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있는
문목하 지음 / 아작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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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만 해도 나는 한국소설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말도 했었는데 요즘에는 한국 소설 읽는 게 참 좋다. 애초에 나의 모국어로 쓰여진 걸 읽는 재미와 기쁨은 번역서가 결코 줄 수 없는 거니까. 게다가 한국 여자작가들의 작품은 다 저마다의 매력으로 좋은데, '문목하'는 이야기 쪽에서 매우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와, 우리나라 여성작가들 글 잘쓰네, 라고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며 감탄했다. 며칠전에 '한국문단은 죽었다'고 말하던 누군가도 떠올랐다. 어떤 책을 읽어왔기에 또 어떤 책을 읽을 생각을 하길래 한국 문단이 죽었다는 거야. 이렇게나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구먼!!


별 다섯의 0.5 정도는 사실 응원과 기특한(?) 마음 같은 걸로 덧붙이게 된건데, 뭐 아무래도 좋다.



윤서리는 초능력을 가진 비원과 초능력을 가진 경선산성의 싸움이 못마땅하다. 분명 이 깊은 싱크홀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윤서리의 능력을 얘기하는 건 이 책의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말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사랑이 어떤 부분에서는 해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이야기한다.


사랑은 모든 것의 답이 될 수도 없고 모든 것의 길이 될 수도 없겠지만, 아주 많은 선택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당신이 살아있기를 원하는 마음, 당신이 잘 지내기를 원하는 강렬한 마음은, 모든 선택들을 다시, 다시 뒤로 돌리게 만들기도 하니까. 내가 지금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그것을 감당할만한 타인의 안녕에 대한 바람이 대부분의 이들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 책의 윤서리가 그랬고 정여준이 그랬고 최주상이 그랬다.



읽다보면 '애쉬톤 커쳐' 주연의 영화 『나비 효과』가 자꾸 생각나는데, 그 영화에서 주인공 애쉬톤 커쳐는 다른 이들에게 일어난 불행을 막기 위해 결국은 자신의 태어나지 않음을 선택하기로 한다. 여기까지만 하겠다.




이 책은 헐리우드에 판권이 팔렸다고 한다.


할리우드에 판권 팔린 토종 SF


기사 중간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가장 로맨틱한' 이야기라는 어느 독자의 평은 적확했다. 읽으면서 서너번쯤 눈물을 닦았다.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하고 또 이렇게 풀어갔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차례 했고, 그래서 와, 우리나라 여자 작가들 글 잘쓰는구나, 했다. 작가가 출판사 아작을 알게 되어 원고를 투고했다는데, 작가의 그 시도와 용기가 감사하다. 이런 글이라면 투고해야함이 마땅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가영이 …… 윤서리를 저기 살려두려고 왜 그렇게까지 견디는 거야?"

정여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최주상을 보았다. 그리고 먼 바깥에 환영처럼 스쳐 지나가는 윤서리의 모습을 보고,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겠어요?"

정여준은 미소 지었다.

최주상이 그를 완전히 처음 보는 낯선 이로 느낄 만큼 찬란한 미소였다.

"왜겠어요."
- P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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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20-11-24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덧글이 하나도 없다니 ㅠㅠ 저도 중반에 흐느끼면서 읽음 ㅠㅠ 너무 재미있었네요. 글 참 잘쓰고 소재도 이렇게 잘 풀어나가다니.. 아 이 여운!

다락방 2020-11-25 07:57   좋아요 0 | URL
여운 장난 아니죠? 위의 인용문처럼 ˝왜겠어요?˝ 너무나 압권인 것....
저 이 작가의 다른 책(해마.. 뭐였는데 ㅋㅋ)도 사뒀는데 아직 안읽었어요. 그 책도 어렵지만 좋다고 하더라고요!
 
백화점에는 사람이 있다 - 상품 뒤에 가려진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
안미선.한국여성민우회 지음 / 그린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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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백화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화장실을 같이 쓰고 싶지 않다고 한 적이 없는데, 왜 고객용 화장실과 노동자들용 직원용 화장실이 따로 있는걸까? 부끄럽게도 나는 화장실이 따로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게다가 한 건물에 있는건데 왜 고객용 화장실과 직원용 화장실은 질적으로 달라야 하나? 이거 만들면서 저거 만들텐데 왜 달라? 나는 백화점 직원들과 에스컬레이터도, 엘리베이터도 같이 쓰고 싶다. 그들이 어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려가 초조하게 뛰어 다니기를 원하지 않는다. 눈에 쉽게 잘 띄는 정수기에서 물을 뽑아 먹으면서, 그걸 직원들은 먹어서는 안된다는 걸 몰랐다. 백화점이 20:00-20:30 에 문을 닫으니, 당연히 그 긴 근무시간을 한 명이 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히 2교대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아, 나는 얼마나 무심한 사람이었던가.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에 유명했던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가 떠올랐다. 신애라는 백화점 직원이었고, 차인표는 그 백화점의 임원이었는데 그 안에서 둘의 사랑이 싹텄고, 불꺼진 백화점 안에서 그들은 키스를 했었는데.

아 그것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작품이었던가.

그 때 백화점 노동자들은 그 드라마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헛웃음이 나왔겠지.

여성 노동자가 그렇게 온갖 노동과 고통과 부조리와 불합리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데, 그걸 보지 못하도록 가려두고 낭만으로만 덧씌워 로맨스 드라마를 만들었었구나....


이 책은 2016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지금은 백화점 노동자들의 현실이 좀 달라졌을까? 그러나 얼마전에 백화점에 가 화장실에 들렀을 때, 내가 거기에서 유니폼 입을 직원을 본 기억은 없다.



백화점이여, 당신들은 직원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왜 그들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게 하며, 그들의 돈으로 매출을 맞추게 합니까. 왜 그 고통으로 자살하게 합니까. 당신들에게 그 많은 백화점의 여성노동자들은 어떤 의미입니까. 왜 이딴 거 써붙입니까.





그렇게나 크고 깨끗하고 화려한 건물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후진 공간들이 따로 존재한다는 게 너무 역겹다.

나 역시도 백화점에 있는 노동자들을 보기 보다는 향기 좋은 꽃밭을 보고 살았던 것 같다.

물건도 사람도, 그리고 CCTV도 참 많은 백화점에는,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든 풍경들도 있었습니다. ‘앉아 있는 백화점 노동자‘, ‘안경을 낀 여성노동자‘, ‘고객용 화장실을 이용하는 백화점 노동자‘입니다. 앉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앉을 의자조차 없다는 것이 못내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직장 건물은 화려하고 근사한데, 알고 보면 ‘의자 하나 주지 않는 직장‘이라니 말입니다. 화장품이나 액세서리 매장이 많은 백화점 1층에서는 ‘안경 낀 여성노동자‘또한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백화점은 시력이 좋은 사람만 뽑는 것도 아닐 텐데, 거짓말처럼 안경 낀 사람이 이렇게 없다니, 이상한 일 아닌가요? 물기 한 방울 없이 깔끔한 ‘고객용‘ 화장실뿐만 아니라,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에서도 우리는 백화점 노동자를 만나 볼 수 없었습니다. - P9

대개 남성인 백화점 정규직 관리자들은 판매직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에게 이렇게 욕했다. "너 나이 먹고 잘리면 마트 가서 캐셔밖에 못해. 너희는 나이 먹으면 쓸모없는 사람들이야." 지독한 욕설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은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나이 먹는 것을,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협박을 받으며 일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이가 적건 많건, 여성노동자에 대한 무시에서 나온 발언에 불과하다. 소위 ‘여성 일자리‘라고 불리는 일이 있고, 여기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높다. 그 편견과 싸우지 않으면 자존감마저 지키기 어려운 세상이다. - P43

노동을 하러 들어간 일터에서 그녀들은, 자신의 노동 안에 모욕과 멸시에 대한 감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차갑고 경멸적인 태도, 외모와 나이에 대한 평가, 편견이 담긴 질문, 폭력적인 술 문화, 갑을 관계를 경험함으로써 말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애초부터 그녀들에게 주어진, ‘여성‘, ‘비정규직‘이라는 자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P46

백화점 판매직으로 일하는 대다수의 노동자는 여성이고, 이들은 긴 근무시간으로 인해 일과 가정생활을 양립하기 어렵다. 서울 지역 유통 판매직 여성의 수면시간은 6시간이었으며,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하루에 1.9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관련 연구들은 유통 판매직 여성노동자의 자녀 돌봄 시간이나 수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밝히고 있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여성이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거의 전담하고 있으므로, 여성노동자는 장시간 임금노동,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으로 3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근무시간은 그나마 공식적인 것이지만 일과 생활을 함께 꾸려 가기 위해 이들이 겪는 시간 압박과 과중한 노동은 가시화되지 않는다. - P52

화장은 물론 액세서리와 손톱까지 관리 규정하는 지침은 실제로 창고를 오가며 육체노동을 하는 백화점 판매직 여성노동자에게 불편을 가져온다. 창고 일을 하고 매장을 오가면서 지저분해진 손톱을 의식하고 지적받으며 다시 손질하는 것은 일상적인 스트레스를 준다. 그녀들은 백화점의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동분서주하며 타인의 시선에 비칠 외모를 거듭 확인해야 한다. 고객 응대 외에도 매장 청소, 재고 정리, 상품 진열, 전산 작업 등 다양한 일을 해야하는데, 딱 맞는 옷, 짧은 치마, 높은 구두 등은 일하기에 불편한 복장이다. - P91

매번 진상 고객은 있지만 심한 날이 있어요. 매장에서 한 20년 일하신 선배님이 항상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 진상 고객들은 어디서 대접 못 받고 와서 우리한테 화풀이하는 것 같다고, 우리들 아니면 누가 상대해 주겠냐고, 그냥 불쌍한 마음으로 생각하자고, 이렇게 안 하명 링 오래 못한다라고 이야기하시거든요. 그만큼 힘들고 더러운 꼴 많이 보니까,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 선배님은 20년 하신 거예요. 그래서 손님 대하는 첫마디부터가 달라요. 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해요. 경력이란 게 있는 것 같아요. (한아름, 백화점 잡화 매장) - P143

단순히 ‘웃는다‘는 것 그 자체, 그 웃음으로부터 매출을 끌어내는 데에만 집중할 뿐, 백화점은 노동자의 행복한 노동 조건에는 큰 관심이 없다. ‘지금부터 고객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의 용모와 복장을 점검합시다‘라는 어구 옆에느 ㄴ꽃을 들고 활짞 웃고 있는, 원피스 차림의 여성의 사진이 있었다. ‘잊지 않으셨죠? 지금부터 고객과 함께하는 공간입니다‘라는 어구가 적힌 포스터에는 사람의 머리 대신 하트가 얹혀 있는 직원의 모습이 그려져 잇었다. 직원의 공간에서 고객의 공간으로 한 발자국 내디디면, 서비스라인의 흰 금을 넘어서면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모습은 언제나 ‘웃고 있는 하트‘일 뿐이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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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겟타 2019-09-23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의 리뷰를 읽고 예전에 시사인에서 제가 봤었던 기사가 생각나서 검색해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이 기사에서도 백화점을 ‘고객에게는 서비스를 받는 장소겠지만, 판매 직원에게는 평가와 감시, 처벌의 장소이다.‘이라고 하더군요.
2013년 기사였는데요. 지금은 크게 달라졌을까요? 다락방님이 읽으신 책을 보니 아닌 것 같네요.
거기서도 여성노동자들은 이중의 압력을 받구요.
우리의 편리함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니 보이는 것만 봐왔던 제 자신도 부끄러워지네요.

다락방 2019-09-24 08:48   좋아요 1 | URL
네, ‘미스터리 쇼퍼‘라고 손님으로 가장해서 직원들의 서비스를 체크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서비스에 점수를 매겨서 상부에 보고하는 사람이요. 진짜 손님처럼 물건을 사기도 해서 누가 미스터리 쇼퍼인지 직원들은 알 수 없고, 본사에서 보내는 사람 백화점에서 보내는 사람도 있어서 일 년에 여러차례 만난다는데, 얼마나 스트레스 겠어요 ㅠㅠ
게다가 그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해봤자 창고에 다름아니고 그마저도 제대로 쉬는 시간도 보장되지 않고요. 저는 고객들과 같은 화장실,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를 쓰지 않는다는 것에 너무 놀랐어요. 돌이켜보니 정말로 그곳에서 직원을 만난 적이 없는거에요! 나라는 인간이 이렇게나 무심했구나, 깨달았답니다. ㅠㅠ
 
나방 사냥꾼 베라 스탠호프 시리즈
앤 클리브스 지음, 유소영 옮김 / 구픽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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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하버 스트리트]보다 더 재미있다.


돈 많고 은퇴한 사람들이 밤마다 술을 마시는 마을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어쩌면 그렇게 매일을 여유롭게 살 수 있는지, 어쩌면 그렇게 집 안을 완벽하게 꾸며놓을 수 있는지 그런 환경에 놓이지 않은 베라는 궁금하며 질투심도 일지만, 그들 개개인에 대해 알게 됐을 때 많은 것들을 숨기고 살고 있다는 걸 보게 된다. 그래, 사람이 그렇게 완벽한 삶을 살 수 없지.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것 같은 그들이었지만, 심지어 부부사이에서도 그들은 비밀을 갖고 있었다.


사건과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 뚱뚱한 독신 여성 베라가 자신의 일을 하는 것, 그리고 후배 여성과 후배 남성과 일을 같이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무척 좋다. 냉정함을 홀리에게 주고 따뜻함을 조에게 준 것도 유쾌한 설정이다.

사건의 중심과 주변에 있는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삶을 보여주는 것도 이 책의 장점. 읽으면서, 아 이 맛에 소설을 읽는 거야, 생각했다.




베라 시리즈는 나오는 족족 다 읽어봐야지.


집 옆쪽으로 구식 부엌 정원이 딸려 있었다. 과일 덤불에는 망을 씌웠고, 식물이 나란히 싹트고 있었다. 모든 것이 깔끔했다. 수전은 정원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있었다면 분명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카스웰의 솜씨다. 그들은 이 집을 사랑했고, 이 정도의 시간을 집에 투자할 수 있다면 분명 은퇴했을 것이다. 정원 너머로 언덕은 가파르게 바위산으로 이어졌다. 잠시 서있으니 양 우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P22

"나이절 루카스입니다."
"소문은 다 들으셨겠지요."
"음, 수전 새비지, 퍼시 노인의 딸이 간밤에 전화해서, 카스웰 저택 하우스시터가 도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개울 옆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보려고 위층에 올라가 보기도 했습니다." 베라는 그를 한 대 때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청년에게도 그를 위해 슬퍼하는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 P73

베라는 자기도 조금만 잘 갈고 닦으면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아침마다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는 시간을 들여 얼굴에 분칠하는 수고를 감당할 만큼 가치 있는 남자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 P75

애니는 자기도 모르게 대화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두려워했다. 고통이나 질명이라는 현실이 아니라, 자신이 없이도 세상이 돌아간다는 자체가 무서웠다. 아직도 그녀는 어둠에 삼켜져 갑자기 사라지는 악몽을 꾸곤 했다. - P120

나이 든 여자가 탁자에 앉아 있었다. 혼자였고, 같이 온 사람은 안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고 잇는 것 같았다. 뺨에는 둥글게 분을 발랐고, 립스틱은 입술 경계를 넘어 파우더까지 번져 있었다. 옷은 밝은색이었다. 파란 코트와 분홍색 스카프, 그녀는 탁자 위에 헝겊 인형을 들고 아기처럼 어르며 말을 걸고 있었다. 자동차 창문이 닫혀 있어서 뭐라고 하는지 들을 수는 없었지만, 홀리는 인형을 계속 탁자 위에서 아래위로 어르다가 아기처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는 노인에게서 당황스러운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치매였다. 어쩌면 알츠하이머일 것이다. 이렇게 도로 가까이 혼자 내버려두면 안전하지 않으니, 보호자가 근처에 있을 것이다. 홀리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왜 저런 노인을 밖에 돌아다니게 할까? 어디 보호소에 있는 게 노인에게 더 편하지 않을까? 하지만 홀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노인의 편안함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P123

자신이 이렇게 잔인하게 타인을 재단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고, 자기도 저렇게 약하고 정신 나간 노인으로 생을 마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갑자기 구역질이 나도록 역겨웠다. - P123

홀리는 카모마일 차를 끓여 거실로 향했다. 사각형의 방에는 물건이 별로 없었고, 홀리는 그게 좋았다. 이 집 융자 보증금을 대느라 몇 년 저축을 쏟아 부었지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그 돈이 한 푼도 아깝지 않았다. 이곳은 업무의 긴장에서 벗어나 차분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정적이 좋았고, 자동차 소음이 없어서 좋았고, 새로 칠한 벽의 날렵한 모서리와 다림질해서 반듯하게 접어놓은 침대 시크가 좋았다. 도전적인 곳이 경력을 위해 좋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북동부로 옮겼고, 이 아파트로 이사 온 뒤로는 떠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 P132

"요즘도 안 좋은 남자하고 사귀나요?" 베라는 대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짐작하려고 해 보았지만, 이제는 그냥 이야기에 휩쓸려 수사와 관계가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애니는 딸이 외지에서 일한다고 했고, 베라는 굳이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았다.
"학교에 다닐 때 선생 중 한 사람과 관계를 가졌죠. 선생은 해고당했어요."
"그건 학생 잘못이 아닙니다!" 베라는 받아쳤다. "특히 미성년일 때는. 유일한 잘못은 남자한테 있어요!" - P137

"이렇게 멀쩡한 척하는 것도 압박 아닌가요?"
로레인은 피식 웃었다. "모든 부부는 뭔가 가장하고 살아요. 항상 정직하면 미쳐 버리고 말겠죠. 성공적인 이성 관계는 선의의 거짓말과 사소한 아첨으로 이루어지지 않나요? 파트너가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상대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해 주는 거예요."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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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탕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7
이승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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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에 가기 위한 수단 혹은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고 오래전에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목적지가 어디인지만 계속 염두에 두고 있으면, 버스나 기차를 타든 중간에 잠시 쉬어가든, 걸어서 오래 걸리든, 어쨌든 우리는 가고자 하는 바가 확실하다면 어떻게든 그곳에 가게 될거라고. 그러나 이렇게 어쨌든 닿기 위해서라면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나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축에 속한다고 스스로를 생각하는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지를 모르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모르되, 지금 여기는 아닌 것 같은 상태.


이승우는 자신의 책 《캉탕》에서 등장인물 '핍'의 행동을 가져와, 그가 정착하기 전에, 머무를 곳을 찾기 위해 했던 것이 항해라 얘기하고 있다. 여긴 아닌 것 같아, 이건 아닌 것 같아, 그렇다면 이렇게 해볼까, 라고 생각해 배를 탔고, 그 배는 어느 곳에 정착했고, 정착해보니 여기가 바로 내가 머무를 곳이다, 라는 생각에 배에서 내렸다. 나는 결국 여기에 오기 위해서 떠돌아 다녔구나, 내가 떠돌아다닌 건지는 몰랐지만, 나는 이곳을 찾기 위해 배를 탄거였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내가 머무를 곳, 정착할 곳을 찾았다면, 그제야 자신이 항해를 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나는 정착해있다. 그러나 언제든 떠날 준비도 되어있다. 나는 이곳이 내가 정착할 곳임을 안다. 그러나 낯선 곳이 저 어디에 있다는 걸 알고, 충분히 낯선 곳을 마주치고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나 당신은 어쩌면 항해중인 걸 수도 있다. 아직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채로, 닿아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채로, 그런 채로 대부분 잔잔한 바다 위에서 때로는 파도가 공격하는 곳에서 항해중인 걸 수 있다. 항해는 오래 걸릴 수도 있다. 항해는 뜻밖의 일로 이름 모를 곳에 정착할 수도 있다. 핍은 배가 멈춘 곳에서 나야를 만나 그곳에 정착하고 남은 삶을 살게된 것처럼, 당신 역시 어느 순간 배가 멈춘 곳에서 나야를 만나 배에서 내려, 그곳에 터를 잡을 수도 있다. 나야와 밥을 먹고 나야의 노랫소리를 듣고 나야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아, 나는 긴 항해를 마쳤구나, 비로소 정착했구나, 생각하며 고요한 낮과 밤을 보낼런지도 모른다.



이승우의 캉탕은 문장 때문에 읽는 맛이 있다. 나는 이승우가 언제나 건드리는 자신 안의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것도 싫어하지 않지만, 그보다는 그의 문장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 아니야, 문장이 아니라 주인공이 가진 저 깊은 곳에, 다른 사람에게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개인의 은밀한 비밀 같은 것을 사랑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캉탕에도 이승우 고유의 문장이 있고 개인의 은밀한 비밀이 저 안에 숨겨져 있다. 불완전한 인간이 있고 불완전한 삶이 있다. 그리고 정착한 사람이 있고 항해하는 사람이 있다. 정착하고자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되질 않아 지도에서도 찾기 힘든 저 먼 캉탕으로 가는 사람이 있고, 캉탕으로 가서도 하루에 몇 시간을 걷는 사람이 거기에 있다. 나 역시 지도에도 나오지 않은 먼 곳으로 가 몇 시간이고 걷고 싶다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생각했다. 걷다가 지치면 해변가에 철푸덕 주저앉아도 좋을테고 해변가의 술집으로 들어가 자리잡고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셔도 좋을테다. 생각들을 쏟아내기 위해 걷고 또 걷는 일을 몇날이고 반복하다보면, 아마 해변가 술집엔 내 고유한 자리가 생기겠지. 그렇게 걷기 위해 갔다가 어쩌면 나도 그곳에 정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 나는 나도 몰랐는데, 내가 정착하고 있는줄 알았는데, 사실은 떠돌고 있었구나, 뒤늦게 깨달으면서.



당신을 생각한다. 당신은 아직 항해중인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은 항해중이고, 당신은 아직 세이렌의 노래 소리를 듣지 못했고, 당신은 아직 배에서 내리지 않았고, 당신은 아직 스스로가 항해중인 걸 알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캉탕에 닿는 시기와 당신이 캉탕에 닿는 시기에는 어쩌면 시간차가 있을 수 있겠지. 나와 당신이 캉탕에 이르게 된 이유와 방법은 달랐을지언정, 결국은 배에서 내려 만나게 될 수도 있겠지. 우리가 닿지 않을 사람들이라면, 내가 다시 항해를 시작하게 될 즈음에야 당신이 비로소 캉탕에 닿을 수도 있고. 나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다시 항해할 수도 있고 당신은 여기에 오기 위해 그동안 길고도 긴 항해를 했구나, 할 수도 있겠지. 결국 당신과 내가 각자의 배를 타고 항해를 한다면 그 먼 바다에서 당신과 나는 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한 명이 캉탕에 이미 닿아 있다면 다른 한 명을 기다린다면 언젠가 배는 흐르고 흘러 캉탕에 닿게 되지 않을까.


선술집, 해가 잘 드는 곳에 이미 당신의 자리는 마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앞자리에서 문이 열릴 때마다 돌아보면서, 책장을 넘기고 있을지도 몰라.

사실 나는 정착해 있는 사람이니까.







그는 핍을 보고 싶었다. 바다에서 내린 후 다시는 배를 타지 않은 사내. 바다에서 내렸으므로 정박했고, 정박했으므로 바다에 타지 않은 남자. - P36

한중수는 J가 본 핍을 보지 못했고 J는 한중수가 본 핍을 보지 못했다. 시간은 조르바를 에이해브로 만들 수도 있고 에이해브를 조르바로 만들 수도 있다. 아니, 시간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20년 전의 핍과 20년 후의 핍 사이에 달라진 것이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에게는 조르바로 인상 지어진 사람이 다른 이에게는 에이해브로 기억되지 말란 법이 없다. 핍은 한 사람이 아니다. 어떤 순간의 누군가의 핍이 있다. 어떤 순간의 횟수와 누군가의 숫자를 곱한 만큼 많은 여러 핍이 있다. 어쨌든 그가 만난 핍은 J가 말해준, J의 말에 의해 인상 지어진 핍이 아니었다. - P45

J는 대체로 한중수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는데, 그것은 한중수가 J에게서 자기 목소리를 듣기 때문이었다. 혹은 자기 목소리와 같은 목소리만을 듣기 때문이었다. 설득은 설득하는 사람의 권위보다 설득당하는 사람의 형편과 의지에 더 의존한다. 말하는 사람이 효과적인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효과적인 말로 듣기 때문에,그 경우에만 설득이 일어난다. 심지어 스스로 결정한 것을 추인받거나 이미 한 선택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외부의, 권위를 가진 목소리를 설득하는 자로 불러오기도 한다. 가령 스승의 어떤 교훈을 삶의 지표인 것처럼 언급하는 착실한 제자에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스승의 수없이 많은, 더러는 충돌하는, 다른 맥락 때문에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는 여러 가르침들 가운데 제자는 어떤 특정한 충고만을 스승으로부터 받은 중요한, 더러는 유일한 가르침으로 언급한다. - P48

그는 가진 것이 없으므로 언제나 먼저 싸움을 걸어야 했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가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싸움밖에 없었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진 자는 그 상태를 평화라고 부른다는 것을 그는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가진 자가 자기 것의 일부를 내주는 일은 절대로 인어나지 않았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가진 것이 없는 가즌 가진 것이 없는 채로 살게 된다는 것을 그의 경험이 가르쳤다. 그러니까 가진 것이 없는 자가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서는 가진 자가 하지 않는, 할 필요가 없는, 치열한, 치사한, 때로 공허한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121

책을 통해 세상의 넓이와 문학의 매력을 맛본 청년에게 밭에 거름 주고 바다에서 김 뜯어 오고 하는 머슴 노릇이 좀 갑갑했을라고. 실제로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어. 오랫동안 고래잡이배의 선원 노릇을 하며 살았는데, 어느 해 배가 정박한 항구에서 만난 여자에게 빠져 살림을 차리고 그곳에 정착했어. 그러고는 다시 배를 타지 않았지. 그 양반, 정착지를 찾기까지 떠돌아다닌 거라고 해야 할까. 정착지를 찾지 못해 떠돌아 다닌 거라고 해도 되겠지. 떠돌아다녀야 정착할 곳을 찾을 수 있다는 교훈도 아주 억지스럽지는 않을 테고 ……. 정박할 때까지는 바다에서 내리지 않는다, 이게 그 양반이 내게 한 말이야.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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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22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허랜드 - 여자들만의 나라 Rediscovery 아고라 재발견총서 5
샬롯 퍼킨스 길먼 지음, 황유진 옮김 / 아고라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여성주의라는 것은 '이것은 어째서 이런가, 뭔가 부조리하다' 라는 깨달음에서, 의문에서 시작한다. 왜 그런가 물어도 '오래 그래왔어'라는 대답밖으 들을 수 없었으므로 여성들은 페미니즘을 알게 되고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 같다.  여러차례 언급한 적 있지만, 페미니스트 철학자 윤김지영 선생님은 천주교도로서 성당에 가 미사를 드리면서 왜 여자만 미사보를 쓰는건지, 그걸 안쓰면 안되는지에 대해 주변에 물었을 때, '원래 여자만 쓰는 거야' 라는 답을 들었고, 그 대답이 성에 안차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나로 말하자면, '최명희' 의 [혼불]을 시작하면서 내내 쌓아뒀던 것들이 폭발했다. 대체 왜 여자는 예로부터 이런 취급을 받아야 했는가, 왜 피해자이면서 숨죽여 지내야 했는가, 왜 멸시를 당하면서도 침묵해야 하는가. 그렇게 나는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샬롯 퍼킨스 길먼은 결혼을 하고 전통적인 성역할을 강요하는 남편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려버린다. 산후우울증도 여기에 한 몫을 했고. 그러나 치료를 위해 찾아간 정신과에서는 그녀에게 지적활동을 하지 말고 육아와 가사노동에만 집중하라는 처방을 내린다. 이 처방은 그녀를 더 나쁘고 약한 상태로 몰아갔다.


아마 이런 경우 많은 여자들이 점차 시들어가고 더 약해졌을 것이다. 1900년대였으니까. 그러나 샬롯 퍼킨스 길먼은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그만두겠다 말하고 남편과 이혼한다. 자신이 아픈 이유가 뭔지 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잇었던 탓이다. 자기에게 처방을 내린 의사가 자신을 제대로 진찰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내가 왜 아픈줄 알아? 그건 지적활동을 해서가 아니라, 지적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해서야! 

의사가 시키는대로 자기 자신을 침묵 속에 놓아두기 보다는 말을 하고 싶어하는 그녀는, 그 일을 계기로 <누런 벽지>라는 자전적 소설을 썼다. 그리고 이 글의 처음에 언급했던 페미니즘, 그러니까 이 모든 일들이 이상하지 않은가, 부조리하지 않은가, 를 생각했던 그녀는 그것을 고발하는 소설을 써낸다. 이 책, [허랜드]가 그것이다.



'허랜드'는 말그대로 '여자들만 사는 나라' 이다. 미국인 남성 세 명이 여자들만 있는 나라라는 말에 호기심과 기대를 가지고 찾아간다. 일단 여자들만 있다는 곳이니 완성되지 않았겠지, 그곳은 많은 것들이 부족할거야, 여자들의 질투와 시기가 가득하겠지, 젊은 여자들 많겠지, 라는 뻔한 편견으로 그곳에 도착했는데, 오, 이곳은 천국이었다. 여자들만 있는 곳에서 여자들은 스스로 아이를 낳는 법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여자들만 살면서 의식주를 현명하게 해결하며 게다가 나라의 모든 여자들이 굉장히 지적인거다. 이 모습은 이 미국인 남자들이 결코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고, 눈앞에 보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곳에서 그곳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익히며 미국의 문화와 언어 역시 교환하던 그들은, 자시들이 살고 있는 미국을 욕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많은 부조리한 것들에 대해 침묵하려 하지만, 허랜드에서 살고 있던 여자들의 '당연한' 물음들 앞에 자신들이 살아왔던 남성위주의 사회가 얼마나 보잘것 없었는지, 얼마나 불공평 했었는지를 드러내게 된다. 




"일부 고등 곤충 가운데에도 그런 예가 있는데, 우리는 그걸 단위생식, 즉 처녀생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녀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생식이란 말은 알겠는데 처녀는 뭐죠?"

그녀의 질문에 난감해 하는 테리 대신 제프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처녀란 짝짓기를 하는 동물 가운데 아직 한 번도 짝짓기를 하지 않은 암컷을 부르는 말이에요."

"그렇군요. 처녀라는 말이 수컷에게도 적용되나요? 아니면 수컷한테는 다른 용어를 쓰나요?"

그는 같은 용어를 쓰지만 수컷에게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하고는 급히 질문을 회피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런가요? 그렇지만 짝이 없으면 짝짓기가 불가능하잖아요. 그럼 짝짓기 전의 암수 모드는 처녀 아닌가요? 미국에는 수컷 혼자서 생식이 가능한 생명체가 존재하나요?"

그가 대답했다. "내가 아는 바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p.83-84)



하하하하. 물론 이 당연한 의문은 몹시 통쾌했고 너무나 쉽게 여성을 멸시하고 혐오하는 것을 드러내는 방법이라 감탄하며 읽었다. 그런 한편, 이미 백년도 훨씬 더 전부터 누군가는 '처녀'란 말이 '아직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을 뜻하는 용어로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했건만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씁쓸했다. 샬롯 퍼킨스 길먼이 그 오래전부터 '이거 이상하잖아!' 부르짖었건만, 그러나 아직까지 '처녀 비행', '처녀작' 같은 말을 운운한다는 것은, 샬롯 퍼킨스 길먼의 외침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게 아닌가. 여성을 혐오하는 문화는 너무나 힘이 셌다. 아주 오래전부터 여자들은 이렇게나 문제점을 지적했건만!!



"우리는 고기는 물론이고 우유를 얻기 위해 소를 키우거든요. 소의 우유는 식단에서 빠질 수 없는 필수 음식이죠. 우유를 모아서 유통하는 사업의 규모도 상당하고요."

그녀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그린 소를 가리켰다. "농부들이 소의 젖을 짭니다." 그러고는 우유 통과 의자를 그리고 몸짓으로 소 젖을 짜는 모습을 재연해 보였다. "그러고 나면 우유 배달원이 도시로 가져와 운반하지요. 모두가 아침이면 집 앞에 놓인 우유를 받아볼 수 있답니다."

소멜이 진지하게 물었다. "소는 새끼가 없나요?" (p.88)



역시 길먼은 허랜드 여자의 입을 빌어 묻는다. 소젖은 소 새끼가 먹는 거 아니야?



미국 남자 세명은 각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제프'는 여성을 천사 대하듯 우러러보고 '테리'는 여성을 성적대상화 하는 데만 급급하며 소위 빻음의 절정을 달린다. 이 이야기속의 화자인 '밴'은 그들 사이의 중립이라고 칭해지지만, 가장 객관적 시선을 가졌다고 스스로도 자부하지만, 그러나 그가 '남자로 태어나 남자로 살아온' 세월이 어디가겠는가. 그는 중립을 자처하지만 영낙없이 남자다. 그나마 다른 게 있다면 허랜드의 장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는 거, 아내가 섹스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설득을 하되, 강제하지 않는 거. 그렇다. 테리는 그곳에서도 강간을 시도한다. 누가 남자 아니랄까봐, 발정기가 아닌데 섹스를 해야하는 걸 이해못하는 아내의 방에 몰래 들어가 강간을 시도하는 것. 그러나 그는 허랜드의 건강한 여자들의 손에 맞고 묶인다. 테리는 어떤 여자라도 남자가 정복해주기를 원하는 법이라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다. 허랜드에서 일 년을 살면서 자신이 알고 있던 고정화된 여성성을 가진 여자들이 아닌 여자들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버리지못했다. 그나마 혐오와 숭배 가운데에 있던 '밴'은 이 일에 대해서 테리의 강간 시도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여자에게도 잘못은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아내는 특히나 더 여성성이 강해 보였다면서.



테리는 강간을 하지 못했고 아내로부터 거절 당했다. 게다가 다른 여자들로부터도 감시당한다. 이 때 그가 분노에 차 허랜드 여자들을 멸시하며 내뱉는 욕이 '노처녀' 이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여자들에게 내뱉는 욕이 노처녀라니, 그게 그가 생각하는 여자들에 대한 욕이라니. 그가 어떤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지 않은가. 내가 누누이 '어떤 걸 욕으로 쓰는 지가 그 사람을 말해준다'고 하는 것은 사이언스...



'밴'은 '엘라도어'랑 결혼해서 우정을 나누고 있다. 이런 사랑이 있다는 것, 이렇게나 큰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애의 당연한 섹스에 대해서, 그리고 양성이 사는 사회에 대해서 늘 엘라도어에게 말했기 때문에 엘라도어는 미국이라는 곳, 양성이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 자기들처럼 한쪽 성만 있는 곳보다 더 나은 곳일거라고 당연히 전제한다. 그렇게 그들 부부가 미국으로 가면서 이 소설은 끝맺는다. 아흑-

엘라도어는 미국에 가서 어떤 세상을 보게 될까. 그녀가 마주하게 될 세계는 그녀에게 어떤 생각을 심어주게 될까. 그녀가 미국땅을 밟고 양성 사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녀는 아마도 이 책의 작가인 샬롯 퍼킨스 길먼처럼, 신경쇠약에 걸리게 되지는 않을까.  그녀에게 이 때 내려질 처방은, 그렇다면, 그녀가 원래 살던 행복한 그곳으로, 남성이 없는 그곳으로 가야하는 게 아닐까.



이 책에는 본편인 <허랜드>를 포함해, 자전적 소설인 <누런 벽지>도 실려있다. 작가의 실제 상황, 삶을 반영한 것인데, 글 쓰는 걸 싫어하는 남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숨어서 글을 써야 하는 여자, 처방이라고는 쉬고 산책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요하는 의사 남편과 살면서 그 처방대로 하다가 단단히  미쳐버린 여자가 나온다. 이 소설을 샬롯 퍼킨스 길먼은 지적활동을 하지 말라는 처방을 내린 자신의 정신과 의사에게 보냈다는데, 그 의사는 그 소설을 읽었을까? 읽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남자라면> 역시 짧은 단편인데, 이 소설을 읽노라면 샬롯 퍼킨스 길먼은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이 사회의 부조리함을 깨달았던 게 아닐까 싶다. 아내가 갑자기 남편인 남자가 되어 남자 옷을 입고 나가면서 옷에 주머니가 많은 것부터 편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기능성 좋은 옷이라니! 게다가 모자! 실용성을 강조하는 남성들의 모자들이 있는데, 여자들은 왜 모자에 깃털 같은 걸 꼽고 다니는가.  게다가 경제력은 어떻고! 이 모든 걸 1860년 미국에서 태어난 샬럿 퍼킨스 길먼은 알고 있었고 이렇게 글로써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진작에 깨우치고 의문을 갖던 여성의 입을 막으려 했던 정신과 의사라니. 너무 해롭다. 이렇게 글로써 모든 걸 고발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 지적 활동을 하지 말라는 처방이라니, 너무나 한심하다. 그런 처방에 굴하지 않고 단호히 앞으로 나가 글을 계속 썼던 샬롯 퍼킨스 길먼은, 아, 얼마나 위대한가.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모임으로 이렇듯 좋은 소설을 또 읽게 되어 너무 좋다. 기억해야 할 좋은, 지적인, 날카로운 여성 작가가 있다는 사실은 너무 큰 기쁨이다. 샬롯 퍼킨스 길먼의 이름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녀들이 본질적으로 지닌 모성애가 문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우리가 말하는 ‘여성스러움‘이 현저히 부족했다. 이 점 때문에 나는 이내 우리가 너무도 좋아하는 ‘여성스러운 매력들‘은 사실 전혀 여성스럽지 않으며 남성성이 반영된 결과물일 뿐임을 확실히 깨닫게 됐다. 즉 여자들은 남자들을 즐겁게 해줄 의무가 있어 그런 특징들이 발달된 것이고 이러한 특징들은 여성 스스로 자아실현을 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P105

"여자들의 나라가 존재한다고 쳤을 때 그곳 여자들 어떤 모습일 것 같아?"
우리는 많은 여자들이 필연적인 한계, 단점들, 사악함 등을 가졌을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확신했다. 우리는 그들이 여성 특유의 허영에만 매달려 과도한 장식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중국 의상보다 더 완벽한, 진화된 의상을 입고 있었다. 매우 아름답지만 늘 실용적이며 위엄과 훌륭한 감각을 갖춘. - P141

궁전들이, 보물들이, 눈 덮인 산맥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그녀에 대한 내 감정이 커져갔다. 나는 그녀처럼 뛰어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재능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물론 그녀는 최고의 수목 관리인이었지만 그런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은 그야말로 모든 측면에서 놀라웠다는 뜼이다. 내가 이런 여자들을 많이 알고, 그녀들과 가깝게 지냈다면 그녀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이곳 여자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남달랐다. - P158

"과거를 존중하지 않는 거예요? 선조 어머니들의 생각과 믿음 말입니다. "
그녀가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왜 존중해야 하는 거죠? 그들은 이미 떠났고 게다가 우리보다 아는 것도 많지 않죠. 우리가 그들보다 나은 사람들이 아니라면 선조들뿐 아니라 우리 다음 세대를 이끌 아이들에게도 우리는 가치 없는 사람들일 거예요."
이 말을 들은 나는 진정 깊은 생각에 빠졌다. 아마도 남들에게서 들었기 때문인지 나는 늘 여자들이 본래부터 보수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곳 여자들은 진취적인 기상을 가진 남자들의 도움 없이 과거를 지나쳐 미래를 향해 대담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 P192

나는 어떤 독실한 사람이 전능한 하나님을 길게 내려오는 옷을 입고 긴 머리와 긴 수염을 한 노인으로 제멋대로 묘사한 그림을 떠올렸다. 무척 솔직하고 순수한 그녀의 질문을 듣고 보니 이러한 신의 모습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실제로는 고대 히브리 인들의 신이며, 고대 가부장적 사회에서 자연히 그들은 신의 모습에 가부장적 사회의 지도자인 할아버지의 모습을 덧입혔고, 우리는 단지 그들의 가부장적인 신의 모습을 이어받았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 P196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성을 빼고는 여러분에게 줄 게 없어서 정말 바보처럼 느껴져요."
셀리스가 불쑥 질문했다. "미국 여자들은 결혼하기 전에는 성이 없나요?"
제프가 설명했다. "물론 있어요. 처녀 때의 성이 있죠. 그녀의 아버지 성을 딴 거예요."
알리마가 질문했다. "그럼 아버지한테 따온 성은 어떻게 되는거죠?"
테리가 대답했다. "그건 버리고 남편의 성으로 바꾸는 거죠, 내 사랑."
"바꾼다고요? 그럼 남편은 아내의 처녀 적 성을 갖게 되나요?"
- P205

상상할 수 있는 지구상의 온갖 민족들의 결혼을 떠올려보면 여자의 피부가 검든, 붉든, 노랗든, 갈색이든, 희든, 여자가 무지하든 교육을 받았든, 순종적이든 반항적이든 상관 없이 인류 역사가 정립한 결혼 전통이 그녀 뒤에 버티고 서 있다. 이러한 전통이 여자를 남자에 종속시킨다. 남자는 자기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여자는 남편과 그의 일에 적응해간다. 국적의 경우에도, 이상하고 간교한 속임수로 여자는 자신이 태어난 곳, 사는 곳과 상관 없이 자동적으로 남편의 국적을 따르게 된다. - P209

"미국에서는 결혼을 하면 정해진 기간이나 아이를 낳는 것과는 전혀 상관 없이 바로 그걸 하기 시작한단 말인가요?"
내가 씁쓸해 하면서 말했다. "물론이죠. 단지 부모이기만 한 게 아니고 서로 사랑하는 남자, 여자니까요."
엘라도어가 뜻밖의 질문을 했다. "얼마나 오랫동안요?"
조금 짜증이 난 내가 그녀의 말을 되풀이했다. "얼마나 오랫동안이냐고요? 그야 평생 동안이죠."
그녀는 여전히 마치 화성인 애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무언가 매우 아름다운 생각이네요. 다른 모든 생명체들은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위해 그 강렬한 행위를 하는데, 당신 나라 사람들은 더 고귀하고 순수하며 숭고한 목적을 위해 한다고요. 당신이 말한 내용에 비추어보건대 이런 관계가 인성을 가장 고귀하게 하는 효과를 낳는 거네요. "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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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8-31 14: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뭐랄까... 샬롯 길먼 이야기를 읽으면서 천재란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다른 여자들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참고 살아야했던 그런 면들이 있잖아요. 샬롯은 이게 아닌거 같아, 할 때 그걸 박차고 일어선다는 느낌이 들었달까요.
머리가 엄청 좋고 용기가 백배인 사람.
전 그런 사람들이 역사에 흔적을 남기는 천재라고 생각해요.

잘 읽고 또 배우고 갑니다, 다락방님~
역시 페미니즘 페이퍼는 다락방님 페이퍼가 제 맛입니다!!

다락방 2019-09-02 11:27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저도 그 생각했어요! 이 사람은 보통이 아니다! 라고 말이지요.
지적 활동을 하지 말란 말에 하지 않으면서 끙끙 앓다가 사라지는 많은 여자들이 분명 있었을거에요. 그런데 샬롯은 ‘그거 아니란 말이야!‘라고 부르짖었던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에 아내도, 엄마의 역할도 그만두겠다는 것도 어려웠을 테지만, 그 후에 책으로 하고자 했던 바를 이야기할 수 있었다니, 진짜 대단하다 싶어요.
게다가 책의 내용도 그렇잖아요. 애초에 잘못된 게 보였고 그게 이상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걸 알리려는 의도가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잖아요. 진짜 너무 고맙고 짜릿해요! 그런 한편, 이렇게 진작부터 잘못된 걸 지적한 여자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여성혐오 문화가 이어져온다는 건, 그 여자들의 목소리를 얼마나 억압했던건가 싶기도 하고요. 하아-

정말 좋은 책을 이번 기회에 잘 읽었어요, 단발머리님. 이제 시몬 베유도 읽어야 하는데 아직 책이 도착을 안했으니 조금 게으름을 피우겠습니다. 후훗.

유부만두 2019-08-31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으셨군요, 역시 다락방님!

다락방 2019-09-02 11:27   좋아요 1 | URL
제가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