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검시관의 하루 - 차가운 시신 따뜻한 시선
주디 멜리네크.T.J. 미첼 지음, 정윤희 옮김 / 골든타임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주디 멜리네크'는 외과 레지던트로 일하다 그만두고 법의병리학 을 새 직업으로 갖게 된다. 쉽게 풀이하면 부검의, 검시관이다. 시체를 보며 죽은 원인을 찾아내고 사망확인서를 발급해주는 일. 시체가 도착하면 일단 외부에 상처가 난 건 없는지를 살피고 그 후에는 몸을 갈라 그 안에 모든 장기와 뼈, 뇌까지 샅샅이 살펴본다. 몸에서 혹시 마약이나 약물이 나오진 않는지, 죽음에 이르게 한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인지 공들여 찾아내서는 그것이 사고사인지 자살인지 혹은 살인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을 제시하곤 한다. 게다가 유족들에게 슬픔을 전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다. 숨을 멈추기 전까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을 거란 걸 뻔히 알면서도 유족에게는 '아니요 바로 사망해서 고통은 없었을 거예요'라고 거짓말해주는 일까지.



그녀는 이 일에 애정을 갖고 있다. 자신이 그간 의대에서 또 외과 레지던트로 일한 경험으로 알게된 지식을 다 쏟아 붓는다. 물론 같이 일하는 동료와 선배로부터도 가르침과 도움을 받고, 그래서 거기에 또 지식과 경험을 차곡차곡 쌓는다. 똑똑한 여자가 자기의 지식을 바탕으로 일을 하는 것, 그 일에 애정을 갖는 것, 동료들과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을 보는 것은 몹시 흥분되는 일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게다가 그녀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하는 일에 애정을 가진 게 보여서 즐거웠다. 매일 시체를 보고 시체에서 나는 냄새를 맡는 사람들에게 즐거웠다는 말을 하는 건 어쩌면 부적절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지만, 자신의 일을 즐기고 그 일을 일로써 잘해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실례는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에이미 박사는 내 손에 들려 있던 두개골을 받아 자세히 살펴보더니 다시 돌려주었다. "뼈 하나하나마다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난 내 일을 정말 사랑해요." ( p.125)



그러나 역시 한 사람의 삶이 끝났다는 것을 보는 것, 아는 것, 전달하는 것은 즐거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사연을 접하노라면, 세상엔 이렇게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구나 싶고, 그만큼 다양한 죽음-내가 결코 알기를 원하지 않았던 종류의 것들까지-이 있구나 싶다. 사고사로 결론 날 수 있는 것인데 가족이 찾아와 그럴 리 없다고 사연을 들려준다거나, 자살한 아들을 인정하지 못해 계속해 사고사일거라고 평생을 주장하는 어머니라든가 하는 사연이, 과연 그냥 남의 일이기만 할까. 그녀의 상사는 그들이 해야할 일은 죽음에 대한 원인을 정확하게 밝혀내는 거다, 이것이 살인사건인지에 까지 관여하는 건 아니다, 라고 하지만, 그녀는 혹여라도 누군가 억울한 죽음에 이른 건 아닌지 돕고 싶어한다. 



그녀가 처음 검시관 일을 하면서부터 맡게 되는 혹은 알게 되는 수많은 사연들에 대해 읽어가다가, 맙소사, 마지막 10장을 읽을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울어야 했다. 10장의 제목은 <충격과 공포>인데, 2001년 9월 11일의 일을 다루고 있다. 



의대에 다닐 때 가장 친했던 친구가 맨해튼 어퍼 사이드에 위치한 메모리얼 슬로언 케터링 암센터에서 종양학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2001년 9월 11일 아침 뉴스를 보자마자 곧바로 아파트에서 제일 가까운 응급실로 달려갔다. 친구의 집은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있었고, 응급실은 그로부터 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병원에는 심장병 전문의, 피부과 전문의, 노인병 전문의까지 온갖 동료 전문의들이 접수처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서, 테러 현장에서 실려 올 환자들을 도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먼저 바퀴 달린 들것을 모아 두었고, 부상 정도에 따라 구역을 나눴으며, 부목과 붕대를 준비했다. (p.252)



큰 사고가 일어난 소식을 접하고 자신이 무엇이든 도와야 한다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사고 현장으로 바로 달려간 친구 얘기가 10장의 처음인데, 이 때부터 계속 눈물이 났다. 당연히 검시관인 주디도 그 때부터 속속 도착하는 시체들의 신원을 파악하는 일을 맡게 된다. 온전한 형태의 시신이 도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왼쪽 골반 하나만 도착하기도 하고 또 바스러진 뼈들이 도착하기도 한다. 나는 이것을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너무 마음이 아파서, 도대체 주디는 어떻게 이 일을 견디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해야할 일이니 그것을 업무적으로 잘 처리하던 주디도, 나중에 소방관 두명의 시신이 도착했을 때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리고 만다. 



9월 11일 이후 나는 최대한 감정의 문을 닫고 전문가답게 처신하려고 애를 썼지만 두 구의 소방관 시신을 보자 더는 참을 수가 업었다. 첫 번째 남성은 어깨 윗부분에 아기 천사 모양의 문신이 있었다. 한쪽에는 티파니, 다른 쪽에는 헨리 주니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1975년과 1978년이라는 출생연도가 적혀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는 소방서 이름이 적힌 서류가 있었다. 서류의 이름과 문신에 새긴 아이의 이름으로 시신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서류는 다름 아닌 퇴직 신청서였다. 헨리는 50대 중반으로 20년이 넘게 소방관으로 일했다. 신원을 확인했지만, 소방 장비에 적힌 이름과 서류에 적힌 이름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나중에 동료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쌍둥이 빌딩 테러가 발생할 당시, 헨리는 비번이었고 뉴스를 보자마자 가까운 소방서에 가서 다른 소방관의 장비를 급히 걸쳐 입고 현장으로 달려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시신은 왼손에 아일랜드의 전통 결혼반지 클라다 링(두 개의 손이 하트를 마주 잡고 있고 그 위에 왕관이 씌워진 반지)을 끼고 있었다. 내 남편도 똑같은 반지를 끼고 다녔다. 지갑 속에는 9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들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소방관의 뒤틀린 손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잡는 순간, 그동안 참고 있었던 눈물이 터졌다. 수술용 마스크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바람에 어떻게든 현장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마스크와 장갑을 벗어 던지고 무작정 뛰어나갔다. 그리고 작업용 텐트 밖에 바리케이드가 쳐진 구석으로 나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p.285-286)




주디를 비롯한 뉴욕 검시관 사람들이 모두 잠을 줄여가며 시신 신원파악에 나서고 경찰과 소방관들이 사건 현장에서 일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돕기 위해 스스로 오고, 구세군은 검시관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주고, 계속해서 시신을 다루어야 하는 검시관들을 위해 정신과 상담센터도 마련되어 있다. 나는 이 모든 일들이 진행되는 것들이 감사하고 고마웠다. 어디에서 누구든 자신이 하는 일에서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누구도 다치지 말라고, 다쳤다면 치료해야 한다고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구나 싶으니, 자꾸만 눈물이 나는 거다. 누군가는 이 모든 것들을 파괴하려 했지만 또 누군가는 이 모든 것들을 다시 되살리고자 한다. 


사건 현장에 가서 부상을 입고 이마에 멍이 들었다가 그 멍이 점점 눈으로 내려온 주디의 동료가 있다.



신원 확인 작업을 하면서 에이미 젤슨 박사도 많이 치유된 것 같았다. 하루가 다르게 부상이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흠씬 두들겨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마에 있던 시커먼 멍이 점차 눈 쪽으로 내려오면서 일명 너구리 눈이라고 불리는 양쪽안와주위혈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재미있는 얘기해 줄게요." 어느 날 아침 작업을 위해 가운을 갈아입으면서 에이미가 말했다. "어제 한 경관이 조용히 할 얘기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따라갔더니 너구리처럼 시커멓게 변한 내 눈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당신 눈을 이렇게 만든 놈이 누군지 이름만 얘기하면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라고요. 그래서 깔깔 웃고 이렇게 대답했어요. '오사마 빈 라덴이에요. 잘 부탁해요.' 상대는 별로 재미있어 하지 않더라고요." (p.281)



나에게도 이건 별로 재미없는 농담이다. 그러나 나는 경관이 그녀의 상처에 관심을 갖고 혹시 모를 가정 폭력이나 데이트 폭력을 걱정해 그녀를 도우려 했다는 게 또 눈물나게 고마웠다. 그것은 응당 다른 사람들이 또 경관이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서는 정말이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으니까. 폭력을 당한 사람을 다시 폭력의 현장으로 돌려보내는 게 그동안 이 곳에서 빈번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렇게 여자의 상처에 관심을 갖고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조용히 말하는 경관이라니. 




많은 죽음 앞에서 부정적 감정을 가진 많은 사연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주디가 이 일을 해내는 동안 그녀 주변에는 그녀를 돕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녀의 남편은 전업주부로 그녀가 밖에서 일하는 동안 집에서 아이를 돌본다. 게다가 그녀가 직장을 옮기면 그녀를 따라 옮기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일하는 사람들 역시 그녀에게 다정하며 그녀가 앞으로 가야할 길에 축복을 바라준다. 테러가 있고나서 사람들이 모두가 내가 도울일이 없는지 현장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는 것이  너무 고마워서 나는 10장을 읽는 내내 울어야 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다정하게 지내던 딸이었는데, 그런 아버지가 자살을 했고 그것이 그녀에게는 오랫동안 상처이다. 그런 그녀가 만나는 시신들 중에는 당연히 자살사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의 자살 때문에 가졌던 걱정과 상처들을 알고 있기에, 자살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에게 어떤 말을 전해야 할 지를 안다.



다음 날 피터 클라크의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어제보다 더 가슴이 아팠다. 13살밖에 안 된 딸이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완전히 무너져버렸다는 거였다. 우연히 가게에 걸린 웨딩드레스를 보았는데 그제야 결혼식장에 자신의 손을 잡고 들어가 줄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 결혼식에도 아버지가 참석하시지 못했어요. 13살 때 아버지가 자살하셨거든요. 그쪽 따님이랑 똑같은 나이였어요." 나는 미망인에게 말했다. "따님에게 자살은 유전병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해 주셔야 해요. 저 역시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 충격이 조금 가셨을 때, 자실이 유전되는 건 아닐까 싶어서 제일 두려웠어요. 나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운명이 아닌가 싶었죠. 정말로 그랬어요. 어머니께서 따님에게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반드시 설명해 주셔야 합니다. 자살은 질병이 아니니까요. 똑같은 경험을 했던 의시가 하는 말이라고 전해주세요." 그 말을 끝나자마자 오랜 경력을 지닌 전문가로서의 자세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우리는 함께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나누었다. (p.211-212)



나는 그녀가 유족들에게 들려줬던 그녀의 모든 말들이, 그녀의 모든 생각들이 언제나 잘했던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기도 했을 거고 때로는 어떤 식으로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겪어내야 하는 것들일 것이다. 또한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스스로 더 성장하기도 할테고. 



그녀는 이 '죽은 사람'을 다루는 일을 결국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 시선이 나는 무척 좋았다. 



2년간 뉴욕 검시관 사무소에서 검시관으로 일하면서, 총 262구의 시신을 부검했고 그로부터 12년 후에는 총 2,000여구의 시신을 부검했다. 지금까지도 하루하루 인체에 대해 새로운 것들을 배워가고 있다. 나는 내 일을 사랑하고 과학과 의학을 사랑한다. 그리고 내 직업의 비과학적인 부분, 유족과 상담을 하고 경찰과 협업하고, 때로는 증언대에 서야 하는 상황까지도 사랑한다. 부검을 담당하는 의사로서 가장 힘든 역할은 바로 세상을 떠난 사람을 대신하여 말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의사는 연민의 감정을 잊어서는 안 되고, 이를 배우고 연습해야 한다. 매일 죽은 자들을 마주하고 시신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p.320-321)




이 책의 책장을 덮고 나는 아, 정말 책은 좋구나, 하는 걸 또한번 느꼈다. 내가 책을 읽지 않았다면 검시관이란 직업에 대해 한 순간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다양한 죽음의 모습에 대해서도 몰랐겠지만, 서로가 서로를 돕기 위한 생각만으로 달려나갈 수 있다는 것도 읽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 자기 일을 사랑하는 똑똑한 여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어 기운이 났다. 책이야말로 세상에 다양한 사연과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수단이 아닌가. 책 너무 좋아 ㅜㅜ







파티의 해피엔딩은 역시 결혼 발표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바로 연구실 동료였던 카렌 투리 박사의 결혼 소식이었다. 카렌 박사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 참사 당시에 한 경사를 만나 오랜 시간을 함께 일하고 고생했다. 인류학자 에이미 박사가 중간에서 다리를 놓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로맨스는 주선자의 큰 도움 없이도 자연스럽게 불타올랐다. 우리는 모두 그런 끔찍한 경험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 무엇보다 다른 사람과 끈끈한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카렌과 경사의 관계는 점점 사랑으로 발전했다. (p.320)

법의학 병리학자, 즉 부검의라는 나의 직업은 지난 10년 동안 TV 드라마에 단골손님을 등장했다. 내가 업으로 삼는 일이 가상의 드라마로 소개될 때마다 나 역시 덩달아 짜릿함을 느꼈다. 강렬한 눈빛의 여자 검시관이 높은 스틸레토힐을 신고 가슴골이 드러나 보이는 의상을 걸친 채로 흐릿한 조명 아래 피투성이가 된 사건 현장에 등장한다. 드라마 속의 부검의는 즉각적이고 완벽한 진단을 내리며, 여기서 나아가 성적인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도는 가운데 동료와 위트 넘치는 농담을 주고받기도 한다.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너털웃음이 터질 때도 있다. 실제 부검의들은 4주간의 수습 기간 동안, 단 일주일만 뉴욕의 살인 현장에 나갈 수 있으며 그것도 경찰서의 사건 조사 전담반이 동행할 때만 가능하다. 또한, 주로 발이 편한 신발을 신고 두툼한 바람막이를 걸치고 다닌다.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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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래시] 페미사이드 같이 읽기
















뉴욕에서 시체 부검을 하는 검시관 '주디 멜리네크'의 책을 읽고 있다. 총상부터 화상, 자살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다양한 모습을 그녀는 맞닥뜨리게 되는데, 거기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남편이나 남자친구로부터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살해당한 여성들의 시신도 있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죽음은 비단 대한민국의 것만은 아니었다.


사흘에 한 번씩은 여자를 때려야 한다는 말이 우리에게도 있듯이, 스티븐 킹의 소설을 보노라면, 그들에게도 예전부터 말 안듣는 여자는 때려야 한다는 말이 있더라. 물론 소설속에서는 아내를 때려 숨지게 한 뒤, 남편이 혹독한 환영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그는 자기를 파괴하고, 아내의 죽음을 도운 자신의 아들도 파괴한다.


매일매일 빠짐없이 남성에 의한 여성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읽게된다. 어제도 역시 그런 기사를 마주쳐, 제발 그만 좀 죽여라, 울부짖고 싶었다. 남편이 아내를, 남자친구가 여자친구를, 전 남자친구가 전 여자친구를, 소위 흠모한다는 이유로 연인이 아닌 여자를, 길에서 만난 모르는 여자를, 그렇게 남자들은 계속해서 때리고 죽이고 있다. 매일매일. 남자들은 여자들을 죽인다.




12월 여성학 책 같이 읽기 도서, 《페미사이드》를 어젯밤부터 시작했다. 책 날개의 작가소개를 읽으며 세상에 이런 여자들이 있다고 감탄한 뒤, 나는 이런 헌사를 만난다.






남자들은 끊임없이 죽이고 여자들은 끊임없이 이것을 멈추게 하기 위해 애쓴다. 피해자와 희생자의 편에서 계속해서 이 일에 대해 언급하며 그들의 편이 되어주고,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하려는 여자들이 있다. 지독한 현실을 끝내자고 말을 건네는 여자들이 있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들의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연쇄살인을 포함하여 남성에게 여성이 살해당하는 살인사건들을 미디어에서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간에 페미사이드가 간과되어왔다는 사실은 특히 충격적이다. 이러한 살인사건들을 일으킨 여성혐오적 동기들은 미디어에 의해 종종 무시되곤 한다. 미디어에서는 여성들을 비난하거나, 종종 살인자를 짐승이나 동물로 묘사함으로써 인간성 곧 남성성을 부정한다. 언론매체가 여성살해를 다루는 방식은 페미사이드의 성 정치학을 덮어버린다. (서론, p.23)



굳이 영화의 초반에 강간씬을 넣고, 굳이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들을 넣으면서, 그러나 그것이'여성혐오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건, 말하면서도 부끄럽지 않나.

얼마전인가 주말에 채널을 돌리다 잠깐 멈추었던 드라마에서는, 남자가 여자 목을 조르는 장면이 나왔다. 내가 채널을 돌렸던 시간은 한낮이었는데(재방송이었을 것이다), 텔레비젼에서 남자가 자신의 양손으로 여자의 목을 조르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에 너무 놀라서,


"엄마, 저건 진짜 아니지 않아? 지금 저게 드라마에서 뭐하는거야?"

"그러게. 왜저러냐?"


미디어에서 여성을 살해한 남성들을 다룰 때, 위의 인용문처럼 그들의 '남성성'을 지워버린다. 그는 남성이 아닌, 정신이상자거나 미친놈 혹은 괴물이 되어 버리고, 그러면 여성혐오 살해 역시 뒤로 감춰지게 된다.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해결 역시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것은 남성폭력에 다름아니다.



결국 남성이 이상적으로 구성한 여성성과 여성의 행동기준에 맞추어 여성들의 품행은 면밀히 조사되고 결점이 드러난다. 이러한 신화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여성들에겐 '선 밖으로 한 걸음이라도 내디디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라고 읽히며, 남성들에겐 '너는 그녀를 죽일 수 있으며, 그러고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라고 읽힌다.

이러한 메시지는 경찰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여성들을 폭력범죄로부터 보호하고자 제시하는 충고에서도 쉽게 읽힌다. 여성들은 혼자 살지 마라, 동행인 없이(즉 남자 없이)밤에 외출하지 마라, 도시의 이러저러한 지역에는 가지 마라 따위의 충고를 일상적으로 듣는다. 영국에서는 6년 동안, 주간 야간 할 것 없이, 요크셔 리퍼Yorkshire Ripper(1975년부터 5년간 영국에서 13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그 밖에도 7명의 여성을 살해하려 시도한 피터 서트클리프Peter Sutcliffe의 별칭)때문에 웨스트요크셔 전체가 여성에게 안전하지 않은 지역으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충고는 여성들이 갈 수 있는 장소와 사람들 앞에서 취해야 할 행동방식에 제한을 둠으로써 여성을 통제하고자 한다. 공공장소는 남성들의 공간이며, 여성들은 남성들의 허락을 받고 조건부로만 그 공간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여성이 있어야 할 장소는 집이다. 그러나, 언급되는 일이 거의 없는 사실이지만, 집에서조차 여성들은 안전하지 않다. 핵가족 안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에게는 집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장소다. (서론, p.29)



밤늦게 다니는 것도 위험하고, 술 마시고 다니는 것도 위험하고, 처음 보는 남자를 따라가는 것도 위험하다고 그렇게나 말하면서, 그러나 여자가 막상 성폭행을 당하면 거기에 대해서는 꽃뱀이라고 의심하며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한다고 말하는 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본인들의 입으로 '너 그러다가 큰일나, 늘 조심 또 조심해야지' 해놓고 '나 이런 일을 당했어' 하면, '진짜야? 강간이라니... 진짜 맞아? 너도 원한 건 아니고?' 이렇게 되어버려..


나한테 예쁘게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다니, 이 여자 괘씸해.

나랑 사귀어주지 않다니, 이 여자 괘씸해.

나랑 헤어지려 하다니, 이 여자 괘씸해.

나를 무시하다니, 이 여자 괘씸해.

이런 것들을 이유라고 들고와서 여자를 때리고 죽이는 게 그저 괴물이 하는 일이라면, 지금 대한민국에도 그리고 세계 곳곳에도 괴물이 너무 많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야. 그러나 그들이 괴물이라면,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괴물의 모습을 감추는가. 왜 하필 그 '여자'에게만 괴물의 모습을 드러내는가.



자, 괴롭겠지만 읽어보자.

저는 시작했습니다.


단발머리 님, 퍼론 님, 쟝쟝 님, 하이드 님, jsshih 님, 건조기후 님, 비연 님.

12월도 같이 읽어봅시다!


그리고 이것도 같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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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8-12-04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정신없어 아직 개시를 못했는데, 저도 오늘 저녁에 시작 예정요!

다락방 2018-12-04 11:21   좋아요 0 | URL
좋아요, 비연님! 우리 함께 12월 열심히 달려봅시다!

단발머리 2018-12-04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가 ‘선 밖으로‘ 나설 때, 분노하고 협박하고 그리고 여자를 죽이죠.
읽기 어려운 책인건 맞는것 같은데, 손에서 뗄수가 없네요.
진실을 직시하는 일은 언제나 고통스럽지만....
우리는 같이 가니까!!!

p.s. 올려주신 동영상 잘 봤어요. 갈 길은 머네요. 미국도 우리나라도....
근데 이 남자 진짜 똑똑하니, 완전 마음에 들어요.

다락방 2018-12-04 15:50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은 벌써 시작하신건가요?
제가 부지런히 따라잡겠습니다! 집에서 이상하게 책만 들면 졸려서 ㅠㅠ
네, 읽는 게 굉장히 고통스러울 것 같지만, 우리 열심히 읽고 또 이야기 나누어 봅시다.

저 남자 참 똑똑하지요? 저도 우연히 보게된 영상이라 처음 보는 남자인데, 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어요. 다른 남자들이 하지 못하는 걸 하고 있네요. 크-

단발머리 2018-12-04 15:58   좋아요 0 | URL
지금 검색해봤더니,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희극배우네요.
전 오늘 처음 본 듯 해요.
내용도 좋고 전달력도 대단해요.
전, 김제동이 생각나네요.
똑똑한 희극배우라고 하면 김제동 밖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8-12-04 16:25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전 헌법 이야기 하는 것만 들어봐서요.
걍 일반적인,이라면 급 아쉬움 ㅠㅠ
 

어제 밤 열한시에 김치볶음밥에 카레를 안주삼아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채널을 돌리다가 <도시어부>란 프로그램에서 '정성화'가 <지금 이순간>을 부르는 걸 보게됐다. 어어, 이 노래를... 안그래도 최근에 이 노래 너무 듣고 싶어서 여러번 유튭에 검색해 듣고 있었더랬다. 나는 다른 사람 걸로는 안듣고 '임태경'이 부른 것으로 듣는데, 내가 제일 처음 이 노래를 알게된 게 임태경이 콘서트에서 불렀기 때문이었다. 이 노래 뭔데 이렇게 좋지? 하고 콘서트 후 찾아보니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곡이라더라. 내게 그 때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해,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걸 들으면 도무지 맛이 안나. 임태경이 오리지널 같은 거다!






어제 이 노래를 우연히 들으면서, 그러고보니 나는 그 유명한 뮤지컬을 본 적도 없었고 볼 생각도 없었네. 어디 한 번 검색해서 지금 하고 있다면 볼까? 하고 검색창에 넣어봤더니, 얼라리여~ 오늘 오후 두 시부터 티켓오픈이더라. 헐. 세상은 왜이렇게 내 중심으로 굴러가지? 그렇게 예매를 하기 위해 알람을 설정해뒀다가,


아, 그런데 뮤지컬 보기 전에 원작을 읽고 보면 더 좋겠다, 싶어 책장에서 책을 빼들었다. 책은 나에게 언제나 준비되어 있지롱.

















일단 예매를 하고 그 전에 이 책을 읽자!



나는 <지금 이순간> 노래 중에서 맨 마지막, '신이여 허. 락. 하. 소. 서!' 하는 부분이 제일 좋다. 그 부분이 너무 절실해서, 혼자 듣다가도 그 부분에서는 한껏 감정을 잡아 립싱크를 하곤한다.



나는 왜이렇게


신이여, 허락하소서



이 부분이 좋을까? 하다가..그러고보니 내가, God, save me! 하고 절규하는 것도 좋아해??





중간에 가장 절규하는 바로 그 부분, 갓 세이브 미!!


God, save me.


너무 좋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런 생각을 하다가, 헉!! 나.. 신을 사랑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신을 사랑하고 있었어. 그러고보면 내가 신이 등장하는 또다른 노래도 좋아하고 있어... 신이 나를 사랑해 그리고 신이 당신을 사랑해. 신이 그를 사랑해 나를 만드셨대요... 아냐?






신이 날 왜 만든 줄 알아? 널 사랑해서다, 임마. 알기나하냐?




아무튼 나는 신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


,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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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11-30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다른 건 다 다락방님과 의견일치가 가능하지만요... 이건 양보가 좀 어렵네요.
<지금 이 순간>은 홍광호가 오리지널입니다. 그냥 답이예요. 정답!
유투브에 홍광호 더뮤지컬어워즈 버전으로 들으시길 추천드립니다.
이 홍광호는, 조승우가 홍광호 노래실력을 칭찬하면서, 홍광호 노래에 비하면 내 노래는 쓰레기다,의 그 홍광호입니다.
티켓 예매는 성공을 기원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

다락방 2018-11-30 15:30   좋아요 0 | URL
ㅎㅎ 제가 안그래도 이 페이퍼 쓰면서, 예전에 단발머리님이 이건 의견 일치가 안된다고 댓글달아주신 적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ㅋㅋㅋㅋㅋ 네네, 홍광호, 제가 들어보겠습니다.
그런데 이번 뮤지컬에는 홍광호가 없더라고요?
저 이 뮤지컬이 이렇게나 인기가 좋을 줄은 몰랐는데... 두시 땡하고 들어갔는데 전일자 전좌석 다 매진이어서 당황했어요. 이게 가능한 일인것인가.. 아무튼 반복해서 클릭질 하다보니 딱히 원하는 날짜는 아니고 원하는 좌석도 아니긴 했지만 간신히 한좌석 예매하긴 했습니다. 누가 주연 배우인지도 모르는채로 걍 했어요. 하고나니 지킬은 ‘박은태‘이고 루시는 ‘아이비‘라네요. 아무튼 저는 보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으하하하.

그렇지만 1/16 까지 기다려야 하네요 ㅜㅜ

수시로 들어가서 더 빠른 날짜 가능하면 바꿔야겠어요. 히힛.

다락방 2018-11-30 15:34   좋아요 0 | URL
아앗 .지금 보니 홍광호가 있네요? 홍광호가 하는 날로 바꿀 수 있으면 바꿔야겠어요. 그런데 ... 홍광호 조승우는 역시 아직도 다 매진.... ㅠㅠ

단발머리 2018-11-30 15:42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하하하!!!
그러게요... 전에도 제가 홍광호! 홍광호! 했더랬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배우일정 보고 왔는데 ㅋㅋㅋㅋㅋ 거기 전체 일정에는 홍광호도 있더라구요.
매진은 일단 조승우가 끌고 가는거겠지요.
지킬앤하이드 - 조승우죠.
뮤지컬 출연료 1위의 위엄.
저는 박은태 목소리 톤도 좋아요. 하이드로 변신했을 때 제일 잘 어울릴것 같아요. 은태씨, 미안합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18-11-30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조승우로 한번 박은태로 한번 봤는데 박은태가 더 좋았어요~ 바꾸지 마세요~ 톤이 좀 날카로운 느낌은 있는데 그게 이 역할이랑 어울려요 ㅎㅎ

단발머리 2018-11-30 17:06   좋아요 0 | URL
독서괭님~~ 완전 부럽습니당!!!
다락방님~~ 독서괭님이 박은태도 좋다고 하시네요. 좋으시겠어요, 다락방님^^

다락방 2018-11-30 17:15   좋아요 0 | URL
저는 그럼 그냥 더이상 신경쓰지 않고 박은태로 가는 걸로 결정하겠습니다. 으하하하하. 댓글 감사합니다, 독서괭님.

비로그인 2018-11-30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조승우 지킬만 두 번 봤는데, 나중에 고고70에서 홍광호 씨 노래 듣고 완전 깜놀... 단발머리님이 부럽네용
그나저나 저도 어제 카레에 와인 마셨는데ㅋㅋ 왠지 반갑 ㅎㅎ

다락방 2018-11-30 20:13   좋아요 1 | URL
아니, 카레에 와인이라고요?! 오오.. 어제 못한 건배를 오늘합니다. 건배!!

단발머리 2018-12-01 17:16   좋아요 1 | URL
부러워하지 않으셔도ㅋㅋㅋㅋㅋ사실... 전 홍광호 지킬 아직 못 봤어요. 하지만 홍광호 콘서트는 다녀왔다는 ^^/

다락방 2018-12-02 13:08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제가 홍광호랑 조승우 다 찾아봤는데 말입니다. 역시 임태경이 짱이던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구 도망친다. =3=3=3=3=3=3=3=3=3=3=3=3=3=3=3=3=3=3=3=3=3=3=3=3)

transient-guest 2018-12-01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뮤지컬을 제대로 본 적은 없다는 전제를 깔고..노래도 좋고 각색도 좋습니다만, 저는 원작소설이 여전히 최고입니다. 그 Gothic한 분위기와 Jack the Ripper 의 런던을 연상시키는 자욱한 안개속의 살인. 흥행은 저조했지만 95-96년에 나왔던 Mary Reilly라는 영화에서 각색된 원작도 좋구요.

다락방 2018-12-02 15:14   좋아요 1 | URL
제가 생각하기에도 원작소설이 짱일 것 같긴 해요. 저는 사실 뮤지컬을 딱히 좋아하진 않거든요. 커튼콜 때 너무 좋긴 하지만, 뮤지컬을 보고싶다는 생각을 잘 안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그냥 책이 짱인 것 같아요. 언제나 어디서나 읽으면서 생각을 하게 해주니까 진짜 책이 짱입니다요!!

매리 라일리는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그 영화를 말씀하시는거죠? 아주 오래전에 그 영화 봤었는데 지금은 전혀 기억이 안나네요. 매리 라일리 영화 포스터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하녀(?)의 복장 입고 있었던 것만 기억나요. 기억은 잘 안나지만 영화 분위기가 내내 음침했던 것은 기억나네요.

얼른 책 읽어봐야겠어요.
트랜님, 책이 있다는 건 참말로 좋죠? 후훗.

transient-guest 2018-12-03 04:10   좋아요 0 | URL
줄리아 로버츠와 존 말코비치가 나온 영화 맞습니다 전기문명이라서 전기가 끊어지면 엔터테인먼트의 90%가 날아가겠지만 책이 있으면 걱정이 없네요 ㅎㅎ

푸른기침 2018-12-03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인 안주가 좀 특이하십니다. 잘 상상이 안되는 조합이지만 나중에 저도 먹어보는 걸로..^^ 저는 왜 자꾸 지금 이순재만 생각나는 걸까요~~~ 여튼 좋은 저녁요

다락방 2018-12-03 18:21   좋아요 0 | URL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좋은 안주가 되는 것입니다... ㅋㅋㅋㅋㅋ
 
미스 플라이트 오늘의 젊은 작가 20
박민정 지음 / 민음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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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고 싫어하고에 관계없이 세상에는 나와야 할 작품들이 있다. 나온 것으로 의미 있는 작품.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 말하여질 필요가 있는 이야기를 했던것처럼, 이 책, '박민정'의 《미스 플라이트》도 내가 흥분하며 너무 좋다고 생각하는 책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 책은 나와야 했다. 작가는 이 말을 이 즈음에 해야했고 그건 충분히 의미 있었다.


항공사 승무원인 유나 의 자살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유나의 아버지는 권위주의적인 군인이었고, 유나는 그런 아버지를 미워했다. 유나에게는 10년간 연애한 남자친구가 있고, 또 그런 그녀의 주변에는 그녀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친구들도 여럿 있다. 어릴 적 자신을 태워다니던 운전병 아저씨 역시 이야기속 주인공인데, 권력과 방산비리와 승무원에 대한 성적대상화가 이 이야기속에 들어 있고 그 과정에서 유나가 자살한 원인을 파고들면서 유나의 성장과정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


어릴 적부터 철이 들어 자신의 아버지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고, 군대란 곳이 어떻게 잘못된 건지도 알았으며, 그래서 유나는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 자기가 미안해하며 살고 있다. 여러 부분에서 코끝이 찡해지는데, 10년간 사귀어온 애인이 자살했다면, 남아있는 연인은 그 일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자식을 잃은 부모는? 그리고 결국 자신이 그 일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동료는? 복잡하고도 현실적인 이야기들이다.



책을 읽다 여러가지 생각을 했는데, 그중 하나는 애인의 죽음이었다. 주한은 유나와 연인관계였고, 그러므로 유나의 죽음을 안다. 주한이 연인을 잃었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도 안다. 그 큰 상실감을 앞으로 어떻게 견뎌내나, 싶은 마음과 함께, 그것을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보다는 나은 것일까, 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나라면, 지금은 옆에 없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누구도, 그러니까 서로의 소식을 전해줄 누군가도 없어서, 그 사람의 신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고 해도 알 수가 없어. 그 점이 너무 아프다. 내가 그나마 안다고 생각하는 건, 그가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것이다' 하는 것. 이건 안다는 것 보다는 짐작에 가깝다. 중요하고 굵직한 일들에 대해서만이라도 소식을 전해듣고 싶어, 신변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듣고 싶어, 아주 오랜 후에는 그의 빛이 사그라들었다는 소식을 내가 모르고 싶지 않아, 중요한 것들에 대한 것만이라도 내게 들려줘요, 라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유나의 아버지와 유나의 관계 때문에, 나는 순전히, 개인적으로 이 책을 지금은 내 옆에 없는 사람에게 읽으라 권해주고 싶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그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같은 게 생겨버렸는데, 그러나 나는 그가 아니므로 이 생각이 틀린 생각일 수도 있다. 나는 방향을 잘못 잡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정확히 어느 부분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니 나는, '아니, 이거 별 감정 없는데'라는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조금쯤은 그에게 가 닿아 어떤 부분을 건드릴수도 있을 거라고, 그게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지만 사두기로 했다. 당신이 살아있고 내가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우리가 만나게 될테고, 그 때 이 책을 주기 위해 준비해두고 싶다.




책 속의 애인도 그리고 철없는 남자사람 친구도, 제자리에서 각자가 맡은 역할을 잘 해내는 이야기이다. 해야 할 말을 하고 있으므로 의미가 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해야 할 말을 해내야한다.







혜진은 낮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아주 오랫동안 영훈은 혜진이 그르렁대며 코 고는 소리를 들어야만 안심하고 잠에 들 수 있었다. 집이 아닌 곳에서 수없는 밤을 맞았지만 단 한 번도 편히 잠든 적 없었다. 영훈에게 잠은 오직 혜진 곁에서, 혜진의 코 고는 소리를 들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처음 자신의 곁에서 잠이 깬 스무 살의 혜진은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다며, 어떻게든 코골이를 고치겠다며 부끄러워했었다. 정작 영훈은 혜진의 코골이를 시끄럽다고 여겨 본 적이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P.60)

짝사랑하는 여자가 의식불명에 빠지자, 그녀를 직접 간병하려고 간호사로 취업한 남자. 하늘색 간호사복을 입은 남자는 매일같이 여자의 몸을 닦아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혜진은 영훈의 어깨에 기대 옥수수 알갱이를 집어 먹으며 에이, 저건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연신 중얼거렸다. 저 여자 불쌍하다. 정말. 어느 날, 코마 상태의 여자는 돌연 임신을 한다. 그녀는 임신에 빠진다. 의식불명에 빠지듯. 남자가 병실에서 여자를 강간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중간에 삽입된 기묘한 색채의 그래픽이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언뜻 암시할 뿐.
-그런데 여보. 그게 사랑일까.
혜진은 그날 밤 뒤척이며 말했다. 목소리에 졸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 영훈은 그 말에 대답하기 위해 한참 생각했다. 생각을 정리한 후 곁에 누운 혜진을 돌아보자 그녀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영훈은 잠든 혜진에게 대답했다.
-그건 강간이지. 착란이거나. (P.59-60)

아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상처를 주는 것 같아요. 멀리 있는 사람들은 상처를 줄 수조차 없죠. (P.123)

주한은 유나가 골라 준 자신의 자취방, 유나가 골라 준 가구들, 유나가 골라 준 옷들을 둘러봤다. 주한을 둘러싼 것들 중에 유나 손을 타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으므로, 유나의 흔적에 새삼 슬퍼할 이유도 없었다. 전부 다 유나의 흔적이었다.
어쩐 일인지 하늘색 티셔츠는 뉴질랜드에 갈 때도 딸려 갔었고, 돌아와서 한동안 유나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를 만날 때도 없어지지 않았다. 대학에 복학한 1년 동안 주한은 유나가 아닌 신입생 후배와 연애를 했다. 그녀는 주한에게서 보이는 유나의 흔적에 히스테릭하게 반응했다. 주한의 존재 자체가 곧 유나의 흔적이었다. 주한의 옷이며 신발이며 가방이며 시게며 전부 유나가 골라 주고 간섭한 물건들이었다. 후배가 요구하는 대로 미니홈피에 남아 있던 유나의 사진과 글을 전부 지웠지만 유나의 흔적은 잊을 만하면 튀어나왔다.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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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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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어느 순간에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온다. 그 후엔, 다시 그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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