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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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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시간, 정물화를 그린다. 쟁반 위의 과일 몇 개, 똑같은 것을 보고 스케치를 시작했고, 색을 입혔다. 수업시간이 끝날 무렵 확인한 바에 의하면 50명의 그림은 달랐다. 같은 것을 혹은 비슷한 것을 바라보는데, 어찌 그들의 그림은 다른 것일까? 그들은 보이는 것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린 것을 보기 때문을 아닐까.  
촘스키와 푸코의 토론을 지면으로 확인하면서 비슷한 의문이 생겼다. 두 학자는 '인간성'에 대한 이해가 왜 다른가? 억지스러울지 모르나 50명의 그림이 조금씩 혹은 제각각이었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일까? 그렇다면, 두 분의 어르신은 보이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발화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네덜란드, 1971년 촘스키와 푸코의 대담, '인간성'에 대한 논쟁을 시작으로 언어와 정치의 관계, 담론분석에 있어 권력의 역할이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오간다. 팔은 안으로 굽을 때 자연스럽다고 했던가. 내 마음대로 안으로 굽는 팔에 해당하는 푸코의 입장에 훨씬 많은 밑줄을 긋는다. 예를 들면 이런 주장이다.
"진리는 권력과 무관하다거나 권력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혁파하는 것입니다. 그 기능과 역사가 의심스러운 신화에 따르면, 진리는 자유로운 영혼에 대한 보답이고, 오래 견딘 고독의 자식이고,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진리는 이 세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합적인 형태의 제약에 따라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의 주기적인 효과를 유도합니다. 각 사회는 진리의 체계가 있고, 진리의 '일반 정치학'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사회가 받아들여 진리로서 기능을 발휘하게 만드는 담론 유형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푸코는 우리가 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는지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둔 셈이다. 요즘 세간에 유행하는 '정의'의 개념에 대해 내 안으로 굽는 팔인 푸코는 다시 이렇게 주장한다.
"제가 보기에 정의라는 개념은 특정 정치, 경제 권력의 지배 수단으로서 혹은 그러한 권력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여러 다른 유형의 사회에서 발명 유통된 개념입니다." 
소쉬르가 언어를 기호라고 했을 때, 내가 소쉬르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래서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임의적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정의'의 정의로 가장 알맞은 것이라고 나 역시 합의하고 싶어진다. 그것도 알아서 열광적으로.

여튼, 이 주장에 관해 촘스키는
"저는 인간성의 내부에 뭔가 절대적 기반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당신이 그 근거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저로서는 곤란해질 겁니다.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아무튼 '진정한' 정의 관념이 인간성의 바탕에 까려 있다고 보는 겁니다." 라고 응수한다. 이렇게 두 어르신의 입장 차이를 놓고 보는 일은 한 번도 제대로 궁리해보지 못한 논제들을 끙끙거리며 생각해야 한다는 귀찮음을 동반하지만 그럼에도 흥미롭다. 잠시 내 성향이 의심스러운 대목이지만 말이다.
여하튼 촘스키는 뭔가 인간성에 바탕을 둔 정의로운 사회를 진단한다면, 푸코는 철저히 현실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따라서 촘스키를 관념론과 연결지을 수 있다면, 푸코는 경험론에 줄을 댈 수 있겠다.  

이쯤되면 무엇을 말하든 두 어르신은 흥미진진하게 대립각을 세우겠지만, '인간성'과 '사회의 진보'라는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방점을 찍고 있는 두 어르신 덕분에 독자는 위의 주제들을 입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셈이다. 고마울 따름이다.
선행학습이 없다면 쉽게 읽힐 책이 아닐 수도 있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혹여 이 책을 읽으실 분들 중에 나와 같이 선행학습이 부재하다면, 책의 1장부터 읽지 말고 2장부터 6장까지 촘스키와 푸코가 각각 주장한 내용을 먼저 읽고, 마지막으로 1장을 읽으면 훨씬 수월하게 읽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는 처음부터 읽었다. 몰랐으니까. 무지는 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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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7 1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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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7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27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28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28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꽃도둑 2011-01-27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무지는 나의 힘이다 라는 말에 한 표 던집니다.
무지하면 원래 막 우기면서! 막가파로 밀고 나가는 용감한 쪽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소크라테스(?) 그쪽에 발을 담그고 있거나... 둘중에 하난데....흠,,,굿바이님은 어느쪽인지 알수가 없단 말야요..ㅡ.ㅡ
사실 저도 무지가 힘인데....^^

굿바이 2011-01-27 13:44   좋아요 0 | URL
ㅋㅋ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둘 다 입니다~~

이거 무슨 조직이라도 결성할까요?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할 것 같은 :)

흰그늘 2011-01-27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한해는 책을 거의 읽지 못할것만 같은 저로선 읽어보고 싶은 책들에 대한 글들을 보는 것으로 나마 나름 위안을 가져 봅니다. 살아가다 보니 그렇더라구요 어떤 무엇은 그 무언가에 의해 더더욱 확고해져 가기도 하고, 그 무언가는 어떤 무엇에 의해 전복되어져 버리기도 하던걸요..

위의 글만을 읽어보는 이 순간의 저는 '인간성의 내부에 뭔가 절대적 기반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하생략.. 촘스키 어르신의 이 부분에 그냥 마음이 가네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일이면 어떻게 변할지는 또.. 모를 일입니다..^^

굿바이 2011-01-27 13:4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흰그늘님!

그렇죠, 살다보면 어떤 것들은 윤곽이 뚜렷해지기도, 흐릿해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촘스키씨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한 저의 무지가 원인이겠지만, '인간성의 내부에 뭔가 절대적 기반이 있다'라고 생각해 보니, 도리어 제가 너무 한심해서 뭐랄까 그저 주변의 탓이오, 네 탓이오, 뭐 이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푸코의 주장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구요.
저 역시 변덕이 워낙 심한지라, 내일이면 또 어찌 변할 지 모릅니다 :)

블리 2011-02-01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니랑 얘기할 때 가끔 느껴지던 투명한 튕김,그건 바로 푸코와 촘스키의 차이었나봐요.
전 도덕을 배우던 학창시절부터 칸트의 관념론쪽이었거든요. 그냥 절로 끌려버리니, 원.
그래도 언니가 밉지는 않아요-ㅋㅋ 저도 미워라 하진 마세용~

굿바이 2011-02-02 22:15   좋아요 0 | URL
미워하지 않아서 무안영광입니다 ;) 저도 그대가 밉지않습니다 :)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27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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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준 것인지, 누구에게 그냥 줘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이응준의 책을 다시 샀고, 다시 읽는다. 어쩌면 놓쳤을 수도 있고, 지금에서야 혼자 오해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아득하게 앉아 이응준의 책을 읽고 있었을 한강을 떠올려본다. 이 책에 수록된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이라는 단편이 허망한 추리의 근거라면 근거다.   

책을 옆에 두고 조카에게서 얻은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다 굴린다. 가늠할 수는 없지만 납득되는 숫자가 허공을 향한다. 다시 던진다. 역시나 그럴 수 있는 숫자가 내 앞에 놓인다. 반복할 수록 우연이 필연적인 숫자들의 조합으로 엮여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사람들의 조합도 그러할 수 있을까. 우연이지만 필연적인 조합. 이응준을 한강을 그리고 나를 우연이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조합으로 묶는다면, 그 필연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아마도 '실재하며 작동중인 쓸쓸한 것들의 조합' 이 되지 않을까.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두고 힘빠지는 이야기를 얼마나 오래 했는지 이제 기억도 멀다. 단지 써야하기에 쓰는 것,이라 말하며 서둘러 자리를 떴고, 써야한다는 그 말의 울림이 그저 먹먹해 집에 오면 으레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곤 했다. 무엇인가 써야함에도 어떤 단어도 이어갈 수 없는 막막함. 치부와 상처가 활자로 떠돌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 같은 근거없는 두려움이 도시의 불빛처럼 밤에도 잠을 막아섰다. 그럼에도 겁쟁이가 숨어들 공간이 있을 수 없는 것 처럼 '실재하며 작동중인 쓸쓸한 것들의 조합' 들은 매번 활자로 떠돌며 나를 찾아낸다. 떠돌아야 한다고, 가벼이 떠돌아야만 한다고 최면을 건다. 서로가 서로에게. 살아야 한다는 말 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말이다.  

"음지는 양지를 탐하여 흉내낼 때 가장 어둡고 축축해 보이는 법이니까. 너는 온갖 세상사에 얽혀 있는 듯 행동하곤 했지만, 실은 언제나 너 홀로 자신에게 골똘했을 뿐이었다. 나는 곧 너를 완전히 이해하겠다는 희망을 포기하였고, 그 대신 너의 전체적인 존재감을 얻어낼 수 있었다. 더불어 네가 어째서 나에게 느닷없이 손을 내밀었던가도 깨달았다. 너는 내가 너처럼 병들었다는 사실을 동물적으로 간파했던 것이다. 그림자 같은 그림자에게 드리우길 원한다. 그거였다."<Lemon Tree 中>

작가가 그려낸 인물들은 타자를 염두한다기 보다 독백으로 일관하고, 흘러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시간은 어디 쯤에서 단절되어 있다. 줄거리를 기억하기에는 모호한 추억들로 채워진 사람들이다. 책은 각각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기 다른 인물들이 출몰하지만, 한 명의 주인공이 다른 공간을 오고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책은 몇 편의 단편속에 묘사되었던 푸른 안개속을 더듬는 듯 하다. 물가의 새벽을 체험한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는, 시리고 명징한 그렇지만 힘이 빠진 안개속을 허위허위 내저으며 걷는 기분이다. 물리적으로 큰 힘이 아님에도 진을 빼고야 마는 그런 경험. 삶이 반드시 기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어느 주인공처럼 삶이 반드시 기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자의 지친 새벽같은 소설이 바로 이응준의 소설이며, '실재하며 작동중인 쓸쓸함'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소설이 바로 이 책이다.

"엉뚱한 얘긴지 모르겠지만, 기실 우리네 삶은 수채화가 아닌 유화가 아닐까. 성숙한 인간이라면 우선 세상의 바탕을 마땅히 고통스럽고, 슬프고, 쓸쓸하고, 외로운 곧 어둠의 색으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대신 살아가는 동안 내내 점차 희망이나 보람 같은 것들을 대변할 만한 밝은 색깔들을 스스로 찾아내어 그 비관적인 인식 위에 덧칠하며 제 평생의 아름다운 그림 한 장을 완성시킬 것!" <내 가슴으로 혜성이 날아들던 날 밤의 이야기 中> 

이 푸르고 외로운 별에서 내가 태어난 순간, 나는 앞으로 얼마가 될 지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 숨쉬는 한 춥고 쓸쓸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울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를 바라보던 내 부모의 눈은, 너를 만나 다시 뭔가 잘해보리라는 마음이 들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우리는 외로웠으리라. 그렇게 우리의 쓸쓸함은 무성해졌으리라. 그러나 세상에 알려진 죄와 알려지지 않은 죄를 모두 저지르고 난 오늘, 어느 문지방에서 돌아보니, 문득 그 모든 것들도 '추억의 속도로 걸어가고'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전히 뒷모습은 보이지만, 꼭 그 날의 새벽처럼, 푸른 안개속으로, 무성하고자 했던 욕심들과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두려움마저 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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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9 16: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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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0 11: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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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다 미슐레의 자연사 1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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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어떤 책은 밑줄을 그을 수가 없다. 책 그 자체가 이미 작가가 그어놓은 거대한 밑줄이기 때문이다. 다만 밑줄을 들키지 않는 작가의 노련함과 배려에 감탄할 뿐이다. 이 책 <바다>가 그렇다. 온통 푸른 밑줄이다.   

저자 쥘 미슐레는 프랑스 태생의 역사학자이자 문필가다. 그가 이 책을 집필한 1850년대는 요동치는 사회였다. 종교가 쇠락하고 이성과 과학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며, 시대는 인간이라는 개인을 발견하게 되지만, 조명을 받기 시작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한다. 모든 것의 중심에 인간을 세우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신비의 영역이었던 자연을 개척과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결과는 설명이 필요없게 되었다. 여하간, 저자는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잠시 접고 [바다]와 [바다와 더불어 사는 생명체]와 [바다와 더불어 존재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역사학사적인 고증과 문필가적인 감성으로 풀어낸다.  

책은 크게 1부 바다를 바라보며, 2부 바다의 기원, 3부 바다의 정복, 4부 바다의 르네상스로 구분되어 있다. 먼저 저자는 [바다]를 이렇게 묘사한다.  
"세상의 큰 운명인 굶주림은 육지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바다에서 굶주림은 예방되므로 있는지조차 모른다. 식량을 찾는 어떤 움직임도 없다. 삶은 마치 꿈처럼 떠다닌다. 그런 힘을 무엇에 쓸까? 힘의 소진은 불가능하다. 그 힘은 사랑을 위해 비축한다.....이것이 바다다. 바다는 지구의 거대한 암컷이다. 지칠 줄 모르는 욕망으로, 영원한 수태로 새끼를 낳는다. 절대로 끝이란 없다." 

"이 신성한 작업을 지켜보자. 바닷물 한 줌을 쥐어보자. 거기에서 원시의 창조가 다시 시작된다.....이렇게 나타나는 물방울은 식물성의 실일까? 그것은 어떤 존재라고 하기 어려운 가벼운 솜털 같다. 이미 예민하고 사랑스러운 솜털이다."
 

그는 바다에 서식하는 단세포 생물의 느릿한 움직임부터 어느 날 갑자기 들끓는 폭풍과 해일을 그리고 적도의 숨막히는 고요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는다. 해와 달의 움직임에 따라 부푸는 바다라는 거대한 암컷을 샅샅히 훑으며 생명이 태어나기 전 이미 그들을 사랑한 생명의 신을 노래한다. 이제 이 푸른 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 [고래]를 생명의 신이 얼마나 가학적으로 사랑했는지 묘사하고 있는 저자의 글들을 살펴볼까 한다.

"움직이는 불덩어리 같은 이 애인들은 일순간 몸을 치켜세우고, 노트르담의 탑처럼, 너무 짧은 팔에 끙끙대면서, 서로 부둥켜안으려 기를 쓴다. 그들은 그 거대한 체중으로 다시 밑으로 떨어진다."

"자연의 창조력이 처음으로 시적인 상상을 발휘해 내놓은 놈 같다. 우선 숭고함을 겨냥했지만, 그 뒤에 가능한 수준으로 복귀했다. 지속 가능한, 즉 생존 가능한 수준으로. 크기와 힘에서 모두 감탄할 이 짐승은 피는 뜨겁고 젖은 따뜻하며 선의에 넘친다. 오로지 생존 수단만 부족하다."   

"멋지게 10미터 높이로 뿜어올리는 물기둥과 분수구멍은 바로 유치하고 야성적인 기관이라는 표시이자 증거다. 힘껏 공중으로 분수를 쏴올리면서 그 '숨 가쁜 통풍기'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오 자연이여, 왜 나를 노예로 만드셨나이까?" 

이 아름답고 힘찬 더불어 선량한 생명체를 지면으로 옳겨온 저자를, 또한 저자의 글들을 도무지 아끼지 않을 수가 없다. 이어서 저자는 바다를 정복한 인간의 역사와 바다를 두고 싸웠던 전쟁의 역사, 뒤를 이어 바다를 끼고 꽃피웠던 아름다운 문화들을 소개한다. 참으로 바다에 관한 모든 것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바다의 정복편에서 저자는 허기진 인간은 무섭다,고 썼다. 그리고, 과거의 영웅들이 숭고한 것은 무지한 데다 그 맹목적인 용기와 절망적인 결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그렇게 바다의 길을 찾고,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고, 심지어 둥근 지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태풍을 제압할 수는 없었지만, 무지는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웅들이 밟았던 땅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의 삶은 영혼 대신 돈을 긁어모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피폐해질 수 밖에 없었다. 원주민들의 존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 뒤에 일들은 입에 담기도 민망할 뿐이다. 인간이 인간을 이렇게 다루는데, 동물은 또 어찌했겠는가. 학살하고 또 학살하고, 죽이기 위해 죽인 고래와 바다코끼리와 해표와 수많은 물고기들. 이제는 사라졌거나 사라질 위험에 놓여있다. 어느 여름 대륙을 강타했던 폭풍과 해일이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모든 생명체의 절규가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그런 책이 있다. 어느 시간, 어느 장소, 어느 페이지를 들춰보아도 고마운 책. 위로가 되는 책. 울렁거리게 하는 책. 쥘 미슐레의 <바다>가 그렇다. 바다가 요동치는 것 처럼 마음이 요동치고, 바다가 고요한 것 처럼 마음도 고요해진다.

이제 <바다>에 수장된 심정은 언어로써 언어의 바깥을 나갈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책을 덮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먹먹할 뿐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실재한다면 이럴까, 마음으로 마음을 넘어설 수 없는 막막함. 마음을 전달하려고 발화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잠시 하얗게 부푸는 물거품에 불과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초라함. 추태를 부릴 수 없음에 두근거리기만 하는 민망함. 몰려드는 무력감에 좌초된 독자는 허영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 곳, 욕망이 끓어오를 틈을 주지 않는 곳, 그렇다고 금욕도 절욕도 아닌 곳, 해석이 아닌 사실이 존재하는 곳, 영원히 검푸른 바다를 두고 고래처럼 솟구쳐 오른다. 오 자연이여, 왜 나를 바보로 만드셨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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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23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은 <바다>를 감명 깊게 읽으셨군요. 저는 전반부에 저자가 바다를 바라보면서
느겼던 것을 기록한 부분만 좋았던거 같습니다.

굿바이 2010-12-23 09:20   좋아요 0 | URL
책이 쓰여진 시대를 감안하면, 혹은 그런 걸 생각하지 않아도, 개인적으로 즐거운 독서였습니다. 개인의 감수성과 취향은 얼마든 다양할 수 있고, 또 그런 다양함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2010-12-23 0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3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3 1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3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3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7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잘라 2010-12-24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로 30분 달리면 푸른 동해바다를 볼 수 있는 데 사는 메리포핀스예요.
안녕하세요? 알라딘서재달인 링크 따라 와봤어요.
주황색 날개 달린 연미복 신사가, 바다를 배경으로 인사를 건네주시네요.
연장 마니아, 라는 한마디가 관심을 끌구요. 굿바이라는 닉네임은.. 좀 뜻밖이네요. 하이 또는 하와유, 굿모닝, 이런 닉네임에 비해서는요.
반갑습니다. 굿바이님! 메리 크리스마스!!!

굿바이 2010-12-27 00:04   좋아요 0 | URL
이제야 댓글 봤습니다.
메리포핀스님, 성탄은 잘 보내셨는지요?

굿바이라는 닉네임이 좀...^^ 메리포핀스라는 이름은 발음도 그렇고, 동화적이고 예쁘네요. 여튼 이렇게 인사나눌 수 있어 반갑습니다. 좋은 밤 보내세요.
 
<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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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실린 <문학 예방>이라는 에세이의 한 대목은 이렇다.
"아주 낮은 수준이 아닌 이상, 문학은 경험을 기록함으로써 동시대 사람들의 관점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시도다......그는 자기가 뜻하는 바를 더욱 명료하게 하기 위해 진실을 비틀고 풍자할 수는 있어도, 자기 마음의 풍경을 곡해할 수는 없다." 

작가의 글이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가정하면, 오웰은 녹록하지 않은 경험으로 얻은 마음의 풍경을 어떤 목적으로도 곡해하지 않는 용기를 지닌 작가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오웰도 <작가와 리바이어던>이라는 에세이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문단의 지식인들이 글을 쓰며 의식하는 이들은 대중이 아니다. 오히려 작가들이 속해있는 그룹, 시쳇말로 업계 종사들일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향한 두려움을 접고, 동시대 사람들의 관점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의 책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해답의 반은 얻은 셈이다.  

그러나, 작가의 글이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한계에 봉착한 독자로서 고백하자면, 그의 글이 사실이 아닌 어떤 풍경에만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에세이 <작가와 리바이어던>에서 그의 말을 빌려오자면, 
"그렇다면 작가는 정파 우두머리들의 지시를 거부할 뿐 아니라 정치에 '대해'쓰는 것도 삼가야 한다는 뜻인가? 이 역시 결코 그렇지 않다. 원한다면 아무리 서투르더라도 정치적인 글을 써서는 안 될 이유가 없다. 다만 한 개인으로서, 외부자로서, 기껏해야 정규군의 측면에 있는 환영받지 못하는 게릴라로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글을 쓰되 다만 외부자로서, 기껏해야 환영받지 못하는 게릴라로서의 위치를 주문하는 작가의 말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불편하다. 그것은 그가 강조한 두려움 없는 글쓰기, 마음의 풍경을 곡해하지 않는 글쓰기에 오히려 흠집을 남기는 일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가 딛고 있는 땅을 살피는 일이 힘겹고 심지어 불가능에 가깝다 할지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응시할 수 있을 때, 응시를 통해 깨달은 곤란한 진실들과 마주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을 발화할 수 있을 때, 적어도 작가가 말한 정치적인 글쓰기에 힘 혹은 진정성이 실린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글이야말로 사후적 해석에만 머무르지 않는 글이 되리라 믿는다.  

언제나 그러하듯, 모든 어긋남은 어떤 의도로부터 시작된 것이리라. 그러하기에 작가의 글과 내 마음이 어긋나는 자리에서 나는 작가의 의도를 짐작해 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어긋나려고 한다. 그것은 작가의 시절과 또 다른 시절, 21세기의 무람없는 냉소주의자들의 행태가 눈에 밟혔던 까닭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에 대한 별쭝맞은 트집을 잡는 것도 잠시다. 참으로 잠시다. 

"전체주의는 신앙의 시대보다는 정신분열의 시대를 약속한다." 는 문장은 오웰의 통찰력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내 마음대로 선정한 조지 오웰의 경이로운 성찰이자, 전체주의에 대한 이 시대 최고의 폭로다. 이 문장은 오웰의 <1984>로 이어져 전체주의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구성원 자신들을 기만하는지 보여주는 모태가 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작가의 남은 답변이 있다면 감히 이 한 문장으로 충분하리라 본다.  

누군가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어느 여인을 두고 매혹적이라 했다. 일견 맞는 말이다. 선택과 유기를 두고 망설이는 일은 성가신 일임에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맞는 상황이라면, 망설임은 필요한 시간이고,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나름대로 현명하고 예의바른 태도의 여인을 가르켜 매혹적이라고 발화한 것이라면 나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유기할 것을 들고 애매함을 보이는 것은 매혹적일 수 없다. 그것은 그저 간교한 행동일 뿐이다. 더 나아가 선택할 것을 들고 애매함을 보이는 것 역시 매혹적일 수 없다. 그저 어리석을 뿐이다. 따라서,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두고 보인 잠시나마 어정쩡했던 태도는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어리석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그의 글을 곁에 두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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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8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9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10-11-08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 대단한 리뷰에요. 오웰이 이걸 읽었더라면!
안 그래도 사려고 한 책인데 꼭 사야겠네요.

굿바이 2010-11-09 09:58   좋아요 0 | URL
책에 밑줄이 많아서, 보내드린다고 하기도 참 그렇고....
저는 개인적으로 좋았어요, 어느 대목은 고종석씨가 보이기도 하고^^

cyrus 2010-11-08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 대단한 리뷰에요. 오웰이 이걸 읽었더라면! 2
오웰은 작가이기 전에 인간이기에 수많은 에세이를 쓰다보면
자신의 문학적 초심과는 어긋나는 방향으로 내용을 쓸 수도 있고,
시대가 변화됨에 따라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문학관이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오웰의 글을 비판하는 내용, 잘 읽었습니다.
안 그래도 다시 읽으려고 한 책인데 꼭 다시 읽어야겠네요.

굿바이 2010-11-09 09:57   좋아요 0 | URL
이런 과찬을 연달아 듣다니, 민망해서...이를 어쩐답니까 ㅜ.ㅜ

비판이라고 하기에는 허접하고, 뭐랄까, 애증이랄까요~
곁에 두고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특히 스페인 내전과 관련된 부분은 다른 책들을 좀 찾아볼까 싶기도 하구요.

꽃도둑 2010-11-10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 님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참으로 밀도 있게 쓰셨어요. 근데 읽다가 <작가와 리바이어던>의 인용구에서 잠시 멈추게 되네요.
오웰은 다른 작가에 대해 자신의 소견을 밝힌 글에서 '반드시 작가의 실제 얼굴이 아니라 그 작가가 가져야만 하는 얼굴을 보게 된다' 라고 했습니다. 오웰은 정치적 글쓰기는 작가가 가져야할 자세이자 시대적 의무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다만 한 개인으로서, 외부자로서, 기껏해야 정규군의 측면에 있는 환영받지 못하는 게릴라로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는 정규군의 입맛에 맞추어진 혹은 정치에 대해 함구하는 것이 아닌 아무리 서투르더라도 자신이 원한다면 글쓰기는 게릴라가 갖는 저항정신, 의협심,자유와 평등에 대한 의지로의 글쓰기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이죠... 그리하여 그건 두려움 없는 글쓰기에서 몸을 빼는 행위가 아닌 걸로 읽혀지기도 하는데...정작 오웰 자신도 환영받지 못한 글을 써서 출판을 거부당한 적이 많았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말을 그렇게 이해하게 되는군요...^^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떤지....궁금하네요,

굿바이 2010-11-10 11:09   좋아요 0 | URL
꽃도둑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지배세력의 혹은 다수의 입맛에 맞는 글을 피하기 위해, [한 개인, 외부자, 게릴라]라는 표현을 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렇지만, 외부자나 게릴라가 항상 의협심이나 자유,평등에 대한 가치를 존중한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 또 저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오웰의 표현이, 작가의 의지와 무관하게, 실존이라는 무게를 감당하지 않으면서 그저 냉소로 일관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그런 알리바이가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기우였습니다.
물론, 순전히 개인적인 기우였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좋은 의견 남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꽃도둑 2010-11-12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자신이 처한 사회적, 정치적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나봐요. 또한 한계라는 것에서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그것을 직시하는가 회피하는가 하는가 두 종류의 사람은 분명 존재하는 거구요. 오웰의 글쓰기는 직시하는 쪽이었다고 봐요, (물론 직시라고 해서 옳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오웰 또한 모순적인 면을 드러낸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었고 일관성 없는 논리로 글을 쓴 적도 있었음은 한 인간이 가진 한계라고 봐야겠죠... 그는 소련이 보여준 독재적 사회주의가 아닌 민중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사회주의를 꿈꾸게 되는 가장 이상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에서 보자면 대오에서 벗어나 세상의 흐름을 바로보고자 노력하고 실천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당의 입맛에 맞추는 글쓰기가 아닌 그는 끊임없이 당을 비판하며 자신이 하고픈 말을 하는 작가였음에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거기에 초점을 맟추어서 글을 읽은거구요...ㅎㅎ 사실 굿바이 님 글에 반론을 제기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보자는 뜻이었지요,..

굿바이 2010-11-12 23:55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이 책에 대해 그리고 작가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려요^^

동우 2010-11-16 0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美님 댁에서 만난 조지 오웰이 그렇더니 굿바이님 댁에서 만나는 조지 오웰.
나 곧 새겨 읽어야 할 조지 오웰...

굿바이 2010-11-16 11:06   좋아요 0 | URL
동우님의 오웰은 또 어떨지 궁금해요. 저는 따라갈 수 없는 사유의 깊이로 오웰을 이야기해 주세요^^
 
미크로메가스.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0
볼테르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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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수의 노래였는지, 시인의 글이었는지, 혹은 드라마 대사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라는 말이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그저 무슨 위로가 마땅하지 않을 때, 가벼이 등 토닥이며 쓰기에 썩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아무런 고민없이 내뱉었던 무책임한 그말이 참으로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알았을 때는 내 자신 [아플 만큼 아프고도 여전히 그만그만한 상태]로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다.  
무엇이든 이미지로 존재하는 것들은 일단 의심하고 볼일이다.

여튼,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인 볼테르의 작품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를 읽으며, 저 문구가 떠올랐던 이유는 주인공 캉디드의 스승인 낙관주의자 팡글로스의 놀라운 언술때문이었다. 
"특별한 불행들이 일반적인 선을 만듭니다. 그러니 특별한 불행이 많으면 많을수록 모든 것은 더욱더 선이 되는 것입니다."
어머나! 요즘 유행하는 순위 프로그램처럼 [인생 역정 누가누가 제일인가] 경합이라도 벌이는 것 같은 주인공들의 상황앞에서도 끊임없이 [최선의 세계]를 운운하는 철학자라니, 또 그것을 무슨 진리로 받들어 [스승이 말씀하시길, 세상은 최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하더이다]라고 읖조리는 주인공을 어찌할 수 있을까. 또 한 번 어머나! 

그러나 이 철학 꽁트는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하다. 무엇이 그렇게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만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 대략 그렇게 [생각]으로 존재하는 것을 떠드는 사람은 한 번 의심해야 한다는 것, 또한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더 나아가 생각으로 밀고나간 [믿음]은 헛것이자 공포라는 것.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어떤 게 더 최악의 상황인지 모르겠군요. 검둥이 해적들한테 백번 겁탈당하는 것, 한쪽 엉덩이를 잘리는 것, 불가리아인에게 몽둥이 찜질을 당하는 것, 종교 화형식에서 죽도록 매 맞은 다음 교수형당하는 것, 교수형당한 후에 다시 해부당하는 것, 그리고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것" 이라는 상황속에 모든 주인공들을 한 번씩 담근 후 묻는다. 
"낙관주의가 뭔데요?" 
주인공의 입을 빌려 볼테르는 말한다.
"아아! 그건 나쁠 때도 모든 것이 최선이라고 우기는 광기야!" 
즉, 이미지로 존재하는 것들이 실재한다고 생각하고 또한 믿는 것은 광기다.  

이 철학 꽁트를 더 재미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라이프니치의 낙관주의를, 루소를, 더 나아가 종교전쟁을 그리고 18세기 유럽의 기괴한 역사를 알면 더욱 흥미진진하겠지만, 그런 것들을 하나도 몰라도 찾을 수 있는 재미는 너무 많다. 예를 들면, [주인공이 발견한 최선의 세상 3곳]이라던가, [몰락한 여섯 왕들과의 식사] 라던가, [알고도 당하는 사기는 무엇무엇이더라]던가, [사랑이라는 기막힌 환상은 누구를 위해 뻥을 치나]등. 그 재미는 여러 곳에 포진하고 있다. 모든 세계문학전집이 라면냄비 받침으로 존재하려고 인쇄되는 것은 아니다. 고전이 왜 고전인지 무릎을 치게 하는 작품도 간혹 있다. 이 책이 그렇다.

21세기, 낙관도 비관도 모두 조롱의 대상이 되는 시절을 사는, 한 발 더 나아가 [비아냥이 최선의 세계]를 만드는 초석이라도 되는 듯 행동하는 시절을 살고 있는 내가, 암울한 시절을 살아낸 사상가의 작품을 앞에 두고, 책을 읽는 내내 낄낄거렸다. 그저 낄낄거렸다.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해 느끼는 허무함에 대한 또다른 조롱일 것이다. 역시나 내 한심함은 강에 유람선 띄우려는 이들과 견주어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과 시스템을 조롱]하는 역사적 사명을 띄고 나는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허무와 냉소로 좋은 시절을 다 보낼 일이 아니다. 진득하니 끈기있게 때로는 오기스럽게 무엇이든 찾아야 할 것이다. 이미 알고 있고 때로는 모른 척 하기도 하지만, 찾는 것은 [공부]일 것이고, [공부]의 목적은 [행동]일 것이다. 책의 마지막 "하지만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꾸어야 합니다."라는 어딘지 세련되지 못한 주인공의 발언이 오늘 나를 깨운다. 또다른 계몽이자 볼테르의 재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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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9 1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0 0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향편 2010-10-19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아! 그건 나쁠 때도 모든 것이 최선이라고 우기는 광기야!"
젠장 저는 낙관주의자였나 봅니다. 젠장.. 허무주의인줄 알았는데

나 미친건가??음 고민 좀...

굿바이 2010-10-20 00:11   좋아요 0 | URL
향편은 허무주의랑 안어울려. 나도 좀 그런 구석이 있는데, 본인도 힘빠지지만 곁에 있는 사람도 맥빠지게 하는 것 같더라구.
이왕이면 우리 모두 그저 좋은 사람, 뭐 그런 거 하자.

근데, 나도 뭔소린지...나도 미친건가? ^^ 아니다. 미치겠다. 좀^^

W 2010-10-19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이렇게 끌리는 리뷰라니! :)

굿바이 2010-10-20 00:11   좋아요 0 | URL
오홋.이렇게 끌리는 댓글이라니! :)

치니 2010-10-19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이렇게 끌리는 리뷰라니! 2 :)

굿바이 2010-10-20 00:12   좋아요 0 | URL
오홋. 이렇게 끌리는 댓글이라니! 2 :)

2010-10-19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0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風流男兒 2010-10-19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다른 창 갔다가 다시 와서 보고 그러고 있는 이 모습은 무엇인가효-

굿바이 2010-10-20 00:15   좋아요 0 | URL
알것도 같은 모습인데, 사실은 나도 계속 다른 곳을 왔다갔다 하다가, 잠깐 멍~해 있다가, 이 모습은 무엇인가효- (따라하니 재미있고, 나름 의미심장하고,정말 유익해요^^)

동우 2010-10-20 0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특별한 불행들이 일반적인 선을 만듭니다. 그러니 특별한 불행이 많으면 많을수록 모든 것은 더욱더 선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善을 線으로 읽는 나의 무지는 비아냥의 시대를 사는 나의 비관주의..
굿바이님.
무슨 이데올로기, 이를테면 '주의'가 붙은 것들은 일종의 광기가 내포된 집단성이 있는듯 합니다.
진정한 계몽이란 집단의 생각이 아닌, 개별의 인식과 개별의 행동 운운..
나는 굿바이님의 볼테르를 읽으면서 나의 무식을 낄낄거리고 있답니다. ㅎㅎㅎ
무슨 심오한 생각 있는척 얼버무리기. 하하핳
책부족, 다음에는 소설뿐 아니라 이런 종류의 책들도 선정합시다그려.

굿바이 2010-10-20 22:28   좋아요 0 | URL
개별의 인식과 개별의 행동. 이것 참 힘들지요. 정말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뭔가 집단을 이룬다는 것은 이미 '광기'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가끔은 정녕, 가볍고 유쾌하고 어딘가 휘둘리지도 매몰되지도 않는 그런 개인으로서 존재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단독자로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이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관계가 주는 달콤함이 또 얼마나 많은지요.
세속이란 늘, 고단하고 구차한 것 같습니다.

멜라니아 2010-10-20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 얼굴에 앉은 먼지로 맑음 없는 하루.
나는 또 왜 이 굴레 속에 들어와 버렸나 한심하고 있는데
굿바이님 행동을 말씀하시는군요

멋진 리뷰, 다른 말 모두 잊어도 행동이란 말을
새삼스레 받아들어 보는 것은
제 몸에 대한, 움직이지 않고 사념만 하고 마는 제 몸에 대한
실망 때문일 것입니다
그 실망 또한 마음만으로 그치고 더 나가지 못하고 있고.
제주 날씨는 흐립니다

동우 2010-10-20 19:2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몸을 움직이지 않고 사념으로 그치는 생각들.
어디 멜라니아님뿐이리오.
그러나 멜라니아님, 실망하지 맙시다.
사유가 있기전 행동이 앞서는 것보다, 무기력할지언정 우리는 천박하지는 않습니다. 하하 아전인수.

제주날씨도 흐리군요.
한반도 전체가 오늘은 흐린가 봅니다.
흐린 부산날씨, 내 기분도 별로 가볍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날씨따위에 좌우되는 기분이라는 것도 가끔은 좀 경멸하기도 합시다그려. 하하하하

굿바이 2010-10-20 22:33   좋아요 0 | URL
멜라미아님, 제주의 날씨가 흐렸군요. 서울 하늘만 바라보느라 작은 땅 여기저기를 잘 모르고 지내게 됩니다.

생각을 바꾸는 일도 어렵다고들 하지만, 몸이 바뀌는 일은 그것보다 몇 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내 몸에 좋은 습관이 베고 좋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일, 그것이 공부의 목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동우님도 기분이 별로 가볍지 않으시다고 하니, 음...내일은 공기 중에 웃음바이러스라도 좀 살포해야 할 것 같습니다^^


2012-12-05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