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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 이론
막심 샤탕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기본적으로 연쇄살인범의 수가 50년 전에 비해 10배로 늘었다는 통계적 사실에 착안해, 혹시 살인을 부르는 폭력성이 인간 유전자에 내재한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럼직한 의문에서 시작하는 소설이다. 그러면 이걸 과학적으로 밝히려는 시도가 있기 마련이고, 거대 자본을 바탕으로 반인륜적인 실험도 마다하지 않는 사악한 거대 조직이 꼭 있기 마련이다([바이오하자드]의 엄브렐러라든가 [에이리언]의 웨이랜드 유타니라든가 [도쿄 구울]의 V조직이라든가). 소설에서는 ‘GERIC’이라는 가상의 연구 기관이 그 역할을 맡는다.
작가 막심 샤탕의 대표작으로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을 파고드는 ‘악의 3부작’이 있다는데, 아마 작가가 천착하는 주제인 듯싶다. 실제로 사이코패스(소시오패스)라는 게 인기를 끌면서 많은 대중 예술이 나왔고, 여기에 토대를 두고 범죄 심리 혹은 나아가 악 그 자체를 고찰하는 작품들 역시 동서를 가리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양들의 침묵], [검은 집], [덱스터] 등등 이 목록은 정말 끝이 없다).
그런데 사이코패스가, 집필 시점에서도 유행이 한참 지난 ‘가이아 이론’과는 무슨 상관일까? 이게 좀 억지스러운 점인데, 소설이 차용한 가설은 가이아 이론에 따라 인간의 환경 파괴가 극에 달하자 인간이 폭력성을 발현해 열심히 살인함으로써 멸종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시중에 널린 사이코패스 스릴러보다 뭔가 더 고차원적인 것을 결부해, 한마디로 더 있어 보이려 한 게 아닐까 싶다. 음, 의도는 좋았지만 소설의 차원은 높아지지 않았고 범작에 머물렀다.
인류학자 에마와 생물학자 페테르, 에마의 동생 사회학자 방자맹이 주인공이고, 에마와 다른 둘이 소설 처음부터 다른 공간적 배경에 놓여 GERIC 프로젝트의 비밀을 풀어나간다. 문장이 읽히기는 잘 읽히는데, 그나마 독특한 설정 빼면 기억에 남을 만한 건 없었다. ‘영상적인 글쓰기’가 작가의 강점이라더니 실제로 그러했다. [독거미] 같은 프랑스 스릴러와 마찬가지로, 영상에 익숙한 세대를 위한 글로서 부족함이 없다. 피레네 산맥과 마르키즈 제도가 배경이니 스케일도 크다! 하지만 두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 보니 교차편집이 필연적일 테고, 대표작들에 비해 평가도 안 좋은 듯하니 영상화되지는 않은 듯하다. 참 다행이다.
역자는 작가의 소설을 여럿 번역했는데도, 작가의 주특기인 영상적인 글쓰기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오늘날 독자가 읽기에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번역이 자주 보인다. “안심하세요. 밧줄로 그를 묶어두었어요. 아무튼 그는 너무 약해져서 누구에게도 나쁜 짓을 할 수 없을 거예요.” / “그는 가만히 있었어요?” / “그는 상황을 깨닫고 반항했지만 너무 늦었죠.”(445쪽) 님, 제발 대명사 좀 생략해주세요… 안정효가 보면 회초리 들고 쫓아올 듯.
이런저런 이유로, 작가의 작품은 2011년을 마지막으로 국내에는 더 나오지 않고 있다. 읽은 지 오래된 책이나, 이상 버리기 전에 버리는 것이 마땅한 이유를 여러모로 정리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