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의 맛 - 교정의 숙수가 알뜰살뜰 차려 낸 우리말 움직씨 밥상 한국어 품사 교양서 시리즈 1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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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치다

깁다



바늘과 실이 있다. 실을 바늘귀에 꿰고 옷감을 꿰맨다. 굵고 큰 바늘에 굵은 실을 꿰고 두꺼운 헝겊을 맞댄 뒤 이불 홑청을 호듯 듬성듬성 꿰매기도 하고, 가늘고 작은 바늘에 가는 실을 꿰고 바짓단을 접은 뒤 바늘땀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꿰매기도 한다. 옷감을 이어 붙인 뒤 바지 안쪽에 세로로 난 바늘땀처럼 안쪽에서 마치 용수철을 꿰듯 감아 꿰매기도 하고, 해진 자리에 다른 옷감을 대고 꿰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천 사이에 솜을 넣고 죽죽 줄이 가게 박음질하드 ㅅ꿰맬 때도 있다. 순서대로 쓰면 시치고, 공그르고, 감치고, 깁고, 누빈 것이다. 시치는 일은 시침질, 공그르는 일은 공그르기, 감치는 일은 감침질, 깁는 일은 기움질, 누비는 일은 누비질이라고 한다. 

바늘과 실이 지난 자리엔 바늘땀과 함께 이렇듯 낱말도 남는다. 하물며 사람이 지난 자리야. 시친 듯 지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친 듯 지난 사람도 있고, 공그른 듯 지나는가 하면 기운 듯 지나기도 하며, 때로는 온통 누비고 다니는 사람도 있으리라.

드물지만 바늘과 실이 사람 몸을 지난 자리도 있다.

어머니의 가슴과 왼쪽 종아리에는 각각 스무 땀과 서른 땀의 꿰맨 자국이 남아 있다. 꽉 막힌 관상 동맥 대신 다리의 혈관을 떼어 내 심장에 연결한 흔적이다.

"사람 몸을 이렇게 누더기처럼 만들어 놓고, 의사들은 참……." 하면서 어머니는 고개를 젓는다. 목숨을 건졌는데 그깟 바늘땀이 대수냐고 나는 무심히 대꾸해 버리지만,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히기도 하다. 남이 입을 옷을 짓느라 평생 바느질을 해 온 양반이, 누군가 당신 몸에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 아닌가.

어머니 몸에 남은 바늘땀을 보고 "바느질 솜씨가 영 형편없네." 하고 내가 짓궂게 놀리면 "그러엄, 이게 누더기처럼 기운 거지 무슨 바느질이니. 이렇게 해 가지고는 밥 먹고 살기 힘들어야." 하며 어머니는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깔깔 웃는다.

'감치다'는 '감쳐, 감치니, 감치는, 감친, 감칠, 감쳤다'로, '깁다'는 '기워, 기우니, 깁는, 기운, 기울, 기웠다'로 쓴다. (p.36-37)




총 302페이지의 책인데 62페이지까지만 읽고 쓰는 리뷰임을 먼저 밝힌다. 대체적으로 책을 읽을 때 앞부분이 좋아도 뒤로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경우도 종종 보아왔으므로 이만큼만 읽고 리뷰를 쓰는 건 지양하는 편인데, 이 책에 대해서라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확신이 든다. 제목 그대로 동사에 대해 마치 국어사전을 펼치듯 설명해 놓았는데, 거기에 대해 저자는 에세이와 또 (본인이 쓴)소설(이라기 보다는 가상의 이야기라고 해야할까-그는 도서관에서 만난 남자 얘기를 자주 풀어놓는다)로써 예를 든다. 동사의 뜻과 활용을 이렇게 맛깔스럽게 풀어놓다니, 이 책은 책장에 반드시 꽂아두고, 동사를 찾아보고 싶을 때 국어사전보다 먼저 꺼내들어야 할, 그런 책이다. 동사의 '맛'이라는 제목은 어찌나 적절한지! 다루는 동사마다 감칠맛나는 글을 덧붙여 두었는데, '감치다'와 '깁다' 편의 저 이야기는 특히나 좋았다. 어머니와의 대화가 완전 생생하지 않은가. 

이것은 사전이면서 동시에 에세이이며 소설이다! 게다가 글을 진짜 지독하게 잘썼어!! 아름다워!!



책 뒷편에 '서평가 로쟈 이현우'가 '바라건대 한국어의 모든 맛을 다시 일깨워 주기를!' 라고 추천사를 썼는데, 완전 공감한다. 나 역시 김정선이 한국어의 모든 맛을 다시 일깨워주기를 바란다. 

여러분, 이 책 진짜 좋다. 읽자. 그리고 책장에 꽂아두자. 동사의 활용이 헷갈릴 때 펴들면 유익할 것이고, 잔잔하고 차분하며 아름다운 글을 읽고 싶을 때 펴들면 또 그대로 만족할 것이다. 진짜 질투나게 글 잘 쓴다.



부르르(질투에 떨리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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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7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7-02-07 14:02   좋아요 0 | URL
아 저 아닙니다 ㅋㅋㅋㅋㅋ 다락방 이란 닉네임을 쓰는 다른분 인듯 합니다.

이진 2017-02-07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만난 남자 이야기가 궁금한데요, 왜 같이 소개를 안 해주셨나요 다락방님!!

다락방 2017-02-07 14:28   좋아요 1 | URL
소이진님, 안녕?

동사 하나하나에 대해서 짧은 에피소드들이 나오는데, 거기에 종종 도서관에서 만난 남자와의 대화가 들어가 있어요. 소이진님, 이 책 꼭 읽어보세요. 소이진님은 꼭 읽어보셔야 해요. 글 쓰는 분이시라, 이거 진짜 도움 많이 될 거예요!

아무개 2017-02-07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임호부님 글 참 좋죠?
저는 소설의 첫 문장을 읽고 있는데 왠지 소설 준비중이신게
아닐까 하는 느낌적인 느낌이. ㅎㅎ

다락방 2017-02-07 14:36   좋아요 0 | URL
글 정말 질투나게 잘 쓰시더라고요.
게다가 단어에 대해서도 이렇게 잘 알고 계시니, 이런 분이 소설을 쓰신다면 어떤 소설을 쓰실지 너무나 기대 됩니다. ㅎㅎ
소설의 첫문장도 좋은가요? 저도 봐야겠어요.
이 분이 [이모부의 서재]내신 후로 그냥 줄기차게 쭉쭉 책을 뽑으시네요.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ㅎㅎ
그렇지만 이 분에겐 기본기가 너무 탄탄해서...
정말 질투나고 기죽어요ㅠㅠ

2017-02-08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08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08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심야 2017-02-16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옹 그렇군요!! 다락방님께서 질투까지 나실 정도면 정말 얼마나 글을 잘 쓰시는건지 궁금하네요!! 갑자기 읽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는군요!! 장바구니에 넣어둬야겠어요 ㅎㅎ

다락방 2017-02-17 09:41   좋아요 0 | URL
심야님, 에피소드나 예문 자체도 가만가만 좋고요 동사에 대해 정리도 잘 되어 있습니다. 읽으시면 후회하지 않으실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