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의 맛 - 교정의 숙수가 알뜰살뜰 차려 낸 우리말 움직씨 밥상 한국어 품사 교양서 시리즈 1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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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치다

깁다



바늘과 실이 있다. 실을 바늘귀에 꿰고 옷감을 꿰맨다. 굵고 큰 바늘에 굵은 실을 꿰고 두꺼운 헝겊을 맞댄 뒤 이불 홑청을 호듯 듬성듬성 꿰매기도 하고, 가늘고 작은 바늘에 가는 실을 꿰고 바짓단을 접은 뒤 바늘땀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꿰매기도 한다. 옷감을 이어 붙인 뒤 바지 안쪽에 세로로 난 바늘땀처럼 안쪽에서 마치 용수철을 꿰듯 감아 꿰매기도 하고, 해진 자리에 다른 옷감을 대고 꿰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천 사이에 솜을 넣고 죽죽 줄이 가게 박음질하드 ㅅ꿰맬 때도 있다. 순서대로 쓰면 시치고, 공그르고, 감치고, 깁고, 누빈 것이다. 시치는 일은 시침질, 공그르는 일은 공그르기, 감치는 일은 감침질, 깁는 일은 기움질, 누비는 일은 누비질이라고 한다. 

바늘과 실이 지난 자리엔 바늘땀과 함께 이렇듯 낱말도 남는다. 하물며 사람이 지난 자리야. 시친 듯 지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친 듯 지난 사람도 있고, 공그른 듯 지나는가 하면 기운 듯 지나기도 하며, 때로는 온통 누비고 다니는 사람도 있으리라.

드물지만 바늘과 실이 사람 몸을 지난 자리도 있다.

어머니의 가슴과 왼쪽 종아리에는 각각 스무 땀과 서른 땀의 꿰맨 자국이 남아 있다. 꽉 막힌 관상 동맥 대신 다리의 혈관을 떼어 내 심장에 연결한 흔적이다.

"사람 몸을 이렇게 누더기처럼 만들어 놓고, 의사들은 참……." 하면서 어머니는 고개를 젓는다. 목숨을 건졌는데 그깟 바늘땀이 대수냐고 나는 무심히 대꾸해 버리지만,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히기도 하다. 남이 입을 옷을 짓느라 평생 바느질을 해 온 양반이, 누군가 당신 몸에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 아닌가.

어머니 몸에 남은 바늘땀을 보고 "바느질 솜씨가 영 형편없네." 하고 내가 짓궂게 놀리면 "그러엄, 이게 누더기처럼 기운 거지 무슨 바느질이니. 이렇게 해 가지고는 밥 먹고 살기 힘들어야." 하며 어머니는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깔깔 웃는다.

'감치다'는 '감쳐, 감치니, 감치는, 감친, 감칠, 감쳤다'로, '깁다'는 '기워, 기우니, 깁는, 기운, 기울, 기웠다'로 쓴다. (p.36-37)




총 302페이지의 책인데 62페이지까지만 읽고 쓰는 리뷰임을 먼저 밝힌다. 대체적으로 책을 읽을 때 앞부분이 좋아도 뒤로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경우도 종종 보아왔으므로 이만큼만 읽고 리뷰를 쓰는 건 지양하는 편인데, 이 책에 대해서라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확신이 든다. 제목 그대로 동사에 대해 마치 국어사전을 펼치듯 설명해 놓았는데, 거기에 대해 저자는 에세이와 또 (본인이 쓴)소설(이라기 보다는 가상의 이야기라고 해야할까-그는 도서관에서 만난 남자 얘기를 자주 풀어놓는다)로써 예를 든다. 동사의 뜻과 활용을 이렇게 맛깔스럽게 풀어놓다니, 이 책은 책장에 반드시 꽂아두고, 동사를 찾아보고 싶을 때 국어사전보다 먼저 꺼내들어야 할, 그런 책이다. 동사의 '맛'이라는 제목은 어찌나 적절한지! 다루는 동사마다 감칠맛나는 글을 덧붙여 두었는데, '감치다'와 '깁다' 편의 저 이야기는 특히나 좋았다. 어머니와의 대화가 완전 생생하지 않은가. 

이것은 사전이면서 동시에 에세이이며 소설이다! 게다가 글을 진짜 지독하게 잘썼어!! 아름다워!!



책 뒷편에 '서평가 로쟈 이현우'가 '바라건대 한국어의 모든 맛을 다시 일깨워 주기를!' 라고 추천사를 썼는데, 완전 공감한다. 나 역시 김정선이 한국어의 모든 맛을 다시 일깨워주기를 바란다. 

여러분, 이 책 진짜 좋다. 읽자. 그리고 책장에 꽂아두자. 동사의 활용이 헷갈릴 때 펴들면 유익할 것이고, 잔잔하고 차분하며 아름다운 글을 읽고 싶을 때 펴들면 또 그대로 만족할 것이다. 진짜 질투나게 글 잘 쓴다.



부르르(질투에 떨리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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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7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7-02-07 14:02   좋아요 0 | URL
아 저 아닙니다 ㅋㅋㅋㅋㅋ 다락방 이란 닉네임을 쓰는 다른분 인듯 합니다.

이진 2017-02-07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만난 남자 이야기가 궁금한데요, 왜 같이 소개를 안 해주셨나요 다락방님!!

다락방 2017-02-07 14:28   좋아요 1 | URL
소이진님, 안녕?

동사 하나하나에 대해서 짧은 에피소드들이 나오는데, 거기에 종종 도서관에서 만난 남자와의 대화가 들어가 있어요. 소이진님, 이 책 꼭 읽어보세요. 소이진님은 꼭 읽어보셔야 해요. 글 쓰는 분이시라, 이거 진짜 도움 많이 될 거예요!

아무개 2017-02-07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임호부님 글 참 좋죠?
저는 소설의 첫 문장을 읽고 있는데 왠지 소설 준비중이신게
아닐까 하는 느낌적인 느낌이. ㅎㅎ

다락방 2017-02-07 14:36   좋아요 0 | URL
글 정말 질투나게 잘 쓰시더라고요.
게다가 단어에 대해서도 이렇게 잘 알고 계시니, 이런 분이 소설을 쓰신다면 어떤 소설을 쓰실지 너무나 기대 됩니다. ㅎㅎ
소설의 첫문장도 좋은가요? 저도 봐야겠어요.
이 분이 [이모부의 서재]내신 후로 그냥 줄기차게 쭉쭉 책을 뽑으시네요.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ㅎㅎ
그렇지만 이 분에겐 기본기가 너무 탄탄해서...
정말 질투나고 기죽어요ㅠㅠ

2017-02-08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08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08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심야 2017-02-16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옹 그렇군요!! 다락방님께서 질투까지 나실 정도면 정말 얼마나 글을 잘 쓰시는건지 궁금하네요!! 갑자기 읽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는군요!! 장바구니에 넣어둬야겠어요 ㅎㅎ

다락방 2017-02-17 09:41   좋아요 0 | URL
심야님, 에피소드나 예문 자체도 가만가만 좋고요 동사에 대해 정리도 잘 되어 있습니다. 읽으시면 후회하지 않으실거예요! >.<
 
가족이라는 병 - 가장 가깝지만 가장 이해하기 힘든… 우리 시대의 가족을 다시 생각하다
시모주 아키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살림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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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는 십 년 전부터 꽃에 새롭게 눈을 떠, 우리 집 꽃도 그가 장식한다. 들꽃을 취급하는 꽃가게 주인과 친해지는 바람에, 자기 방식대로 자유롭게 꽃을 꽂는다. 그런데 의외로 감각이 좋다. 내가 말하자니 뭣하지만, 때로는 '우와!' 싶을 정도로 꽃들의 조화가 아름답다. 수반이나 꽃병 같은 것드은 내가 전에 취미로 모은 것이지만……. (p.167)




저자는 자신의 남편을 '반려'라 칭하며 시종일관 건조한 시선을 유지한다. 어느정도의 거리도 느껴지고 또 담백한데, 저렇게 꽃에 대해 관심을 가진 자신의 반려에 대해 칭찬한 게 이 책을 통틀어서 가장 친근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내가 만약 결혼이나 동거를 하게 된다면, 나도 나와 함께 사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렇게 건조한 시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들 부부는 삼십년 이상을 함께 살았는데, 그렇다면 함께 사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일텐데, 이렇게 글로 쓸 때는 건조함을 유지하는 게 신기하고 좋아 보였다.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난 이렇게까지 건조하진 못할 것 같아. 


자연스레 신형철이 자신의 책에서 낯뜨거운 감사를 했던 게 떠올랐다. 내가 그 부분 때문에 그 책을 안샀고 신형철에 대한 관심을 끊었더랬지... 



자신의 반려에 대한 건조한 시선이 독특했지만 이 책 자체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고 재미있지도 않다. 각자가 자신의 몫을 잘 살아야 한다는 걸 일찍부터 깨달은 사람의 이야기이고 또 그런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인상적이었지만, 확실히 제목이 제일 근사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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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7-02-06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느낀 그 지점이 겹쳐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지나친 칭찬, 헌사는 왠지 저도 거부감이...그냥 요새는 왠지 건조하고 좀 담백한 글들이 좋아지더라고요.

다락방 2017-02-07 08:34   좋아요 0 | URL
네, 그간 신형철을 좋아했었는데 자신의 책을 마치 청첩장인듯 쓴 걸 보고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자신의 책이고 자신이 하고싶은 대로 하는거지만 어휴, 제 취향은 아니더라고요. 그런참에 이 책의 저자는 어찌나 건조하던지. 그 건조함이 나쁘지 않았던게, 건조하다고 해서 그들 사이가 심드렁하거나 무심한 사이는 아닌걸로 보였거든요. 긴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또 아이를 낳지 않기로 서로 얘기한 거라서 그렇게 서로에 대한 신뢰로 함께 오래 살아온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반려‘라 표현하며 건조하다니, 참 좋더라고요.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요?
김연지 지음 / 처음북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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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과 이별한 지 며칠 안됐을때였다. 여전히 마음이 아팠고 헤어지자고 말을 했던 내 자신이 좀 부끄러웠고 또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 남아있을 때,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택시를 탔다. 어떻게 대화를 시작하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택시 기사님께 애인하고 헤어져서 슬프다고 얘기를 했다. 이 위기를 넘겼어야 했는데 나는 넘기지 못해 헤어지자고 말했고, 그래서 그게 몹시 미안하다고. 그 날 나를 처음 본 기사님은 내게 '아가씨가 그 사람을 좋아한 만큼은 딱 그 만큼이었던 거예요" 라고 하셨더랬다. 나 역시 그걸 알고는 있었지만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낯선 사람으로부터, 그간의 내 사정과 성격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듣는 그 말은 당시의 꽤 큰 위로가 되었다. 맞아,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만큼은 딱 이만큼이었던 거야. 나는 스스로를 더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김연지'라는 저자에게 실제 일어났던 일이다. 데이트하는 어플 을 통해 뉴욕에 사는 남자를 알게 된 저자는, 일년반 동안 그와 연락을 유지하면서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그가 있는 뉴욕으로 그를 보기 위해 슝- 날아간다는 게 큰 줄거리다. 연락을 하는 동안 그들은 서로 친해지고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되고 또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여느 연인들처럼 싸우고는 '다시는 연락하지마!'를 반복하기도 하고, 그렇게 싸우다가 '사랑해' 한마디에 풀리기도 하는, 그런 평범한 연인. 물론, 그들이 아직 서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은 보통의 연인과 아주 크게 다른 점이다.



그러나 이들의 만남은 엇갈린다. 여자가 화가 나 데이트하는 어플을 지우고 있다가 다시 설치해보니 그로부터 연락이 와있었고, 그 사이에 그는 한국에 나흘간 머무르면서 마지막 날 네 얼굴 잠깐 볼까 연락했었다, 라고 했다. 그러나 연락이 안돼 만나지 못해 돌아가야 했고, 그를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여자는 결국 3개월간 뉴욕에 머무르고자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지만, 남자는 그 기간동안 시애틀로 출장 가있다가 바로 한국으로 휴가를 간다고 했다. 열네시간을 날아 뉴욕까지 갔지만 여자는 남자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그와 함께 가보고 싶었던 여자는 혼자 술을 마시고 외로움에 흐느끼기도 하지만, 뉴욕의 생활에 차츰 적응하며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공부에 대한 욕망도 샘솟는다. 많은 것들이 여자를 자극하는 가운데 남자를 이곳에서 만나지 못할거란 생각으로 계속 괴로워하긴 하지만, 긍정적인 그녀의 성격은 이렇게라도 뉴욕에 올 수 있게 해준 그에게 감사한다.



사랑은 내밀한 것이고 연애 역시 둘만의 것이라, 제삼자가 알지 못하는 둘 만의 은밀한 사연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기정 사실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그 연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부질없다. 여자도 책의 말미에 자신이 남자를 더 많이 좋아했다는 사실에 대해 언급하긴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남자가 이 여자를 많이 좋아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다. 남자는 여자가 화나고 토라졌을 때 전화선을 통해 '사랑해'라고 말하면서 여자를 달래주고 여자를 순간 구름 위로 올려놓기는 하지만,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만큼은 딱 그만큼, 그러니까 나흘간 한국에 갔을 때 마지막날 '잠깐 만나볼까' 하고 연락하는 딱 그만큼이었던 것 같다. 여자가 열네시간을 날아 뉴욕에 온다고 하지만, 자신의 출장과 휴가 스케쥴을 변경할 순 없는, 딱 그만큼. 이렇게 열정적이고 뜨겁고 게다가 뉴욕에서는 아주 많은 낯선사람들로부터 예쁘다, 근사하다, 모델이 되어달라 등등의 찬사를 듣는 여자가, 자신에게 움직이는 데에는 좀 망설이는 남자를 마냥 좋아하는 것은 좀 무모해 보였지만, 사랑이란 게 어디 이성으로 되는 것인가. 그러나 사랑 그리고 이별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그 과정에서 배우고 깨닫는 게 있다. 여자는 남자를 보려는 목적으로 뉴욕에 갔지만, 뉴욕에서 많은 자극을 받고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정한다. 결국 뉴욕이란 곳에 다시 가고 싶게하고 또 새로운 꿈을 꾸게 하는 좋은 동기가 '사랑'이었다. 이런 여자라면 앞으로 무얼 하고 또 누굴 만나도 쭉쭉 뻗어나가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보이지 않는' 사랑이란 것은 과연 사랑일까, 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소설,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에서 에미와 레오는 많은 감정을 나눈다. 상대로부터 이메일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컴퓨터만 쳐다본다. 영화 《her》에서는 심지어 실체가 없는 프로그램과 사랑에 빠지는 남자가 나온다. 사랑이 주는 설레임과 두근거림, 그리고 사랑이 주는 서운함과 고통까지도 그들은 모두 느낀다. 그렇지만 그들이 만나고나면?



그건 단순히 잘생기고 못생기고의 문제가 아니다. 포온세엑스로 알게 됐던 남자와 여자가 만나게 되는 영화 《나의 PS파트너》에서 둘은 어쩌다보니 상대가 지성이고 상대가 김아중이었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다고 해서 내 사랑이 더 굳건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메일로, 문자메세지로, 통화로 서로에게 사랑을 느꼈다고 해도 만나서는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만났는데 이 사람이 술에 취해 괴상한 눈빛으로 나를 볼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때는 지켰던 예의를 보이고 나서는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 상대에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습관, 냄새, 버릇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고, 전화 상으로 '사랑해'라고 수없이 속삭였지만 쩝쩝거리면서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 정이 떨어질 수도 있다. 물론 만나서 더 좋을 수도 있다. 나 역시 만나서 좋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고 더 좋았던 경우가 있었는데, 만나서 훅 갔을 때는 정말이지, 상대가 잘생긴 것과는 거리가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멀었는데도 심장이 벌렁벌렁 거렸더랬다. 이처럼 만나서는 아주 많은 '다른' 경우의 수가 생긴다. 사랑한다는 말은 흔하지만, 내 경우에는,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을 이렇게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는 것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물론 '나는 지금 이순간 사랑을 느끼고 이걸 그대로 표현할거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면 된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사랑한다는 말에 책임을 지고 싶은 사람이고, 이 사람과 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단순히 문자로, 목소리로 사랑을 느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다른 면들을 보지도 않은 채로 '사랑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여자는, 책 속의 묘사로 보건데, 똑똑하고, 사랑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이고. 나는 여자에게 어떤 조언도 해줄 수 없고 또한 조언할 위치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 또 각자의 사랑을 한다. 이 책은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는 굵직한 줄기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거기에 붙은 많은 가지들은 뉴욕 여행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타이틀에도 <여행 에세이>라고 되어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을 향해 움직이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뉴욕을 좋아한다. 게다가 책 속 주인공처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요소가 많이 들어있는 책이었지만, 그런데 이 책이 좋지는 않다.


이 책은 여행에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그녀의 '미스터 프린스턴'에 대한 사랑 고백이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던 순간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이랄까. 읽다가 중간에 '이 책이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을까' 잠깐 궁금했다. 저자는 이 원고를 들고는 출판사로 찾아간걸까?



음, 남자는 딱 그만큼만 좋아했던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한 것처럼 이 책은 딱 이만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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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2-01 09: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놔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계속 등록하려는데 ‘광고,도박,음란성 글은 게시가 안된다‘고 에러 뜨길래

데이트앱→데이트하는 어플
폰섹스→포온세엑스

로 부득이하게 수정하였음을 밝힌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러니까 등록되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양이라디오 2017-02-01 18:38   좋아요 1 | URL
광고, 도박, 음란성 글은 자제해주세요ㅋㅋ

다락방 2017-02-02 08:11   좋아요 0 | URL
네 주의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와같다면 2017-02-01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기억.. 끊없는 자책과 후회..

‘그 사람을 좋아한 만큼은 딱 그 만큼이었던 거예요‘ 딱 그만큼..
비로서 숨이 쉬어지고 위로가 됩니다

다락방 2017-02-02 08:11   좋아요 1 | URL
위로가 된다니 다행입니다, 나와같다면님.
딱 그만큼인 정도가 끝나면 또다른 관계, 또다른 감정이, 또다른 방식으로 시작될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 숨 잘 쉬고 삽시다, 나와같다면님.
:)
 
가만한 당신 - 뜨겁게 우리를 흔든,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 가만한 당신
최윤필 지음 / 마음산책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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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세상을 태어나 그 삶을 다하기까지의 이야기가 한 편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제목처럼 이 책은 가만가만한데, 책날개에 실린 저자소개조차도 가만하다. 이 책의 저자인 '최윤필'은 저자소개에서 자신을 '요컨대 나는 국적·지역·성·젠더·학력 차별의 양지에 살았다' 라고 표현한다. 양지에 살았다는 그가 뭔가 특별한 이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고 이성애자 사내아이, 서울대 사회학과,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마친 게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도 이 사회에서는 양지에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세상을 보게 될 시야에도 관여한다. 너네가 기득권이다, 라고 사회적 약자가 아무리 부르짖어도, '내가 왜?' 라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부인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렇듯, 대한민국의 남자로서 '더 특별한' 무얼 가진 게 아니면서도, 그는 자신의 양지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가 이토록 누군가의 부고를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런 시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에 실린 이들 중에는 내가 기존에 그 존재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게다가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노라면, 사실 그간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아예 인식조차 해보지 못했던 면들에 대해서 부르짖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재소자의 인권도, 국가의 국민에 대한 감시도, 자살 조력자에 대한 것도, 평소에 내가 인식하고 사는 부분들이 아니니까. 이슈가 되면 그 때 잠깐 반짝할 뿐, 나는 그것들로부터 아예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책에 실린 사람들, 한 평생을, 식상한 표현 그대로 '뜨겁게' 살다간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의 축을, 사회적 약자에 맞춰놓고 움직였다. 성폭행 피해자들을 돕고, 여성의 낙태권에 대해 주장하고, 학살 당하는 인류의 편에 서고, 전쟁을 반대한다. 경찰의 비리를 고발하고, 모성에 대해 연구해 발표하고, 여성 할례 금지 운동을 한다. 어떻게 하면 힘들고 아픈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에서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살아가던 이들에 대한 가만한 부고가 여기, 이 책에 실려있다. 알지도 못했던 존재에 대한 웅장한 삶에 대한 이야기가 고작 4-5장 정도에 압축되어 표현되어 있는데, 짧다면 짧다고 볼 수도 있을 그들의 생에 대한 이야기들이, 저자의 가만한 마음 위에 얹혀져, 아름답고 또한 거룩하다. 인상적인 건,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았던 이 책에 실린 모든 이들, 그들중에 여성이란 성별을 가진 이들은, 모두가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이다. 나 역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시작하면서, 저절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관심까지 갖게 되었는데, 페미니스트라는 건, 소수자의 삶이 소멸되지 않게 그들의 삶 역시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결한 것임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아름다운 이 모든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더더욱 페미니스트로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그저 부고만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탄생부터 삶의 전반적인 과정까지, 그들이 살아생전 했던 말들과 행동들까지 고스란히 알려주는데, 이 모든 걸 어떻게 다 알 수 있었을까, 궁금했던 바, 미주에 그 답이 나와있었다. 그는 각 인물에 대한 책과 기사들을 많이 참고했다. 한 사람의 생을 어떻게 다른 한 사람이 온전히 전할 수 있을까. 그러나 관련 기사와 책을 살피며 그 사람의 삶을 곰곰 생각했을 저자를 떠올려보며 그 노력에 감사하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이 이렇게나 노력을 했다.



좋은 글을 만나면 언제나 나 역시 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더 좋은 글에 대해 고민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글이라니, 나도 더 아름다운, 더 좋은, 더 따뜻한 글을 쓰고 싶어지는 거다. 그러나 이 책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그가 글을 아름답게 쓰기 이전에, 그가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선 자체가 깊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고는, 글을 잘 쓰기 이전에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게 먼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곧 더 좋은 사람이 되야 한다는 의미일테다.



아름다운 글이다.

책장을 덮으면서, 이들중 누군가의 삶에 대해 한 편쯤은, 가만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읽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 여기, 이런 삶이 있었어, 들어봐, 하고.






바버라 아몬드Barbara Almond는 정신분석·상담 의사로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라는 책을 썼다. 책에서 그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 희생을 뭉뚱그려 ‘모성motherhood‘은 무조건 완벽하고 최고여야 한다는 아득한 기준을 부정했다. 끊임없이 ‘모범 어머니‘를 찾아 전시하는 사회, 모든 어머니가 그런 모범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고 채찍질하는 사회를 비판했다. 책의 제목처럼, 그녀는 모성에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나란히 있고 모든 어머니는 자식을 진심으로 미워할 때도 있다고 썼다. 당신만 아이를 미워하는 게 아니고, 그게 잘못된 일도 아니며 한결같이 감싸주는 게 아이에게 좋은 일도 아니라고, 그러니 스스로를 미워하지 말라고 썼다. (바버라 아몬드, p.51)

책을 낼 무렵 아몬드에게는 손주들이 있었다. 2011년 <보스톤글로브> 인터뷰에서 할머니가 되니까 ‘양가감정‘이 덜하냐는 질문에 그는 "조부모 노릇Grandparenthood은 부모 노릇과 달리 순수한 기쁨이다. (…) 하루이틀 뒤 조금도 미안한 마음 없이 짐 싸서 집에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바버라 아몬드, p.59)

콰스니 부부의 탄생으로 인디애나 주의 동성혼 합법화 투쟁은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두 달 뒤인 2014년 6월에 영 판사는 동성혼 불허는 연방헌법 정신에 위배된다며 100여 건의 동성혼 신청 소송 사례를 이거에 주정부로 보내 즉각 혼인확인서를 발급하도록 판결한다. 판결에서 영 판사는 "조만간 미국 시민은 원고들과 같은 커플의 결혼을 흔히 보게 될 것이며, 그걸 ‘동성혼‘이 아니라 그냥 ‘결혼‘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젠더와 성적 지향을 빼면 그들은 거르의 여느 부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으며, 다르지 않은 그들을 다르지 않게 대하라는 게 미합중국 헌법의 요구다"라고 밝혔다. (니키 콰스니,p.74-75)

법과 제도의 진전이 시민 의식과 관습 속에 스미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일상의 보이지 않는 차별과 편견에 맞서 온전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법 제도와 별개로 천부의 권리를 시민들의 감각 속에 끊임없이 노출하는 게 중요하다. 인종 분리의 담장을 넘어 흑인이 진입하고, 동성애자 커플이 손을 맞잡고 거리와 광장을 활보하고, 남성이 전유한 노동과 유희의 경계를 허무는 일. 끊임없이 자극하고 부딪쳐 더디더라도 점차 자연스러운 풍경의 일부가 되는 일은 집단이 거대한 대오를 이뤄서 힘과 함성으로 법 제도에 맞서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투쟁의 일부다. (델 윌리엄스, p.123-124)

한국은 군비 지출 세계 10위에 무기 수입 세계 9위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복지비는 OECD 조사 대상 28개국 중 최하위다. 2015년 한국 국방 예산은 전년에 비해 4.9퍼센트 증가한 37조4560억 원으로 북한 실질 GDP의 두 배가 넘는다. (루스 레거 시버드, p.320)

시버드가 첫 보고서를 낸 이래로 세게는, 적어도 거대 전쟁의 위협으로부터는 비교적 멀찍이 서 있게 됏다. 그 평화는 시버드의 뜻처럼 군비 감축을 통해서가 아니라 파국적인 군사력 축적으로 이룩된 평화다. 하지만 시버드는 "군사력으로 안전을 도모하려는 관료 사회가 지속되는 한 이 지구는 결코 안전해질 수 없다. (…) 우리 주머니에서 나간 돈이 우리를 죽일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그의 지적은 원론적으로 옳지만 냉정히 말해서 그의 ‘우리‘가 인류라는 이름의 우리는 아니다. 군사 강국의 정치와 군수산업은 지금도 이 지구의 어딘가에서 전쟁무기 수요를 창출하고 있고, 한반도도 그중 한 곳이다. ‘세계 군축 행동의 날‘ 슬로건("전쟁 대신 복지를")을 한국에서는 "우리 세금을 무기 대신 복지에!"라고 외친다. (루스 레거 시버드, p.321)

영국이 낙태를 합법화한 건 1967년이었다. 어디나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때까지 영국 산부인과 환자의 태반이 불법 낙태 수술 후유증 환자였고, 그들 대부분은 미혼 여성이었다. 리비가 생기는 대로 아이를 낳은 것도, 아이를 키우느라 병원을 그만두고 셰필드 지역 보건의GP가 된 것도, 낙태를 불법화환 법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1960년대 초 기혼 여성 가족계획과 미혼·독신 여성 피임을 돕는 ‘408클리닉‘이라는 여성보건센터를 개설했다. 여성(자신)의 삶에 대한 법의 부당한 간섭을 어떻게든 최소화하자는 취지였다.
그의 클리닉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여성들이 아니라 윤리 경찰을 자임한 성직자와 지역 유지들이었다. 그들은 설교와 신문 칼럼등을 통해 클리닉의 부도덕성을 성토했다. 리비는 "그건 우리가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최고의 홍보였다. (…) 여성들이 몰려들어 클리닉이 있던 블록을 에워쌀 정도였다." (엘리자베스 리비 윌슨, p.335)

리비는 1990년 은퇴 후 가족계획 국제 NGO인 ‘마리스토프스인터내셔널 MSI‘을 도와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1년간 봉사 활동을 했다. 2009년 인터뷰에서 그는 "전 세계 어디나 여성은 다 똑같다. 내가 만난 시에라리온 여성들은 글래스고에서 만난 수많은 가난한 여성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들은 남편을 두려워하고, 섹스를 거부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또 아이를 낳곤 했다"라고 말했다. 법은 법이고, 가부장 권력은 또 가부장 권력이라는 얘기였다. (엘리자베스 리비 윌슨,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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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시릴 페드로사 지음, 배영란 옮김 / 미메시스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여행을 다니다보면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생기곤 하지만, 포르투갈에 대해선 딱히 그런 게 없다. 어떤 일이 그곳에서 일어났다거나, 특별한 누군가를 만난 기억도 없다. 내가 포르투갈 리스본에 머무른 시간은 아주 짧았고, 머무른 그만큼의 시간만큼을 비행기 안에서 보냈으니까. 어떤 특별한 일은 전혀 없었고, 그저 아침에 밥 먹으러 식당에 가서 와인을 마셨고, 점심을 먹다가 와인을 마셨고 저녁을 먹다가 또 와인을 마셨다. 어딜 가든 와인을 자유롭고 저렴하게 마실 수 있어서 무척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연신 하늘을 보며 좋다고 감탄했던 기억과, 골목들을 걸으며 멈춰서 아름답다고 했던 기억. 나는 포르투갈어를 몰라서 굳이 길을 물을 때는 영어로 물었는데, 그렇게 그곳의 언어를 전혀 모르는채로 짧은 시간 있으면서도, 와 여기 왜이렇게 좋지 너무 좋다, 자꾸 말했다. 함께한 친구들에게 '나 포르투갈에서 살고 싶어' 라고 말했더니, 친구들은 '너무 멀어서 놀러오기 힘들어 다른 데로 가' 라고 했더랬다. 직항도 없어서 어딘가를 경유해서 아주 오랜 시간을 날아야 포르투갈에 닿을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비행기 안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머물러야 한다. 비행기 안에 오래 있는 것은 무척 힘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포르투갈에 좀 더 오래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어딘가에 갈 수 있는 기회가 되면, 나는 지금은 아주 많은 다른 곳들을 가보고 싶어서 여기 저기 기웃거리고 티켓을 예매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또다시 포르투갈을 찾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거기에서 내가 어떤 특별한 일을 하거나 특별한 누군가를 만난 게 아닌데도. 자꾸자꾸 그곳에 가고 싶다. 그런데,



이 책을 넘기다보면, 아아, 포르투갈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진다. 이 책 속의 남자는 포르투갈에 있는 친척으로부터 그림을 그릴 집을 빌리게 되는데, 아아, 너무 이상적인 삶이란 생각이 드는 거다. 포르투갈에 좀 장시간 머무르면서, 누군가의 집을 빌려 살게 된다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집 앞 골목골목을 산책하고 사람들과 눈인사를 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삶은 아름답지 않을까.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생각보다 더 오래 포르투갈에 머무를 것 같아요. 이 나라를 그리고 싶어졌거든요. 이걸로 어떻게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라고 시작하는 편지. 


생각보다 더 오래 포르투갈에 머무를 것 같아요.

이 나라를 그리고 싶어졌거든요.

이걸로 어떻게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 이 부분을 읽는데, 당장이라도 포르투갈로 날아가고 싶어졌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건 두렵고 낯설고 힘들겠지만, 포르투갈어를 배우는 건 어떨까, 또 잠깐 생각해봤다.

배우고 포르투갈에 가는 것보다는, 포르투갈에 가서 배우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결국은 외국에서 영주권까지 받으며 장기체류하게 될 나라가, 어쩌면 포르투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두근두근했다.



이 책 역시 나의 여행이 그러했던 것처럼 어떤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다. 주인공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는데, 그들 형제 이야기까지 나와서 그 구성원들에 대한 가족사가 딱히 내 흥미를 끌지도 않더라. 그런데 매사 의욕 없던 주인공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원하는 게 뭔지조차 모르는 주인공이, 포르투갈에 머무르면서 '여기 더 머무르기로 했다'고 하는 게, 왜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두근두근.. 정말 두근두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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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양배추 2017-01-16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달에 한 도시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제일 길게 갔었던 여행이 혼자 이탈리아로 11일이었어요. 그 11일도 쪼개서 세 도시를 돌아다녔는데...피렌체가 참 좋았거든요,저는. 그래서 아 여기서 한 달만이라도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어요. 다른 곳은 몰라도 피렌체만큼은 살면서 한번 더 가보고 싶은 곳이예요. 다락방 님처럼 피렌체에서 저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나진 않았어요. 그래도 오롯이 혼자 그 곳의 골목길들을 걸어 다니고, 길가 벤치에 앉아 쉬기도 했던 그 기억들이 저에겐 특별하게 남아있습니다. 다음엔 가능하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그 길들을 다시 걷고 싶네요^^
항상 아침에만 글 올려주셔서 저녁엔 안 들렸었는데, 반갑게 글 발견해서 너무 좋았어요. 좋은 저녁 되시길!

다락방 2017-01-17 08:23   좋아요 0 | URL
히힛. 사각양배추님, 안녕?
이탈리아 11일이라니, 길게 다녀오셨네요. 저는 11일간 나가본 적도 없어요. 기껏해야 9일을 가지고 그 안에서 비행기 타고 왔다갔다하는 시간까지 다 써야 하기 때문에 짧게 다녀오곤 하는데, 직장에 다니고 있는 저에게는 이게 최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길게 갈 수 있을 때 가야지, 하고 기다렸다가는 그 때가 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이 직장을 관둬야 가능한데, 그때는 제 체력이 바닥일지도 모르고요. 그래서 저는 짧게 다녀오더라도,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먹자!! 고 힘차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포르투갈에 다시 가보고 싶어요. 말도 안통했으면서 뭐가 좋다고 거길 그렇게 또 가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히힛. 그렇지만 이렇게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살아가는 작은 기쁨인 것 같아요. 나중에 사각양배추님도 피렌체에 가시고 저도 리스본에 가서 장기간 머무르다가, 그 시간들속에 언제쯤은 중간지점에서 만나요! 같이 와인 한 잔 하십시다! ㅎㅎ


아, 제가 가끔 기분이 동하면 저녁에도 글을 쓰곤 하는데, 대체적으로 아침에 다다다닥 쓰는 편이기는 해요. 어제 아침에 쓴 길고도 긴 페이퍼는 읽으셨습니까? 애쉬톤 커쳐와 데미 무어가 등장합니다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라면서 내 친구처럼 말하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은 하루 보내세요, 사각양배추님!

무해한모리군 2017-01-17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르투갈에 가보지 못했네요. 계획을 짜봐야겠어요. 가본곳중에 저는 바르셀로나에 살고 싶어요. 음식도 딱 입에 맞고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7-01-17 17:49   좋아요 0 | URL
저는 장기적으로는 미국에 살고 싶어요. 사는 건 미국에서 살고 싶은데, 포르투갈에서도 장기 체류 해보고 싶어요. 길면 육개월 쯤이요. 짧으면 한달에서.
아.. 떠나고 싶네요. 회사가 사람을 갉아먹는데... ㅠㅠ

보슬비 2017-01-17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았어요. 뭔가 따뜻한 느낌도 좋았고, 와인 마구 마실때도 좋았어요.^^

다락방 2017-01-18 08:13   좋아요 0 | URL
이 책 신기하게 좋더라고요, 보슬비님. 뭔가 이렇다할 에피소드라든가 흥미로운 줄거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묘하게도 포르투갈에 가고 싶은거예요. 주인공이 포르투갈 좋다고 막 찬양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포르투갈에 가서 장기체류하고 싶어졌어요. 포르투갈 가서 아침 점심 저녁 와인 마시면서 여유롭게 지내다 오고 싶네요. 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