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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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니 시적 순간이란 것과 대면하게 될 때가 있다.
갑자기 사방이 특정한 이미지로 굳어지는 느낌, 그 순간의 기억은 언제 꺼내 보아도 동일한 이미지로 기억되는 특별한 시간이 존재한다. 나는 그 시간을 시적 순간이라고 이름지었다. 그것은 마치 시인이 어느 것과도 대체될 수 없는 단어를 시에 삽입하듯, 내 기억에서는 그 순간이 어느 것과도 대체될 수 없는 특정한 이미지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 날은 그런 날이었다.
깡깡 얼어붙은 하늘에서 무언가 쏟아질 것 같았고, 내 손에는 기형도의 시집이 들려 있었고, 분홍색 스웨터는 추위를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고, 그 아이의 손은 하얗고 부드럽고 길었다.
  

쥐불놀이

- 겨울 版畵 5

어른이 돌려도 됩니까?
돌려도 됩니까 어른이?

사랑을 목발질하며
나는 살아왔구나
대보름의 달이여
올해에는 정말 멋진 연애를 해야겠습니다.
모두가 불 속에 숨어 있는걸요?
돌리세요, 나뭇가지
사이에 숨은 꿩을 위해
돌리세요, 술래
는 잠을 자고 있어요
헛간 마른 짚 속에서
대보름의 달이여
온 동네를 뒤지고도 또
어디까지?

아저씨는 불이 무섭지 않으셔요?



시인과의 지독한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내게 인연이란 무엇인가. 내게 있어 인연은 어긋남의 다른 기표였다. 내가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그의 유년시절의 상처와 우울한 정열과 못다 이룬 사랑에 통감하며 그를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죽은자였다. 하여 내가 그에게 표할 수 있는 경의는 그의 시를 잊지 않는 것 뿐이었다. 손이 유난히 고왔던 그 녀석과의 인연도 마침표에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그 이야기에 들어서자 마자 나는 길을 잃고 이야기속에 갇혀버렸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를 기억하는 이는 많다. 그의 한 권 뿐인 시집에 찬사를 보내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기형도가 고통스럽다. 그의 시는 내 삶의 중요한 어느 부분마다 불쑥불쑥 찾아와 생채기를 내놓고도 아무런 복수도 할 수 없게 너무 쓸쓸히 여기저기서 나뒹굴고 있다. 미워할 수도 없이 힘이 빠진 말간 얼굴을 하고 말이다. 
이미 겪은 고통이 아무리 잔인한 것이었다고 해도 덤덤하게 여겨질 날이 올 것이라는, 그런 일들이 반복된다고 해도 나는 또 먹고 자는 일을 반복하리라는 사실이 오늘 덜컥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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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0-01-28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각의 기억, 후각의 기억, 청각의 기억.
기억이란 감각의 영역.

굿바이님의 '시적순간'이라는 말.
촌철살인.
마르셀 프루스트가 맡는 냄새.



굿바이 2010-01-29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다른 분들의 시적순간,이 궁금해졌어요. 언제 한 번 물어볼래요~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 현대문화론 강의
이진경 엮음 / 그린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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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문화정치학의 영토들]은 [근대]와 [탈근대]라는 이념을, 현대문화를 특징짓는 일련의 현상들 안에서 살펴봄으로써, 근대의 삶과 현대의 삶을 조명한 현대문화 강의서다. 
이 책이 다루려고 하는 문화정치학은 이미 알만한 학자들이 대부분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한 분야이고, 나름의 깃발을 꼽고 그들의 진지를 구축해 놓은 상태다. 따라서 우리의 재기 발랄하고 젊은 집필자들은 [근대]와 [탈근대]라는 이념을 설명함에 있어, 단지 현상만을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복의 실현 가능성 그리고 긍정적인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는데 노력을 기울인 듯 하다.

대체적으로 이 책의 주요 논쟁거리인 [근대]를 특징 짓는 어떤 이념들은, 그것이 자본주의적인 삶과 땔 수 없다는 태생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지만, 인간을 神으로부터 빼돌리는데 일조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절대자로부터 도망친 인간이 완전한 해방을 누렸는가,라는 질문에는 여전히 부정적인 답변을 할 수 밖에 없지만 말이다. 여하간 신으로부터 탈주한 인간들은 독립적인 영토를 구축하고, 그 땅에 새로운 씨앗을 뿌렸으니, 씨앗이 싹터 맺은 열매를 우리는 [이성性]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근대]의 시간은 이성이 지배하는 시간이며, 이성의 잣대로 가늠할 때, 비합리적인 것들을 합리적인 상태로 극복,하려는 노력이 존재했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심하고 주목할 점은 바로 [합리적인 상태]다. 말은 그럴싸 하지만 [합리성]을 강요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한 [합리성]인지, 마지막으로 [합리성]의 결과물이 어때했는지를 검증해 본다면, 의도도 투명하지 않으며 결과도 기대에 못미친다는 사실을 간파 할 수 있다. 따라서 쉽고 간단하게 짚으면 [근대의 시간]은 그것이 주장했던 [합리성]과는 무관하게 비합리적인 행태와 문제점을 적지 않게 표출하였다. 이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선언이 바로 [탈근대]다. 

근대는 이미 지나간 시절이라고 하지만, 특히 예술의 영역에서 본다면 포스트모던이 지배적인 추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현대의 삶은 근대적인 삶의 형태와 사유로부터 벗어나 크게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서 다루어진 주제 중 [현대 자본주의와 현대문화], [근대의 욕망과 신체], [근대의 이념적 경계들]은 우리의 신체와 감각이 서구적 지배이데올로기, 다시 말해 근대적 사유에 어떤 식으로 철저히 붙들려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현대 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현상들을 무수히 많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버거운 현대 문화의 현상들은, 매우 그럴싸해 보이지만, 전혀 그럴 듯 하지 않으며, 또한 새로울 것도 없으며, 주위를 기울이지 않으면 너무 쉽게 매몰된다. 물론 그렇게 살아간들 무슨 큰 일이 생기겠냐고 하겠지만, 현대의 문제점은 현대 문화의 병패가 단순히 외부적인 공격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이 자각할 수 없는 교묘한 장치들을 동원해 인간의 내연에 틈을 만들고,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가 스미스의 몸 안에서 그를 조각조각 찢어 놓듯이, 인간의 내부를 폭파시킨다는데 있다. 따라서 현대의 특징으로 불려지는 무수한 지점들, 자본주의로 포장된, 이제는 나열하는 것도 지겨운 현상들을 의심하고, 판단하고, 극복하지 않으면 神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물론 현대 문화의 괴기스러움을 극복하고 제시되어야 하는 새로운 삶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 막연하다. 즉 서양적인 것을 극복하는 것이 동양적인 것인가,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공동체주의인가,라는 의구심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도 사실이다. 더 나아가 내게 있어 가장 큰 숙제인, 인간은 그럴 수 있는가, 모두가 더 낳은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을 의심하는 것으로 부터 출발해 고민하고 검증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인간 스스로 무차별하게 소비되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여기서 답을 얻고 방법을 찾아 현대 문화의 비정상적인 현상들을 균열낼 수만 있다면, 균열된 영토에서 새로운 시대의 유토피아를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상상만 하는, 불평만 하는 나는 얼마나 또 근대적인 사람인가. 아! 포스트모던한 신체에 깃든 모던한 정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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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09-12-17 0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전에 '정치학의 이데올로기'를 모자란 지식과 이해력을 동원하여 겨우 읽어냈던 적은 있지만 나로서는 생경한 '문화정치학'
굿바이님의 글은 내 이해에 훌륭하였습니다.

패러독스의 한마디가 일품이었습니다.
"아! 포스트모던한 신체에 깃든 모던한 정신이여!"
그런데 굿바이님, 내 생각에 신체는 일단 모던합니다.
포스트모던한 것은 바로 정신이지요.
그래야 파라독스.. 하하

굿바이 2009-12-18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포스트모던한 신체는....언제 저를 한 번 보시면 이해하시리라 사려되옵니다. 더는 괴로워서 드릴 말씀이....OTL
 
제망매
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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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밝히는 바, 나는 고종석교의 신도다.
무슨 이유로 이런 음험한 소리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내 맘,이라고 말하리라.
여하간 그는, 그의 소설, [제망매] 일부분을 흉내 내자면, 일천구백구십오년 이후, 나에게 세상사를 조근조근, 또박또박, 치우침 없이, 일러준 스승이었고, 부스럼 일고 생채기 난 마음을 다독여 주는 은혜로운 분이었다. 그러니 물고기 몇 마리와 빵 몇 조각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다소 판타지 영화같은 사건은 보여주시지 않았으나, 그의 메세지는, 그의 글을 읽고 그를 흉내내며 폼을 잡았던 나에게, 별다른 매력은 눈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던 나에게, 선배들과 동기들의 관심을 쏠리게 하는 밑천이 되었으니, 이것이 인간의 의한 인간의 구원아니겠는가. 모든 것이 그의 덕이며, 그의 은총은 그렇게 깊었다.

따라서 나는 그의 글을 거의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 책이건 신문이건 매체를 가리지 않고, 그의 글에 담긴 뜻을 알아 듣던 못 알아 듣던 그건 중요한게 아닌지라, 그저 신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묵묵히 수행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일천구백구십칠년에 구입한 그의 소설 [제망매]를 무려 십년이나 묵혔다 비로소 꺼내 들었다.
나는 왜, 어찌하여, 그의 소설을 읽지 않았던 것일까. 발가락을 까닥거리며 곰곰히 숙고한 결과, 나는 그의 글이 소설과 어울리지 않을 거라는, 미덥지 않은 편견 비슷한 것이 있었고, 말 그대로 편견이었던 생각은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나는 혹시라도 그에게 실망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발상이었다. 그럼 이제 새삼 그 두려움이 사라진 것일까. 아니다. 첫 장을 젖힐 때 까지도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다만 배짱이 좀 붙었을 뿐이다. '네 생각대로 해, 그게 답이야' 정도!

[제망매]는 내 불안을 냅다 걷어냈다고 하기에는 부족했지만, 그렇다고 불안해질 이유도 없었다. 특히, 단편 [사십세]는 내게 특별하기까지 했다. 그 속내를 밝힐 수는 없지만, 그가 나를 들여다 볼 수 있으면 뭔 말인지 알 것이다. 아마 그는 뭔 말인지 알 것이다.
몸이 튼튼해지려면 음식을 가려 먹지 말아야 한다. 옳은 말이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라고 하려니 좀 거슬리는 부분이 있지만 이번 경우라면 옳은 말이다.   

소설 [재망매]는 인문학적 소양과 재기 넘치는 문장들이 빛을 발하는, 세상을 향한 그의 안쓰러운 애정이 마구 드러나는, 어떤 부분에서는 에밀 시오랑이 몽실몽실 떠오르는, 찾기 쉽지 않은 소설이다. 그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소설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따라서 나는, 일천구백구십오년 이후로 꾸준히 이어온 신앙을 앞으로도 굳게 지킬 것이다. 당분간, 쫌 오래, 나는 고종석교를 배교하지 않을 듯 싶다. 경험한 바에 의하면 배교는 아프고 또 힘들다. 사족이지만 나는 그것을 김훈에게서 배웠다.

(아끼는 후배가 고종석에게 반했다고 한다. 일천구백구십오년 생각이 났다. 아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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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12-11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고종석 신간 나와요
고종석의 여자들~

굿바이 2009-12-11 15:55   좋아요 0 | URL
오호~
고종석의 여자둘~

2009-12-11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1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1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동우 2009-12-12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종석.
(후니마미님 댁에선가) 귀에는 익으나 한번도 글을 접하지 못한 사람.
에밀 시오랑이 그렇더니.
아, 내 과문과 모자람이 이와 같습니다.

굿바이님이 신선한 존숭의 대상을 발견한 시점.
내 일천구백구십오년이라면 그야말로 타성과 비겁함에 절어 절어 헉헉대던 시절.
그 또한 여일하여, 단념할건 단념함ㄴ서 살기로. ㅎㅎ

젊은 시절 흠취하였던 구절(멜라르메의 아포리즘이었던가요?)도 있었건만.
"모든 책을 읽었노라. 육체는 슬프다."
흐음.


굿바이 2009-12-14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일천구백구십오년에 대학교 3학년이었는데, 그때는 정말 지금 생각하면 창피해서 말을 못하겠어요. 뜨겁다 못해 폭발 직전. 알맹이도 없는, 그저 무지몽매, 쌩쑈에 가까운 날들이었어요. 물론, 그 시절 홍역을 앓지 않았다면 여전히 저는 천둥벌거숭이로 살지도 모르지만 말이죠.
"모든 책을 읽었노라. 육체는 슬프다."라는 말, 참 가슴 아프네요. 개입할 수 없는 현실, 개입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는 현실에서 책을 다 읽어 무엇하겠나 싶습니다.

다이조부 2010-09-18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종석 애독자(?)인데 반갑네요.~ ^^

p양 이라는 주변분 이야기 쓰러지게 재미있네요.

굿바이 2010-09-20 11:18   좋아요 0 | URL
고종석 애독자를 이리 만나네요^^

반갑습니다. 매버릭꾸랑님!

다이조부 2010-09-20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에 소개한 책 저도 가지고 있어요~

한 ㅅ ㅣ절 좋아하던 이성 친구 줄려고 꼬옥 쥐고 있었는데

그 자식이 얼큰하게 취해서 못 건네줘서 아직도 방 안 어딘가에 짱 박여 있어요 ㅎㅎ
 
존 리드 평전 - 사랑과 열정 그리고 혁명의 투혼
로버트 A. 로젠스톤 지음, 정병선 옮김 / 아고라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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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리드(John Reed, 1887.10.22~1920.10.19)는 영화를 통해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의 유명한 저널리스트다. 또한 더 잘 알려진 것처럼 러시아 혁명을 기록한「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라는 르포르타주를 작성한 혁명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기 전 상상속의 그는 이미 뜨거운 사내, 강철같은 사내였다. 그래서였을까, 이 책은 유난히 오래 읽혔다. 왜냐하면 상상 속의 리드를 지우는 일과,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리드를 받아들이는 일이 수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뮤지컬처럼 부풀려진, 낭만적이며 이기적인,존 리드를 만나는 과정은 조금 난감했지만 그가 패터슨에서 '세계산업노동자동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의 헤이우드와 교류하며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 대목은, 그에 대한 나의 상상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그곳에서도 그의 객관성을 잃은 시선, 뜨거움이라고 상찬하기에는 부적절한 그의 열정이 적잖이 불편했지만, 리드가 투쟁의 현장에서 빈곤의 추악함과 잔혹한 불평등을 목도하고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또 그것을 실천하는 모습은 그의 진정을 느끼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패터슨에서 자본주의의 '도구주의'와 맞서며 인간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향후 그의 반전운동으로도 자연스레 연결되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자꾸 마음이 쓰인다. 그럼에도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변명도 구차하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리드는 유럽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 전쟁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본가들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 라며 궁색한 일상이 되어버린 전쟁을 노골적으로 규탄한다. 또한 소모적이고 가혹한 전장에 참전하려는 의뭉한 미국의 움직임에도 거세게 항의한다. 그는 자본가들과 정치가들의 야심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었다. 전쟁은 무고한 젊은이들을 선동하고 죽음으로 내모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애국자(?)들의 깜짝 파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이는 지금의 국제정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리드의 행보를 따라가다 마지막에 만난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내게 몇 가지 의문을 남겨준 채 끝나버렸다. 그것은 리드의 삶이 너무 일찍 막을 내린 탓일 것이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서 그가 좀 더 살아있었다면, 혁명의 추이를 지켜보고, 거기에 개입된 인간들의 어쩔 수 없이 던접스러운 인간성을 확인했다면, 레닌과 카오츠키 다음에 등장할 스탈린에 대해, 그리고 러시아 혁명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이고 독특한 해석을 내놓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하면 리드가 뜨겁게 환호했던 러시아 혁명 그리고 그의 벗 레닌은 인터내셔널의 슬로건 아래 '국가주의적 전체주의'를 실현한 마르크스의 사생아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판단으로는 말이다.

한 위대한 인간의 삶을 되짚는 일은 단순히 그를 거들떠보는 행위를 넘어선다.
그것은 특정한 개인에게 말을 건네는 것에서 시작하여 독자가 처한 현실을 더듬는 일로 치닫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 리드, 그를 읽는 것은 한 세기를 뛰어넘어 21세기를 부유하는 나를 돌아보는 일이며,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 ‘인간은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에 대답하는 소극적인, 그렇지만 고통스러운 행위였다. 그가 처했던 20세기와 달리 현재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혁명은 이미 퇴물이 되어버렸고 자본주의는 폭발해버렸다. 하여 착취, 전쟁, 절대빈곤으로 내몰린 사람들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나불거리는 일은 죄악에 가까운 일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이렇듯 욕지기가 치미는 현실에서 ‘인간은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라는 나의 물음은 공허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만나는 과정에서 느낀 다행스러움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실은 인간 자체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 개념적으로 그러할 것이다,라고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 그러니까 선하기도 악하기도 하다, 그러니까 타이밍만 허락하면 선할 수도 있다라는 신뢰의 회복이었다. 그의 삶에서 엿본 열려있는 사고체계와 신념, 그리고 신념의 중심에 인간을 세우는 행위는 이미 자본과 상품이 신이 되어버린 이 시절에 우리가 되찾아야 할 그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진실로 혁명적인 태도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열정적인 사내를 내려놓지만 내 안의 혁명, 풀리지 않은 숙제들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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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09-12-10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금 그 설렘은 사라졌지만 한때 설레게 하였던 이름 블세비키 존리드.
지적욕구를 만족시키는 것과 로망의 감동은 반드시 배리하는 것만은 아니지만. 하하

'인간은 기대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가'라는 굿바이님의 자문.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겠어요? 하하 싱거운 대답올시다.

굿바이 2009-12-11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싱거운 대답 아니세요.^^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두될 수 밖에 없었던, 20세기 이전의 사고체계 중 해체가 필요했던 것들이 분명히 있었죠. 계몽이라던가 이성에 대한 신뢰라던가 뭐 이런 것들이 정치논리로 활용되어 낳은 비극이 하나 둘이 아니니까요. 저도 근대를 극복하고 '인간은 기대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창비시선 298
김기택 지음 / 창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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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집 [껌]에서 김기택의 언어와 시선은 물질 문명을 비판할 때는 더욱 단단해졌고, 폭력을 목격하는 장면에서는 더욱 친절해졌다. 또한 그의 친절한 시선이 안내하는 세계는 별거 없을 것 같은 일상적인 풍경을 단번에 '헉'소리와 '움찔'거림이 존재하는 풍경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일상에 늘상 존재하는 가리워진 폭력이다.  

가령 그의 시「고양이 죽이기」를 보면 "야생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호랑이나 사자의 이빨과 발톱이 아니라/잇몸처럼 부드러운 타이어라는 걸 알 리 없는 어린 고양이었다./승차감 좋은 승용차 타이어의 완충장치는/물컹거리는 뭉개짐을 표나지 않게 삼켜버린 것이다./씹지 않아도 혀에서 살살 녹는다는/어느 소문난 고깃집의 생갈비처럼 부드러운 육질의 느낌이/잠깐 타이어를 통해 내 몸으로 올라왔다./부드럽게 터진 죽음을 뚫고/그 느낌은 내 몸 구석구석을 핥으며/쫄깃쫄깃한 맛을 오랫동안 음미하고 있었다./음각무늬 속에 낀 핏자국으로 입맛을 다시며/타이어는 식욕을 마저 채우려는 듯 속도를 더 내었다" 라던가 다른 시「껌」에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늘 함께 놀던 껌/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이빨이 먼저 지쳐/마지못해 놓아준 껌" 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작가의 시들은 이미 문명의 폭력에 익숙해진 독자들 앞에 폭력의 풍경을 친절하게 전시한다. 이 때 작가의 의도된 친절함은 독자로 하여금 '헉'소리를 유발하게 하는 계산된 장치이며, 거기서 더 나아가 독자를 '움찔'거리게 만드는 기괴함으로 다가온다.  이렇듯 작가의 집요한 친절함이 독자를 '헉'에서 머무르지 않고, '움찔'거리게 만드는 것은 고통의 반대편에 놓인 고통을 즐기는 자들의 무의식적인 즐거움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타자의 고통을 통해 허기를 채워야 하는 모든 것들의 태생적인 비극을 바라보는 일은 제 스스로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것 자체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일 것이다.    

살의를 드러내지 않고 식탁을 차릴 수 있는, 그래서 적당히 세탁되어진 죽은 생명들을 섭취하며 사는, 타자의 고통을 단순히 지폐 몇 장으로 교환하며 눈 가리고 살아온 내게 그는 「코뚜레」에서 "코는/소의 몸에서 가장 예민하고 부드러운 곳/붉은 혀만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깊은 구멍일 뿐인데/저렇게 단단하게 잠가둔 걸 보니 수상해./그 구멍에서 가끔 뜨거운 공기가 나오고/신음소리도 나오고/희고 걸쭉한 분비물도 나오는 걸 보니 더욱 수상해./근질근질질해서 견딜 수 없는 열쇠/열쇠구멍 없는 자물쇠를 열 유일한 열쇠,도끼가/어느날 저 자물통을 부술 거야/허나 도끼가 범할 일을 자세히 열거하고 싶진 않네,/저렇게 일평생 순결을 감금당하고도/도끼에 겁탕당할 이마/겁탈당할 피 겁탈당할 죽음을,/겁탈당한 후에 다시 발가벗겨질 가죽과/그 속에 든 발갛고 축축하고 말랑말랑한 순결을." 이라고 도살의 현장을 비밀스럽게 들려준다. 그리고 겁탈당한 죽음과 말랑말랑한 순결이 내 이빨의 살기와 내 혀의 황홀한 미각에게 묻는다. 아직도 수염에서 슬픔과 두려움이 자라고 있는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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