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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에는 사람이 있다 - 상품 뒤에 가려진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
안미선.한국여성민우회 지음 / 그린비 / 2016년 8월
평점 :
나는 백화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화장실을 같이 쓰고 싶지 않다고 한 적이 없는데, 왜 고객용 화장실과 노동자들용 직원용 화장실이 따로 있는걸까? 부끄럽게도 나는 화장실이 따로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게다가 한 건물에 있는건데 왜 고객용 화장실과 직원용 화장실은 질적으로 달라야 하나? 이거 만들면서 저거 만들텐데 왜 달라? 나는 백화점 직원들과 에스컬레이터도, 엘리베이터도 같이 쓰고 싶다. 그들이 어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려가 초조하게 뛰어 다니기를 원하지 않는다. 눈에 쉽게 잘 띄는 정수기에서 물을 뽑아 먹으면서, 그걸 직원들은 먹어서는 안된다는 걸 몰랐다. 백화점이 20:00-20:30 에 문을 닫으니, 당연히 그 긴 근무시간을 한 명이 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히 2교대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아, 나는 얼마나 무심한 사람이었던가.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에 유명했던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가 떠올랐다. 신애라는 백화점 직원이었고, 차인표는 그 백화점의 임원이었는데 그 안에서 둘의 사랑이 싹텄고, 불꺼진 백화점 안에서 그들은 키스를 했었는데.
아 그것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작품이었던가.
그 때 백화점 노동자들은 그 드라마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헛웃음이 나왔겠지.
여성 노동자가 그렇게 온갖 노동과 고통과 부조리와 불합리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데, 그걸 보지 못하도록 가려두고 낭만으로만 덧씌워 로맨스 드라마를 만들었었구나....
이 책은 2016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지금은 백화점 노동자들의 현실이 좀 달라졌을까? 그러나 얼마전에 백화점에 가 화장실에 들렀을 때, 내가 거기에서 유니폼 입을 직원을 본 기억은 없다.
백화점이여, 당신들은 직원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왜 그들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게 하며, 그들의 돈으로 매출을 맞추게 합니까. 왜 그 고통으로 자살하게 합니까. 당신들에게 그 많은 백화점의 여성노동자들은 어떤 의미입니까. 왜 이딴 거 써붙입니까.
그렇게나 크고 깨끗하고 화려한 건물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후진 공간들이 따로 존재한다는 게 너무 역겹다.
나 역시도 백화점에 있는 노동자들을 보기 보다는 향기 좋은 꽃밭을 보고 살았던 것 같다.
물건도 사람도, 그리고 CCTV도 참 많은 백화점에는,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든 풍경들도 있었습니다. ‘앉아 있는 백화점 노동자‘, ‘안경을 낀 여성노동자‘, ‘고객용 화장실을 이용하는 백화점 노동자‘입니다. 앉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앉을 의자조차 없다는 것이 못내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직장 건물은 화려하고 근사한데, 알고 보면 ‘의자 하나 주지 않는 직장‘이라니 말입니다. 화장품이나 액세서리 매장이 많은 백화점 1층에서는 ‘안경 낀 여성노동자‘또한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백화점은 시력이 좋은 사람만 뽑는 것도 아닐 텐데, 거짓말처럼 안경 낀 사람이 이렇게 없다니, 이상한 일 아닌가요? 물기 한 방울 없이 깔끔한 ‘고객용‘ 화장실뿐만 아니라,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에서도 우리는 백화점 노동자를 만나 볼 수 없었습니다. - P9
대개 남성인 백화점 정규직 관리자들은 판매직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에게 이렇게 욕했다. "너 나이 먹고 잘리면 마트 가서 캐셔밖에 못해. 너희는 나이 먹으면 쓸모없는 사람들이야." 지독한 욕설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은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나이 먹는 것을,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협박을 받으며 일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이가 적건 많건, 여성노동자에 대한 무시에서 나온 발언에 불과하다. 소위 ‘여성 일자리‘라고 불리는 일이 있고, 여기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높다. 그 편견과 싸우지 않으면 자존감마저 지키기 어려운 세상이다. - P43
노동을 하러 들어간 일터에서 그녀들은, 자신의 노동 안에 모욕과 멸시에 대한 감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차갑고 경멸적인 태도, 외모와 나이에 대한 평가, 편견이 담긴 질문, 폭력적인 술 문화, 갑을 관계를 경험함으로써 말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애초부터 그녀들에게 주어진, ‘여성‘, ‘비정규직‘이라는 자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P46
백화점 판매직으로 일하는 대다수의 노동자는 여성이고, 이들은 긴 근무시간으로 인해 일과 가정생활을 양립하기 어렵다. 서울 지역 유통 판매직 여성의 수면시간은 6시간이었으며,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하루에 1.9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관련 연구들은 유통 판매직 여성노동자의 자녀 돌봄 시간이나 수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밝히고 있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여성이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거의 전담하고 있으므로, 여성노동자는 장시간 임금노동,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으로 3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근무시간은 그나마 공식적인 것이지만 일과 생활을 함께 꾸려 가기 위해 이들이 겪는 시간 압박과 과중한 노동은 가시화되지 않는다. - P52
화장은 물론 액세서리와 손톱까지 관리 규정하는 지침은 실제로 창고를 오가며 육체노동을 하는 백화점 판매직 여성노동자에게 불편을 가져온다. 창고 일을 하고 매장을 오가면서 지저분해진 손톱을 의식하고 지적받으며 다시 손질하는 것은 일상적인 스트레스를 준다. 그녀들은 백화점의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동분서주하며 타인의 시선에 비칠 외모를 거듭 확인해야 한다. 고객 응대 외에도 매장 청소, 재고 정리, 상품 진열, 전산 작업 등 다양한 일을 해야하는데, 딱 맞는 옷, 짧은 치마, 높은 구두 등은 일하기에 불편한 복장이다. - P91
매번 진상 고객은 있지만 심한 날이 있어요. 매장에서 한 20년 일하신 선배님이 항상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 진상 고객들은 어디서 대접 못 받고 와서 우리한테 화풀이하는 것 같다고, 우리들 아니면 누가 상대해 주겠냐고, 그냥 불쌍한 마음으로 생각하자고, 이렇게 안 하명 링 오래 못한다라고 이야기하시거든요. 그만큼 힘들고 더러운 꼴 많이 보니까,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 선배님은 20년 하신 거예요. 그래서 손님 대하는 첫마디부터가 달라요. 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해요. 경력이란 게 있는 것 같아요. (한아름, 백화점 잡화 매장) - P143
단순히 ‘웃는다‘는 것 그 자체, 그 웃음으로부터 매출을 끌어내는 데에만 집중할 뿐, 백화점은 노동자의 행복한 노동 조건에는 큰 관심이 없다. ‘지금부터 고객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의 용모와 복장을 점검합시다‘라는 어구 옆에느 ㄴ꽃을 들고 활짞 웃고 있는, 원피스 차림의 여성의 사진이 있었다. ‘잊지 않으셨죠? 지금부터 고객과 함께하는 공간입니다‘라는 어구가 적힌 포스터에는 사람의 머리 대신 하트가 얹혀 있는 직원의 모습이 그려져 잇었다. 직원의 공간에서 고객의 공간으로 한 발자국 내디디면, 서비스라인의 흰 금을 넘어서면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모습은 언제나 ‘웃고 있는 하트‘일 뿐이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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