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성.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결혼 생활을 그만두지 못하는 친구들, 계속 바람을 피우다 중단해버리는 친구들, 심지어 때로는 바람피우는 일을 시작도 못 하는 친구들을 보았는데, 모두 똑같은 이유를 내세웠다. "그렇게 하는 건 전혀 현실적이지 않아." 그들은 지친 목소리로 말한다. 거리가 너무 멀고, 기차 시간표가 편치 않고, 일하는 시간이 맞지 않는다. 그다음에는 주택 저당, 자식, 개 이야기가 나온다. 또 물건들의 공동 소유 이야기가. "레코드 모은 걸 정리하는 일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남편을 떠나지 못하는 여자가 나한테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의 첫 전율을 느끼던 시절 남녀는 그들의 레코드를 합치고, 겹치는 것은 버렸다. 그렇게 꿰맨 모든 것들 다시 푸는 것이 어떻게 실현 가능한 일인가? 그래서 그녀는 그대로 머물렀다. (p.140)



친애하는 청년과 서재 결혼시키기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 시키기》가 아니라, 정말로 서재를 결혼시키는 것에 대해서. 그러니까 질문은, '너는 만약 너만큼 책 많은 남자랑 결혼한다면 서재를 합칠것이냐'였다.


으으-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앤 패디먼의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고민했더랬다. 만약 나정도의 책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의 서재방을 만들어 책장을 합쳐야 할까? 그러다 겹치는 책이 나오면? 그러면 그중 한 권은 정리하면 되겠지? 그렇지만 만약 그게 내가 좋아하는 책이라면, 내 책에는 내 고유의 밑줄이 있을 것이고, 상대의 책 역시 그러할진대, 그렇다면 처분할 수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같은 책이 나란히 꽂히게 되지 않을까. 그러느니 우리는 각자의 서재를 만들면 어떨까. 최소한 방 세 개짜리에 살면서 하나는 우리의 침실, 하나는 내 서재, 하나는 당신 서재..이렇게.


친애하는 청년은 내게 '겹치는 책이 많은 게 좋을까, 없는 게 좋을까' 라고도 물었다. 으으.. 이것도 너무나 어렵다. 나와 겹치는 책이 많은 게 좋을까? 어쩌면 우리는 취향이 비슷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테니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겹치는 게 별로 없어서 서로가 그간 관심없던 분야의 책을 새로이 맞이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내 책장이었다면 꽂히지 않았을 책을, 이 사람과 함께 하므로 꺼내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너무 멋지잖아?


음..그렇지만 너무 다르기만 하면... 그러니까 겹치는 책이 없는 그런 사람이라면..음...서재를 합치기 보다는 따로 하는 게 나을것 같다. '너무' 다르면... 내가 상대의 책을 꺼내 읽을 일이 없을 것 같아.......... -0-

그래도 내가 가끔 당신 서재에는 들어가보리다. 당신 책읽다 자면 내가 이불도 덮어주고 그럴게요.

그리고 내 서재방의 책은 아무때나 꺼내 읽으시구려.


그런데... 사실... 책을 안 읽는 상대라면..이런 고민은 너무나 쓸데없어 지는 것......... 책을 전혀 안읽는다면, 내가 서재방 만드는 거에 태클이나 걸지 말았으면...그러다가 어느날에는 '나도 책 좀 한 번 읽어볼까?' 하고는 내 서재방에 들어가 아무 책이나 골라 읽고 그러다가 책에 재미 들려서 내 서재방을 자기 놀이터 삼아 자주 들렀으면. 그렇다면 내가 서재에 큰 소파를 놓으리다. 킹사이즈 침대를 놓을 수도 있겠소. 음..그러면 그것은 침실인가 서재인가...당신은 내 서재방 책장 곳곳에서 내가 보관해둔 와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거 나 몰래 마시기 있긔없긔?



줄리언 반스의 책에서 저 부분, 레코드 정리가 복잡해서 헤어지지 않았다는 부부 얘기를 읽으니, 일단 너무 싫은 상대였다면 '다 필요없어, 됐어' 하고 그냥 나와서라도 헤어졌을 것 같지만, 레코드가 차마 헤어지지 않을 핑계가 되어준 거였겠지만, 나의 경우 책이 섞여있다면 어쩌나 싶긴 하다. 음..역시 '그냥 다 당신 가져' 하고 나올 순 없을 것 같아. 아마도 정리의 시간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내 책 당신 책 표시를 해두어야 할까. 그러나 그렇게 표시를 해둔다는 것은 '우리가 헤어질 것을 대비해서' 해두는 것 같잖아. 일단 우리가 같이 살기로 한 이상, 해피 에버 에프터...를 상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알라딘에서 만난 사람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난 사람 치고...나만큼 책을 읽거나 가진 사람 못봤고요..그러니 내가 책 많이 가진 사람 만나서 뭐가 되도 될 것이라는 생각 같은 것은 안하고요..그것은 바라지도 않고요..서재 결혼? 훗. 우습다. 그냥 나는 내 책 내가 가지고 내 서재방 내가 꾸미고, 그러다 읽고 팔고 또 사고... (오늘도 샀다! 만쉐이!! 아니, 그러니까, 오늘은 나의 친애하는 청년이 나에게 책 영업을 하는 게 아닌가...그래서 쏠랑- 넘어가서 홀랑- 사버렸네?) 그래도 너무 어쨌든 즐거운 상상이다. 나와 당신의 서재를 합칠 것인가 분리할 것인가, 당신은 나의 서재를 싫어할 것인가..나의 서재에 태클 거는 사람이라면...내가 애초에 딱히 좋아했을 것 같지도 않다. 책을 안읽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내가 책읽는 거라도 좋아해야 해... 아무튼 나는 그렇게 당신과 나의 서재를 합쳤다가 분리했다가 헤어질 땐 어쩌나 고민도 했다가 아아 그러나 다 부질없다 책 안읽는 남자가 세상엔 훨씬 많다 했다가, 음..어쩌면 아예 다른 식의 이야기가 펼쳐질 수가 있겠다. 국제 결혼을 하면... 한 쪽 방에는 원서가 가득차겠지. 꺅. 이것도 좋군. 후후훗.



아무튼 나는 안잘생겨도 좋으니까 멍청하지 않은 사람이 좋다. 여기서 멍청하다는 건 머리가 나쁘다거나 나쁜 학교를 나왔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 말을 듣지 않는 걸 의미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면 사고의 확장이 안되고 자기 안에 갇히게 된다. 자기 안에 갇혀서 자기가 세상 똑똑한 줄 알아. '아아 나는 세상 똑똑한 놈이다' 하는 세상 멍청한 놈이 되는 것이다...



아아, 서재를 결혼 시키려다가 이야기가 왜 이렇게...


아무튼 나는 오늘 내가 읽을 책을 내 돈 주고 샀다. 그 책들은 내 서재방에 가지런히 꽂힐 것이다. 아니면 침대 머리맡에 쌓이든가. 킁킁.



그런데..

우리 가족 중에서도 책 읽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흐음..........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연애의 기억》에 대해서는 더 길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지만, 글이 나를 찾아오면, 그 때 써야겠다. 글이 나를 찾아오겠지. 샤라라랑- 하고는 내게 다가와 톡톡 어깨를 두드릴거야. 그럼 그때까지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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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핑키 2018-09-28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다락방님 페이퍼를 읽다보면 정말 막 - 모니터 안으로 쑥 들어가서 같이 손벽 치고 맞장구 치고 한 자리 잡고 같이 계속 이야기 나누고 싶어져요 ㅋㅋㅋ 저는 책 1도 안 읽는 남자와 결혼해서 7년째 그럭저럭 살고있는데요.. 권태기 왔을때는 진짜 책이고 뭐고 다 버리고 (다시 사면 되니까요!ㅋㅋㅋ ) 도망가고 싶었구요 ㅋㅋㅋ 책 안 읽는 사람과 살다보니 내남자도 제발 좀 책 좀 읽었으면.. 하는 로망이 항상 있었는데요, 그랬던 남자가 최근에 <7년의 밤>을 완독 하고 뭐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테클 테클 거니까 막 겨우1권 읽어놓고 막 - ㅋㅋㅋ 이러면서 짜증이 짜증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하,
암튼, 넘 오랜만에 덧글 남겨봅니다ㅋㅋ

다락방 2018-09-30 08:52   좋아요 0 | URL
아니 꽃핑키님..이게 얼마만입니까! 안그래도 며칠 전에 꽃핑기님 서재에 새 글 올라온 거 보고, 아아 이제 알라딘에 다시 오시려는가..했는데 제 서재에서도 이렇게 뵙게 되니 반가워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제 남동생이 거의 한달에 한 권 꼴로 책을 읽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이제 너무 책을 많이 읽어서 ㅋㅋㅋㅋ 웬만한 책은 제목만 봐도 내용이 짐작된다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 책을 써야할 시점인 것 같대요. 참나원 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내 남자가 책을 안읽어도 상관은 없는데, 책을 읽든 안읽든 좀 대화가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저랑 같은 책을 읽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또 너무 좋고요!! 꽃핑키님, 자주 오세요!!

단발머리 2018-09-28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남자는 책을 읽는 남자여야 하는가, 아니어야 하는가...는 참 중요한 질문인 것 같아요.

일단 책이 좋다, 책 읽는 게 좋다,라는 걸 아예 이해하는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잘못은 아니지요.
하지만 이해를 못 합니다. 뭐가 좋아, 책이 뭐가 재밌어? 하면 말이지요. 뜨아~~
책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책 읽기 좋아하는 걸 이해하는 정도의 사람. 그런데 그럼 그 사람도 책 읽는 거 좋아하지 않을까요?

아무튼 오늘의 문장^^

그런데 나는..알라딘에서 만난 사람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난 사람 치고...나만큼 책을 읽거나 가진 사람 못봤고요..그러니 내가 책 많이 가진 사람 만나서 뭐가 되도 될 것이라는 생각 같은 것은 안하고요..그것은 바라지도 않고요.

다락방 2018-09-30 08:54   좋아요 0 | URL
ㅎㅎ 단발머리님. 저는 내 남자가 책을 안읽어도 상관은 없는데요, 대화는 됐으면 좋겠어요. 단발님이 말씀하신 책읽는 재미부터 시작해서 책에 관한 내용을 얘기했을 때 잘 듣고 반응하고 하는 것들이요.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책을 아주 많이 읽는다고 해서 상대랑 대화가 잘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요. 책 많이 읽어서 자기가 제일 많이 안다는 고집에 휣싸일 수 있잖아요. 으으.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게 열린 마음고 깨어있는 정신인 것 같아요. 저는 이곳 알라딘에 단발님이 계시므로 책 읽는 남자에 대한 같은 환상은 가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책에 대한 부족한 저의 지식이라든가 또 같은 책을 읽은 후에 나누는 감상을, 단발머리님과 아주 충분히, 만족할만하게 나누고 있어요.

사랑합니다!!

꼬마요정 2018-09-2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후 저는 책을 읽기는 하지만 순식간에 다 읽을 수 있는 책을 좋아하는 남자랑 결혼해서 서재방을 만들구요. 그 남자는 책 좀 그만 사라고 맨날 잔소리 하지만 책장 주문해서 책 꽂아주구요. 어느새 저랑 같이 책을 읽고 있어요. 처음엔 니 책들은 읽을 게 없어. 라고 했지만 지금은 읽을 게 너무 많아. 다 읽고 싶어. 라고 한답니다. 저 결혼 잘 한 거 같아요. ㅎㅎㅎ 자꾸 세뇌시키니까 되더라구요. (자랑하고 도망갑니다 ㅎㅎㅎㅎ)

다락방 2018-09-30 08:56   좋아요 0 | URL
아니 이것은 무슨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자랑이란 말입니까! 지난번에는 가장 좋은 친구라고 남편에 대해 말씀하시더니, 이번엔 책 친구이기까지 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꼬마요정님은, 아시는 것처럼 정말 결혼 잘하셨습니다. 제이슨 므라즈도 자신의 노래 [럭키]에서 얘기하잖아요. 가장 좋은 친구랑 연인이 되다니, 나는 운이 좋았다고. 꼬마요정님도 정말 운이 좋은 분이시네요! 가장 완벽한 것은 그야말로 베스트 프렌드와 결혼하는 거 아닙니까!!

뒷북소녀 2018-11-02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제목 때문에 이 책이 읽어보고 싶어졌는걸요.^^

다락방 2018-11-05 08:32   좋아요 0 | URL
줄리언 반스는 굉장히 우아한 글을 쓰는 것 같아요. 읽어보세요, 뒷북소녀님!
 


청소년이 주인공이지만 <청소년 관람불가>인 영화 《키싱 부스》를 봤다.


'엘'과 '리'는 한날 한시에 태어난 단짝 친구이다. 부모님들끼리도 단짝 친구여서 엘 과 리 가 단짝 친구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태어나서부터 십대가 되어버린 지금까지 그들은 늘 함께했고 서로에게 비밀이 없었다. 그들 사이에는 우정을 지키기 위한 단짝 친구의 룰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나 가족과는 사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아, 그러나 리 에게는 너무나 멋진, 학교의 인기남 '노아'라는 형이 있었고, 노아는, 말 그대로 너무나 환상적인 남자였다. 키도 크고 잘생겼고 운동도 잘하는데다가, 얼라리여, 하버드에 진학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세상엔 그런 캐릭터가 있지... 학교의 모든 여자애들도 노아와 친해지고 싶어하지만, 엘은 언제나 노아에게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마' 라고 하면서 그에게 반한 다른 여자들과는 다른 행동을 보이고, 오오, 노아는, 너무나 전형적으로,


나에게 반하지 않은 여자는 니가 처음이야


이러면서 그녀에게 쏠랑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여자친구가 생긴 리는 엘의 행복을 바라지만, 여전히 엘과 친하고 자신의 여자친구와 같이 노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렇지만 리는 엘이 자신의 형과 사귀는 것을 받아들일 순 없었고, 그래서 서로에게 점점 빠져드는 노아와 엘은 자신들이 사귀는 것을 비밀로 하게 된다. 아무도 모르게, 그러나 둘만은 뜨겁게, 더 뜨겁게..청소년 관람불가로 사귀게 되는 것이다. 오오, 청소년들이여, 청소년 관람불가로 사귀는구나!


노아와 엘이 서로에게 빠져들고 사랑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 와..어찌나 부럽던지.. 이미 이걸 보고 내게 추천해준 동료에게, 보다말고 '부럽다..' 메세지를 보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학교 인기짱 노아는..넘나... 내스타일 아닌 것. 이 영화를 나보다 먼저 본 동료는 여자와 남자의 덩치 차이가 너무나 바람직하다고 했지만, 나에게 노아는 '너무 크고', 왜 인기많은 학생인지 잘 알겠지만, 내가 좋아하진 않을 타입이었다. 영화 설정상 그는 하버드에 진학하지만, 그러나 내게는 오오, 너무나 백치미... 너무나 멍충미가 보이는 것이야. 아아, 사랑할 수 없어. 역시 나는 사랑을 머리로 하는구나. 잘생기고 키크고 몸 좋아도 뭔가..멍충미가 흐르면 사랑이 안돼. 내 사랑은 무엇?



이 둘이 진행해나가는 로맨스로도 즐겁게 보긴 했지만,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리 와 엘의 우정이었다.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엘과 노아가 사귀는 것을 리가 알게된다. 엘이 말하기 전에 리에게 들켜버린 것. 리는 나름 노아에 대한 컴플렉스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형에게 빼앗겼다는 생각 때문에 진심으로 화를 낸다. 엘은 몇 번이고 리에게 용서를 빌어보지만 리는 받아주지 않는다. 그들만의 단짝친구 룰에서는 '아이스크림을 주면 무조건 용서해준다'고 했지만, 이번 일에 대해서는 가차없었다. 리는 엘이 준 아이스크림을 눈 앞에서 버린다.


리는 자신의 형이 자신보다 모든게 낫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걸 다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형이 가지지 못한 유일한 것이 자신의 단짝 친구 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무나 분노가 차올랐던 것. 리 역시 자신의 오랜 단짝친구를 잃고 너무나 가슴아파 그 우정을 되찾고 싶어한다. 그녀는 노아와 헤어질 생각까지 하면서 리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들이 항상 만나던 오락실에서 늘 그렇듯이 댄스 머신(이거 뭐더라, 동전 넣고 하는 오락실에 있는 그거 였는데) 플레이를 켜고 리는, 망설이다가 두 명의 플레이어를 선택한다. 그리고 엘에게 살짝, 늘 그랬듯이 그녀가 있던 옆자리를 가리키고. 그렇게 그들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항상 그랬던 것처럼 같이 춤을 추고, 이 시간이 그리웠노라 얘기한다. 리 도 여자친구가 생겼고, 여자친구와도 함께 이 머신 위에서 놀긴 했지만,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엘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들은 순수하게 서로 단짝 친구였던 그 우정을 그리워했고, 그리고 이렇게 화해하면서 그것이 다시 그들에게 왔음에 기뻐하며 포옹한다.



나는 이 영화에서 이 장면이 제일 좋았다.


친구를 되찾는 장면. 우정을 다시 이어가는 장면. 긴 시간 함께한 것이 반드시 가장 좋다는 것을 보장하진 않지만, 그들은 아주 끈끈하게 이어져 있었다. 애인과는 또다른 의미로 그들의 그 우정은 깊었고 소중했다. 서로에게 비밀조차 없을 정도로 각별했던 사이었는데, 그것이 멀어질 때 얼마나 아팠을까. 그리고 그것을 다시 되찾았을 때의 그 기쁨이란!


나는 이 영화속에서 이 장면이 가장 좋았다. 잃었다고 생각했던 우정을 다시 찾는 장면. 그리고 이 장면이 가장 부러웠다. 내가 갖고 싶은 것도 이거였다. 우정을 다시 찾는 것. 다시 친구가 되는 것. 정말 좋은 친구,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며 서로의 인생에 턱- 하니 자리한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관계란 건 흔한 게 아니니까. 단짝 친구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그리고 다시 찾는 것 역시. 리와 엘은 앞으로 숱하게 사랑을 잃어보기도 하고 아파하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우정'이 있는한 잘 버티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 근사한 노아와 사귀게 된 엘 보다, 리 라는 친구를 가진 엘이 부러웠다. 그들에게 서로가 있다는 게 너무 근사하게 여겨졌다. 와-


잃었던 우정을 다시 찾다니,

다시 친구가 되다니.


축복받은 삶이로구나.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노아, 엘, 리.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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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8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28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8-09-29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잘생기면 다구나, 라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 글구 제가 리였다면 아마도 엘을 몰래 좋아했을 거라, 형과 사귄다는 걸 알았다면 더 속상했을 것 같아요. 그 상태에서 우정이 이어질까요. 댄스머신으로 봉합하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다락방 2018-09-30 08:58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 보면서 혹시 리가 엘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이것은 형제간의 싸움이 되는 건 아닐까 했는데, 다행히 아니더라고요. 그랬으면 정말 뻔하고 싫었을 것 같아요. 다행히 리에게도 좋은 여자친구가 있고 또 아직 어리니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먼 훗날에는 결국 서로가 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내게도 '멀어진' 관계들이 존재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듯이. 그 멀어진 사람들은 멀어지기 이전에 나와 '연인'이기도 했고 또 '친구' 이기도 했다.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그 때처럼 친근해지지 않은 상황이고, 그리고 그중에 어떤 관계들은 서로를 미워하며 끝내기도 했다. 미워하며 끝냈다 해도 그 전에 연인 혹은 친구였다면, 우리 사이에는 분명 친밀함이 있었고 서로를 애정하는 마음도 역시 있었다. 우리가 한 때 연인이거나 혹은 친구였다는 것은, 그런 친밀한 관계였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친밀한 관계였을 때 우리는, 서로 자주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일상의 소소한 얘기들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도 얘기했을 것이고, 또한 자신이 가진 상처에 대해서도 얘기했을 것이다. 내 상처, 내 죄책감, 나의 아픈 과거, 나의 부끄러운 과거, 나의 수치등을 비롯한 나의 비밀들. 다른 누구에게가 아니라, 그 때 그 당시에 '그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들을 했을 것이다. 그 말들을 상대에게 전하면서 우리는 그 말들이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우리가 설사 그 이후에 서로 악감정만을 남긴채 서로 등을 지고 각자 갈 곳으로 가게 되었다 할지라도, 서로에 대해 미움만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 때, 친밀한 사이었을 때 나누었던 은밀한 이야기들을,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에 바깥으로 보내 상대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 는 것은, 우리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그리고 지키고 있는 룰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 지금은 미워하고 꼴도 보기 싫고 아휴, 그 때 왜 그 사람과 그렇게 친밀한 관계를 오래 유지했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 사람이 내게 말한 은밀한 것들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지 않는다.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불행해지기를 바라지도 않고, 또한 그 불행을 하물며 '내'가 가져오고 싶지도 않다. 그 때, 그 당시에, 그 사람이 말한 그 비밀들은, 우리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예의로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이 말한 건 그 때의 나에게만 가능했던 것이니까.


나는 이것이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기본적인 예의라고 생각한다. 헤어졌다 해서 그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의 비밀을 말하고 다니지 말것. 게다가 그것을 그 사람의 불행에 이용하려고 하지 말 것. 내가 그렇게 살지 않는 것처럼 나 역시 상대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결국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고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어디가서 내가 그 사람에게만 말했던, 속삭였던, 다정했던 그 이야기들을 퍼뜨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것은 '그사람'이기에 믿는 것이고, 우리 사이에 '그 때'가 있기에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





그런데 ,

영화 [시에라 연애 대작전]의 '시에라'는 그렇지 못했다. 친한 친구가 자신에게만 얘기했던 비밀, 상처를, 그 친구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용한다. 친구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자신이 눈앞에서 본 장면이 바로 진실 그 자체라고 믿으며, 그녀의 비밀-상처였다-을 친구를 불행하게 만드는 데 이용했다.



'시에라'는 아직 고등학생이다. 사랑도 처음 느껴보았고, 동성의 친구도 처음 사귀어보았다. 그런 그녀가 겪게 되는 숱한 감정들은 그녀의 삶에 있어서 처음이었을 것이고, 그러니 그 감정들을 대하는데 서툴렀을 것이다. 먼훗날 시에라가 어른이 되어서 '내가 그 때 그런 잘못을 했었지' 라고 말한다면, 이미 어른인 나 역시 '아아 나도 그런 부끄러운 과거가 있지' 하고 그녀의 손을 잡고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이미 그녀가 한 잘못을 본 이상, 그리고 그 잘못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선을 넘어버리는' 행동인 이상, 아무리 그녀가 영화속 주인공이라 해도 그녀를 용서할 수가 없다. 물론,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에게 '너 그러는 건 진짜 아니었어' 라고 말하고 그녀를 용서하지만. 그래서 그들이 그녀의 친구이고 나는 아닌거겠지만.


이 영화는 엄청 구리다. 정말 구리다. 모두 보지 않기를 권할 정도로 구리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너무나 전형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제목에서 혹은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이 소설 [시라노]를 원작으로 한 것인데, 아아, 인물의 대결 구도가 어찌 이따위란 말인가.


우리의 주인공 '시에라'는 '뚱뚱하고 못생기고 인기 없지만 학교 성적은 좋고 착한 학생' 이다. 한편 그녀가 미워하다가 친구가 되는 '베로니카'는 '엄청 예쁘고 몸매도 좋지만 싸가지없고 멍청한 학생'으로 나온다. 하아- 인물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누어놓은 것도 이미 불편한데, 게다가 남자 주인공은 어떤가. '시에라'가 사랑하게 되는 남자 주인공 '제이미'는 '똑똑하고 착하고 운동도 잘하고 잘생겼으면서 찌질이 친구들과 놀아주는, 다른 남자랑은 다른 학생'인 것이다. 그러니 그런 제이미가 올려쳐지는 것은 당연하다. 아아 너무 캐릭터 설정 개망인 영화인 것이다... 


뚱뚱하고 못생긴 시에라,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역시 '쭉빵에 미녀인 베로니카'를 좋아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의 앞에 시에라 자신으로서 나서지를 못하고, 집에 가서는 엄마에게 울면서 얘기한다. '엄마는 항상 자존감이 중요하다고 얘기하지만, 십대의 내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건지 짐작이나 하느냐'고 하는 것이다. 그녀는 모든 과목에 에이를 받는 학생이지만 학교에서는 친구도, 인기도 없고 존재감도 없는 학생이다. 그래서 울고야 만다. 그러면 이 장면에서 나는 무엇을 느꼈는가?


'역시 탈코가 답이다!'


코르셋을 벗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를 조이고 있는 외모 코르셋을 벗어야 한다. 꾸밈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여자로 살아가면서 존재의미를 가장 크게 부여하는 게 결코 다른 사람들로 평가받는 외모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애초에 이렇게 태어났는데, 그리고 이렇게 되었는데, 그 사실만으로 존재감이 없고 놀림감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어처구니 없지 않은가. 사람들이 정해놓은 미의 기준, 그대로 따르는 것을 우리가 거부해야 지금의 십대 학생들 역시 거기에서 자유로워지지 않겠는가 이 말이다. 



그렇게 똑똑하고 착한 시에라 였지만,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 역시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이성을 잃고 '결코 해서는 안될 짓'을 그녀가 하고야 만다. 이 일은 아마 그녀 평생 따라다니는,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추악한 과거'가 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 다른 예쁜 여자랑 사랑할 거라는 추측... 그로 인한 해서는 안될짓에 대한 결심... 아아, 왜 남자를 좋아해가지고... 갑자기 멍청해지느냐 이 말이다. 



나는 사랑을 하면 그것이 자신에게 그리고 상대에게도 더 좋은 모습을 찾아주는 것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사랑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는 아무리 똑똑해도 자신을 진창속으로 넣고 말았다. 나는 나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의 성장을 보길 바라지만, 그녀는 망가지고야 만다. 물론 모든 성장에는 망가지는 과정이 필수이긴 하다. 망가지고 깨지고 진창으로 빠져봐야 성장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시에라 역시 그 일을 겪고 나서 성장하긴 했다. '베로니카' 역시도 그전과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아픔을 겪었어야 했고. 그렇지만 영화 끝까지 '제이미'가 뭔가 '다른 남자랑 달라서' 시에라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는 생각에 끝까지 구린 영화였다.


이 영화를 나보다 먼저 보기 시작한 친구에게 나는 이 영화 다 봤는데 너무 구리다, 고 얘기했더니, 그 친구는 불편해서 중간까지만 보다 말았다고 했다. 아아,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멍청한 영화...





[엔젤 아이즈]는 '제니퍼 로페즈' 주연의 2001년 영화이다. 2001년 영화인 건 포스터 찾다가 알게된 건데.... '정체 불명의 남성과 속절없이 사랑에 빠지는' 영화라고 줄거리를 보고 끌리듯이 본건데..일단 '정체불명'인 거 너무 싫고... 게다가 남자 주인공이... 너무 지저분하다 ㅠㅠ 그래서 도무지 공감이 안돼.. 제니퍼 로페즈여, 왜 이 남자를 사랑하나요? 아, 너무 양치 안하게 생겼고, 옷도 생전 안빨아 입는 것 같고...얼굴에서 각질 떨어질 것 같고..눈도 너무 맹하고... 안 씻는 남자의 전형같은 인물이다. 안 씻는 남자(어쩌면 잘 씻는데 안씻게 생긴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정체를 모르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다니..나에게는 너무나 있을 수 없는 일 같은데, 그러고보면 나는 진짜로 사랑을 '머리로'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 '머리'가 사랑을 한다. 머리가... 착하고 매너가 좋고 나에게 들이대지만, 정체를 모르겠는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나는 안돼. 역시 내 사랑은 머리가 한다..


아무튼 '연애'쪽으로 선택하고 본 영화라면 이 영화는 공감도 전혀 안되고 주인공들 연기도 별로고 해서 재미도 없지만, 굉장히 중요한 메세지가 반복되어 보여진다.


여주인공 '샤론'은 시카고의 경찰관이다. 그녀는 어릴 적에 가정폭력 속에서 자라났다.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는 걸 보면서 자란 것. 어느 날 그녀는 그런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하는데, 그 뒤에 그녀에게 돌아온 건 가족들의 따돌림이었다. '니가 가족 망신을 시켰다'는 것. 그런 부모가 그 때 헤어졌는데 재결합을 하고 심지어 재결합식을 한다고 그녀의 오빠가 그녀에게 알려준다. 그녀는 그곳에 참석해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엄마를 찾아가는데,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고 아빠는 '최근 몇년간은 안그랬다'고 말한다. 아아..이해할 수 없는 엄마여.. 샤론은 자신이 옳은 일을 한 거라고 엄마에게도 말하지만, 엄마는 샤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게 재결합식에 가야할까 고민하던 와중에, 이번에 경찰서에 신고가 들어온다. 자신의 오빠가 집안 기물을 파손하고 아내를 때린 폭력을 저지른 것. 이에 그녀는 달려가서 오빠에게 '오빠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아버지랑 똑같다, 한번만 더 언니에게 손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버럭하는데, 그녀의 오빠는 그녀에게 큰소리치고, 오빠의 아내는 그녀에게 그러지말라고 화를 낸다. 그래서 샤론은 언니에게 말한다.


"언니를 때린 건 내가 아니에요!"


엄마를 때린 건 아빠였고 언니를 때린 건 오빠였다. 샤론이 때린 게 아니다. 샤론이 그 폭력을 저지른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모두들 샤론에게 화를 낸다. 마치 이 가족의 불행은 샤론 때문이라는 듯이. 그녀는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믿고 있는데, 열심히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자신이 옳은 일을 했는데, 가족들로부터 멀어진다.


재결합식에 참석해 사이가 껄끄러워진 아빠에게 '내가 오기를 바랐냐, 가기를 바라냐, 나를 아직 사랑하냐' 묻지만, 아빠는 '솔직히 말하면 나는 딸이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샤론은 옳은 일을 했다. 옳은 일을 했는데 가족들에게 배척당한다. 그런 그녀는 반복해서 외친다.


'내 잘못이 아니야'

'널 때린 건 내가 아니야!' 라고.


이 불행을 가져온 건, 폭력을 신고한 '샤론'이 한 게 아니다. 아내를 때린 아빠와 오빠가 한 일이다. 가족들 모두가 그녀를 내쳐도,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고 가족들로부터 멀어진다. 





연휴중에 본 영화중에 가장 좋았던 영화, 그래서 다시 보는 영화는 이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와- 이 영화는 너무 좋아서, 못 본 사람들이 없게 해달라고 빌고 싶은 심정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짝사랑만 했던 학생 '라라 진'이 자신의 짝사랑했던 남자들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들이 모두 주인공에게 가 닿는다는 것. 그래서 그들이 라라 진 앞에 나타나 '미안하지만 너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다'고 말해 그녀를 당혹시키는 것이다. 그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으으, 예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야' 라고 그들에게 말해보지만, 그녀의 어릴 적 친구 '젠'과 사귀었던 남자 '피터'와는 각자의 이유로 가짜로 사귀기로 한다. 피터는 젠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므로 질투를 유발하고 싶어서, 라라 진은 조쉬를 좋아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보이고 싶어서. 그렇게 그들은 가짜 연인이 되기로 한다. 이 가짜 연애에는 유치하게도 계약서가 존재하게 되는데, 첫번째 항목은 '키스 금지'였다. 이에 피터는 말도 안된다며, 너에게 터치 하지 않는데 우리가 연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묻자, 아아, 우리의 라라 진은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좋아, 내 바지 뒷주머니에 네 손을 넣는 건 허락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빵터졌다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피터는 그게 뭐냐고 궁시렁 거리고, 라라 진은 그것이 80년대 유명한 영화의 첫장면이라 말해준다. 그렇게 그들은 꼭 같이 볼 영화의 목록도 만들어가고, 학교에 데려다주게 되고, 같이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된다.


'저렇게 이야기를 많이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데 도대체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가 내가 영화를 보는 동안 생각했던 거였는데, 아아..... 라라 진이여...



그들은 서로가 가진 상처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상황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서로에게 이야기를 하고 또 들어주며서 '너 참 잘 들어준다'고 말한다. 그렇게 아주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는 거다. 그 과정에서 피터는 라라 진에게 왜 연애를 하지 않았냐고 묻는데, 아아, 나는 이 때의 라라 진이 너무 좋다.


"나는 연애와 사랑에 대해서라면, 읽는 것도 재밌고 쓰는 것도 재밌고 상상하는 것도 재밌는데, 그렇지만 실제로 일어나면..."

"무서워?"

"응."

"왜? 왜 무서워?"

"내 인생에 사람들을 들여놓을수록 떠나는 사람도 많을 거 아냐."


아.... 나는 이 영화, 십대들의 유치한 사랑 영화라고 생각하고 보기 시작했던 영화, 이 영화를 보면서 몇 번이나 울었다. 이 장면에서도 그랬다. 잃을까봐 두려워 인생에 넣지 않으려고 하려는 라라진이 너무 이해되어서. 라라 진의 경우에는 어릴 적에 엄마를 잃은 경험이 있어서 그렇다지만, 나의 경우엔 그런 게 아닌데도 나 역시 두려움이 있었다. 사랑을 하면 잃게 될까봐,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는 연애를 하지 말자고 늘상 생각해 왔던 거다. 라라 진 역시 그게 두렵지만 '우리 사이는 가짜니까 괜찮아'라고 말해서, 그 앞에서 잘 들어주고 있던 피터에게 상처를 주었듯이, 어쩌면 나의 이런 마음,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는 사귀지 않겠어'가 역시나,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내가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나는 몇 명에게 상처 입혔을까... 


내가 그랬다. 내가. 내가 잃는 게 두려워서, 멀어지는 게 두려워서, 사랑을 하면 필연적으로 끝이 있을 거란 생각에,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는 결코 사귀지 않겠다고 늘상 다짐해왔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적당한 사이가 되어, 결코 멀어지지 않아야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았던 거다. 그런데 시작도 해보지 않고 끝을 두려워하면 어떡하냐고 나를 설득하는 바람에 내가 당신이랑 사귀었잖아... 그 말에 쏠랑 넘어갔어, 내가... 


그리고 당신을 잃었지..


내가 그래서 엉엉 소리내어 울던 그 날을 나는 여전히 기억한다. 혼자 걷다가, '내가 안한다고 했잖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사귀지 않겠다고 했잖아" 하고 엉엉 울었던 거다. 마침 그 때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고, 산이기에 가능했다. 아주 오래전, 삼순이가 삼식이랑 이별하고 한라산에 오르며 울고 중얼거렸던 것처럼, 나 역시 일자산을 오르면서, 그러게 내가 안한다 그랬는데 왜 하게 만들어서 이렇게 아프게 해, 하고 엉엉 울면서 말했던 것이다. 아 나여... 이리로 와라, 나여...토닥토닥... 



내가 안한다고 했잖아 이 빵꾸똥꾸야. 안했으면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다정한 사이가 되었을 거 아니야. 지금은 이게 뭐야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잖아, 이 머저리야.. ㅜㅜ



라라 진은 대학에 진학하느라 집에서 따로 살게 된 언니에게 자신의 가짜 연애를 말하지 못한다. 언니와의 통화를 피한다. 나중에 언니가 집에 와서는, '왜 내 전화를 피하느냐, 나랑 얘기도 하기 싫으냐'고 했을 때, 그 때 라라 진은 언니에게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거짓말 해도 언니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까."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나 졸라 눈물터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 영화는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시작하는 것으로도 매우 만족스런 영화인데, 가족 얘기로도 너무나 좋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게다가 친구로도...이 장면 보다가 또 울어버렸어 ㅠㅠㅠㅠㅠㅠㅠㅠ



피터는 이 가짜 연애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젠'이 돌아오길 바라서였다. 대학생과 사귀는 젠이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길 바라서, 라라 진과 가짜 연애를 하는 중에도 젠 에게 끌려다녔다. 젠은 대학생과 사귀고 있었지만, '대학생 오빠가 내 말을 잘 안들어줘, 나는 니가 필요해'라고 하면서 자신의 곁에서 피터가 멀어지지 않게 붙잡으려고 한다. 이런 관계를 이제 진심이 생겨버린 라라 진은 당연히 질투하게 된다. 피터 역시 진심이 생겨버려 라라 진과 조쉬 사이를 질투하게 되고.



'젠'은 피터가 자신이 돌아오길 바라는 게 아니라 이제 진짜로 라라 진을 좋아하게 됐다는 것 때문에 화가 난다. 화가 나서, 라라 진에게 거짓말을 한다. '어젯밤 피터랑 같이 있었다'고. 

나는 이 마음도... 이해가 안된다. 나랑 사귀지 않는다면 너랑도 사귀지 못해, 라는 이 마음.. 이 마음은 뭘까. 왜 굳이 없는 말을 지어내서는 '니가 좋아하는 남자가 나를 좋아하지롱~' 이러는 걸까? 이 마음은..대체 어떤 마음일까. 대학생이 자신의 말을 잘 안들어주고 피터가 잘 들어줘서 피터를 붙잡고 있는 거라면, 젠은, 피터와 계속 사귀어야 했다. 대학생과 사귀는 게 아니라. 대학생도 사귀면서 피터도 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젠은 대학생으로부터 충족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뜻한다. 그렇다면 젠은 자신을 충족시켜줄 상대를 찾아, 자신 역시 상대를 충족시켜줘야 했다. 그러나, 모든 연애와 이별은 아픔이 수반되고, 그 아픔으로 인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듯이, 젠 역시 이번에 실패하고 실수했지만, 아마 다음 연애에서는 다른 것들을 보고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연애에 있어서는 '상대가 내 말을 잘 들어주는가'를 보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연애를 업그레이드 시켜 나가면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업그레이드 된 상대를 만나고 싶다면, 나 역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하니까. 



피터랑 라라 진이 헤어지자, 라라 진의 아빠는 라라 진에게 말한다.


"너가 피터랑 같이 있을 때 되게 행복해 보였어"


라고. 나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연애를 하는 도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야 할 말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너 행복해 보여' 라는 말. 내가 누군가와 사귀면서 너무 행복하고 즐거워서 그것이 바깥으로 보이고, 그래서 나를 아끼는 주변사람들로부터 '너 되게 행복해 보여' 라는 말을 듣는다는 게, 연애가 응당 가져와야 할 것이 아닌가. 많이 웃고 많이 즐거워하는 것.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연애라는 것은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서로의 성장을 돕는 게 아니던가. 



일전에 본 영화 [메리 키스마스]에서 여자는 자신의 약혼자에게 이별을 고하며 '나는 나를 존중하는 상대와 매일 깊어지는 사랑을 하고 싶어'라고 말한다. 나는 사랑과 연애는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터와 라라진은 그걸 했었다. 내 관심 밖의 영화를 그 사람 때문에 보게 되고, 그렇게 함께할 대화 소재를 더 찾아내는 것, 혹시 이 대화가 상대의 아픈 점을 건드린 건 아닐까, 조심스러워 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상대는 아니야, 네 마음 이해해, 라고 말해줄 수 있는 것. 혹여라도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되는 말이나 행동을 했다면 거침없이 그에 대해 '미안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에 멀리까지 움직이는 것.


그리고 상대를 기다리는 것. 



'그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친구의 말에,

'정말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라고 라라 진이 묻는다.





라라 진은, 피터가 여전히 젠을 기다리고 젠을 좋아할거라고 생각하고 의심하는데, 이 때 피터가 하는 말이 너무 좋다.


"가끔 성적 좋은 애들이 진짜 멍청하더라"


ㅋㅋㅋㅋㅋ 아 너무 좋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피터 너무 좋다. 스키 여행 가는 버스 안에서 라라 진이랑 같이 앉고 싶어서 집에서 간식도 싸왔다고 했다. 라라 진이 좋아하는 요구르트를 사오려고 멀리 있는 한국 마켓까지 갔다왔다고 말한다. 아아, 사랑 뭘까. 사랑 너무 좋은 것이야. 사랑은 멀리로도 움직이게 하고, 꼼짝없이 기다리게도 하는 것이야.



피터는 내내 혼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라 진은, 내내 혼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피터에게로 간다. 







얼마전 단발머리님의 페이퍼로 이 책의 원작 있다는 걸 알게됐다. (왜때문인지 번역서는 정가인하라고 지금 현재 5,400원에 판매중이다. 만세!!)
















영화는 연애 이야기로도, 가족 이야기로도, 성장 드라마로도 무척 좋다. 영화를 보고 나서 계속 영화가 생각난다. 피터와 대화하는 라라 진이, 아빠랑 대화하는 라라 진이, 언니랑 대화하는 라라 진이, 동생이랑 대화하는 라라 진이. 그리고 연애 소설 열심히 읽는 라라 진이. 

좋은 영화다. 그리고 좋은 연애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상대를 이겨내고 그들은 서로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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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9-27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일 동안 나를 행복하게 했던 라라진과 피터의 이야기를 다락방님에게서 듣는 새벽이라니...
난 너무 행복한 것입니다. 하트뿅뿅!!!

이 시리즈는 3권인데 1권의 내용만 영화로 만들어진듯해요.
저희집은 넷플릭스를 안 보는데,
다락방님이 이 영화 못 본 사람 없게 빌고 싶은 심정이시라니 한달 무료 신청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피터 나오는 부분만 골라 읽었지만서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저는 3권까지 다 읽었습니다!!
아이 러브 피터! 아이 러브 피터 카빈스키!

다락방 2018-09-27 08:08   좋아요 0 | URL
단발님, 저는 이 책을 읽어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중이에요. 이미 영화가 제게 완벽했는데 책까지 읽어야 할까 싶으면서, 또 3권이라 하시니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고...
피터 너무 좋아요! 피터도 젠을 겪으면서 그리고 라라 진과 사귀면서 성장하는 것 같고요, 라라 진 역시 자신의 두려움을 피터를 통해 이겨내고 있어요. 너무 좋은 이야기에요.
게다가 라라 진의 가족 이야기도 너무 좋아요. 언니랑 투닥대는 막내 동생도 너무 좋고요, 동생에게 자신이 필요 없을까봐 겁내면서 동생을 어떻게든 도우려 하는 큰 언니 마고도 너무 좋고요! 아빠는 어떻고요! ‘엄마가 돌아가시고난 후 내가 너희들에게 너무 기댔지‘라고 대화를 시도하는데, 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아주 다정한 아빠였어요. 이 가족의 이야기만으로도 너무 좋아요!

정말 좋은 이야기였어요, 단발머리님.
이 이야기를 단발머리님과 공유할 수 있다니 행복합니다.
아아, 우리는 트와일라잇도 잭리처도 공유하다가 이제는 라라 진도 공유하는 것입니다!! 꺅 >.<

무해한모리군 2018-09-27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사랑했던 메모메모 꼭 봐야지.

다락방 2018-09-27 13:36   좋아요 0 | URL
아주 재미있고 좋은 영화였어요, 모리님. 추천합니다!!
 
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불행은 너무 힘이 세다. 낙관적 희망은 언제나 그앞에서 무력하게 패배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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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거 아니야.
















일전에 유연석 주연의 영화 《그날의 분위기》를 보고 내가 어처구니 없다는 페이퍼를 쓴 적이 있다. 그 영화에서 유연석은, 기차의 옆자리에 앉은 처음 보는 여자에게 '나는 오늘 그쪽이랑 잘겁니다'라고 말한다. 미친 개소리를 씨부린건데, 이 장면에서 어떤 남자들이 '야, 유연석 정도면 여자들도 자겠지'라고 생각한다는 걸 보고는 기가 찼다. 잘생겼기 때문에 저런 발언이 허용될 것이고 여자들도 섹스를 허락할 것이라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걸까? 그리고 저 자리에서 '미친놈아 웃기지마' 라고 내가 대답한다면, 나는 '처음 만난 남자와 자지 않는 조신한 여자'같은 게 되는걸까?



당연히 성인 남자와 성인 여자가 만나, 그 만난 첫 날 섹스를 할 수 있다. 나 역시 만난 첫날 섹스를 한 적도 있다. 그 날 그 남자랑 하고 싶어서 그랬다. 처음 만난 날 섹스를 하자는 상대의 말에 나도 너무 하고 싶어서 갈등을 한 적도 있다. 할까, 말까? 오늘 내가 이 남자랑 섹스를 하면 나는 이 남자랑 어떤 관계가 될까? 망설이다 고개를 저은 적도 있다. 나를 포함한 여자들도 처음본 사람과 당연히 섹스할 수 있고, 섹스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내가 상대의 제안에 응하거나 혹은 내가 제안했을 때는, 상대를 그 날 처음 본거라 하더라도 얼마만큼은 '괜찮은'사람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상대가 나에게 그런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영화에서 유연석이 그랬던것처럼,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갑자기 '나는 오늘 너랑 잘겁니다' 하면, 내가 걔를 뭘 믿고 '오케바리, 나도 오늘 섹스 땡겨, 고고씽!!' 하겠는가? 어디서 저런 생각을 하지? 미쳤나? 상식 같은 거 1도 없나?



그리고 마리 루티의 책에서, '여자들은 하룻밤 섹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근거로 멍청한 연구를 했다는 걸 알게 됐다.





이 연구자는 여자들의 '삶'을 1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갑자기 모르는 남자가 다가와서 '너 몇 번 눈에 띄더라, 오늘 나랑 잘래?' 이러면, '오 네 눈에 띄었다니 기뻐. 그래 자자' 하는 여자가 어딨냐. 그 남자가 강간범일지 살인범일지 어떻게 알고. 내가 마실 물에 약을 타서 납치를 할지 불법촬영을 할지 어떻게 알고... 어떻게 저런 실험을 해서 여자들이 '아니'를 말했다고, '여자들은 첫만남 섹스를 안좋아해' 라고 결론을 내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너무 멍청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무슨 데이트앱에서 설문조사 하니, 여자들은 자신이 만나게 될 상대가 강간살인범일까봐 가장 무섭다고 했고 남자들은 상대가 뚱뚱한 여자일까봐 가장 무섭다고 했다. 와...진짜 남자들 인생 편하게 사는구나..뚱뚱한 여자 만나는 게 가장 무섭다니... 아무튼,


나와는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고, 스토리도 없고, 대화로 알아가는 과정도 없이, 심지어 나는 본 적도 없는데 나를 여러번 봤다는 스토커 같은 새끼랑 내가 어떻게 자냐...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그런데 여기에 안잤더니 여자는 갑자기 남자보다 성욕 없는 사람 되어버리고.......



여자가 처음 본 남자와 섹스하지 않는 건, 섹스를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에 따른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에휴.....



엊그제부터 매일, '오늘 책을 사자', '오늘 사자' 이러면서 지금까지 미뤄왔다. 미루다보니, 장바구니 목록이 자꾸 달라진다. 도대체 나는 어떤 것들을 정해야 하는가. 북마크도 살거라서 오만원이상 구입하면 잉천점 마일리지가 생겨... 어떤 책을 선택해야 할까...























《성폭력을 다시 쓴다》는 이미 읽었고 가지고 있고 밑줄도 박박 그어져 있다. 그런데 내가 가진 책이 구판으로 너무 오래된거라... 2018년 개정판이라는 책으로 새로 꽂아 놔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사야하지 않는가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순결한 피해자'라는 것에 나 역시 갇혀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분, 이 책 읽으세요.


《비바, 제인》은, '개브리얼 제빈'의 책이다. 《섬에 있는 서점》과《마가렛 타운》을 읽어본 나로서는, 비바 제인 역시 읽어볼만하지 않을까 싶다.


《불온한 검은 피》는 내가 '허연' 시인의 <오십 미터>라는 시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다른 시들을 읽고 싶어졌다.


오십 미터를 옮겨 놓으면서 이 페이퍼를 마치기로 하겠다. (어쩐지 숭고한 마지막...)




오십 미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너머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 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 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때가 오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 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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