를 체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불행이라면 불행이다. 내가 정치적 판단이 가능해진 시점의 한국은 민주화의 초입이었고, 내가 경제적 판단이 가능해진 시점은 IMF의 초입이었다. 하여 그당시 실존으로서의 먹고 사는 일이 어찌나 큰 화두가 되어 버렸는지, 사회혁명의 짜투리를 넘겨다 보는 일조차 실로 사치였다면 개인적인 과장일까, 여튼 그랬었다. 그렇다고 중심부에 편입되었던 것도 아니니 나는 주변부의 상황 역시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불편한 심기를 자극했던 사건들은 무수히 많았지만, 그때마다 작게 분노하고, 작게 동정하는 일이 내가 취한 최대한의 도덕이었다. 너무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위안이었지만, 쉽게 얻은 만족이기에 한편 하찮을 수 밖에 없었다. 

집단적 이익만이 존재하는, 심지어 생명의 권리마저 자본의 권리를 위해 폐기되는 사회를 산다는 일은 결코 유쾌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사회적 리듬에 엇박을 놓을 수 있는, 적어도 제단된 욕망을 의심하기라도 하는 사람들을 찾았고, 그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그러나 쉽게 메워지지 않는 균열을 내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버려지는 것들을 되살리는 일, 그 일을 통해 얻어진 댓가를 주변부의 사람들과 나누는 일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나는 실패했다. 필자가 말하는 [흐름의 공간]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공간에 존재하는 [대중]을 파악하지 못했고, [소수자] 혹은 [타자]들의 연대를 구축하지 못했다. 실패의 기억은 쓰라리지만 그렇다고 얻은 것이 없지는 않다.  

책으로 돌아가자. 필자는 내게 이렇게 묻는다. "자신들의 고통, 자신들의 저항마저도 자신만의 것으로 하는 게 아니라, 다른 모든 타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환시키는 것, 이를 통해 다수자들과 거리를 느끼고 간극을 만들기 시작한 모든 이들을 자신들이 창안한 저항과 돌발의 지대로 유인하는 것,.......어떤 저항과 투쟁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그 공감이 공명되며 확대되어갈 때, 그리하여 또 다른 커다란 돌발의 흐름이 만들어질 때, 그것을 소비하는 속물들이 출현하는 일이야 어디서나 피할 수 없는 '조그만 불행'아닌가. 그 조그만 불행을 피하기 위해 자기들만의 순수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 조그만 불행을 큰 불행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어리석음과 오기로 탈진해 버렸던 지난 시절이 안쓰럽고, 다시 떠올리기도 싫지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무엇을 할 것인지', '운동이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스스로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또한 내가 꿈꾸었던 세상으로 다시 되돌아가려 할 때가 온다면, 그때는 정주하면서도 떠날 수 있고, 이동하면서도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시점일 것이다. 거대하고 단단한 그 어느 지점에 균열을 내기 위해 되돌아 간다는 것, 그것은 이미 내게 정해진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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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2-24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조 양반의 미덕은 천천히, 우아하게...였겠지요.
식민지 시대 착취의 대상이 되면서 천박한 빠름이 '빨리빨리'의 원형이 되었겠지만,
그것이 전국민의 '빨빨화'로 확산된 것은 아무래도 산업사회의 리듬감이라고 봐야겠죠.
60년대까지만 해도 이 땅은 농민들의 삶이 지배하는 1년 단위의 느린 호흡을 가졌더랬으니 말입니다.

굿바이 2010-02-2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의 말처럼, 다시 생각해보니 산업화의 리드감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제 주장은 그 기원에 대한 이야기에 묶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지음, 시와사회 편집부 옮김 / 시와사회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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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들을 딱히 뭐라 부르는지 알 수 없지만, 예전에 나를 포함한 그들을 천후파(天候派)라 부른적이 있었다. 어제 저녁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어쩌면 봄비일지도 모르다는 생각에 피식웃었다. 그시절 일들이 떠올랐던 까닭이다.

1997년. 그 해 봄에는 유난히 비가 잦았다. 한 두 달가량 수요일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그런 날이면, 바람결에 실려오는 젖은 흙비린내에 나는 반쯤 미쳐있었다. 반쯤 미친 상태로 회사 근처 작은 서점으로 향하면, 그곳은 습기에 민감한 오래된 책들이 눅눅한 향을 뿜어내고 있었고, 비좁은 공간에 마련되어 있던 간이 의자는 식빵처럼 푹신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아낌없이 남아있는 정신의 반도 놓아버렸다.

내가 정신나간 여자로 변해 찾아 헤매던 숱한 책들중에서 나를 쉬게 했던 책은,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집이었다. 시집과의 조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갑자기 이루어졌다. 나,라는 단어의 절박함에 나타샤,라는 단어의 울림과 당나귀,라는 단어의 떨림이 나를 붙들었던 것이다. 나는 멈추고, 숨을 고르고, 천천히 책장을 열었다. 빗소리에 맞춰 아주 천천히.....

흰밤
 
옛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1935년 11월)


수절과부의 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외로움에 치를 떨며 행간속에서 먹먹해지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이 시와 마주앉아 그렇게 꼼짝없이 바람벽앞으로 불려나와 있었다.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
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이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
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에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
  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
  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란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그 밤 나는 내 가난하고 높고 쓸쓸한 가장 소중한 그것들을 떠올리며, 이 시를 앞에 두고 곡(哭)하였다. 오늘도 비가 오면 백석이, 백석을 앓던 시절이, 그 봄밤의 빗소리가 그리울 것이다. 그리고 마스카라가 다 번져 엉망이 된 젊은 처자를 지긋이 바라보시던 책방 아저씨도. 깜빡이던 백열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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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2010-02-0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백석 오라버니의 시들을 좀 외워볼까봐요.

굿바이 2010-02-08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글이 예뻐서 낭독하면 참 좋아. 봄밤에 취기가 좀 오르면 노래처럼 불러도 좋고, 언제 낭독의 밤,같은거 한 번 해볼까나^^

동우 2010-02-16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제 책읽는 부족 함께 만나면, 굿바이님 낭송하는 백석의 시를 듣고 싶습니다.

굿바이 2010-02-16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를 시키면 좋겠습니다.ㅋㅋㅋ

W 2010-02-17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석 오라버니는 언니가 해야...ㅎ

굿바이 2010-02-19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됐고!!!
 
관촌수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6
이문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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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깨달음과 지혜에는 일종의 체념과 허무가 포함되기 마련인가 보다.
그런 연유로 반백이 되어버린 내 아버지의 말씀은 항용 벼락처럼 내 귓전을 치지만, 아버지의 뒷태는 흡사 안개처럼 흐려지기 일쑤다. 어쩌면 나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지혜와 깨달음을 내 아버지를 통해 엿볼 수 있었으나 그 값으로 원치 않는 허무를 알아챘는지도 모르겠다.
하여 내게 [관촌수필]은 또 다른 이름의 아버지이자 사라져버리는 것들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는 이의 심중을 가늠해볼 수 있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이문구의 [관촌수필]을 거론함에 있어, 그리고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 충청도 사투리를 빼놓을 수는 없다. 여담이지만 나는 한때 모든 농촌은 충청도라 믿었었다. 그만큼 그의 글은 살아 움직여 마음을 헤집고 들어온다. 허나 방언은 잘 알려진 특징일 뿐, 작가의 수사학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작가가 조부로부터 득한 한문의 수사학에 힘 있고 격조있는 문어체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관촌수필]의 매력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관촌수필이 한 권으로 묶여 있지만 여덟편의 이야기가 배치되어 있는 것이나, 작가가 집필한 다른 저서들 역시 단편의 형식을 갖춘 것을 볼 때, 그의 글은 단편으로서의 묘미가 가장 크다. 그것은 구어체적 특징 때문이다. 그의 글은 툭 터진 웃음보마냥 또는 사레들린 사람의 기침처럼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거기에 더해진 에피소드들은 풍성하며 반듯하고, 훈훈하며 가슴을 쥐어지르는 것들이다. 이만한 글의 성찬이 또 어디있겠는가.

[관촌수필]을 술회하는 마음이 모두 같을 수는 없겠으나, 나는 이 책의 독자라면 누구나 심중에 간직한 나무 한 그루를 꺼내 보지 않았을까 싶다. 따라서 일락서산(日落西山)과 관산추정(關山芻丁)은 좀 더 각별했다. 조부를 상징하는 왕소나무, 어머니를 상징하는 감나무 그리고 이제 홀로 고향을 지키는 복산이라는 구부러진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분에 취해 내 유년기의 그때로 잠깐 헛발을 들여 놓고 허망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것은 제 깜냥에도 친가에 있던 감나무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몰락하는 존재의 운명앞에서 그리고 삭정이처럼 간신히 매달려있는 것들 앞에서 나는 비감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밖에도 행운유수(行雲流水)의 옹점, 녹수청산(綠水靑山)의 대복, 공산토월(空山吐月)의 석공이라는 등장인물들은 책을 덮고도 쉽게 놓아줄 수가 없었다. 옹점과 대복 그리고 석공처럼 무엇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리고 무엇도 채근하지 않으며, 언제든 달려가면 덥썩 끌어안아 줄 인연들을 삶의 어느 지점마다 매듭지어놓은 작가가 한없이 부러웠다. 

이 책을, 작고한 작가를, 아련하고 서운한 풍경을 이야기하자면 적어도 이십년은 묵은 친구와 밤을 세워도 부족할 것이다. 나는 그만큼 작가의 모든 것에 각별하다. 이는 누구의 말처럼 그는 내게 깜깜한 밤에도 길을 보여주는 북극성이었고, 울화가 치미는 속내를 털어놓고 치기를 부리고 싶은 선배였고, 연애를 걸고 싶은 진짜 남자였다. 그러니 2003년 2월 그의 부음을 듣고 부레가 끓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내 개인적인 욕심과 무관하더라도, 우리 문단에 그대로 있어야 할 어른이 아니었던가. 진짜 어른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2월이 왔다. 나는 한동안 그의 글 속에서 여투어 둔 마음을 담아 기제사를 지낼 예정이다. 이 글이 축문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일락서산의 한 대목으로 감히 축문을 갈음한다.
  

잘 있어라 옛집, 마지막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번 옛집을 되돌아보았을 때, 그 너머 서산 마루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지는 해가 있었다. [현대문학, 197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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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윤 2010-02-01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문구작가처럼 살고싶다고 했었지? 요즘 너를 보면 많이 닮아간다는 생각이 들어. 2월이구나.

굿바이 2010-02-0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닮는다....나잇살과 주름살?^^ 선생님의 글이 그리워서인지, 아니면 맴돌기만하는 내가 못마땅해서인지, 2월이면 어김없이 멜랑꼴리해져. ㅜ.ㅜ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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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니 시적 순간이란 것과 대면하게 될 때가 있다.
갑자기 사방이 특정한 이미지로 굳어지는 느낌, 그 순간의 기억은 언제 꺼내 보아도 동일한 이미지로 기억되는 특별한 시간이 존재한다. 나는 그 시간을 시적 순간이라고 이름지었다. 그것은 마치 시인이 어느 것과도 대체될 수 없는 단어를 시에 삽입하듯, 내 기억에서는 그 순간이 어느 것과도 대체될 수 없는 특정한 이미지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 날은 그런 날이었다.
깡깡 얼어붙은 하늘에서 무언가 쏟아질 것 같았고, 내 손에는 기형도의 시집이 들려 있었고, 분홍색 스웨터는 추위를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고, 그 아이의 손은 하얗고 부드럽고 길었다.
  

쥐불놀이

- 겨울 版畵 5

어른이 돌려도 됩니까?
돌려도 됩니까 어른이?

사랑을 목발질하며
나는 살아왔구나
대보름의 달이여
올해에는 정말 멋진 연애를 해야겠습니다.
모두가 불 속에 숨어 있는걸요?
돌리세요, 나뭇가지
사이에 숨은 꿩을 위해
돌리세요, 술래
는 잠을 자고 있어요
헛간 마른 짚 속에서
대보름의 달이여
온 동네를 뒤지고도 또
어디까지?

아저씨는 불이 무섭지 않으셔요?



시인과의 지독한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내게 인연이란 무엇인가. 내게 있어 인연은 어긋남의 다른 기표였다. 내가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그의 유년시절의 상처와 우울한 정열과 못다 이룬 사랑에 통감하며 그를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죽은자였다. 하여 내가 그에게 표할 수 있는 경의는 그의 시를 잊지 않는 것 뿐이었다. 손이 유난히 고왔던 그 녀석과의 인연도 마침표에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그 이야기에 들어서자 마자 나는 길을 잃고 이야기속에 갇혀버렸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를 기억하는 이는 많다. 그의 한 권 뿐인 시집에 찬사를 보내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기형도가 고통스럽다. 그의 시는 내 삶의 중요한 어느 부분마다 불쑥불쑥 찾아와 생채기를 내놓고도 아무런 복수도 할 수 없게 너무 쓸쓸히 여기저기서 나뒹굴고 있다. 미워할 수도 없이 힘이 빠진 말간 얼굴을 하고 말이다. 
이미 겪은 고통이 아무리 잔인한 것이었다고 해도 덤덤하게 여겨질 날이 올 것이라는, 그런 일들이 반복된다고 해도 나는 또 먹고 자는 일을 반복하리라는 사실이 오늘 덜컥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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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0-01-28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각의 기억, 후각의 기억, 청각의 기억.
기억이란 감각의 영역.

굿바이님의 '시적순간'이라는 말.
촌철살인.
마르셀 프루스트가 맡는 냄새.



굿바이 2010-01-29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다른 분들의 시적순간,이 궁금해졌어요. 언제 한 번 물어볼래요~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 현대문화론 강의
이진경 엮음 / 그린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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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문화정치학의 영토들]은 [근대]와 [탈근대]라는 이념을, 현대문화를 특징짓는 일련의 현상들 안에서 살펴봄으로써, 근대의 삶과 현대의 삶을 조명한 현대문화 강의서다. 
이 책이 다루려고 하는 문화정치학은 이미 알만한 학자들이 대부분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한 분야이고, 나름의 깃발을 꼽고 그들의 진지를 구축해 놓은 상태다. 따라서 우리의 재기 발랄하고 젊은 집필자들은 [근대]와 [탈근대]라는 이념을 설명함에 있어, 단지 현상만을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복의 실현 가능성 그리고 긍정적인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는데 노력을 기울인 듯 하다.

대체적으로 이 책의 주요 논쟁거리인 [근대]를 특징 짓는 어떤 이념들은, 그것이 자본주의적인 삶과 땔 수 없다는 태생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지만, 인간을 神으로부터 빼돌리는데 일조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절대자로부터 도망친 인간이 완전한 해방을 누렸는가,라는 질문에는 여전히 부정적인 답변을 할 수 밖에 없지만 말이다. 여하간 신으로부터 탈주한 인간들은 독립적인 영토를 구축하고, 그 땅에 새로운 씨앗을 뿌렸으니, 씨앗이 싹터 맺은 열매를 우리는 [이성性]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근대]의 시간은 이성이 지배하는 시간이며, 이성의 잣대로 가늠할 때, 비합리적인 것들을 합리적인 상태로 극복,하려는 노력이 존재했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심하고 주목할 점은 바로 [합리적인 상태]다. 말은 그럴싸 하지만 [합리성]을 강요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한 [합리성]인지, 마지막으로 [합리성]의 결과물이 어때했는지를 검증해 본다면, 의도도 투명하지 않으며 결과도 기대에 못미친다는 사실을 간파 할 수 있다. 따라서 쉽고 간단하게 짚으면 [근대의 시간]은 그것이 주장했던 [합리성]과는 무관하게 비합리적인 행태와 문제점을 적지 않게 표출하였다. 이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선언이 바로 [탈근대]다. 

근대는 이미 지나간 시절이라고 하지만, 특히 예술의 영역에서 본다면 포스트모던이 지배적인 추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현대의 삶은 근대적인 삶의 형태와 사유로부터 벗어나 크게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서 다루어진 주제 중 [현대 자본주의와 현대문화], [근대의 욕망과 신체], [근대의 이념적 경계들]은 우리의 신체와 감각이 서구적 지배이데올로기, 다시 말해 근대적 사유에 어떤 식으로 철저히 붙들려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현대 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현상들을 무수히 많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버거운 현대 문화의 현상들은, 매우 그럴싸해 보이지만, 전혀 그럴 듯 하지 않으며, 또한 새로울 것도 없으며, 주위를 기울이지 않으면 너무 쉽게 매몰된다. 물론 그렇게 살아간들 무슨 큰 일이 생기겠냐고 하겠지만, 현대의 문제점은 현대 문화의 병패가 단순히 외부적인 공격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이 자각할 수 없는 교묘한 장치들을 동원해 인간의 내연에 틈을 만들고,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가 스미스의 몸 안에서 그를 조각조각 찢어 놓듯이, 인간의 내부를 폭파시킨다는데 있다. 따라서 현대의 특징으로 불려지는 무수한 지점들, 자본주의로 포장된, 이제는 나열하는 것도 지겨운 현상들을 의심하고, 판단하고, 극복하지 않으면 神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물론 현대 문화의 괴기스러움을 극복하고 제시되어야 하는 새로운 삶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 막연하다. 즉 서양적인 것을 극복하는 것이 동양적인 것인가,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공동체주의인가,라는 의구심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도 사실이다. 더 나아가 내게 있어 가장 큰 숙제인, 인간은 그럴 수 있는가, 모두가 더 낳은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을 의심하는 것으로 부터 출발해 고민하고 검증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인간 스스로 무차별하게 소비되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여기서 답을 얻고 방법을 찾아 현대 문화의 비정상적인 현상들을 균열낼 수만 있다면, 균열된 영토에서 새로운 시대의 유토피아를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상상만 하는, 불평만 하는 나는 얼마나 또 근대적인 사람인가. 아! 포스트모던한 신체에 깃든 모던한 정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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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09-12-17 0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전에 '정치학의 이데올로기'를 모자란 지식과 이해력을 동원하여 겨우 읽어냈던 적은 있지만 나로서는 생경한 '문화정치학'
굿바이님의 글은 내 이해에 훌륭하였습니다.

패러독스의 한마디가 일품이었습니다.
"아! 포스트모던한 신체에 깃든 모던한 정신이여!"
그런데 굿바이님, 내 생각에 신체는 일단 모던합니다.
포스트모던한 것은 바로 정신이지요.
그래야 파라독스.. 하하

굿바이 2009-12-18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포스트모던한 신체는....언제 저를 한 번 보시면 이해하시리라 사려되옵니다. 더는 괴로워서 드릴 말씀이....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