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인지 아닌지 생각하는 고기오 샘터어린이문고 55
임고을 지음, 김효연 그림 / 샘터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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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유쾌하게 자기를 찾아가는 여행이라니. 이토록 진심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하다니, 캐릭터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조카에게 계속 얘기했다. 야, 정말 고기오 존멋 아니니? 트로이 전쟁에서 이기고 귀향하던 오디세우스도 이렇게까지 자기 자신에 대해 고민하진 못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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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 열림원 이삭줍기 13
실비나 오캄포 지음, 김현균 옮김 / 열림원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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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너무나 좋아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대상이 적잖이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은 입을 뗄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실비나 오캄포의 이 소설집은 20대 후반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몇 권의 책 중 하나다.


그중에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여러 번 이야기한 소설은 {연인 속의 연인}이다. 이마를 맞대고 누워 잠들기 전까지 번갈아 이야기를 만들어 속삭이는 커플. 정확히 그런 내용은 아니지만 이미지를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이게 낭만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 낭만일 수 있을까. 다른 수록작들도 그렇지만 단편의 미학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그녀에게 꿈 얘기를 해줄 필요가 없었다.’ 압축적인 한 문장(이자 한 문단)으로 플롯을 한 방에 정리해버리는 작가의 대범함을 보라.


{연인 속의 연인}만큼이나 낭만적인 또 다른 작품은 {케이프}다. 분량은 아주 약간 더 길다. 해변 관광지라는 배경이 왠지 모를 아련함을 더해주는 가운데, 우리(화자)는 케이프와 페도라를 만나고, 페도라와 헤어졌다가 페도라와 다시 만나게 된다.


윤회. {케이프}를 끝까지 읽고 충격을 느끼는 이유는 [아이 오리진스]의 엔딩과 정확히 똑같다. [아이 오리진스]의 엔딩에서 조용히 흘러나오는 라디오헤드의 {Motion Picture Soundtrack}은, 정말 이 노래 하나를 틀려고 장편영화를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적절했고, 지금도 떠올릴 때마다 소름이 돋곤 한다.


페도라라는 괴짜 같은 인물 자체도 오늘날 독자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윤회를 증명하기 위한 기분 좋은 자살. 그런 걸 실행할 사람이 과연 현대사회에 있을까? 페도라의 정신적 취약함은 작중에 극히 간접적으로 묘사되며, 거기서 현대의학의 관점으로 정신질환의 양상을 찾는 건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어차피 누구도 페도라 같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내게는 두 단편이 무엇보다 잊히지 않는 소설이다 보니 다른 수록작들에 대해선 할 말이 많지 않다. 두 작품 외에는 카나리아라는 매개로 사랑의 복수를 하고 속죄하는 과정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는 {속죄}도 인상적인 수록작이었다. 책의 마지막 작품 {충동적으로 꿈꾸는 아이}는 {연인 속의 연인}에서 다룬 꿈, {마구쉬}에서 다룬 점쟁이를 모두 소재로 다루지만, 다른 몇몇 엽편과 마찬가지로 극적인 플롯은 없다. 한편 {담배 연기로 만든 반지}은 뭔가 황순원 {소나기}의 실비나 오캄포 버전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읽어보면 안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묶은 책은 아니나 문학사회학 혹은 외재비평의 방식으로 보면 지배 질서를 전복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읽어낼 수도 있다. 이건 역자 해설을 참고.


국내에 소개된 실비나의 다른 작품으로는 [탱고](문학과지성사, 1999)에 수록된 {울리세스}가 있다(알라딘 상품페이지에는 ‘올리세스’로 잘못 등록되어 있다). 전집이 번역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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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 이론
막심 샤탕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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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연쇄살인범의 수가 50년 전에 비해 10배로 늘었다는 통계적 사실에 착안해, 혹시 살인을 부르는 폭력성이 인간 유전자에 내재한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럼직한 의문에서 시작하는 소설이다. 그러면 이걸 과학적으로 밝히려는 시도가 있기 마련이고, 거대 자본을 바탕으로 반인륜적인 실험도 마다하지 않는 사악한 거대 조직이 꼭 있기 마련이다([바이오하자드]의 엄브렐러라든가 [에이리언]의 웨이랜드 유타니라든가 [도쿄 구울]의 V조직이라든가). 소설에서는 ‘GERIC’이라는 가상의 연구 기관이 그 역할을 맡는다.

작가 막심 샤탕의 대표작으로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을 파고드는 ‘악의 3부작’이 있다는데, 아마 작가가 천착하는 주제인 듯싶다. 실제로 사이코패스(소시오패스)라는 게 인기를 끌면서 많은 대중 예술이 나왔고, 여기에 토대를 두고 범죄 심리 혹은 나아가 악 그 자체를 고찰하는 작품들 역시 동서를 가리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양들의 침묵], [검은 집], [덱스터] 등등 이 목록은 정말 끝이 없다).

그런데 사이코패스가, 집필 시점에서도 유행이 한참 지난 ‘가이아 이론’과는 무슨 상관일까? 이게 좀 억지스러운 점인데, 소설이 차용한 가설은 가이아 이론에 따라 인간의 환경 파괴가 극에 달하자 인간이 폭력성을 발현해 열심히 살인함으로써 멸종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시중에 널린 사이코패스 스릴러보다 뭔가 더 고차원적인 것을 결부해, 한마디로 더 있어 보이려 한 게 아닐까 싶다. 음, 의도는 좋았지만 소설의 차원은 높아지지 않았고 범작에 머물렀다.

인류학자 에마와 생물학자 페테르, 에마의 동생 사회학자 방자맹이 주인공이고, 에마와 다른 둘이 소설 처음부터 다른 공간적 배경에 놓여 GERIC 프로젝트의 비밀을 풀어나간다. 문장이 읽히기는 잘 읽히는데, 그나마 독특한 설정 빼면 기억에 남을 만한 건 없었다. ‘영상적인 글쓰기’가 작가의 강점이라더니 실제로 그러했다. [독거미] 같은 프랑스 스릴러와 마찬가지로, 영상에 익숙한 세대를 위한 글로서 부족함이 없다. 피레네 산맥과 마르키즈 제도가 배경이니 스케일도 크다! 하지만 두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 보니 교차편집이 필연적일 테고, 대표작들에 비해 평가도 안 좋은 듯하니 영상화되지는 않은 듯하다. 참 다행이다.

역자는 작가의 소설을 여럿 번역했는데도, 작가의 주특기인 영상적인 글쓰기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오늘날 독자가 읽기에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번역이 자주 보인다. “안심하세요. 밧줄로 그를 묶어두었어요. 아무튼 그는 너무 약해져서 누구에게도 나쁜 짓을 할 수 없을 거예요.” / “그는 가만히 있었어요?” / “그는 상황을 깨닫고 반항했지만 너무 늦었죠.”(445쪽) 님, 제발 대명사 좀 생략해주세요… 안정효가 보면 회초리 들고 쫓아올 듯.

이런저런 이유로, 작가의 작품은 2011년을 마지막으로 국내에는 더 나오지 않고 있다. 읽은 지 오래된 책이나, 이상 버리기 전에 버리는 것이 마땅한 이유를 여러모로 정리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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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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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개봉을 앞두고, 작년에 읽었던 이 책을 다시 펼쳐본다. 2011년에 나온 베스트셀러이니 처박아두고 읽기까지 마침 7년 정도 걸린 셈이다. 막상 읽기 시작하자 (잘 쓴) 스릴러답게 금방 몰입하여 끝까지 읽었다. 인물이 많지 않음에도 장마다 시점과 시간대가 바뀌는 등 초반부터 속도를 내기는 어려웠지만, 반대로 영화에서는 어떻게 접근성을 더 높였을지가 은근히 기대되기도 한다.

 

장편소설은 그 분량만으로도 압도적인 무언가가 있다. 플롯만 놓고 보면 단순한데 어떻게 이런 플롯으로 500쪽이 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게다가 잘 읽힌다. 예외가 있다면 현수가 죄책감으로 꾸는 꿈이나 자해의 묘사가 필요 이상으로 고통스럽고 길다는 점 정도. 반면 세령이 당하는 학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그 반복성과 일상성과 대조적으로 다분히 불충분하고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아동 학대라는 소재는 대놓고 묘사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나머지 많은 분량은 대화와 심리묘사, 그리고 영화를 보는 듯한 시각적 이미지, ‘스릴러스러운사건 진행의 서술이다. 이들은 다른 많은 (잘 읽히고 또한 잘 팔리는) 스릴러물에서 공통되는 요소일 거다. 이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디테일이다. ‘아저씨는 배를 앵커시키고, 후미 쪽에 형광색 다이빙소시지를 띄웠다. 귀환지표였다. 나는 BC포켓을 납작하게 밀착시켜 부력을 줄였다. 보조공기통을 챙기고 호흡기 상태를 체크하고, (오리발) 스트랩을 당기고 아저씨와 바디라인을 연결했다. 우리는 스탠딩자세로 입수했다.’(36) 이 문단의 핵심 정보는 첫 문장의 앞 절과 마지막 문장뿐이다. 나머지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일반인이라면 사는 동안 한 번 접할까 말까 한 전문용어들의 나열이다. 작가는 2년간 검찰 수사관, 119구조대 잠수교관, 토목시공기술사, 댐 운영관리팀 등을 취재하며 소설을 썼고, 그 노고는 고스란히 작품에 녹아 생생함을 더해준다.

 

앞에서 인용한 부분은 일례일 뿐이나, 특히 저 부분이 소설 초입인 걸 고려하면 속도감 따위보다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취재했는지, 소설이란 게 단순히 책상머리에서 쓰일 수 있는 게 아님을 너희에게 똑똑히 보여주겠어!’라는 작가의 곤조가 전해지는 듯하다. 그러니 다소 장황하게 느껴지는, 하영의 편지나 승환의 기록 등 인용문으로 서사가 풀리는 데 대한 불만은, 넘어가는 게 옳겠다.

 

감탄과 존경심은 들지만,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절대악이 있고, 실수로 죄를 지은 자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자멸하나 그의 아들은 선인의 도움으로 절대악을 물리쳐 복수를 완결 짓는다. 절대악은 왜 절대악이 되었나. [차가운 달]처럼 인간 심리의 불가지성을 전제하기라도 한 듯한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도 절대악 영제의 범죄 심리는 누구도 헤아릴 길이 없다. 그저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악이고, 타도해야 할 대상일 뿐이며, 결국은 (무릇 독자의 기대대로) 파훼된다. 어느 인물군에 비중을 더 둘지가 상업적으로 자명하다면 자명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선악의 불균형,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플롯의 근본적인 선형성이 조금은 마뜩잖다. 작가는 현수를 중심에 두고 선악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긴 했으나 떡밥을 잘 회수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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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잘못 날아왔다 창비시선 288
김성규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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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한 곡에 꽂혀 앨범을 사듯, 시집을 살 때도 어딘가의 누군가가 웹에 올린 시 한 편을 보고 시집 한 권을 사곤 한다. 다만 책을 사고 나서 읽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는 (대부분의) 경우, 내 마음에 들어왔던 시가 어떤 작품이었는지는 애저녁에 잊히고, 샀던 이유와 상관없이 새롭게 시집 전체를 읽게 된다. 김성규의 시집도 그랬다. 황현산이 해설을 썼다는 점도 살 결정을 하는 데 일조했으리라 추측해본다.

이렇게 산 이유를 잊은 시집은 목차를 훑고 표제작을 먼저 읽기도 한다. 하지만 시 제목이 책 제목으로 쓰이지 않는 일도 잦다. [너는 잘못 날아왔다] 역시 동명의 작품은 목차에 없다. 이 문장은 {불길한 새}(32~33쪽)의 마지막 연이다. 이 시는 ‘눈이 내리고 나는 부두에 서 있었다’로 시작한다. 마지막 연 앞 연은 ‘해송 몇그루가 무너지는 하늘 쪽으로 팔다리를 허우적였다 / 그때마다 놀란 새의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이다. ‘너’는 저편에서 이쪽 부두를 향해 지친 날개로 바다를 건너오는 ‘검은 새’를 가리킨다. 새 뒤로 혹은 위로 ‘하늘 한 귀퉁이가’ 무너지고 있다. 시인은 왜 이 새가 잘못 날아왔다고 말했을까? 하늘은 왜 무너질까. 이 표현은 익숙한 비유인가, 아닌가. 새가 바다를 건넌다는 행위도 혹시 무엇인가 익히 알려진 상징은 아닌가. 의문이 이어지고,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불행’의 시각화로 읽을 수도 있지만, 함의를 규명하기 이전에 심상만으로 강렬한 시다.

접어둔 시로 먼저 {빛나는 땅 2}(78~79쪽)가 있다. 화자는 ‘북을 치는 광대들과 두건을 두른 사내들’을 좇아 ‘통곡이 그치지 않’는 마을에 이른다. ‘아이들의 시체가 뒤엉켜 강물에 버려’지고 ‘사람들의 앓는 소리가 우물에서 메아리’치는 마을이다. 화자는 ‘몇알의 약을 입 안에 털어넣고 새벽녘 마을을 빠져’나온 후에야, 자신이 있던 곳이 ‘빛나는 땅’임을 알게 된다. 마을은, 복마전이나 디스토피아로 읽기엔 묘사가 모호하지만(이 역시 내가 놓치는 상징성 때문일 수도 있다) ‘빛나는 땅’이라는 희망찬 지명과 대비를 이루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른 몇몇 수록작에서 힌트를 찾아 연결한다면, 마을은 ‘억압적 권력’(이 어구는 황현산의 해설에서 가져왔다)이 현현한 물리적 공간으로 읽을 수 있다. 묘사가 모호하다고 쓰긴 했지만 사실 마을을 서술하는 2연의 분량이 제일 길고, 여기에서 오는 대비가 읽을 당시에 내 마음에 조금은 자국을 남겼던 듯싶다.

접어둔 다른 시는 {꽃밭에는 꽃들이}(100~101쪽)다. 친근한 제목에 이어 ‘누나의 집은 늘 맥주병을 둘러 꽃밭을 만들고 채송화, 맨드라미며 알 수 없는 이름의 꽃이 피곤 했다’ 같은 문장이 나온다. 아마도 한동안 찾지 않았을 이 누나의 집을 다시 찾은 화자는, 매형에게 위로를 듣고 마루에서 담배를 피운다. 이 목가 속에서 왜? 불안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조카니 과자니 하는 단어들 뒤에 아예 숨어 있다. 이 작품은 황현산이 간략하면서도 충분하게 해설해놓았다.

끝으로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22~23쪽)가 있다. 김성규의 등단작(2004년)인 이 시는 직접적으로 쓰여 굳이 부연할 게 없다. 독산동을 신림동이나 봉천동으로 바꾸고 세 가족을 한 가족으로 쓴다면 좀 더 요즘 시대에 맞는 이야기가 될 법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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