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플라이트 오늘의 젊은 작가 20
박민정 지음 / 민음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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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고 싫어하고에 관계없이 세상에는 나와야 할 작품들이 있다. 나온 것으로 의미 있는 작품.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 말하여질 필요가 있는 이야기를 했던것처럼, 이 책, '박민정'의 《미스 플라이트》도 내가 흥분하며 너무 좋다고 생각하는 책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 책은 나와야 했다. 작가는 이 말을 이 즈음에 해야했고 그건 충분히 의미 있었다.


항공사 승무원인 유나 의 자살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유나의 아버지는 권위주의적인 군인이었고, 유나는 그런 아버지를 미워했다. 유나에게는 10년간 연애한 남자친구가 있고, 또 그런 그녀의 주변에는 그녀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친구들도 여럿 있다. 어릴 적 자신을 태워다니던 운전병 아저씨 역시 이야기속 주인공인데, 권력과 방산비리와 승무원에 대한 성적대상화가 이 이야기속에 들어 있고 그 과정에서 유나가 자살한 원인을 파고들면서 유나의 성장과정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


어릴 적부터 철이 들어 자신의 아버지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고, 군대란 곳이 어떻게 잘못된 건지도 알았으며, 그래서 유나는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 자기가 미안해하며 살고 있다. 여러 부분에서 코끝이 찡해지는데, 10년간 사귀어온 애인이 자살했다면, 남아있는 연인은 그 일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자식을 잃은 부모는? 그리고 결국 자신이 그 일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동료는? 복잡하고도 현실적인 이야기들이다.



책을 읽다 여러가지 생각을 했는데, 그중 하나는 애인의 죽음이었다. 주한은 유나와 연인관계였고, 그러므로 유나의 죽음을 안다. 주한이 연인을 잃었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도 안다. 그 큰 상실감을 앞으로 어떻게 견뎌내나, 싶은 마음과 함께, 그것을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보다는 나은 것일까, 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나라면, 지금은 옆에 없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누구도, 그러니까 서로의 소식을 전해줄 누군가도 없어서, 그 사람의 신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고 해도 알 수가 없어. 그 점이 너무 아프다. 내가 그나마 안다고 생각하는 건, 그가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것이다' 하는 것. 이건 안다는 것 보다는 짐작에 가깝다. 중요하고 굵직한 일들에 대해서만이라도 소식을 전해듣고 싶어, 신변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듣고 싶어, 아주 오랜 후에는 그의 빛이 사그라들었다는 소식을 내가 모르고 싶지 않아, 중요한 것들에 대한 것만이라도 내게 들려줘요, 라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유나의 아버지와 유나의 관계 때문에, 나는 순전히, 개인적으로 이 책을 지금은 내 옆에 없는 사람에게 읽으라 권해주고 싶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그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같은 게 생겨버렸는데, 그러나 나는 그가 아니므로 이 생각이 틀린 생각일 수도 있다. 나는 방향을 잘못 잡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정확히 어느 부분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니 나는, '아니, 이거 별 감정 없는데'라는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조금쯤은 그에게 가 닿아 어떤 부분을 건드릴수도 있을 거라고, 그게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지만 사두기로 했다. 당신이 살아있고 내가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우리가 만나게 될테고, 그 때 이 책을 주기 위해 준비해두고 싶다.




책 속의 애인도 그리고 철없는 남자사람 친구도, 제자리에서 각자가 맡은 역할을 잘 해내는 이야기이다. 해야 할 말을 하고 있으므로 의미가 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해야 할 말을 해내야한다.







혜진은 낮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아주 오랫동안 영훈은 혜진이 그르렁대며 코 고는 소리를 들어야만 안심하고 잠에 들 수 있었다. 집이 아닌 곳에서 수없는 밤을 맞았지만 단 한 번도 편히 잠든 적 없었다. 영훈에게 잠은 오직 혜진 곁에서, 혜진의 코 고는 소리를 들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처음 자신의 곁에서 잠이 깬 스무 살의 혜진은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다며, 어떻게든 코골이를 고치겠다며 부끄러워했었다. 정작 영훈은 혜진의 코골이를 시끄럽다고 여겨 본 적이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P.60)

짝사랑하는 여자가 의식불명에 빠지자, 그녀를 직접 간병하려고 간호사로 취업한 남자. 하늘색 간호사복을 입은 남자는 매일같이 여자의 몸을 닦아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혜진은 영훈의 어깨에 기대 옥수수 알갱이를 집어 먹으며 에이, 저건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연신 중얼거렸다. 저 여자 불쌍하다. 정말. 어느 날, 코마 상태의 여자는 돌연 임신을 한다. 그녀는 임신에 빠진다. 의식불명에 빠지듯. 남자가 병실에서 여자를 강간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중간에 삽입된 기묘한 색채의 그래픽이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언뜻 암시할 뿐.
-그런데 여보. 그게 사랑일까.
혜진은 그날 밤 뒤척이며 말했다. 목소리에 졸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 영훈은 그 말에 대답하기 위해 한참 생각했다. 생각을 정리한 후 곁에 누운 혜진을 돌아보자 그녀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영훈은 잠든 혜진에게 대답했다.
-그건 강간이지. 착란이거나. (P.59-60)

아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상처를 주는 것 같아요. 멀리 있는 사람들은 상처를 줄 수조차 없죠. (P.123)

주한은 유나가 골라 준 자신의 자취방, 유나가 골라 준 가구들, 유나가 골라 준 옷들을 둘러봤다. 주한을 둘러싼 것들 중에 유나 손을 타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으므로, 유나의 흔적에 새삼 슬퍼할 이유도 없었다. 전부 다 유나의 흔적이었다.
어쩐 일인지 하늘색 티셔츠는 뉴질랜드에 갈 때도 딸려 갔었고, 돌아와서 한동안 유나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를 만날 때도 없어지지 않았다. 대학에 복학한 1년 동안 주한은 유나가 아닌 신입생 후배와 연애를 했다. 그녀는 주한에게서 보이는 유나의 흔적에 히스테릭하게 반응했다. 주한의 존재 자체가 곧 유나의 흔적이었다. 주한의 옷이며 신발이며 가방이며 시게며 전부 유나가 골라 주고 간섭한 물건들이었다. 후배가 요구하는 대로 미니홈피에 남아 있던 유나의 사진과 글을 전부 지웠지만 유나의 흔적은 잊을 만하면 튀어나왔다.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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