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에 여성의 패션 쇼핑 습관에 대한 가장 큰 연구 중 하나를 수행한 웰스리치그린은 여성들의 자신감과 독립성이 높아지면 쇼핑하고 싶은 마음이 줄어들고, 일을 즐기면 즐길수록 옷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p.284)

















대중문화에서의 반격에 대해 계속 읽고 있는데, 영화와 드라마를 비롯한 잡지 그리고 나중엔 패션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남자들이 '너무 많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많은 남자들이 하고 싶은 건, 여자들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여자들에게 자신들의 말을 듣게 하는 거였다.


우리는 너희들 말에 관심은 없고, 너네가 뭘 원하는지도 관심이 없어, 닥치고 시키는대로 인형같은 옷이나 입고 의견 말하지마.


영화에서도 시트콤에서도 드라마에서도 그리고 여자들의 옷을 디자인하고 파는 패션업계에 있어서도, 드물게 여자들은 '아니, 그거 아니야, 그러면 안돼, 그러면 안팔려, 그런 거 싫어해' 라고 말해왔지만, 그렇게 말하는 여자는 정말이지 너무 적었다. 아주 많은 남자들이 그녀들이 그런 말을 하든 말든 자신들의 뜻대로 했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그거 아니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여성 시청자들을 끌어들이고 싶으면서 여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여자옷을 디자인하면서 여자들의 생각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 개놈들..



그러니까 그들은 '너네들이 원하는 것'을 만든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데만 몰두했던 거다.



텔레비전 네트워크의 임원들은 자신들이 이 프로그램의 내용에 간섭하는 것은 오직 캐그니와 레이시 같은 직장 여성들에게 위협을 느낄 여성 시청자들을 걱정해서라고 말했다. 로젠즈위그는 이들에게 말했다. "내 책상에는 전혀 위협을 느낀 것으로 보이지 않는 여성들에게서 온 팬레터 4,000장이 쌓여 있습니다. 조사를 어떤 식으로 한겁니까? 한 번도 해 본 적도 없으면서." (사실 베커의 아내는 이 드라마의 "왕팬"이었다고 그는 인정한다.) 캐그니와 레이시라는 강인한 두 여성에게 불편해한 건 여성 시청자들이 아니라 바로 CBS 의 남성 프로그래머들이었다. (p.254)



자신의 아내조차도 좋아하는 '강인한 여성들이 주연인 드라마'에 대해 텔레비전 임원은 '여성에게 위협이 되어 걱정이다' 라고 말한다. 아니, 이봐, 당신 아내까지도 이 드라마의 팬이라니까?



전일제로 둥지를 지키는 여성을 떠들썩하게 반기는 건 이 드라마의 여성 배우와 시청자들이 아니라 남성 제작자들이었다. (p.275)


전업주부인 여자를 완벽하게 그려놓고 싱글인 여성을 이제 남자를 사귈 수 없는 한심하고 신경쇠약 걸린 여자를 만들어놓은 드라마에, 많은 여성관객들과 또 드라마 관계자인 여자들조차도 '그러지말라'고 했지만, 이 드라마의 제작자들이 남자였다. 그러니까 남자들은 어디에나 너무 많았다. 특히나 돈이나 힘을 쥔 자리에 그들이 너무 많아서 여자들이 '아니'라고 말해도 그저 제 뜻을 고집한다.


몸무게 약 64킬로그래에 10이나 12 사이즈의 옷을 입는 32세 여성으로 상정하고 '어린 소녀' 드레스와 '호리호리한 실루엣'을 밀어붙였다. 키가 162센티미터가 넘거나 14보다 작은 사이즈를 입는 미국 여성은 4분의 1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패션복의 95퍼센트가 여기에 맞춰 디자인되었다. (p.280)



실제로 옷을 구매해 입을 여자들의 체형을 알아본 게 아니라 자신들이 바라는 체형에 대한 옷을 만들어놓고 옷이 안팔린다고 광광대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너무 멍청해들...




한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는 1980년대 중반에 디자인업체들을 돌아보다가 "미국 여성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요?" 하고 톡 쏘듯 말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이젠 듣질 않아요. 우린 그들에게 옷 입는 법을 알려 주지만 들은 척도 안 하네요." 혹은 라크루아가 나중에 불평한 것처럼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여성해방운동 때문에 여성들의 패션 감각이 떨어졌"고 워낙 많은 부유층 여성 고객들이 고급 여성복을 저버리는 바람에 "아랍 공주들과 고풍스러운 노부인들만 고객으로 남았다." 고결한 여성성은 해방된 여성들의 관심을 뒤엎으려는 역공이었다. 고결한 여성성을 주도적으로 기획하는데 참여한 패션 디자이너 아널드 스카시Arnold Scaasi 의 설명에 따르면 이 새로운 패션 칙령은 "페미니즘에 대한 대응이고, 일종의 전쟁이었다."

라크루아와 동료 디자이너들의 사명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여성들이 말을 듣게 만들고 때로는 말 그대로 이들에게 고삐를 채우는 것이었다. (p.281)



디자이너들은 여성들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옷을 입히고 싶어 했다. (p.281)




자신들이 원하는 옷을 입히고 싶어하면 그 옷이 팔리겠는가, 여성들이 '입고 싶어하는 옷'을 디자인해야지, 이 바보들아..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 독자적으로만 일을 하는 게 아니어서 남자 디자이너가 '이것이 여자들이 입어야 할 옷이다' 하고 만들면, 매스컴들이 달려들어 '이 옷이 핫하고 이 옷을 입어야 세련된 여자들이다' 하고 기사 내기에 바빴다. 아..너무 남자들이 많아. 곳곳에 남자들이 많다...



패션업계는 반격의 나팔을 울릴 때마다 가혹하게 몸을 구속하는 옷을 토해 냈고 패션계 언론은 여성들에게 이런 걸 입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후기 빅토리아시대 언론에 실린 코르셋에 대한 많은 남성들의 추천사 중 하나는 "소녀가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자태와 감정으로 성숙하기를 원한다면 그녀를 꽉 묶어주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p.282)




그러나 꽉 조이는 옷들, 생활하는 데 불편한 옷들을.. 여자들이 사 입을 리가 없잖아. 당장 불편한데 왜 입어...



어찌나 절박했던지 패션업계는 유서깊은 관행마저 부정하기 시작했다. 패션계 홍보 담당자들은 여성성은 여성의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영원하다'고 오랫동안 침이 마르게 예찬해 왔다. 그런데 지금 와서 잘못된 옷을 입으면 이 영원한 여성적 본성이 지워질 수 있다고 여성들에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p.283)



여성성이 여성의 본성이라면, 여자들은 어떤 옷을 입어도 그것이 지워지지 않을것이다. 꽉 조이는 옷 안입는다고 여성적 본성이 지워질 수 있다니... 저 때의 남자들은 그러니까 뭐랄까..생각을 똥구멍으로 했던걸까. 뭐, 지금이라고 딱히 다른 것 같진 않지만.


이들이 여성옷을 만들면서 여성의 의견을 무시하고 머릿속 망상으로 옷을 만들기 때문에 옷이 안팔리고 망한거다. 다음이 바로 대표적인 케이스다.



로스앤젤레스의 의류 제조업체 컴포닉스Componix 의 대표는 "나이 든 여성들은 이제 직장에서 섹시해 보이고 싶어 한다"며 고집을 세웠다. "그들은 남자들이 자신을 여자로 봐 주기를 원해요. 내 견적서가 아리나 다리를 먼저 봐 달라는 거죠." 의류업계의 권위자들은 하나둘 이 새로운 패션 라인을 좇았다. 디자이너 빌 블라스 Bill Blass 는 "여자들은 다리를 보여 주고 싶어 한다"고 잘라 말했다. 디자이너 딕 브란즈마Dick Brandsma는 "여자들은 또 여자가 되고 싶어 한다."고 읊어댔다. (p.296-297)



하아.. 내가 바로 그들이 말한 '직장에 다니는 나이 든 여성'이다. 나는 전혀, 전혀 섹시해보이고 싶지 않다. 내가 이 직장에서, 내 상사가 있고 또 내가 상사이기도 한 이 직장에서 대체 내가 '왜' 섹시하게 보이고 싶어하는가. 나에게는 직장이 필요하다.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이 내게는 필요하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며 회사에 출근을 하는데, 내가 여기서 대체 섹시해야 할 이유란 무엇인가. 나는 회사에 다니면서 남자 직원들에게 내 다리를 봐달라며 치마를 입었던 게 아니다.  '직장에 다니는 나이 많은 여자'가 되어본 적도 없으면서, 어째서 직장에 다니는 나이 많은 여자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중학교 때 엄마가 거들을 입으라고 사다준 적이 있었다. 몸을 꽉 조이는 속옷이었다. 몇 번 입다가 던져버렸다. 그 뒤로 나는 한 번도 거들을 입지 않고 사는데, 이십대 중반에 사귄 남자가 내게 '너도 거들입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배와 허리를 쏙 들어가게 해야하지 않겠느냐는 것. 나는 대체 남자들이 왜 배와 허리 쏙 들어간 것을 여자들이 아무때고 원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건 그들 머릿속의 망상이다. 되어본 적 없고 살아본 적 없으나, 여자들이 당연히 그럴 거라는 망상. 나는 그 때 남자친구에게 싫다고 말했다. 싫은데? 나는 내 배 숨쉬게 둘건데?



이 책 백래시에 보면 여성들의 투표권이 없는 나라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남자도 나오고, 자기 의견 말하는 여자들은 필요없다고 말하는 남자들의 예도 나오는데, 나는 사실 그게 대부분 남자들의 생각이 아닐까 싶다. 이제 욕먹을까봐 차마 입밖으로 내지는 못하지만, '내 말대로 해, 니 뜻대로 하지말고'가 그들이 바라는 바겠지. 그러니까 여성은 무조건 성적 대상화 되어야 되고, 성적대상화된 자신에 만족하려면 거들을 입어야 하고 더 꽉 조여야 하고, 다리도 보여야 하고, 직장에서도 더 섹시하게!! 유후~


그 당시 남자친구는 '너 책 그만 읽어' 라고 말하기도 했다. 따박따박 말대답한다고... 내가 연상의 남자를 사귄일이 없는데 ㅋㅋㅋㅋㅋㅋ그 남자가 유일한 연상이었고, 게다가 나이 차이도 많았다. 당시에 정말 그를 좋아했고 또 오래 그를 잊지 못하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너 책 좀 그만읽어. 말대답해서 안되겠어."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작년 미니스커트는 참담했어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 "프루프루도 별로 신통치 않았죠. 여성들은 여전히 정장을 원해요. 아직은 그게 제일 많이 팔려요." 하지만 그는 자신의 관찰이 디자인계에서는 씨알도 안 먹히리라는 점을 알고 있다. "평균적인 디자이너는 도서관에 가서 그림책에 있는 그림들을 보죠. 아마 드레스가 매장 창문에 서 있는 마네킹한테 입혔을 때 훌륭해 보일지에 대해서나 신경 쓸 거예요. 그게 다죠. 난 일반 디자이너들이 애써 이 문제에 대해 여성들과 이야기해 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성에 대해 파악하는 건 가장 후순위인 거죠." (p.300)



그러니까, 여성들이 입을 옷인데 여성에 대해 파악하지 않기 때문에 망하는 거란 당연한 원리를 그들이 모른다. 그들 머릿속에서는 '이렇게 허리 잘록 들어가고 다리 드러내는 옷을 입어야 예쁜데 왜 안입지? 여자들 왜 그런거야?' 이러고 있는 것.



'메릴 스트립' 주연의 영화 《더 포스트》에 보면 주어진 자료를 기자들이 모두 톰 행크스의 집에 모여 찾고, 읽고 그걸 바탕으로 기사를 쓰는 장면이 있다. 거기에 여자 기자는 하나였는데, 넓은 방바닥에 자료들을 쫙 깔아놓고서 찾는 과정에서, 여자는 몸에 붙는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게 얼마나 불편할까 신경쓰였다. 그런 옷을 입은 이상 무릎을 모으고 쭈구리고 앉는 거 말고는 답이 없으니까. 나는 그 장면 보면서, 저러고 하루종일 있어야 하다니, 너무 가혹하고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영화속으로 들어가 내 파자마를 건네고 싶었다. 이거 입으라고, 이거 입고 일하라고. 최소한 바지라도 입었어야 되는데, 아아, 저게 뭐야 진짜...



피에르 가르뎅Pierre Cardin이 만든 망토형 천은 몸에 너무 딱 붙는 바람에 《뉴욕타임스》의 패션란에서는 이 옷을 두고 "이 옷을 입은 모델이 팔을 움직일 수 없다는 점에서 상당히 걱정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p.301)



늬들이 입어봐라, 그 옷을 입고 편한가. 왜 늬들이 안편한 옷을 만들어놓고 '이걸 입어야 핫한 여자다' 이지랄들이야..



의류 제작자들은 여성들이 푸프 스커트를 입으려 하지 않으면 또 다른 비하성 패션을 강요하곤 했다. 중요한 건 스타일의 내용이 아니라 그걸 강제로 입힌다는 사실이었다. 여성 소비자층의 고령화에 대한 시장 보고서가 넘쳐나는데도 이들의 디자인이 여성의 영아성嬰兒性으로 자꾸 퇴행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여성의 형태를 최소화하는 것이 여성에 대한 디자이너의 권위를 극대화하는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p.302)




아아. 정말이지 얼마나.. 아니... 왜..무엇 때문에... 거대한 리본 달린 옷..같은 걸 만드는거지요?



기자와 구매자 들은 "서른 몇 살"이라는 제목의 오전 쇼를 보기 위해 이 마트의 강당에 모여들었다. 프로그램지에는 이 옷들이 "현대 직장 여성을 위해" 디자인된 것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꼭 필요한 설명이었다. 모델들이 엉덩이와 어깨에 거대한 나비 리본을 매달고 최대 다섯 층의 주름에 감싸진 채로 회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게 9시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하는 사람들을 위한 옷이라는 걸 잊기 쉬웠으니 말이다. 한 디자이너는 직장 여성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모델들은 서류 가방으로 무장시켰다. 수척한 젊은 여성들이 손에는 앙증맞은 흰 장갑을 끼고 뾰족구두를 신은 채 런웨이를 활보했다. 이들의 서류 가방은 깃털처럼 가벼운 부활절 바구니처럼 흔들거렸다. 빈 가방이었던 것이다. (p.299-300)




현대 직장 여성... 이 왜.... 직장에 가는 데 엉덩이와 어깨에 거대한 나비 리본을 달아야 하냐... 나비 리본 달고 어떻게 .. 왜.. 일을 대체 어떻게 하라는거야. 그냥 당신들이 일하는 걸 생각해보라고. 당신들이 일을 할 때, 디자이너들이 일을 할 때, 엉덩이랑 어깨에 커다란 리본 달고 일합니까? 그거 걸리적거려서 어떻게 일하지?


일전에 나는 어깨에서부터 손목으로 내려갈수록 소매통이 넓어지는 블라우스를 입고 출근한 적이 있었는데, 키보드 칠 때마다 소매가 덜렁거려서 너무 짜증난 적이 있었다. 아, 이건 일할 때 못입겠구먼, 하고는 고무줄 찾아서 소매를 묶어버렸었어. 더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서 기존에 있는 옷도 고치려는 판에, 대체 왜 다섯층의 주름 .. 나비 리본.. 미니스커트.. 같은 거 입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뒤로 가면 속옷 얘기도 나오는데, 일할 때는 예쁘기만한 속옷은 진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이 남자 디자이너들을 비롯하여 패션언론에 관련된 남자들까지, 주변 여자들이 일하면서 정장 입는 거 보면서도 이렇게나 '여자들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니야!' 하고들 있다.




나는 이 모든 게 남자들이 너무 많아서 비롯된 문제라고 본다. 남자들이 너무 많다. 쓸데없이 많다. 머릿속 망상을 얘기하면 누군가는 나서서 그걸 잡아줘야 되는데, 다 그놈이 그놈이라 그게 안된다. 지들끼리 환호를 해. 어쩌다 있는 적은 수의 여자가 잘못됐다고 말을 하면 그건 듣지를 않아.


여자가 지금보다 곳곳에 더 많아져야 하는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망상이 더 퍼져나가지 않을 수 있도록. 여자들이 원하는 건 '이렇게 예쁘게 성적대상화 된 나'가 아니다. 편하게 살고 싶은 나이다. 그런 걸 말하기 위해서는 여자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져야 한다. 힘있는 자리에 더 여자들이 많이 보여야 해. 패션계, 영화계도 마찬가지고 법조계도 마찬가지다. 여자 판사들이, 검사들이, 경찰들이 지금보다 더 많다면 분명히 세상은 지금과 달라질 것이다. 여자 소설가가, 여자 영화감독이, 여자 제작자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다면, 분명히 세상은 지금과 달라질 것이다. 성적대상화에 미쳐있는 남자들에게 닥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등한 자리에, 그보다 더 높은 자리에 여자들이 있어야 한다. 불법촬영을 하지 말라고 더 힘있게 말하기 위해서라도 높은 자리에 여자들이 지금보다 더 있어야 한다. 디지털 성폭력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여자 경찰들은 더 필요하다. 피해자의 말을 듣고, 그 피해가 심각하다는 것을 아는 여자들이 필요하다. 여자 경찰들을 더 뽑으라는 말에 신체적 조건이 남자를 따르지 못하는데 왜 여자들을 뽑으라는 거냐, 말도 안된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은 경찰이 그저 '힘만으로' 일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경찰은 가해자를 잡기 위해 피해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 데이트폭력, 가정폭력으로 경찰을 찾아갔을 때, '이해해라', '사랑해서 그런거다' 같은 말로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자 경찰들은 지금보다 더 많이 필요하다. 불법촬영 당했다고 갔을 때 그냥 돌려보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자경찰들은 필요하다. 여자를 죽이러 간다고 방송하는 남자들에게 5만원만 벌금으로 때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경찰에, 검찰에, 언론에 여자들은 더 필요하다. 별 거 아닌 것들이 노벨문학상 받을 작품이라고 추앙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문학계에 여자들은 더 필요하다. 어릴 때부터 예쁘고 날씬한 것만이 최고인 줄 알고 사는 걸 막아야 하기 때문에, 매스컴과 관련된 모든 곳에 여자들이 더 필요하다. 공부하러 간 곳에서 성적대상화 되지 않기 위해서 교육계에 여자들은 더 필요하다. 근무중에, 회식중에 여자들이 성적대상화 되는 걸 멈추게 하기 위해서, 모든 직장에 여성 임원은 지금보다 더 필요하다. 지금은 여자들이 너무 적다. 지금은 남자들이 너무 많다. 아무데나 남자가 너무 많아서 정말이지 공해 수준이다. 강간, 성폭력, 성추행을 저질로도 남자들은 광고를 찍고 예능에 나오고 소설을 발표한다. 남자가 너무 많아서 생기는 일이다. 그 남자들이 있어야 할 곳에 여자들이 있어야 한다.





요즘엔 예쁘다는 말에 대해서 곰곰 생각해보고 있다. 나도 여전히 나도 모르게 예쁘다는 말을 내뱉곤 하는데, 이 예쁘다는 말은, 그러나 해롭지 않은가.


예쁘다는 말은 텔레비젼만 틀어도 최고의 찬사로 나오고 있다. '예쁘다'는 최고의 가치가 되어, 여자들은 모두 예뻐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예쁜 나를 전시하고, 예쁜 나를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래서 예쁘다는 건 너무 힘을 가지게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며칠전부터 들었다. 예쁘다는 게 별 게 아니었다면, 그것이 그렇게 아이들에게,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최고의 가치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를 요즘 계속 생각하게 되는데, 그건 성추행 당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바로 '니가 예뻐서 그래'라는 거였다. 



니가 예뻐서 그래.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여자들이 듣는 말. 성추행, 성희롱, 심지어 강간까지. '니가 예뻐서 그래' 라는 말은 얼마나 많은 변명이 되었나. 니가 예뻐서 그래, 라고 해버리니 잘못은 '예쁜 나'에게 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예쁜 게 좋은 거라고 그렇게나 여기저기에서 칭찬이랍시고 해대니까 예뻐지고 싶어하고 예쁘다고 인정받고 싶어하는데, 그런데 예쁘면 예쁘다고 강간당한다. 애나 어른이나.. 이거 너무 이상하잖아? 예쁜 게 좋은 건가? 이거 너무 이상해.



자, 봐봐, 장애인도 무정자증도, 여자들도 군대에 갈 수 없어, 그런데 군대에 다녀오면 가산점을 준다.... 이거 이상하지 않아? 애초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정해두고는, 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 가산점을 준대. 이상하잖아?

자, 보자, 예뻐야지, 예쁜 게 최고야, 예뻐야 시집도 잘 가, 예쁜 게 짱이다, 니가 예뻐서 강간했어..... 이상하잖아? 너가 가수로 성공하고 싶으면 영화배우로 성공하고 싶으면 취직 잘하고 싶으면 지금보다 더 예뻐져야 해, 니가 예뻐서 강제로 키스하는 거야, 니가 예뻐서 강간했어...



이걸 어떻게 해야할까.

예쁘다는 말은 나도 모르게 불쑥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어쩌면 이런 것부터 고쳐야하지 않을까. 예쁘다는 말을 찬사로 만드는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게 아닐까.

가야할 길도 멀고 아직도 답을 알 수 없는 것들도 많다.




백래시 책이 무거워서 집에서만 읽고자 했더니, 너무 진도가 더딘 것 같아, 어제는 출근길에 가져왔다. 아무래도 내가 가장 집중을 잘할 수 있는 공간은 지하철 안, 출근시간이다... 퇴근 시간에도 자리에 앉으면 책을 펼치고 읽을 수 있긴 하지만, 이렇게나 무거운 책은 서서는 도저히 꺼내 읽을 수가 없어. 팔이 아푸다... 아무튼 그렇게 어제 아침.





역시나 예상한대로 너무 무거웠고..그렇지만 집중이 잘됐다. 밑줄 아주 박박 그으면서 공부하는 마음으로 잘 읽고 있다. 오늘 출근 할 때 300페이지를 막 넘겼다. 뭔가 출근길에 웨이트 트레이닝 하는 기분이었지만..뭐....... 킁킁.


이렇게 무거운 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난데, 어떻게 엉덩이랑 어깨에 리본을 매달고 다니고 어떻게 꽉 조이는 옷을 입고.... 아무튼 여자들이 회사에 다닌다는 것, 직장에 다닌다는 것, 출근을 한다는 것은 '일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을 한다, 일을 한다고. 일을 해!!! 가서 가만히 앉아 '내 여성성을 마음껏 보세요' 하고 가는 게 아니라고 이 머저리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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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11-14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요즘 <백래시>랑 <코르셋> 같이 읽고 있는데 다락방님 올려주신 부분이 특히 남자가 ‘미용‘ 또는 ‘의복‘을 빌미로 여성을 얼마나 규제하려 했는지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자신들이 원하는 옷을 여성들에게 입히려는 남성들처럼 자신들이 좋아하는 하이힐을 여성들에게 신기려고 하는 구두 디자이너들이 있더라구요. 참내... 그 옷이랑 구두랑 세트로 본인들이 입으면 될 것을 말이예요.

저도 예쁘다는 말을 자주 하거든요. 아이들한테, 어른한테도 ㅠㅠ 다락방님 글 읽으면서 거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됐어요.
유익하고 의미있는 글, 너무 멋져요.
하지만 역시나 백미는, 이 페이퍼의 마지막 문장.

난, 다락방님이 좋아요.

다락방 2018-11-14 16:09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이 세상이 여자를 사람 취급 안한 건 너무나 오래된 역사라는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어요. 여성의 옷을 디자인하면서 실제 여성들이 입으면 어떨까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니..너무 끔찍하잖아요. 자기들 마음대로 사이즈 만들어놓고 자, 이걸 입어라, 하다니... 그걸 안입으면 여성성을 잃는 것처럼 묘사하다니. 머릿속 망상으로 ‘여자란 이런것이다‘ 그려놓고 거기에 인간 여자들을 끼워맞추려고 안간힘들을 썼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인간들이 너무나 많으니 문제입니다. 영화와 패션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나 많은 남자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남자가 너무 많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여자가 더 많아져야 합니다, 더 많이, 더 많이요.


저도 예쁘다는 말 저절로 나오곤 해요. 사랑스럽고 순진하고 그럴 때도 저도 모르게 아유 예쁘다고 감탄사처럼 내뱉게 되잖아요. 그것이 과연 이대로 좋은것인지..요 며칠간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백래시 책에서 ‘예쁘다‘는 것에 대해 나온 게 아닌데, 백래시 읽다보니, ‘그런데 예쁘다는 건 이대로 괜찮은걸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니가 예뻐서 그래‘라는 소름끼치는 말이 갑자기 확 무섭게 다가왔거든요. 예쁘다는 건 뭘까, 우리는 예뻐야 하는걸까?

왜, 남자들이 여자 소개팅 시켜준다고 하거나 할 때를 비롯해 그저 모르는 여자에 대한 얘기가 나올라치면 가장 먼저 묻는 말이 그거잖아요. ˝예뻐?˝

예쁘다는 게 뭘까, 이건 이대로 괜찮은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해보고 있어요. 계속 공부하고 이야기 나누다보면 어떤 답을 찾을 수 있게되겠지요.


저도 단발머리님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걸 아셔야 해요. 훗.

비공개 2018-11-14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 책을 못읽고 있는 요즘이네요 ㅠㅠ
약속해놓고 못지키고 있어 죄송하고 답답한 마음...
그치만 이 페이퍼를 읽고 나니 다시 의욕이 불끈솟네요!!

다락방 2018-11-14 16:10   좋아요 0 | URL
jsshin님, 아직 11월달의 절반이 남아 있습니다. 남은 절반동안 주루루루룩 읽어내시길 바랄게요. 이게 막상 손에 잡으면 잘 넘어가요. 왜냐하면 우리의 삶을 얘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의욕, 계속 가져갑시다! 불끈!!
 
[eBook] 나를 쳐다보지 마 스토리콜렉터 67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8년 9월
평점 :
판매중지


너무해 ㅠㅠㅠㅠㅠㅠㅠ 이러는 법이 어딨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

가능성과 희망을 잔뜩 던져주어 들뜨게 해놓고서는, 그 모든것들을 더한 것보다 큰 절망을 내리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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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몸이 아픈 상태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엄마는 '엄마' 라고 부르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너 목소리가 왜그래, 너 어디 아퍼?' 하고 바로 물으셨다. 그때 왈칵, 눈물이 차올랐었지. 어떻게 이렇게 짧은 단어 하나 만으로도 내 목소리에 스민 감정을 알아챌까. 엄마는 그랬다.


딱히 능력있지 않은 아빠와 살면서 우리 삼남매가 다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었던 것도 엄마의 노력 덕분이었다. 엄마는 내가 어릴 적에는 공부를 봐줬고, 그게 본인의 능력으로 되지 않겠다 생각했을 때 참고서를 사주었다. 개인과외나 걸스카웃 하고 싶다는 내 말에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지만, 영어 너무 몰라서 과외받고 싶단 말에 중고책방에 가서 헌책으로 참고서를 사주셨다. 팝송이 너무 좋다고 하니 길거리에서 테이프를 사준 것도 엄마였고 힘들게 돈 벌고 들어와서 어린 우리들을 씻긴 것도 엄마였다.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있는 최대치로 우리에게 해주려고 하셨고, 나는 그것을 기억하고 또 알고 있다.


그에반해 사실 나는 아빠가 한 일은 크게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힘들 때 내가 무언가 필요할 때 그걸 들어보고 알아채주고 해결해주고자 하는 건 엄마였다. 아빠는 물론 우리를 사랑했지만,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사랑했지만, 그저 사랑밖에 할 줄 몰랐다. 가진 것도 능력도 없는 남자, 그러니까 내 또래의 대한민국 여자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한국남자, 그게 바로 아빠였다. 머리가 크고난 뒤의 나는 엄마에게 '자유롭고 행복하게 혼자 살고 싶지 않아? 이혼하면 어때?'라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기 훨씬 전부터 그랬다. 엄마는 아빠랑 같이 살지 않으면 더 편할 것 같았고, 아빠는 엄마랑 같이 살지 않으면 불편할 것 같았다.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엄마는 자유롭게 살았을텐데. 엄마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우리 때문에, 매일을 일찍 일어나서 밥을 차리고 애들 학교를 보내고 돈을 벌고 가사노동을 해왔다.

















제일 첫번째 실린 단편 <피로 물든 방>에서 17세 소녀는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 소녀의 엄마는 어쩐지 그건 아닌 것 같은 촉으로 그를 사랑하느냐 묻지만, 소녀는 그와 결혼하고 싶은 게 진심이라며 그와 결혼한다. 그에게는 소녀와 결혼하기 전에도 세 명의 아내가 있었고, 모두 사망했다. 그와 결혼을 하고 그가 가진 보석을 받고, 그의 큰 저택의 열쇠를 받고, (어쩌면)그의 큰 사랑도 받으면서, 그녀 자신이 가진 거라곤 고작 순진함과 순수함만이 전부였던 때,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를 사랑한다고도 생각하지만,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이건 아닌 것 같다'의 느낌으로 찾아오진 않지만, '아닌 것 같은' 것이 그녀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느낌이랄까.




가능한 한 전화를 미루고 싶었다. 저녁 식사를 다 마치면 그 이후 다가올 완전히 지루한 시간에 뭔가 기대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7시 15분 전 어둠이 벌써 성을 둘러쌌을 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맘 목소리를 듣자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엄마, 욕실 수도꼭지가 황금이야.

황금 수도꼭지라고요!

아뇨, 엄마, 그건 울 일이 아니겠지요.

전화 연결 상태가 안 좋았다. 엄마가 축하하고 물어보고 걱정하는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전화기를 내려놓자 약간 기분이 나아졌다. (p.39)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된다. 나는 이 책이 단편집인지 몰랐다가 이야기가 빨리 진행되어 놀랐는데, 이제 17세 소녀는 남편의 정체를 알게됐다. 외딴 곳에 떨어진 이렇게 큰 저택에서 남편은 이제 그녀를, 그의 전 아내들에게 그랬듯이, 죽이고자 한다. 그녀는 자신의 위험을 누구에게도 알릴 수가 없다. 전화선은 끊어졌고 하인들은 남편이 모두 휴가를 보냈다.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숨어서 남은 건 장님 조율사 뿐이었다. 죽음이 시시각각 자기에게 다가오는 걸 알면서, 그런데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으면서, 그녀는 자꾸만 그 시간을 늦추고 싶어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러다가 그녀는 자신에게로 오고 있는 엄마, 엄마를 창밖으로 보게된다.



용기. 용기를 생각하자 엄마가 떠올랐다. 그때 연인의 얼굴 근육 하나가 꿈틀하는 것이 보였다.

"말발굽 소리!" 그가 말했다.

나는 최후의 필사적인 시선을 창문으로 던졌고, 기적처럼 말과 기수가 현기증 나는 속도로 바닷길을 따라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이제 말발굽 뒤쪽까지 파도가 밀려오는데도 말이다. 기수는 힘차게 빨리 달리려고 검은 스커트를 허리춤에 말아넣은 채 미망인의 상복을 입고 미친듯이 달리는 훌륭한 여자 기수였다.

전화가 다시 울렸다.

"아침 내내 기다려야 하나?"

매순간 엄마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p.64)



정말 짜릿해지는 순간이다. 어쩌면 엄마는 제때에 못오고 늦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엄마, 엄마가, 심지어 말을 타고!! 내게로 오고 있다. 엄마가, 엄마가 온다!


아, 너무 짜릿해서 정말이지 눈물이 나지 않는가. 소녀는 시간을 좀 더 끌고 싶고 그러나 그의 앞에 서게 된다. 이제 그로부터 처형을 당하게 될 순간에, 엄마는 그 큰 저택의 문을 두드린다. 소녀를 구하기 위해 엄마가 왔다. 오빠가 아니라, 아빠가 아니라, 왕자님이 아니라, 엄마가!!!


나는 엄마가 어떻게 올 수 있었을까 계속 생각했다. 이 위험을 어떻게 알고 엄마는 이렇게 딸을 구하기 위해 달려올 수 있었지?



나는 단지 그날 밤 내 전화를 받고 나서 당장 기차역으로 달려가게 한 엄마의-뭐라고 불러야 하나?- 모성적 텔레파시를 찬양할 뿐이다. 난 한 번도 네가 우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어, 엄마는 이렇게 설명했다. 네가 행복할 때는 안 울었지. 도대체 누가 황금 수도꼭지 때문에 울겠니? (p.68)



아아, 엄마는, 황금 수도꼭지 때문에 운다고 딸이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당장 그 길로 기차를 타고 딸에게로 올 수 있었다. 당연히 나의 엄마가 생각났다. 목소리만 듣고도 내 상태를 알아주는 엄마. 소녀가 용기를 떠올리고 엄마 생각이 났다고 하는 것처럼, 나는 힘들 때 엄마가 생각났다. 나는 힘든 순간에도 그리고 기쁜 순간에도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가 나를 자랑스러워하기를 바랐고, 엄마에게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했다. 만약 내가 저 당시의 소녀라고 해도 엄마는 나를 구하러 왔을 것이다. 말을 타지 못했다면, 엄마는 뛰어서라도 왔을 것이다. 어떻게든 왔을 것이다. 엄마, 우리 엄마가.


(여기까지 썼는데, 단발머리님이 이 내용 엄청 좋아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똭-)



그리고 두 번째, 세번째 단편까지 읽고 멈춘상태. 나는 다정한 청년과 이 책을 같이 읽고 있는데, 오늘 아침 우리는 이 책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피로 물든 방>에서 거대한 남성의 억압을 느껴서 소녀로 하여금 체념하게 만들었다고 했고, 나는 소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틀댔다고 말했다. 만약 소녀가 더 자란다면, 그 꿈틀거림은 더 확장됐을 것이고, 결국 저항했을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소녀는 이제 고작 17살이었고, 그녀 앞에 우뚝 선 남편은 나이도, 덩치도, 돈도, 하물며 그가 가진 집도 다 그녀의 것보다 크고 강했다. 꿈틀꿈틀 대다가 아직 싹이 자라기도 전에 죽음에 처할 상황. 그런 그녀를 이미 저항을 알고 있는 그녀의 엄마가 달려와 도와준 것이다.



두번째 단편은 우리 둘다 그냥 그래, 라고 했고 이어서 세 번째 단편은? 하고 이어졌다. 지금까지 읽은 단편들에서 앤절라 카터가 보는 남성은 야수였다. 상대적으로 여자들은 가난하고 힘없고 어린 소녀들이었는데, 이건 사회적으로 약한 여성과 남성의 대비를 극명하게 하기 위한 장치라고 느꼈다.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단편에서 남자들은 야수와 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데, 세번째 단편에서는 야수 앞에 선 여자가 야수와 함께 짐승이 되는 결말로 끝이 난다. 소녀는 아버지의 도박에 걸려 야수에게 팔려가게 된 것. 현재까지 읽은 앤절라 카터의 단편들 속에서 아버지는 무능하고 딸을 팔아넘긴다. 어머니가 딸을 세상에 내놓고 돕는 것과는 정반대의 역할. 세번째 단편 <타이거의 신부>에서 소녀는 왜 야수처럼 짐승이 될까, 피부를 벗고 털이 생길까, 하는 것에 대해 오늘 아침 나눈 대화.








위 대화에서 말한 '그런 구절'은 바로 이것.


나는 젊은 여자이며 처녀였다. 남자들은 자신들이 비이성적이면서도 자신들과 똑같지 안은 존재들에게 이성이 없다고 주장하듯 내게도 이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만약 내 주위의 황량한 황야에서 한 사람의 영혼도 볼 수 없다면, 그렇다면 우리 여섯9말이나 말 탄 자들이나 양쪽 다)은 우리 사이에도 영혼이 하나도 없다고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이 세상 최고의 종교들은 모두, 선하신 주님이 에덴동산의 문을 열고 이브와 그 친구들을 내쫓으셨을 때, 야수나 여자들에게는 그 연약하고 말랑한 영혼을 주시지 않았다고 명확하게 단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강으로 난 갈대밭을 달려가면서 속으로 형이상학적 사색에 몰두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분명히 나의 상황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는 것을 알아달라. 내가 어떻게 사고팔렸으며,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어갔던가를. 나를 위해 뺨에 분을 발라주던 그 태엽 소녀. 남자들 사이에서 나는 인형 만든 사람이 그 인형에게 준 것과 같은 종류의 흉내내는 삶밖에 배당받지 못한 게 아닐까? -<타이거의 신부>, p.113-114





독후 대화가 이렇게나 유용하다. 나는 소수자성과 그 곁에 남고자 하는, 아버지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려하는 소녀를 읽어내긴 했지만, 소녀가 거울을 볼 때 아버지 얼굴을 보는 것을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화를 하다보니, 그게 또 거기서 그런 의미였어!! 아아 온 몸에 전율이 인다. 아버지의 세계를 자꾸 보여주는 거울이여. 짜릿해!!


아, 역시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거 너무 좋다. 이 친구와는 《분노의 포도》, 《제2의 성 》,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일곱번째 파도》, 《올리브 키터리지》도 같이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같이 이렇게 대화 하는 거 너무 좋다. 아 근데, 《제2의 성》은 둘다 미완 상태.. 우리 이거 언제 읽어요? (시무룩... 왜 안읽나, 나여....)



둘다 세번째 단편까지 읽었고 여기까지 대화를 나누었는데, 아 정말 너무 좋다. 책 같이 읽는 게 이렇게나 좋다. 책 읽고 대화를 나누다보면 내가 보지 못한 걸 볼 수 있기도 해. 너무 짜릿하지 않아요, 여러분? 온 몸에 전율이... 찌릿찌릿.



그건그렇고,

나는 내가 앤절라 카터의 《밤의 써커스》를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검색해보니 2011년에 《써커스의 밤》을 읽은 거였고(메롱이다..), 심지어 《매직 토이숍》도 읽었더라. 나여... 왜 그 전에는 앤절라 카터에 대해 그냥 '좀 어려운' 작가라고만 생각했을까. 심지어 이 다정한 청년의 제보에 의하면 2011년에 내가 앤절라 카터의 책을 읽고 이런 글을 써놨다고 한다.



'앤젤러 카터'의 『매직 토이숍』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 『써커스의 밤』은 책장에 꽂아두고도 읽기를 망설였었다. 그런데 읽기를 결심하고 나니 이제는 계속 읽을지를 망설이게 된다. 이 책은 나보다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 더 재미있게 읽힐 소설인것 같았다. 나는 대체적으로 모든일에 무심한 편이지만,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놓인 자들에 대해 늘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나보다 이 소설을 더 의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인공 페버스의 등에 난 날개가 그녀가 말한 그대로 진짜인지, 혹은 월써가 생각하는 것 처럼 꾸며낸 거짓말인지, 그걸 계속 확인하고 싶은데 책장이 쉬이 넘어가질 않아서 이걸 다 읽을까 말까, 읽으면서도 고민했다. 다른 책을 너무 읽고 싶어서 이 책 읽기를 멈출까 하고 생각했다.  퇴근무렵, 계속 읽어, 말어 를 고민하다가 그래 조금만 더 읽어보자, 하고 이 책을 들고 지하철을 탔다.  (2011년 7월 22일의 페이퍼 중에서)



헐...


나는 내가 왕년에 빻은 말들 많이 하고 다닌 것들을 기억하고 있고, 또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빻은 말들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지만, 맙소사, 저게 무슨 말이야. '이 책은 나보다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 더 재미있게 읽힐 소설인것 같았다. 나는 대체적으로 모든일에 무심한 편이지만,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놓인 자들에 대해 늘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나보다 이 소설을 더 의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라니, 나는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놓인 자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나... 저 때의 나는, 그리 오래전이라고 볼 수도 없겠지만,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이라고 말하는 그런 사람...아아...... 


오늘 과거에 내가 써둔 저 글에 대해 다정한 청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뼛속부터 페미니스트 였던 게 아니라, 제 발로 그 쪽으로 걸어간 경우라고 나를 얘기하더라. 나는 나야말로 꿈틀대던 사람이었다고 얘기했다. <피로 물든 방>의 소녀가 17세에 꿈틀댔던 것처럼(그를 사랑해, 그는 역겨워), 나 역시 내가 하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이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으르렁 대고 있었고, 그 꿈틀댐이 결국 나를 아버지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은 거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이라고 말하고 다닐 때부터, 그러나 사실은 나는 페미니스트 였던 것. 그런데 페미니스트가 뭔지를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과거의 무지한 나여... 


이래서 사람이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 배우고 공부하고 노력하고 행동해야 한다. 아아, 과거의 나여, 2011년의 나여. 너는 앤절라 카터를 대체 어떻게 대한거야. 나는 너무 미안하고 민망해서, 그리고 내가 놓친 것들이 무엇인지 다시 보기 위해서, 앤절라 카터의 책 두 권을 주문하기로 결심했다. (왜 지금 내게 없지요?)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tmi 이겠지만, 가수 '미카(MIKA)'의 두번째 앨범 <We are golden> 은 [매직 토이숍]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다.



남은 단편들을 읽어내는 것이 너무 기대되지만 나는 지금 사무실이고.. .시무룩......대체 언제까지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하는 삶을 살아야 하나. 게다가 오늘 아침엔 아침부터 카레에(카레는 내가 만든 카레가 세상 최고다) 닭강정, 뼈해장국까지 다 먹고 와서 배가 너무나 무겁다. 뛸 수가 없어서 지하철을 한 대 보내버린 아침...

그리고 과거의 나를 다시 돌아본 아침....




그건그렇고, 책 친구 너무 좋다. 여러분 모두 책 같이 읽는 친구 만들어요. 같은 책 읽고 대화를 나누노라면 온 몸에 진짜 전율이 인다. 톡톡 건드려서 깨어나게 하는 이 느낌이 너무 좋아. 좋지 않아요, 여러분? 으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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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11-09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나보다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 더 재미있게 읽힐 소설인것 같았다‘고 말씀하신 게 무려 ‘20211년 7월 22일‘인데 미래에 그렇게 되시려고요? ㅋㅋㅋㅋㅋㅋ 그렇게 되지 마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8-11-09 10:43   좋아요 0 | URL
으아아아아아아앗 이 댓글 읽고 얼른 수정했습니다. 감사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8-11-09 15: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빠가 아니라, 아빠가 아니라, 왕자님이 아니라, 엄마가!!! 에서부터 뜨거워지더라구요.
(여기까지 썼는데, 단발머리님이...)에서는 이미 눈물이 방울방울!!!!

오늘 아침에 엄마 만나고 왔는데요. 저도 다락방님과 비슷한 경우예요.
제가 쉽지만 어려운 얘기를 딱 시작하자마자, 엄마가! 맞아! 그래! 난 니 말이 딱 이해가 된다! 그러시는 거예요.

엄마, 엄마가 저를 잘 알아서 그런거 아니구요? 했더니 엄마가... 아니, 니 말을 듣자마자 딱 이해가 되는데! 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좋은 엄마를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의 목소리만 들어도 우리를 아는, 우리의 말을 딱! 알아 들으시는 그런 엄마!
아~~~ 엄마!!! 어머니!!

진짜 너무 좋은 글이예요! 눈물나게 하는 거 빼고는 완벽하게 좋아요!!!!!
이 작가님!! 진심 사랑합니다!!! (와락!)

다락방 2018-11-09 15:47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도 <피로 물든 방>좋아하실 것 같아요. 굉장히 특이하고 독특한 작가에요. 그리고 엄마를 그렇게 그려주어서, 그러니까 주인공을 구하러 제 때에 와주는 사람이 엄마여서 너무 좋아요! 그러면서 약자를 다 끌어안고 가려는 게 느껴져서 참 독특한 작가구나 싶었어요. 그런 것들을 말하면서 그러나 내용이 아름답고 착하고 그런 게 아니에요. 뭔가.. 성인 동화라고 해야 하나.. 라고 생각했는데 책 뒷표지에 ‘천진난만한 동화의 치명적 변주‘라고 나오네요.

아 엄마 보고싶어요...

맞아요, 단발머리님. 저는 정말 좋은 엄마를 가졌어요. 단발머리님, 우리는 좋은 엄마를 가졌던 것입니다!!!

단발머리 2018-11-09 15:50   좋아요 0 | URL
제목은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닌데요.... 다락방님 리뷰 보니까 너무 읽고 싶어요.
다 읽지 못해도 <피로 물든 방> 은 꼭 읽어보려구요.

저는 좋은 엄마를 가졌을뿐 아니라,
좋은 책친구를 가졌어요.
제 좋은 책친구는 제가 어떤 책을 좋아할지 막, 그런것도 잘 알고 그래요.
저는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랍니다. (으쓱으쓱)

다락방 2018-11-09 15:52   좋아요 0 | URL
저도 제목 때문에 밤에 못읽겠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이게 또 막 그렇지는 않아요? 단편집이라 이야기가 빨리 진행되어 덜 무서웠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좋은 책친구, 너무 좋죠!
단발머리님의 요즘 페이퍼들을 읽으면서 저는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단발머리님이 읽고난 후의 감상을 들려주는 글을 앞으로도 계속 계속 읽고 싶어요. 부디 지치지말고 계속 써주세요!!!

clavis 2018-11-12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엄마보고 싶어서 눈물이..
다시 태어난다면 락방님이 되어보고 싶어요ㅎ글로 이렇게 사람을 쥐락펴락?하신담ㅠ

다락방 2018-11-13 08:16   좋아요 1 | URL
아이고, 클래비스님 얼마나 엄마가 보고싶을까요.. 그 먼데서... ㅠㅠ

기운내요, 클래비스님!
엄마랑 전화통하라도 해요, 응?
 


















"너희 엄마가 찰리를 건드린 거 알고 있었어?"

루크는 그녀의 표정을 읽으려고 애쓰며 그대로 바라만 보았다.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언제?"

"아주머니 생신에. 찰리가 열다섯 살 때 일이야. 정확히 표현하자면 강간을 한 거지. 그건 분명히 아동 학대였어."

"아니, 전혀 몰랐어.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정말 유감이야." (p.571)



이 책을 읽으며 초반에 내가 언급했던 70세 루루가 15세 찰리와의 성관계에 대해, 작가는 그것이 강간임을 알고 있었다. 소설의 말미에 그 일을 다시 언급하며 그것이 강간, 아동 학대라고 분명히 찰리 엄마의 입을 빌어 밝히고 있으니까. 작가의 이력을 보면 '극작가이자 광고인'이라고 되어있던데, 지나치게 극적인 걸 만들려다가 작가는 정신줄을 놓아버린 건 아닌가 싶다. 600여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 한권에서 성인과 미성년의 섹스가 그 한 번뿐이 아니었다. 10대의 소년 소녀를 성적 대상으로 보는건 예사요, 실제로 강간해버리는 장면이 또 나온다. 토할것 같다. 이쯤되면 작가 자신의 정신상태에 대해 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도대체 왜 그렇게 미성년자를 성애의 대상으로 그려놓는지, 왜 어른들마다 그런 시선으로 아이를 보는 걸 그려놓은건지, 작가 자신이 그렇게 청소년을 보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14세 소녀가 등장하는 장면은 특히 역겨운데, 그렇게 미성년자를 성애의 대상으로 보고 강간까지 하는 사람들이 큰 문제없이 친구들과 다정하게 지낸다는 것은,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는 걸 알려주기 위한 작가의 계략이었을까? 등장인물 친구중에 동성의 아동을 성폭행하다 아내에게 들켜 쫓겨나는 놈도 나오는데, 친구들은 다들 그를 안쓰럽게 바라본다. 그에게도 어린 자식이 있는데 이렇게 쫓겨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이 때 그 모임중의 미국인 남자 하나만이 '도망다니는 성범죄자'로 그를 인식한다.


마요르카 섬의 문화가 이런걸까 생각해보다가, 그들중 몇 명은 여행온 거란 걸 떠올리면, 게다가 스페인에서도 아동학대가 큰 범죄라고 나오는 걸 보면, 이것은 마요르카 섬의 문화도 아니고, 그냥 작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어른이 어린이를 보는 일상적인 관점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이 어른이나 저 어른이나 아이들을 강간하면 분명히 피해자들이 나올텐데 그 피해들 속에서 어떻게 이 아이들이 제대로된 사랑과 섹스를 배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초반에 한 번 그런 거 나왔으니 자극적으로 하려고 한건가 하며 막 '에기나'라는 등장인물에 빠져들고 있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 어디에 언제쯤 있을지 다 짐작할 수 있는 에기나에게 막 집중하려는 찰나에 또 이렇게 미성년자 이런 식으로 등장시켜버리면... 내 집중과 공감은 다 깊은 빡침으로 변하는 것이다.



나는 이 작가가 대체 왜그렇게 미성년자를 폭행하는 장면을 많이 그려내는지 모르겠다. 이건 막장도 뭣도 아니지 않나. 나는 그저 작가가 평소에 '아이는 어린이를 성애의 대상으로 본다'는 걸 자기 몸으로 체화하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뻑하면 성인 여자가 소년을 보고 욕망을 느껴서 몸을 갖다대고 성인 남자가 소녀를.. 진짜 토할것 같다. 이게 실제 작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던 걸까? 아니면 작가의 상상만으로 이렇게 빈번하게 이런 일을 그려냈을까?



게다가 작가가 매력적으로 그려내는 여성은 한결같이 '자기관리 잘해서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젊고 탄탄한' 여자... 남자 작가에게 여자의 자기관리란 몸매유지와 같다. 몸매만 탄탄하게 유지하면 여자는 세상 자기관리 잘하는 사람이 된다. 자기관리가 몸매유지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상상력의 한계.



이 책은 물론 장점이 있다. 이 책을 읽다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를 읽어보고 싶어졌으니까. 게다가 역순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들은, 이미 등장인물들이 죽었다는 걸 알면서 시작하는데도 어찌나 흥미진진한지. 다음장을 넘기면서, '왜,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건데, 니네 왜 서로에게 화내는 거야, 어디서 그런 오해가 쌓인거야' 계속 궁금했단 말이다. 그러니 소재로도 구성으로도 아름답고 깊은 문학이 될 가능성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작가는 '극적인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해 인상 찌푸려지는 소설을 만들고 말았다. 이 소설 한 권에서 미성년자 강간씬만 쏙 들어내도 이야기에는 아무런 무리도 없고 어떤 영향도 없다. 물론 개개인의 인생사는 다양하고 다른 사람들이 미처 알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소설에 대체 그 씬들을 집어 넣은 건 어떤 의도일까. 분명 그걸 넣어야겠다고 생각해서 넣은건데, 이 책을 읽은 독자인 나로서는 '이게 이래서 필요했네'라는 걸 전혀 느낄 수가 없는 거다. 오히려 그것들을 다 들어내어버리면 좀 더 좋은 소설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지나친 욕심은 오히려 화를 불러오는 법.




자, 그리고 이 작가가 그려낸 사랑에 대해서도 보자.



나는 이 책속의 등장인물들에게 '그게 니가 만들어낸 니 운명이다' 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토록이나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으로는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해, 사귀지 않으면서도 마음속 1순위로 삼으면서, 가슴 속 깊은 응어리로 남겨두고 언제나 인식하고 살거면서, 그런데 어째서 오해를 푸는 데는 그토록이나 인색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사랑했으면, 상대가 나를 배신했다고 생각했을 때, 한 마디 변명이라도 들어줬어야 되는 게 아닌가. 화가 나고 서운하고 속상해도, '내 말 좀 들어봐'라는 상대의 말을 무시해서는 안되잖아. 사랑한다며, 그렇게나 사랑했다며. '내 말 좀 들어봐' 라고 하는데도 전혀 듣지 않고 상대를 피하면서 평생을 원망하고 살다니...너무 머저리들 같잖아?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 사람을 대체할만한 사람을 찾고 있어..인생 진짜 똥멍청이들로 살고 있네. 들어봐줬으면 됐잖아. 특히 루루의 경우에는 제럴드가 하는 말을 들었다면, 아니, 하도 말을 안들어주니까 제럴드가 '이 사진이라도 봐'하며 필름을 줬을 때 그거라도 현상해서 봤다면, 평생 가슴에 상처로 남을만한 일들에 대해 이해와 용서가 가능했을 것이고, 오히려 '아 그 당시에 네가 그렇게 힘들었구나' 할 수도 있었을텐데... 왜 말을 안들어? 에기나 역시 마찬가지. 그 실망에 대해 진짜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지만, 한 마디라도 들어주지 그랬어. 평생 그 남자를 가슴에 간직하고 살거면서. 아이고 답답하다.


그리고 제일 찐따같은 건 루크다.


에기나가 단 하루, 아프고 토해서 창백해졌을 때 옆에 있으면서 사랑한다고 고백한 남자가, 널 사랑해, 라고 말하고나서 바로 다음날 다른 여자랑 섹스했다니... 그거 니가한 짓이야. 니가 입으로는 '나는 에기나를 사랑해요' 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 개소리 하고 자빠졌네 참나원. 그게 니가 한 짓이다. 아픈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였고, 그것이 진심이었고, 상대도 그걸 진심으로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다른 여자랑 모래사장에서 '어쩔 수 없이' 섹스한 거, 그건 니가 잘못했다, 이 똥멍청이야. 그래놓고 자기 마음속 1순위는 에기나라고 하면서 제대로 다른 여자한테 정착도 못하고... 그게 니가한 짓이야. 니 운명은 니가 만들었다 이 개똥같은 놈아. 내 사랑은 진심이야, 라고 하면서도 상대의 말에 귀 기울여주지도 못하고 '그런데 내 육체가 내 마음대로 안돼'이딴 개소리 씨부리면... 그 사랑은 어떻게 이루어지지요?



안이루어진다.


멀어진다.


세이 굿바이.



그래서 당신들이 어떻게 살았냐? 평생 상대를 원망하고 그리워하고 살았다. 평생. 심지어 오해를 풀지도 못한채 늙어 죽고... 그게 뭐야... 참나원..... 왜 하나같이 다들 멍청하지?


사랑하면 상대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의도치 않아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상대에게 오해를 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것이고, 사랑했다면, 그리고 그 사랑이 진심이라고 생각했다면, 상대가 '내 말 좀 들어봐요'라고 했을 때, 한 번쯤은 귀기울여 들어줘야 하는 거다. 그래야 평생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억지로 노력하면서 행복하지 않게 지내는 뻘짓을 하지 않을 수 있는거야. 인생 길어야 백년이고 인생 딱 한 번 뿐인데 대체 왜들 그러는거야...



루크가 언제쯤 시내에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에기나는 수년 동안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치 사지를 절단하듯, 두 사람은 서로를 잘라내려고 오랫동안 애쓴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사라졌던 환영이 되살아난 느낌이었다. 잘려나갔던 팔다리가 아직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여전히 가렵고 따끔거리는 것이 아닌가. 퍼거스는 에기나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부분을 채워줄 효과적인 대체물이었다. (p.190)




하지만 내일 아침이 올 때 즈음이면, 루크는 차가운 시체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에기나를 만날 수도 없게 될 터였다. 루크는 자신이 바라는 것만큼, 에기나도 다시 그와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반드시 그렇게 되지는 않더라도, 그의 입장에서는 항상 에기나가 1순위였고 나머지는 다음이었다. 세상 여자 전부를 준대도 절대로 에기나를 모른 척하고 등질 수는 없었다. 에기나의 존재는 루크 마음속에 문신처럼 깊이 새겨져 있었다. (p.247)



바로 그게 루크의 문제였다. 그는 오직 에기나만을 사랑했다. 그는 절대로 에기나를 사랑한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었다. (p.250)



제럴드는 수십 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그를 마요르카 섬에 붙잡아두었던 여자를 고작 1킬로미터 거리에 두고 그 오랜 세월 동안 몇 번 만나지도 못한 채, 인생의 대부분을 홀로 지내야 했다. 한 번은 거리에서 갑작스럽고 열광적으로, 또 한 번은 스페인의 한적한 곳에서 어이없는 사건(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지만) 때문데 그녀와 마주쳤었다. 제럴드는 두 사람 사이에 벌어졌던 사건 때문에 속이 텅 비어버린 통나무 신세가 되었다. (p.269)







가을방학도 자신들의 노래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싶어질 때가 있어> 에서 말하지 않는가. '너같은 사람은 너 밖에 없었어'라고. 가을방학도 아는데 모두다 알아야지. 아무도 그 사람을 대체할 수 없다. 그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어. '당신같은 사람'은 없다. '당신'만 있을 뿐이지. 인생을 통틀어 당신같은 사람을 어떻게든 또 만나겠다고 덤비고 또 덤벼도 어떤 점에서 '당신과 비슷한' 사람이 있을 순 있지만, 당신은 아니다. 당신같은 사람은 없어.


너같은 사람은 너 밖에 없었어.






쉰살이 넘었지만, 그래도 이제, 어쩌면 루크는 그 날의 자신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쉰이 넘었지만, 아주 오래 만나지 못했고 또 아주 오래 방황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이 책의 가장 마지막에 나온다. 에기나가 그렇게 하는 사람이라서, 나는 그게 참 좋았다. 쉰 살이라니, 너무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예순살 되기 전이고... 너무 오래 방황했지만...... 이제 남은 생은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다정하게 살자.




아침에 뼈해장국 먹었더니 배가 엄청 부른데 동료 직원이 아몬드 빼빼로 줬다. 빼빼로는 역시 아몬드 빼빼로가 짱인 것 같아. 오늘 집에 가면서 마트에 들러 아몬드 빼빼로를 박스째로 사놓을까..같은 생각하면서, 동료가 준 아몬드 빼빼로 흡입했다. 빼빼로는 역시 아몬드 빼빼로!!!










서머싯 몸은 글을 써서 번 수백만 달러의 돈으로 빌라 모레스크를 구입해서, 오랜 여생을 호화롭게 보냈다. 아침에는 글을 쓰고 오후가 되면 브리지 카드 게임을 즐기고 매우 운이 좋은 이웃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서머싯 몸의 자서전에서 읽은 바로는, 이웃 중 하나가 몸의 빌라로 걸어 들어와서 정원을 보며 감탄에 찬 어조로 이렇게 외쳤다고 했다. "글을 써서 이 모든 걸 얻었단 말인가!" (p.170)

루루는 사람들을 등진 채 갑판으로 나와서 서서히 멀어지는 해안쪽과 가장 가까운 배 뒤쪽의 모서리로 재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핸드백을 저만치 멀리로 집어던졌다. 핸드백은 바다 위로 20미터 정도 붕 떴다가 ㅋ몬크리트로 된 부두에 풀썩하고 떨어졌다. 그녀는 신고 있던 신발도 벗어서 핸드백이 있는 쪽으로 연달아 집어던졌다. 그리고 발레리나처럼 높은 요트의 상갑판 쪽으로 올라서더니, 바닷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p.198)

에기나를 두고 딴짓을 하다니, 망할 자식. 루크는 퍼거스가 그녀에게 가당치 않은 상대라는 사실이 언제나 마음에 걸렸다. 그는 당장에라도 사실을 까발리고 싶었고 너무 화가 났다. 하지만 이제 에기나에게 귀띔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하긴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아직까지 남편의 실상을 모른다고 해도 언젠가는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퍼거스를 뻥하고 차버리는 날이 오겠지. 루크는 그럴거라고 굳게 믿었다. (p.247)

도미니크는 절대 아니었다. 우스꽝스러운 어릿광대. 쉽사리 넘어갈 사람도 아니었지만 어머니의 이상형은 절대로 아니었다. 루루는 글을 쓰는 사람을 좋아했다. 지적이고 사색가이면서 무미건조한 농담을 잘하는 사람. (p.445)

더 외로워지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이제 그와는 거리가 먼 얘기가 되었다. 이제 그의 인생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기보다는 축소시켜나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자신의 미심쩍고 그릇된 결론과 점점 불가사의해지는 태도 혹은 불필요한 언급까지 하나하나 상대에게 설명하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마음을 열고 감사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지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p.567)

흔히들 말한다. 진짜 비극은 인생이 짧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을 너무 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옮긴이의 말, p.581)

"루크, 꼭 와."
아주 오래전 …… 판잣집에서 함께 있었던 그날 밤에 그랬던 것처럼…… 에기나는 그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몇 시에?"
"7시."
에기나는 몸을 숙이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떼고 엄지손가락으로 촉촉하게 젖은 뺨을 부드럽게 쓸어냈다. 그녀의 시선이 루크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고 마침내 다시 그의 눈가에 멈추었다.
"올 거지?"
"응, 갈게."
"7시."
"응." (p.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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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11-0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과 같은 크기는 아니겠지만 비슷한 정도의 빡침으로 루크를 욕하면서!!!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읽는 맛의 원조, 다락방님께 감사를^^

다락방 2018-11-08 10:47   좋아요 0 | URL
감사는 제가 요즘 단발머리님께 하는 게 감사입니다!! ㅎㅎㅎ

제가 에기나였어도 나 아파서 자는 동안 나가서 다른 여자랑 섹스한 남자의 변명을 어떻게 들어주나 싶기도 해요. 그래도 그러면서 평생을 그리워하고 있는 걸 보노라니 답답...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남자의 관점으로 쓰여진 책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에는 남자 작가들 글 읽으면서 정말 상상력의 한계를 느껴요.

Forgettable. 2018-11-08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그저 그랬어요. 마요르카는 그저 거들 뿐, 현지 얘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또 이방인 얘기도 아니고, 외국인들이 아름다운 마요르카에 와서 헛짓거리 하는 얘기로만 보이던데.. 그니까 왜 로망 갖고 있는 도시를 소재로만 갖다 쓴 느낌? 그 도시에 대해서는 뭣도 모르면서?? ㅎㅎ 짜증 ㅋㅋ

다락방 2018-11-08 10: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마요르카라는 공간적 배경은 그저 공간적 배경일 뿐 어디서 죄다 섹스에 미친 인간들만 데려다놓은 것 같아요. 전 특히 에기나 14세 얘기가 너무 싫었어요. 뭔가 극적으로 만들려고 욕심만 부려서 망쳐놓은 것 같아요. 매력적인 캐릭터도 없어. 죄다 상대방 말은 안듣고 닥치라고만 하는 캐릭터들뿐... 이긍..
 
단어의 사생활
밥보다 일기 - 서민 교수의 매일 30분, 글 쓰는 힘 밥보다
서민 지음 / 책밥상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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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주 일기를 쓴다. 매일 쓰진 않아도 언제나 글을 쓰는 편에 속한다.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과 느낌은 이 곳에 쓰지만, 책과 상관이 없는 사적인 것은 네이버 블로그에 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사적인 내용,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좀 더 깊은 속내에 대해서는 늘상 가방 안에 넣고 다니는 다이어리에 쓴다.



(이것이 나의 다이어리들...)




기록은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있다. 내 경우엔 그렇다. 이 책, '서민'의 《밥보다 일기》에서도 일기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스치고 잊힐 수 있었던 것들이 기록해 놓으면 그 때 그 상황과 감정까지 고스란히 생각난다고 말하는데, 나는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한 번은, 딱히 이성적으로 끌리는 건 아닌데, 내가 이 사람과 사귀는 게 맞을까? 라는 고민을 다이어리에 적기 위해 펼쳤다가, 몇 년전에 쓴 다이어리를 꺼내보게 됐다. '그냥' 읽어본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지금과 똑같은 고민이 적혀 있었다. 나는 다른 상대에 대해 같은 상황에 맞닥뜨렸던 것. 아,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깊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구나 부터 시작해서, 그래서 그 끝은 어땠었지 까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과거의 기록들을 꺼내어 읽어보노라면 내가 잊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것들이 좌르륵 펼쳐지면서 그 때의 감정과 기억들이 불쑥불쑥 나를 건드린다. 그것들은 우울한 지금의 나에게 내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를 말해주기도 하고, 언젠가의 내가 왜 슬펐고 불행했는지 역시도 말해준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동의한 일기의 장점중 하나는 '자기 객관화'이다. 내 감정이 들끓어 오를 때 그것을 적어가노라면, 그 일에 대해 그리고 그 들끓었던 감정에 대해 다시,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보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좀 더 나은 나'를 만드는데 영향을 미치고, 어떻게 해야할지 방향을 일러준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일기 쓰기는 내가 나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매일 일기를 쓰면 자기소개서도 잘 쓸 수 있게 되어 취업에도 용이하다고 하는데, 그 역시 장점이긴 하고 또 글쓰기를 잘하는 것은 못하는 것보다 여러모로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나는 일기쓰기 즉, 매일의 짧은 글쓰기가 가져오는 장점은 '나를 더 잘 알게 해주는 것'으로도 정말이지, 아주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메모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어쩌면 글을 계속 쓰고자 하는 사람들은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답을 찾아내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에게는 이 책에서 말하는 뮤즈가 자주 찾아들어, 그 순간순간 바로 다다다닥 글을 쓰는 쪽이 편한데, 상황이 언제나 내가 글을 쓰도록 돌아가는 게 아니다. 예전에는 머릿속에 '이거 써야지, 이거 기록해야지' 라고 생각하면 글쓰기를 앞에 두고 죄다 생각이 났었는데 요즘에는 '아 뭐 쓰려고 했더라..' 하고 잊게 되는 거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메모를 한다. 메모지가 있으면 메모지에 키워드만을 써두고, 메모지가 없으면 스맛폰 메모장에 키워드를 써둔다. 키워드만 써두면 내가 뭘 쓰고자 했는지 알 수 있으니까. 혹은 키워드만으로 안되겠다 싶으면 짧게 내용을 쓴다. 이것은 아마도 이 책에서 서민 이 말한 '얼개'에 해당하는 것일테다. 어차피 쓰기와 기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잊지 않기 위해'서라는 목적도 가지고 있는 터라, 그걸 쓰기 위한 소재조차 잊지 않기 위해 이렇게 순간순간의 기억을 써두는구나 싶으니 동지애가 느껴졌다.



이 책이 말하는 일기의 장점은 모두다 옳고, 또 글쓰기에 대한 조언들도 유용하다. 그런데, 너무 쉽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는 이 책을 청소년이 가장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청소년을 염두에 두어서 이토록 쉬운 글이 나왔구나, 싶다가 내가 이 글을 '쉽게' 읽는 건, 내가 그동안 계속 일기를 써왔던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미 일기를 쓰고 있는 사람은, 이미 저자가 말한 바들을 실천하고 있을테니, 이 책이 말하는 바가 어려울 리가 없다. 그러나 성인이라 해도 일기를 전혀 쓰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그리고 일단 눈 앞에 노트나 빈 화면을 보고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써야할까' 막막한 사람이라면, 이 책은 바로 그대로의 의미가 있겠구나 싶은 거다. 그러니 이 책의 대상은 이미 일기를 쓰는 사람보다는 일기라는 짧은 글, 자기 자신에 대한 글조차 쓰기가 너무나 막막한 사람이 되어야할 것이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나 좋자고 글을 쓴다. 글을 쓰면서 내가 가진 생각이 정리된다. 그리고 나 좋자고 쓰는 이 글이, 쓰는 순간의 내게도 좋지만, 다 쓴 후의 내게도 좋다. 훗날 과거의 기록을 읽노라면 나는 수시로 과거의 어느 순간에 가서 생생한 감정들을 느끼고 있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그렇게 과거의 내가 어떤지 알게되면, 미래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더 깊게 생각해보게 된다. 무엇보다 이토록이나 자주 글을 쓰면 자꾸자꾸 쓰면서 글 실력은 좋아진다. 계속하는 사람이 계속하지 않는 사람에 비해 실력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글을 쓰지 못하니까 안쓰면 계속 글을 못쓰게 되지만, 글을 쓰지 못하지만 계속 쓰고 또 쓰고 또 쓰면 잘 쓰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거다. 이것도 이 책에서 다 말해주고 있다.



저자는 독서가 깊은 글쓰기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하는데, 크- 이건 뭐... 도무지 이견이 있을 수가 없다. 책을 읽고 또 읽고 계속 읽으면 쓰는 게 달라지는 건 정말이지 두말하면 잔소리야. 글 써서 나쁜 점은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정말 없나? 이건 좀 곰곰 생각해봐야하겠다).




마지막으로 덧붙인 저자 아버지의 일기 때문에 이 책은 '일기를 쓰자'는 데 더 설득력을 갖는다. 오래전에 아버지가 써두었던 일기를 읽음으로써 그 당시의 상황과 자신의 생각이 어떤 식으로 달랐던건지 돌아보게 되는데, 이 아버지의 일기 덕분에, 저자가 말한 일기의 모든 장점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나는 이 아버지의 일기 때문에 별 하나를 더 주고 싶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의 일기가 읽고싶어졌는지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제임스 w. 페니베이커'의 《단어의 사생활》이 생각났다. 정확히는 이런 구절이었다.



내 경력으로 말하자면 초기에는 건강, 감정, 트라우마 경험의 특징등을 연구했다. 그러다 1980년대 초반, 나는 우연히 발견한 사실에 마음이 끌렸다. 지독한 트라우마 경험을 혼자서만 간직하는 사람들은 그 경험을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들에 비해 건강상의 문제가 훨씬 많았던 것이다. 비밀을 간직하는 것이 왜 그리 해로울까? 더 중요한 질문을 하자면, 강렬한 감정을 수반하는 비밀을 터놓는 사람들은 더 건강해지는 것일까? 나와 제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금세 알게 되었다. 답은 <그렇다> 였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루 15분에서 20분 정도씩 사나흘 연속으로 자신의 트라우마 경험에 대해 글로 써보라는 실험을 시작했다. 그 결과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 글을 쓴 사람들은 아무런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주제에 대해 글을 써야 했던 사람들에 비해 건강이 호전되었음이 증명되었다. 이후의 연구들에서는 감정을 표출하는 표현적 글쓰기expressive writing 가 면역 기능을 높이고, 혈압을 낮추며, 우울한 감정을 줄이는 한편 평소의 기분도 더 나아지게 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최초의 글쓰기 실험 이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계 전역에서 2백 건 이상의 비슷한 실험이 수행되었다. 연구 결과는 그리 대단치 않을 때도 많지만, 감정의 격변을 <언어의 변환>하는 단순한 과정은 신체적 및 정신적 건강과 꾸준히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임스 W. 페니베이커, 『단어의 사생활』, p.26





일기를 쓰자. 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좀 더 건강한 내가 되기 위해서. 나는 일기 쓰는 나를 항상, 언제나 칭찬한다.

잘하고있다, 나여...

뭘 이렇게 다 잘하는건지 모르겠다.






자, 그렇다면 일기를 매일 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 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날 저질렀던 실수에 대해서는 진지한 반성으로 이끌어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노력하게 해줍니다. 글을 쓰려면 해당 사건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야 하니 사고가 깊어지는 것은 당연하고요. (p.38)

글쓰기 소재는 원래 갑자기 떠오릅니다. 작가들은 그걸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의 신인 ‘뮤즈‘에 비유합니다. 이 뮤즈라는 분은 워낙 빠른 속도로 왔다가 그냥 가버리는 게 특징입니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빈대떡을 보는 순간에는 ‘아, 빈대떡에 대해 쓰자‘고 생각을 하겠지만 1분만 지나면 그 생각은 없어지고 ‘내가 뭘 쓰겠다고 했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중략)
그러니 뮤즈가 왔을 때 잽싸게 뮤즈를 붙잡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게 바로 노트에 써놓는 것이지요. ‘빈대떡‘이라고 쓰고, 뭐에 대해 쓸지 대략의 얼개를 짜놓는 겁니다.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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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1-0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의 일기 라니깐 <존 치버의 일기>가 생각납니다...ㅎ

다락방 2018-11-07 10:40   좋아요 1 | URL
덕분에 검색해보고 왔습니다. 존 치버 노년의 일기로군요. 자기 아들에게도 읽혔다고 하네요..
나만의 내밀한 일기도 사실은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 쓰고 있는걸까요?

카알벨루치 2018-11-07 11:32   좋아요 0 | URL
존 치버는 자기 일기가 출판되기를 강하게 원했고 아들은 그걸 따랐죠 많이 불편했겠지만 아버지의 뜻이니...만감이 교차했을 듯 싶네요! 글이란게 누군가에게 읽혀질 수 밖에 없는 것인데...일기문제는 여러모로 생각을 해봐야할 부분인듯 ㅎㅎ

카알벨루치 2018-11-07 11:33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주문했는데 머시기 거시기 준비안된 책때문에 벌써왔어야할 책이 더디 오네요 ㅜㅜ

다락방 2018-11-07 11:36   좋아요 1 | URL
머시기 거시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이 책 보고 이사카 고타로의 책을 장바구니에 넣어두었고요, 요즘 읽는 소설책 때문에 일리아스를 장바구니에 넣어두었고요... 아아.... 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책을 부릅니다, 카알벨루치님... 흙흙 ㅜㅜ

카알벨루치 2018-11-07 12:20   좋아요 0 | URL
이 바닥이 다 그러니 울지마소서! 넘 좋은거 아닙니까! 어제 <백년의 고독> 2권 읽는데 뭉클한게 올라오는데 야 이 맛이구나 싶더군요 ㅋㅋ

단발머리 2018-11-07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보다 일기> 얼른 찾아 읽어보고 싶네요. 인용해 주신 <단어의 사생활>이라는 책도요.
다락방님 다이어리 너무 근사해요.
매일의 내밀한 기록이 이렇게 차곡차곡 쌓여있다는게 정말 이 세상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제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부럽습니다.
저도 예전에 한 일기하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은 어디갔을까요? 새해, 새 다이어리에 시작!해도 3일을 못 넘겨요ㅠㅠ

다락방 2018-11-07 10:42   좋아요 0 | URL
일기를 매일 쓰지는 않아요. 마음 복잡할 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은밀한 일들이 있을 때, 그럴 때만 쓰곤 하는데, 그런 것들이 나중에 읽어보면 ‘아, 이게 나구나‘ 싶더라고요. 그런것들이 저렇게 차곡차곡 쌓였네요.
제가 읽는 저의 역사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 같아요!!

단발머리님도 매일이 아니라 생각날 때만이라도 부지런히 적으세요!! 나중에 읽어보면 얼마나 재밌다고요!! >.<

2018-11-15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15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2 0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