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사이드 - 여성혐오 살해의 모든 것
다이애나 E. H. 러셀.질 래드퍼드 엮음, 전경훈 옮김 / 책세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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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에 의한 여성살해에 대한 끔찍하고도 오랜 역사가 이 책에 담겨있다. 여러 학자들의 논문이 고루 담겨있는데,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일은 힘겹고 감히 추천하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을 읽는 일이 필요하고 유의미하며 읽는 이를 단단하게 만들어줄 거란 생각은 하지만, 읽는 동안의 그 고통을 다른 사람들에게 경험하라 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일까 싶어, '꼭 읽어봐라' 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기대했던 것처럼 책 뒤편에는 남성에 의한 여성살해, 그 끔찍한 일들에 대해 역시나 저항했던 여성들의 긴 역사에 대한 글도 있다. 여성들은 끊임없이 그래서는 안된다고, 그러면 안되는거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행동해왔다. 이 책이 쓰여진 것 역시 그 저항중 하나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던 것들보다 더한 것들이 책 안에 있었고, 위에 쓴것처럼 그래서 힘들었다. 이걸 다 읽어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때문에 결국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올해 가장 잘한 일이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였단 내 말은 괜한 게 아니었다.


차별과 억압, 강간과 살해가 계속되는한, 저항 역시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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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12-31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플래그 색깔이, 책 분위기랑 맞춘 것마냥.....

다락방 2019-01-01 00:18   좋아요 0 | URL
붙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킁킁 ㅋㅋㅋㅋㅋ

공쟝쟝 2019-01-14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정리할 틈이 안생겨서 오늘 겨우 했는데, 정말 이 책은 너무 무서웠어요.... ㅠㅠ 특히 요크셔 리퍼 부분..

다락방 2019-01-14 22:08   좋아요 1 | URL
말 그대로 강간문화가 페미사이드를 불러버린 것 같아요. 읽느라, 이렇게 정리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쟝쟝님. 호흡 좀 고르시고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로 오세요!

공쟝쟝 2019-01-14 22:09   좋아요 0 | URL
10페이지 읽었어요~~ 인제 다시 운동화끈 묶고 고고고~~~

다락방 2019-01-14 22:10   좋아요 1 | URL
저는 133 !! 고고!!
 
달의 영휴
사토 쇼고 지음, 서혜영 옮김 / 해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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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일본이란 나라에 딱히 관심이 있지 않아서, 이름만으로 그 성별을 구분하는 것은 내게는 어렵다. 그러니까 이름이 반드시 남자 이름이라고 해도 여자일 수 있고 여자 이름이라고 해도 남자일 수 있겠지만, 어쨌든 내가 처음 읽는 작가 '사토 쇼고'는 나에게 여성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건 이름에서 준 건 아니었고, 아마도 '달의 영휴' 라는 제목이라든가, 표지의 단발 소녀, 그리고 '차고 기울다' 라는 부제에서 준 것인가? 어쨌든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머릿속에 '여자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 여자가 아닌가?' 하다가, 결정적인 장면에서 '남자 작가다!' 라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 책은 남자'만' 쓸 수 있는 책이다. 성별을 확인해보고 싶은데 알라딘에 들어가 작가 소개를 봐도 사진이 없어.. 그래서 사실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남자 작가다, 이건. 이렇게 징그러운 걸 여자가 쓸 순 없다..



누구하나 공감할만한 인물이 나오질 않아 재미도 없지만, 어쨌든 '루리'라는 27세의 여성이 20세의 '미스미'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이 사랑에 빠지는 것부터 좀 어처구니가 없는데, 유부녀 루리는, 고작 27세이면서, 미즈미와 7살 차이밖에 안나면서 자꾸 자기를 늙었다고 자책해... 이봐요, 당신 스물일곱살이야.

아무튼.


그들이 무슨 그렇게 절절한 사랑을 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어쨌든 루리는 '나는 죽는다면 다시 태어나서라도 널 만나러 올거야', 라고 한단 말이야? 여기까지는 어떤 사랑의 간절함을 표현하려고 한 것 같았는데, 어쨌든 루리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또 '루리'라는 이름으로 살게 되고.  7살을 기점으로 해서 육체가 열병을 앓고나면 전생의 기억들이 확 들이닥쳐서 전생에서 사랑했던 '미스미'를 찾아가려고 하지만, 아무리 자신의 영혼이 성인 루리 라고 해도 몸은 일곱살 아이에게 갇혀 있으니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환생을 이해해주는, 전생의 '남편'을 만나게 되는데, 이 남편은 루리가 지금의 꼬마 모습이기 전에 자신의 아내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가 찾으려는 바람핀 애인을 찾는 것을 돕고자 한다. 그러나 차에 그 꼬마를 태워 운전해 가던 도중 사고가 나 죽고 만다. 물론 루리는 또다시 환생해서 7살이 되면 또 성인 루리 전생의 기억이 찾아들고...를 반복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러니까 루리를 차에 태워 가던 성인 남자, 즉, 전생에서의 남편이 아동성애자로 몰리게 되는 거다.



"……범인은 초등학생 여아자이를 차에 태워 데리고 다녔고 여자아이가 자기 아내라고 주장하면서 경찰의 설득에도 응하지 않았던 거고."

"그래요. 자동차 추격전도 했어요."

"자동차 추격전?"

"있잖아요, 오사나이 씨, 알고 있지요? 마사키는 노조미가 자신의 아내라고 주장한 게 아니라 정확히는 자신의 죽은 아내라고 주장했다고요. 이미 알고 있지요? 나도 올해가 돼서 안 이야기지만 8년 전에 텔레비전이나 신문은 마사키를 소아성애 경향을 가진 정신 이상자로 만들었어요. 체포후 마사키가 어떤 인간이었나에 대해 경찰이나 언론에 증언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아이큐가 높은 아이였는데 도박에 빠져 생활 파탄자가 됐다든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마사키의 언동이 매우 이상했다든가 등." (p.315)



그러니까 요점은,

초등학생을 데리고 부모의 허락없이 이동해서 아동성애자로 몰렸지만, 그 깊은 속내는 그게 아니다, 그는 소아성애자가 아니라, 그 아이가 환생한 아내였던 거다, 라는 거다. 나는 굳이 왜 이런 부분이 있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의 사정을 알 수 없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사실만으로 판단했다가는 오류를 범하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성인 남성이 초등학생을 부모의 허락없이 데리고 갔던 것에 대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이, 그러니까,


'저건 아동성애가 아니라 전부인이 환생한 일이 그들에게 있었을지도 몰라' .. 같은 생각을 해야 하나? 물론, 그것은 납치도 아니고 유괴도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로 납치도 유괴도 아닌데, 그렇게 몰리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되고 멋대로 죄인으로 취급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이 부분이 이런 식으로 들어간 것, 하필이면 아동성애에 대한 것이라니, 나는 작가가 아동 성애에 대한 변을 대신 해주는 것에 찜찜함이 계속 남는거다.



게다가 루리는 자꾸 환생을 반복해서 마지막 일곱살 소녀가 과거의 연인 미스미를 찾아갈 때는 미스키가 60 아저씨다. 보고싶었다고, 드디어 찾았다고 루리는 울음을 터뜨리고 미스미는 올 줄 알았다고 말하는데... 이 지점에서 '아아, 너무나 사랑하면 다시 태어나서라도 반드시 만난다'라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어쩌자고 일곱 살 아이와 할아버지의 만남으로 해놓았는가, 하는 분노와 찜찜함만이 남는 거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전체적으로 아동성애에 대한 변명을 하고자 하는 것 같은 거다. 늬들이 아동성애라고 욕하는 거, 그 안에는 내밀한 속사정이 있을 수도 있어, 라고.



그래서 나는 이 책은 '여자가 쓸 수는 없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성인 여자의 영혼이 어린 일곱살 아이의 몸에 들어가 있어서, '그 남자 옆에 있고 싶다'같은 눈빛을 갖는다고 책 속에 등장한다. 욕망이 드러나는 눈이었다고. 하아- 진짜 ... 그 안에 성인 여성 갇혀있다는 걸 변명 삼아 일곱살 아이의 '한 남자랑 함께 있고 싶은 눈빛' 같은 걸 합리화 시켜버렸어.

다 읽고나니, 이 책은 그냥 남자가 쓴거구나 싶은 거다. 책 표지의 책 소개를 다시 읽어보는데, 역시 성별은 나와있지 않고, 55년생이라고 되어있다. 55년생 할아버지여.... 일곱살 소녀로 환생한 여인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셨네요. 대단합니다.




글쎄 모르겠다. 책이 이미 책으로 나온 순간 그 책은 독자의 몫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그러니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영원불멸의 사랑에서 오는 감동...같은 걸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방금 일본어 공부중인 친구가 구글에서 작가를 검색해 보내주었다. 작가는 남자였다.

이 책으로 나오키상을 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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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8-12-20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탓다고요?ㅋㅋㅋㅋ 나는 기억가지고 환생하면 더 어리고 젊은 남자 만날거같은뎈ㅋㅋㅋㅋ 왜 육십살전남편을ㅋㅋㅋ 하나도 아름답지않은 사랑이야깈ㅋㅋㅋ

다락방 2018-12-20 17:30   좋아요 0 | URL
만나는 건 남편 아니고 애인인데요. 너무 짜증났어요. 일곱살 아이가 할아버지 만나는 거. 뭐하자는거지 싶어요. 그런데 이 책은 상을 탔다고 합니다. 흐음.......
 
달의 영휴
사토 쇼고 지음, 서혜영 옮김 / 해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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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서라도 만나고 싶은 간절한 사랑.. 이라는 것에 대해 얘기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찜찜하고 재미도 없다.
책의 제목이나 표지 때문인지 여자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책 읽으면서 좀 징그러워, ‘이거 분명 남자가 쓴거구만‘ 했는데, 작가소개 봐도 성별이 안나와서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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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8-12-20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 작가 맞아요. 62세...

다락방 2018-12-20 16:42   좋아요 0 | URL
또 지 로망 갖다가 써버렸구먼요. 은교에서 박범신이 그런것처럼... 소름.....

단발머리 2018-12-21 09:48   좋아요 0 | URL
유부만두님 멋져요.
62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것도 알려주시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투 더 워터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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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Drowning Pool '익사의 웅덩이'라는 뜻으로, 봉건 시대 스코틀랜드의 법에 따라 여성 범죄자들을 처형하기 위한 목적으로 판 웅덩이나 우물을 가리킨다. 16-17세기 마녀 재판이 횡행하던 시절에는 마녀로 고발당한 여성의 유무죄를 시험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물에 빠뜨려진 여성은 물속으로 가라앉으면 마녀가 아닌 것으로, 물 위로 뜨면 마녀로 간주되었다. 어느 쪽이든 결국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p.7)



마침 페미사이드를 읽던 중에 고른 책은, 첫 페이지부터 '드라우닝 풀'에 대해 나온다. 잘못이 있든 없든 여자를 죽여버리는 웅덩이. 잘못하지 않으면 물에 빠져죽고 잘못했으면 마녀이므로 처형당하는. 이 얼마나 끔찍하고도 오랜, 여성을 죽이는 참혹한 역사인가.



마을에 있는 드라우닝 풀에서 여자가 자살한 사건이 발생한다. 자살한 여자의 딸조차도 '엄마가 뛰어내린 거다'라고 얘기하지만, 그러나, 그녀가 정말 자살한 것일까? 그녀는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하려 한것일까? 불과 몇 년 전에는 딸의 친구도 드라우닝 풀에서 자살했었다. 이 사건은 그 사건과 같은 것인가? 여자들은 왜 그곳에서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가? 내가 '스스로' 그 물속으로 걸어들어갔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 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인가?


이 과정에서 '에린'이라는 타지역의 경찰이 와 수사에 협조한다. 마을 사람들은 특히나 경찰이었던 마을의 유지-늙고 권력있는 남자-는 그녀를 배척한다. 그녀가 동성애를 저지르다 좌천되었으므로 마땅히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그 전에 어떤 짓을 저질렀는가?



니키, 마크, 쥴스, 에린, 패트릭, 조시, 리나, 헬런 등등, 많은 사람들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다소 산만하게 느껴진다. 이 사람이 저 사람이구나 라고 고정되어 흐름을 따라가기까지 좀 시간이 걸렸던 터라, 나는 이렇게 여러 사람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별로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딱히 좋지는 않다'고 이 책을 읽어나가다가 책장을 덮게 되면 수많은 생각들이 아주 오래 머릿속에서 섞여든다. 


좋은 사람이란 무엇인가?

마을에서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알려진 사람들, 심지어 존경까지 받는 사람이, 그러나 어떤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그 자신을 포함해 다른 몇 명만이 알고 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비난할 수 있는 시점을 가진 사람 조차도 또 누군가에 대해서는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좋은'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인가?


미투 폭로를 비롯해 누군가 성폭행했다는 진실이 바깥으로 드러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착한 사람인데' 라며 가해자를 두둔하거나 가해자의 편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이곤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면을 보여줬던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은 그저 '좋기만' 한 사람일까? 

또한,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겐 강간과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 된다면, 그렇다면 그 사람은 '왜'그런 일을 하는걸까?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변명의 여지가 될까? 

성인 남성이 십대 소녀와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말을 한다. 자신은 미성년자를 성적대상으로 보는 걸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평소에 그런 사람들을 욕했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렇지만 이건 진짜 사랑이었다고. 이것이야말로 진실된 사랑이지만, 세상이 자신을 미성년자 성폭행범으로 몰아갈거고 그렇게 감옥에 가게되면 자신은 끔찍한 취급을 받게 될거라며 두려워한다. 그의 연인이었던 십대 소녀는 자신 역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성인이 되지도 못한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사랑 이란 이름으로 용서할 수 있는 것일까? 자신들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었다면, 왜 그들은 그 사랑이 세상에 드러날까 두려워 한 쪽의 죽음으로 그 관계를 끝내야 했을까?


강간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페미니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강간과 성폭력을 다룬 책들도 많이 읽게 되었는데, 많은 여자들이 자신이 당한 것이 강간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주변에서 지인이 자신이 당한 것을 전혀 강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걸 보고 나는 너무 화가났었는데, 자신이 강간당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넌 강간당한거야' 라고 말하는 것은, 해도 되는 일인가? 나는 아무 말도 못했지만, 이 일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뭐가 복잡해요? 뭐가 그렇게 복잡했는데요?"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실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안 그래도 힘든 부모님한테 짐을 더 얹어드리긴 싫었어."

"그래도......강간당했잖아요. 범인은 감옥으로 가야죠."

"그땐 그런 생각도 못했어. 어렸으니까. 지금 너보다 더. 나이뿐만이 아니야, 난 순진했고, 너무 미숙했고, 어리석었어. 요즘 너희들은 합의가 없으면 무조건 강간이라고 말하지만, 그땐 그런 얘기도 잘 안 하던 시절이었어. 그래서 난...."

"그가 그런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내가 제대로 이해를 못 했던 것 같아. 진짜 무슨 일을 당한건지 몰랐던 거야. 강간이라는 게, 못된 어른이 한밤중에 갑자기 골목길에서 튀어나와서 나를 덮치고 목에다 칼을 대는 건 줄 알았지. 남자애들이 그럴 줄은 몰랐어. 로비처럼 잘생기고, 마을에서 제일 예쁜 여자아이들이랑 어울려 다니는 남학생하고는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지. 우리 집 거실에서 나한테 그런 짓을 하고는 좋았느냐고 물어보는 게 강간일 줄은 몰랐어. 난 그냥 내가 뭘 잘못했나 보다, 싫다고 확실히 말했어야 하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지" (p.459-460)





마찬가지로, 강간의 가해자 역시 자신이 강간의 가해자인줄 모르고 살고 있다는 데에 더 끔찍해졌다. 나는 너에게 자비를 베풀었지, 너는 나를 욕망했잖아, 라는 대응은, 평생을 강간의 피해자로 살며 고통스러워 한 여자에게 참담한 고통이었다. 이 새끼, 평생 강간에 대한 죄책감없이 살아왔구나, 나는 이렇게나 괴로웠는데.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자신이 강간의 가해자인줄 모르는 채로 살고 있을까. 



그리고 십대의 여자아이.

결국 해야할 말을 하는 것이 십대의 여자아이라는 것이 상징적이다. 이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 벌어졌던 일들. 그리고 차마 말하지 못하고 감추어졌던 것에 대해서 '그러면 안되는 거'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십대의 여자아이라는 것은 좀 희망적이지 않은가.



"이해를 못하겠어요. 항상 여자들만 탓하는 이모 같은 사람들, 정말 이해가 안 돼요. 두 사람이 똑같이 나쁜 짓을 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여자라면 무조건 그 여자 탓이죠. 그렇죠?"

"아니야, 리나, 그런 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왜 아내들은 항상 상대 여자를 원망해요? 자기 남편을 원망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자기를 배신한 것도, 평생 사랑하고 지켜주겠다고 맹세한 것도 남편인데, 절벽에서 떠밀어 죽이려면 자기 남편을 죽여야 하지 않아요?"  (p.461)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내가 아무리 정의롭게 살려고 해도 어딘가에서 나는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줄스가 끝까지 언니를 미워했던 것은, 자신의 강간에 대해 언니가 피해자의 탓을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줄스가 아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줄스는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은 채로 언니를 오래 미워했다. 줄스가 미워해야 했던 것은 언니가 아니라, 언니의 남자친구 였는데. 우리는 얼마나 많이, 미움의 상대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을까. 나 역시, 오래 그랬다.

'대니얼'은, 드라우닝 풀에 대한 역사와 마을이 감춘 비밀을 파헤치고 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는 입을 막아서도 침묵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성인 남자가 어린 소녀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면 안되는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 모든 것들을 '옳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서 전적으로 좋기만 한 사람이었을까? 계속해서 자신을 미워하는 동생에게 대화를 시도하려는 사람이긴 했지만,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잘못을 저지르고 살았다.



남자들이 끔찍하게도 여자들을 미워하는 이야기가 책 속에 있다. 전형적으로 여자를 성녀로 만들고 자신의 말을 잘 듣는다면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늙은 남자. 그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런 여자들에게는 가차없다. 잔인하고 끔찍한 남자. 그러나 그런 남자가 비단 그 하나뿐일까?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세대가 다른 여자들이 연대한다.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희망은, 그런 식으로 찾아오는 게 아닐까. 


작가의 전작, [걸 온 더 트레인] 보다 나는 이 책이 더 좋았다. 이 책 한 권으로 '폴라 호킨스'는 여성작가만이 할 수 있는 말들을 다 해냈다. 가스라이팅, 페미사이드, 성폭력, 연대, 가부장제, 성소수자, 성차별까지. 그리고 어긋난(혹은 지나친) 사랑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게 되는지도. 책장을 덮고나서야 이래서 여성작가의 책을 읽어야 하는 거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툭, 툭, 생각해야 할 것들이 떠오른다. 이 책이 그렇게했다. 다우닝 풀로 몸을 던진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이 모든 이야기들을 작가는 풀어냈다. 



'다이애나 러셀'과 '질 래드퍼드'의 [페미사이드]를 읽다보면 나오는 사례들이 이 책안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실제 바람핀 게 아닌데도 자신의 오해만으로 여자를 죽이는 남자, 사랑했지만 죽이는 남자. 여성을 죽이는 끔찍한 역사는 이토록 오래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연구하고 책으로 써내는 사람들이 있고, 이야기의 힘을 빌어 그 역사를 다시 꺼내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페미사이드]의 결론은 어떻게 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인투 더 워터]에서처럼 희망적일 거라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세대의 여자들이 서로를 이해하며 연대하고, 더이상 침묵하지 않겠다고 발언하면서, 그러면서 세상은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이곳은 수백 년 동안 리비 시턴, 메리 마시, 앤 워드, 지니 토머스, 로런 슬레이터, 케이티 휘태커, 그리고 이르모 얼굴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왜, 어쩌다가 긇게 됐는지, 그리고 그들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런 의문을 던지기보다는 입막음하고 침묵시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침묵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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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8-12-16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멋진 리뷰 감사합니다. 페미니즘은 아주 사소한(?) 폭력의 레이더를 켜주는 것 같아요..

다락방 2018-12-16 20:35   좋아요 0 | URL
쟝쟝님 1월에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갑시다. 그리고 [혁명의 영점]은 우리 둘이 동시진행 어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압박 맞아요 ㅋㅋㅋㅋㅋ)

공쟝쟝 2018-12-16 20:53   좋아요 0 | URL
그거 천페이지 넘지않아요 ?ㅋㅋㅋ 찌잉..🥺

다락방 2018-12-16 21:03   좋아요 0 | URL
이렇게 말씀드리면 기분이 좀 나아지실지 모르겠지만 696 페이지라고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18-12-16 23:06   좋아요 0 | URL
크크 고고

공쟝쟝 2018-12-16 23:08   좋아요 0 | URL
혁명의 영점은 2월에...

다락방 2018-12-17 02:48   좋아요 0 | URL
오케!

단발머리 2018-12-19 12:5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동시진행 마구 들이대는 다락방님~~~~
진정시키는 쟝쟝님~~~~~~~~~
멋지십니다, 두 분 다!!!

다락방 2018-12-19 14:31   좋아요 0 | URL
쟝쟝님의 댓글에 힘입어 2월에는 어차피 셋트로 구성되어진 혁명의영점+캘리번과 마녀 를 같이가면 좋을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욕심욕심)

단발머리 2018-12-19 14:44   좋아요 1 | URL
그것 참 좋은 생각입니다.
세트는 같이 읽어줘야 제 맛이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쟝쟝님 바쁘시겠당!!!

공쟝쟝 2018-12-19 15:38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저 가랑이 찢어집니다~||!!

다락방 2018-12-19 15:45   좋아요 1 | URL
쟝쟝님, 아직 2월 안됐으니 좀 기다려봅시다 ㅋㅋㅋ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단발머리 2018-12-19 15:47   좋아요 1 | URL
이렇게 쟝쟝님은 또 다시 다락방님의 꾀임에 넣어가게 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To be continued.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 완벽한 페미니즘이라는 환상
이라영 지음 / 동녘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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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의 연설문) '아버지의 여행가방'에는 또 하나의 장소가 등장한다. 바로 아버지의 서재다. 서재는 주로 '아버지의'장소다. 돌아다니고 읽는 사람은 아버지이며, 집 밖의 세계를 전달하는 사람도 대부분 아버지다. 파묵의 아버지가 파리의 호텔방에서 서구에 대한 동경을 담은 글을 쓸 때, 파묵의 어머니는 어디에 있었을까. 내가 어릴 때도 '여행가방'을 가진 사람은 '아버지'였다. 엄마에게는 대신 장바구니가 있었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절대다수가 여성)에게는 기저귀 가방이 필요하다. 화가의 가방과 운동선수의 가방이 다르듯, 가방이라는 작은 공간에는 가방 주인의 이동 경로와 주요 업무가 담긴다. 여성이 고급스럽고 값비싼 가방을 갖는 것에 사회가 유난히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이유가 단지 가격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식구들을 먹이는 장바구니나 아이를 돌보기 위한 기저귀 가방이 아닌 오로지 자신을 위한 공간과 이야기를 소유하는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다.(p.200)




내가 살고 있는 집에는 화려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지만 '나의 서재'라는 공간이 있다. 방 하나의 벽면을 책으로 채워두었는데, 어제 우리집에 방문한 회사 동료가 내 서재를 보고서는 '우와-' 하고 감탄했다. 내 짐작으로는 500-700권 정도의 책이 그 방안에 있을 것 같은데, 책을 많이 사는 이곳 알라딘 사람들에게야 많지 않은 수이겠지만, 책을 안읽는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확실히 나는 책을 많이 가지고 있다.


위의 200쪽, 아버지의 서재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나는 새삼 내게 서재가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내가 책을 읽는 사람이라서,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다. 나의 조카는 어릴 적부터 '이모 방엔 책이 많다'는 것을 보며 자랐다. 게다가 내가 여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아홉살 여자 조카아이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떤 여행은 조카랑 함께 하기도 했다. 조카에게 이런 나는 '돌아다니고 읽는 사람'이다. 조카에게 '돌아다니며 읽는 사람'은 이모이다. 아버지가 아니다.



나는 내가 이런 모습으로 조카에게 보여질 수 있다는 것에 오늘 크게 감사했다. 내가 의식적으로 '이런 사람이 되어 조카에게 보여주자'고 한 행동들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나는 조카에게 읽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바깥 세상에 대해 들려주는 것도 내가 하는 일이다. 서재를 가진 사람이 내 조카에게는 아버지가 아닌 이모다. 그동안 의식하지 않았던 이 사소한 일이, 오늘은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는 계속, 읽고 돌아다니고 세상에 대해 들려주는 그런 이모가 되어야지.



지금의 나는 비혼이고 아마 앞으로도 출산과 양육이 내 일이 될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지만, 만약 이런 내가 '엄마'가 되었다면, 내 아이에게 '읽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엄마'일 것이다. 아이는 '엄마의 서재'를 집에서 늘상 보게될 것이다. 아아, 나는 선택하지 않았지만, 내가 엄마가 되기를 선택했었다면, 아아, 얼마나 멋진 엄마가 되었을까! (너무 멀리 나갔나?)




읽고 쓰기에 대해 생각한다. 계속해서 나는 읽고 쓰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읽고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말하기.



이 책,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는 페미니즘 감별사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따끔한 충고 같은 책이다. 그말인즉슨, 이미 꼴페미인 나에게는 굳이 읽지 않아도 좋은 책이란 뜻도 된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고 이미 내가 생각한 바가 그대로 다 쓰여진 책이라고 해도 또 한 번 읽어 나를 단단하게 무장하는 일은 필요할 것이다. '내가 다 아는 얘기잖아' 라면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지만, 이렇게 나는 '이모의 서재'앞에 멈추게 되니까.



게다가 '나는'으로 시작하는 글쓰기에 대한 권유는 무척 반가웠다.

내가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많이 쓴다는 것을, 다른 분의 리뷰 덕에 알았더랬다. 이렇게나 '나는'을 많이 쓰는 사람이라니, 그 리뷰에서는 나의 글 한 편에 실린 '나는'을 세어보기까지 했다. 그 리뷰를 읽고서야, '아, 내가 '나는'이란 말을 자주 썼어?' 하고 알게 되었는데, 이라영은 얘기한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남성적 '나'들이 보편적 인간을 대표하는 세계에서 묵살당한 '나'들의 재현과 목소리는 정치적 행위다. '나는'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상대적으로 차단당한 존재들이 '나는'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더욱 확장하길 갈망한다. 자신의 쾌/불쾌가 사회적 옳음/그름과 일치해온 사람일수록 제 기분에 의지해 사안을 판단한다. 여자들이 감정적이라고? 여자의 감정이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과 자리를 벗어나면 부정적인 의미로 감정적이라는 오명을 덧씌운다. 여자의 감정은 정치화되지 못하고 해석당한다. 여성의 연대와 목소리를 '정치 행위'로 보지 않는 게 문제다. 기존의 가부장-여성착취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진보'는 '반동'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정치와 폭력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들은 기존에 폭력으로 규정되지 않던 문제를 폭력이라 말하고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다른 방식으로 정치 행위를 하며 연대를 보여주고 있다. (p.10-11)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모의 서재에 책들을 쌓아두고 읽고 보내기를 유지할 것이며, '나는'으로 시작하는 글도 역시 계속해서 쓸 것이다.






어떤 여성이 페미니스트라고 밝혔을 때 자신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페미니스트 검증으로 포장한다. ‘진짜 페미니스트‘인지 검증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르르 하고 지켜본다. 한 손에는 확대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아주 작은 꼬투리라도 집어 올릴 수 있는 핀셋을 든 채 언제라도 ‘실수‘를 포착할 준비를 한다. 탈탈 털어 작은 먼지라도 잡아내면 ‘진정한‘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한다. ‘진짜‘ 혹은 ‘진정한‘에 대한 집착은 진짜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반대다. 누구도 진짜가 아니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p.5)

적어도 ‘워마드는 진짜 페미니즘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오해‘받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 형성되었다. 오해를 살까 걱정되어 조심하도록 만드는 그 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는 두려움을 이용해 궁극적으로 여성을 지배하는 방식이다. 메갈리아를 조목조목 비판하지 않는다면, 나아가 워마드가 얼마나 문제인지 낱낱이 밝히지 않는다면, 진정한 페미니스트의 자격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해명을 하거나 특정 집단과 선을 긋는 발언을 하도록 은근히 요구하는 상황이 과연 옳은가. (p.7)

균형 잡힌 객관적 시각으로 여겨지는 어떤 중립적인 태도는 이러한 권력의 불균형을 쉽게 간과한다. 균형 잡힌 사람들의 균형 감각은 희한하게도 여성의 말과 행동 앞에서만 빛나게 활발하다. 너무 균형이 잘 잡혀서, 광활한 페미니즘의 역사와 투쟁을 미처 알기도 전에 페미니즘의 문제점부터 먼저 배운다. 이미 형식상의 성평등 제도가 완비되고 오랜 투쟁의 역사가 쌓인 일부 나라들에서 불거진 ‘부작용‘을 과하게 부풀려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 훈계하는 일이 잦다. (p.9)

남성적 ‘나‘들이 보편적 인간을 대표하는 세계에서 묵살당한 ‘나‘들의 재현과 목소리는 정치적 행위다. ‘나는‘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상대적으로 차단당한 존재들이 ‘나는‘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더욱 확장하길 갈망한다. 자신의 쾌/불쾌가 사회적 옳음/그름과 일치해온 사람일수록 제 기분에 의지해 사안을 판단한다. 여자들이 감정적이라고? 여자의 감정이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과 자리를 벗어나면 부정적인 의미로 감정적이라는 오명을 덧씌운다. 여자의 감정은 정치화되지 못하고 해석당한다. 여성의 연대와 목소리를 ‘정치 행위‘로 보지 않는 게 문제다. 기존의 가부장-여성착취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진보‘는 ‘반동‘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정치와 폭력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들은 기존에 폭력으로 규정되지 않던 문제를 폭력이라 말하고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다른 방식으로 정치 행위를 하며 연대를 보여주고 있다. (p.10-11)

성차별을 걸러내고 유지되는 관계는 거의 없다. 심지어 ‘페미니스트‘와 마주 앉아 있을 때도 그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을 실감할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람은 나쁘지 않은데"라는 식으로 차별을 ‘이해‘하려 애쓰며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한다. 마땅히 분개해야 할 일에 분개하지 못한 가슴이 우울해지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많은 이들이 권력의 진정성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그러면서 동시에 저항하는 사람의 진정성을 증명하려 한다. 진정한 페미니스트 또는 선량한 시민임을 증명하도록 강요받지만, 증명한다고 이해받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해는 불공정하게 돌아간다. (p.28)

차별받는 사람이 친절하길 원하는 마음은 여성을 ‘펴오하적인 언어‘속에 가두려 한다. 저항의 ‘올바름‘을 강조하며 은근슬쩍 ‘저향‘을 무력화하려는 전략이다. 여성의 역사를 지우듯이 여성의 말에는 ‘맥락‘이 사라진다. 앉아서 소변을 보기만 해도 페미니스트가 되는 남성이 있는 반면, 평생에 걸쳐 제 몸으로 젠더 이슈를 직접 다뤄온 사람들이 한번 ‘실수‘라도 하면 기다렸다는 듯 물어뜯는 태도가 과연 옳을까. 페미니스트의 과실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여성의 성공은 개인의 능력이지만, 한 여성의 실수는 모든 여성의 실패로 만들려는 남성연대 사회의 비겁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p.36-37)

페미니스트를 혐오하는 이들은 진짜의 조건과 자격을 계속 발명한다 "저들은 진짜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목청 높이는 이들은 자신의 여성혐오를 메갈리아/워마드 비판이라 우긴다. 한편 페미니스트도 ‘착한 여자 콮플렉스‘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이러한 재판에 이의를 제기하기보다는 ‘진짜‘가 되어 남성 연대의 혐오를 받지 않으려는 페미니스트도 있다. 자신은 메갈리아처럼 상스럽지 않은데 같은 페미니스트로 묶일까봐 초조하고 두려운 ‘페미니스트‘는 앞장서서 메갈리아 진압에 나선다. 나는 메갈리아와 다르다고 선을 긋는다. 경멸의 의미로 ‘트페미‘라 부르며 트위터를 비롯한 온라인의 여성 목소리를 비하한다. (p.38-39)

페미니스타가 ‘내 안의 여성혐오‘까지 찾느라 자기검열에 시달리는 동안 어떤 이들은 페미니스트를 구별하고 평가하려 한다. ‘잘하는지 못하는지‘, ‘어디 네가 하는 말이 맞나 들어보자‘따위의 태도로 임하는 경우가 있다. 스스로를 ‘객관적 관찰자‘에 놓는 습관에 길들여진 이들은 자기반성이 결여된 태도로 판관의 위치에서 발화한다. 자꾸만 교훈을 주려 한다. 이를 이성적이거나 객관적인 태도라고 착각한다. ‘단지 페미니즘을 떠나‘, ‘젠더 이슈를 넘어‘와 같은 수사는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 이 자리의 문제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서 뭘 떠나고 뭘 넘는단 말인가? (p.47)

누군가 인간으로서 기본적 권리를 주장할 때 그 권리가 자신을 불편하게 한다면 그동안 ‘특권‘을 누려웠다는 뜻이다. 조심과 불편은 정의롭게 분배되지 않았으며, 안전은 특권화되었다. "어디 여자가" 라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말은 여성살해까지 그 고리가 이어져 있다. 언어 하나하나를 붙들고 집요하게 싸워야 하는 이유다. 그것이 익명으로 사라진 수많은 ‘oo녀‘들의 ‘원통한 혼‘과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이다. (p.67)

나름 공정성을 기한다는 이유로 여성의 행동에 대해 ‘만약 남자가 그렇게 했어도‘의 식으로 접근하는 태도가 항상 공정한 답변을 끌어올릴까. ‘그렇다‘라는 답을 얻을 수 있다면 훨씬 편할 것이다. 모든 문제를 반대로 뒤집어서 답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약자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동하지 않던 역지사지가 그 반대의 상황에서는 잘 작동한다. 차별의 얼굴은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적이지 않다. 그보다 훨씬 복잡한 정체를 숨기고 있다. (p.93-94)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이 남자들 중에서 제우는 소영의 몸을 구매하지 않으며(과거에 매매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그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남성이지만, 결정적 순간에 비겁해진다. 그는 어떤 면에서 이 영화 속 인물들 중 가장 ‘온화한 폭력‘을 행사한다. 제우가 소영과 근사한 식사를 하고 비싼 호텔에서 데이트를 청할 때 그는 소영에게 가족이 없음을 상기시킨다. 기다리는 가족이 없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여자였다. 남편과 자식이 없는 여자는 주인이 없는 집으로 취급받는다. 제우는 이 약점을 활용하고 반강제로 수면제를 먹게 만들어 소영이 살인 누명을 쓰는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다. (p.127-128)

‘강간문화‘는 1970년대 미국의 여성운동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여성을 강간하는 것이 정상적인 행위로 간주되고 심지어 기대되기까지 하며, 여성에 대한 남성의 태도와 여성 자신 및 다른 여성에 대한 여성의 태도 등이 위의 문화적 가정에 의해 착색되는 문화적 분위기를 의미한다." (p.156)

(미주:헤스터 아이젠슈타인, 《현대여성해방사상》, 한정자 옮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9, 91쪽)

남자들은 여자가 필요하다. 여자의 노동력과 여자를 통한 쾌락은 남성 중심 사회의 중요한 삶의 동력이다. 여성이 필요하지만 존중해주면 지배자가 될까봐 두렵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무시한다. 남성은 여성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이지만 여성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수동적이다.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는 ‘욱해서, 홧김에‘라고 하지만 여성과이ㅡ 관계를 위한 감정노동에 대해서는 ‘표현을 못한다‘는 말로 넘어간다. ‘표현을 못한다‘는 그 ‘표현‘은 언제나 전적으로 고마움, 애정,부탁, 미안한, 부끄러움 등이다. 이러한 감정표현은 여성화되어 있다. (p.171)

‘정절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성폭행 피해 여성의 자살은 사회적으로 권장되었다. 이들의 자살은 사회적으로 부추겨진 타살이다. 여성이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살한다지만, 실은 여성의 명예가 아니라 남성이나 집안을 위해 타살당한다. 이는 단지 사적 관계를 지배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고 국가를 통치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는다. 은장도로 제 몸을 찔러 죽은 그 수많은 여자들의 목소리는 없다. 그들은 죽었고, 말할 수 없으며, 남은 남성들이 죽은 여성의 정절을 숭배한다. ‘열녀‘는 여성 학대의 산물이다. (p.173-175)

멜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다루는 장르다. 사람에게 반하고, 끌리고, 만남을 시도하고, 조금씩 자신을 보이며 다가가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감정, 내게로 다가왔다가 다시 떨어져나가는 타인, 그 사람을 만나기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나. (p.204)

(그림)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1621)



‘자신의 성폭행 피해를 고소하고 긴 재판 끝에 승리를 얻어낸 화가 젠틸레스키는 피해자로 남지 않는 여성의 강렬한 모습을 그렸다.‘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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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8-12-13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모의 서재..ㅎㅎㅎ

다락방 2018-12-13 08:51   좋아요 0 | URL
고모의 서재,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