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페미니스트 선언, 그날 이후의 페미니즘
윤김지영 지음 / 일곱번째숲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에는 눈웃음청년과 페미니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내게 페미니즘에 대해 '묻는다'고 하지만, 사실 나는 그와의 대화로부터 배우는 것도 많다. 오늘은 '각자의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했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과연 좋은 것인가, 옳은 것인가, 하는 얘기를 시작해서 각자의 페미니즘 쪽으로 결론이 났는데, 그러니까 지난 토요일 북콘서트에서 누군가 그런 얘길 한것이다. 요즘 서점에 가면 페미니즘 책이 많지만, 실상 그들이 서로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지가 않다, 온건하다, 고. 그러자 윤김지영 쌤은, 그게 우리 출판계가 딱 그만큼까지를 허락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얘기를 하신거다. 더 극단적인, 래디컬한 페미니즘에 대한 책 소개까지는 아직 할 수 없는, 아직은 이만큼까지만 소개할 수 있는 딱 그정도. 쌤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하셨다. 이를테면, 흑인 인권운동을 위해 싸운다고 할 때, 그것이 과연 기득권이었던 백인에게도 좋을까, 기득권인 백인은 불편할 것이다, 하는 얘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것이 '옳기' 때문에 '모두를 위한' 게 될까? 페미니즘 역시 마찬가지로 '모두를 위한다'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거였다. 성평등에 가기 위해서는 기득권의 불편함은 당연히 따라올 터, 그것이 과연 '모두를 위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거였다.



페미니스트 라고 자신을 정의하는 사람들도 모두 각자가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이 서로 싸우기도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더 옳다고 믿고 주장하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페미니즘 내부에서 이렇게 서로 자기 주장을 피력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모순일까?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 한 방향을 보느니만큼 다같이 어깨동무하고 사이좋게 가면 더 빨리 닿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결국 지향하는 바에 닿기 위해서는, 갈등은 필연적으로 따라올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눈웃음청년과 나는 '각자의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 내가 지향하는 페미니즘과, 내 친구 a가 생각하는 페미니즘, 내 친구 b 가 지향하는 페미니즘은, 성평등을 향해 나아가되,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살아온 환경과 각자의 경험이 모두 다르니까. 같은 책을 읽어도 느끼는 바가 다른 것처럼, 우리는 같은 페미니즘 책을 읽어도 서로 다르게 소화해낼 것이며, 받아들이는 게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페미니즘이라는 걸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갈등은 결코 '모순'으로 표현되어져서는 안되는 것 같다. 갈등은 모순과 다르니까. 



토요일에 만난 친구는 정희진 쌤의 말에 대부분 동의한다고 했지만, 벨훅스도 읽었지만, 아, 뭔가 어딘가 다른 걸 더 듣고 싶어서, 뭔가 더 있지 않을까 싶어서 윤김지영 쌤의 북콘서트에 오게 됐다고 했다. 나 역시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발언을 듣고 싶었다. 내가 페미니즘을 지향하고 페미니스트가 된다고 했을 땐, 그건 이미 유명한 페미니스트 하나만을 모델로 두고 가는 게 아니다. 다양하게 읽으면서 또 다양한 강의를 들으면서, 거기에서 내가 느끼는 바와 생각하는 바를 정리하고 내 자신을 성찰하며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어느것이 옳고 그른지, 어디를 향해 나아갈건지 물어야 한다. 페미니즘은, 내가 생각하기에,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내가 옳게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는 것. 이런 페미니즘에 있어서 내부 갈등은 필수적이지 않을까. 나 하나의 개인을 놓고 봐도 내적 갈등이 수시로 오고가는데, 하물며 페미니즘이라는 성평등을 주장하는 사상이 어떻게 아무 잡음 없이 앞으로 앞으로 쭉쭉 내달을 수 있겠는가.




윤김지영 쌤은 이 책에서 그간 헬페미니스트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어떤 액션을 취해왔는지를 잘 정리해주었다. 이미 내가 보고 듣고 알고 있던 바를 차근차근 정리해둔 그런 책이다. 게다가 틈틈이 내가 궁금해했던 것들에 대한 언급도 있어서 지금까지 내가 여기 있는 이유에 대해 다시 돌이켜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개인의 내적갈등과 집단의 내부 갈등을 어쩔 수 없이 끌고 가야 하는 것도 고개 끄덕이며 인정할 수 있었고.



페미니즘이 매력적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페미니스트들이 끊임없이 행동한다는 데 있다고 본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어진 것들, 몰카를 몰아내고자 하고 리벤지 포르노의 용어를 바꾸는 것들을, 페미니스트들이 해왔다. 언젠가의 페미니즘 강연에서 이현재 선생님은 그간 온건파 페미니스트로 살았는데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 이제 자신도 래디컬로 돌아서기로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지극히 당연한 것들을 이만큼 바꾸는 데에는 지옥을 헤쳐나가려는 의지가 필요한 것 같다. 헬페미니스트들의 행동력이 없었다면, 그들의 강한 나대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몰카에 시달리고, 여자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마치 잘못해서 복수를 당하는 것마냥 리벤지 포르노란 용어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 


일전에 페이퍼에서 언급한 적 있던 '혐오'라는 단어에 대해 눈웃음 청년과 이야기를 나눴다. 만약 다른 사상이었다면, 페미니즘이 아닌 다른 부분에서였다면,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과격한 단어라고 했을 때, 혐오라는 단어를 버리고 다른 단어를 선택하려 했었을텐데, 페미니즘은 끝까지 혐오라는 단어를, 다른 사람들 입맛에 맞춰 버리는 게 아니라 가져간다는 것에 대해 그는 감동한다고 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취해야 할 자세는 바로 이런 데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건 너무 심해', '그건 아니야' 라는 숱한 말들에 물러서지 않는 것. 지금처럼 계속 나대고 시끄럽게 쿵쾅대는 것. 그래야 조금, 아주 조금 바뀌니까. 



언젠가 친구들과 할머니 페미니스트가 되자, 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친구들에게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할머니 헬페미니스트 들이 되자고. 영화 매드맥스에서처럼, 후손에게 씨앗을 건네줄 수 있는 전사 할머니가 되고, 공격에 맞서 싸우는, 그런 할머니가 되자고. 헬페미니스트라니, 정말 좋다.




아래 올리는 밑줄긋기는 모두들 다 읽어보았으면 한다.







리벤지revenge포르노-헤어진 연인이나 부인의 신체, 성행위를 찍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여성의 동의 없이 온라인에 유포하는 범죄 행위-라는 용어에 대한 헬페미니스트의 비판을 살펴봅시다. ‘리벤지‘라는 단어는 사적 영역에서 여성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남성의 사적 복수, 사적 정의 구현이라는 함의를 가지고 있으며, ‘포르노‘라는 단어는 피해자인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시선의 연장이므로 헬페미니스트는 ‘리벤지 포르노‘라는 단어 자체가 남성 중심적인 관점임을 지적합니다. (p.38)

때문에 헬페미니스트는 리벤지 포르노란 용어를 파기하고 ‘디지털 성범죄digital sexual crime‘라는 새로운 용어를 제안해 널리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잘못에 방점을 찍어 이것을 사회적 문제로 부각함으로써 적극적 해결책을 촉구하는 것이지요. 소라넷 폐쇄를 이끈 DSO(디지털 성범죄 아웃)팀은 영상 유출자만이 아니라 이를 유통시키고 소비하는 자들 역시 디지털 성범죄의 공범자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공범성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동영상 유포, 재생산 행위를 ‘유포 강간‘으로, 영상소비행위를 ‘시청 강간‘으로, 악성 댓글로 조롱, 협박하는 것을 ‘온라인 강간‘으로 명명합니다. 강간이라는 의미의 외연을 확장함으로써 디지털 성범죄가 어떠한 방식으로 한 사람을 사회적 죽음-사회로부터의 백안시, 배제, 열외, 비하, 협박에 의해 이민을 가거나 직장과 학교를 그만두는 것등-은 물론 생물학적 죽음-디지털 성범죄 영상유출 후 자살 등-으로 내모든 구조인지를 드러내는 것이지요.(p.40-41)

이후 데스티니 차일드 게임 일러스트 중에서 송 작가의 그림이 지워집니다. 송미나 작가가 사용한 한남충이라는 용어가 메갈리아라는 징표로 받아들여져 집중공격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넥슨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남초 커뮤니티딜의 소비자 집단주의가 시작되면서, 소강기로 접어들었던 메갈 사냥이 재점화된 겁니다. 김치녀와 된장녀라는 용어는 남초 커뮤니티가 골고루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며 확대 재생산되고 농담처럼 용인되지만, 한남이나 한남충이란 용어는 메갈리아의 전유물로 규정되어 금기와 외설의 언어가 되어버리는 사태가 재연된 것입니다. 단지 여성이 남성을 호명하는 용어를 발명해 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 성우는 목소리를, 여성 일러스트 작가는 그림을 몰수당하게 된 것이지요. (p.76)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강간문화‘라는 단어는 형용모순은 아닌지 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떻게 강간이라는 흉물스런 폭력과 문화라는 고상한 단어가 조합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문화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문화는 자연과 야만, 미개성의 영역을 설정해야만 존립 가능한 개념입니다. 문화는 자연에 대한 조작과 통제, 이용을 통해 형성되며, 이러한 정복 행위를 문명화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문화란 타자에 대한 폭력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성들 간의 결속과 담합으로 이루어진 문화가 타자로 설정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여성입니다. (p.98)

폭로divulgation는 자족적 독백이 아니며 비림의 봉인을 풀어 공론장 안에 던져 넣고 변화를 촉구하는 주체적인 발화양식입니다. 오늘의 문명 안에서 누군가가 누리는 특권이 다른 누군가를 짓밟음으로 이루어져 온 것임을 밝힘과 동시에, 문명의 밑바닥에 설치된 가부장제의 음험하고도 비루한 하수구를 철거하려는 행위입니다. 또한 기존의 가치와 의미체계에 편입되지 않는 새로운 가치의 들끓음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이것은 기성 질서가 제어할 수 있는 규칙을 벗어나는 것으로, 세련되기보다 난장판에 가깝고 통제되지 않은 소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폭로는 고백을 듣는 청자로 ‘정의로운 남성‘의 자리를 남겨두지 않음으로써 모두를 진창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성폭력을 폭로하는 행위자는 여성 포식 구조인 강간문화를 방관해 온 남성에게 비판의 활시위를 당깁니다. 여기서 무지의 권력이란 그들 역시 여성을 향한 폭력을 폭력으로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無知의 권력‘을 누리는 공범자이기 때문이빈다. 그러한 무지는 단지 둔감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알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몰라도 된다고 믿는 특정 문화의 소산입니다.(p.108)

이제 여성들은 일상의 고통과 상처의 목록을 꺼내들고 주저함 없이 그것들의 부당함을 폭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들은 더 이상 자기검열 구조에 갇혀 ‘내 탓이오‘를 외치며 착한 죄인으로 고백의 값을 받아내려 하지 않습니다. 폭로 행위자들이 자신이 감내해온 고통의 강도가 얼마만한 것인지, 자신이 받은 상처의 깊이가 어떠한 것인지에 오롯이 집중하며 말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이 세상은 폭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성혐오사회의 긴 터널을 무너뜨리는 다이너마이트이자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폭죽입니다. 폭로는 바로 해방의 언어 그 자체인 것입니다. (p.111)

밀실에서 거리로 여성들의 공간 이탈을 가능하게 한 것은 통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통감通感이라는 정동 역학은 어떻게 개념화될 수 있을까요? 통감의 축자적 의미는 ‘마음에 사무치게 느낌‘입니다. 이에 한정하지 않고 새로운 윤리적 감각으로 이론화한다면, 통감은 고통의 감각이 나를 오롯이 관통하는 ‘가로지름‘의 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p.153)

나아가 통감은 타자의 고통을 경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온몸으로 절절히 반응하게 합니다. 타자의 고통을 관망하지 않고 그것에 반응하며 행동하는 전신全身의 행위자가 되게 합니다. 지금까지 여성 살해에 대한 반응은 공감에 가까웠으며, 대부분 죽은 여성에 대한 안타까움에 그쳤습니다. 심지어 피해자 여성의 행실을 의심하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5·17 페미사이드를 "강남역 유흥가 살인 사건"으로 보도하는 방식이 그러한데, 여기에는 ‘유흥가‘라는 적절치 못한 곳에 여성이 있었기에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도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제시되고서야 유흥가라는 당너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즉 여성의 죽음은 살아남은 여성들에 대한 경고이자 공포정치의 효과적 표본이 되어왔기에 여성 살해는 추모의 연대와 분노의 저항으로 적극적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p.156)

통감은 어느 한 사람의 고통에 다른 이가 먹혀버리는 것, 일방적 흡수행위가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변이와 이행의 에너지에 온전한 자리를 담보 받을 수 없는 것, 이러한 차이의 회오리로 빨려들어가 변신의 파동에 일렁여 새로운 행위를 구성하도록 하는 것이 통감입니다. 즉 감정적 전염은 감정적 매몰에만 그쳐 어떠한 행위도 구성할 수 없도록 하지만, 통감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명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행위화로 이행해가는 인식의 차원 또한 내포합니다. 또한 통감은 감정과 사유의 섬세한 뉘앙스가 진동하는 접촉의 양식이자 생이 약동하는 계기입니다. 새로운 행위의 존재 진동을 낳는다는 점에서 감정적이자 인식적 차원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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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as 2017-07-05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동안 원론적인 페미니즘 책에 조금 지쳐있었는데 좀 새로워 보이네요 :) 사러갑니다

다락방 2017-07-05 13:51   좋아요 1 | URL
네, 잘 정리되어 있어서 좋았어요. 그것보다 또다른 페미니스트의 글을 읽는 것도 기뻤고요. 헬라스님은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하네요. 얼른 읽어주세요!
 
남자란 무엇인가
안경환 지음 / 홍익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제목 그대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그리고 다 읽고 책장을 덮은 후에도, '도대체 이 책을 왜 썼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이 책은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내가 읽기에도 아무것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가 읽는다고 해서 뭔가 위로를 받는다거나 재미있다거나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안경환은 누구보다 현실 혹은 현상 파악에 능하다. 과거에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의 남자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잘 알고 있고 또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변화의 과정에는 페미니스트들과 페미니즘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고. 페미니즘을 지양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것이 당연한 시대의 흐름이라는 인정도 하고 있다. 만약 그 인정을 좀 더 설득조로 썼다면 지금과 같은 문제(?)는 없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현상 파악을 잘 하고 있으면서도 단지 현상 파악만을 책에 기술했기 때문에 이 책은 문제가 된다. 게다가 처음부터 남자의 뇌와 여자의 뇌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아니, 주장이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현상을 기술한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나는 그 기술, 단순한 기록에 있다고 생각한다. 숱한 명사의 숱한 책 혹은 말에서 가져와 이 책을 구성하는 거다. 남자와 여자의 뇌과 다른데, 이렇게 달라, 하면서 여기저기에서 인용문 가져오고, 그래서 남자가 이런 본능을 가지고 있고 이렇게 행동하는데, 하면서도 여기저기서 인용문을 들입다 갖다 박는다. 위에 언급한대로, 그것은 '문제적'이고 지독한 차별에서 지금처럼 변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활동가들의 운동 덕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그냥 다 출처를 밝힌 인용문이다. 결과적으로 지금 세대의 남자들은 기존의 남자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그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는 '살아 남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시선을 가진듯 보이고, 이 역시도 강하게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 현상을 나열하는데 그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분노하는 문장들을 비롯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 있는 문장들까지도, 대체적으로 인용문이다. 



만약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닌 상태에서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읽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없는' , '삶 혹은 일상에 영향을 1도 안미치는', 그야말로 '읽으나마나 한' 책이었을 거다. 정말 이 책을 왜 쓴걸까?



이 책은 지금 화제가 되었든 안되었든 내가 읽고싶어할 만한 책은 아닌데, 여당 의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발췌'하여 사람들이 비난한다고 하고 또한 '맥락을 읽지 못하고 발췌만 가지고 판단한다'고 하길래, 정말 그런가 싶어 읽게 되었다. 어디, 맥락을 파악하면 그 모든 발췌문들이 다르게 느껴질까? 해서 시작한 거다. 그리고 다 읽으니 발췌독만 읽었을 때보다는 '덜' 분노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맥락이 '분노하지 않을만한' 것은 아니다. 과거의 남자들이 가진 문제와 지금의 남자들이 가진 문제, 이 사이에 페미니스트들의 역할까지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언급했듯이, '남자와 여자의 뇌가 다르다'고 심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남자들의 문제'를 '남자들의 문화'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이, 지금 욕먹을 만큼 '차별주의자'는 아닌 것 같은데(오히려 문제 파악을 잘하고 있다), 왜이렇게 읽는 내내 찜찜할까를 고민했는데, 그가 적어낸 문장에서 나는 그 답을 찾았다.




여군의 선호도가 높아지는 데는 유엔 평화유지군 활동의 비중이 커지는 영향 때문이기도 했다. 파견국 주민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데 여성 군인이 장점이 많다. 최소한 성매매나 성폭력과 같은 전형적인 남자문화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전자책 p.237)



남자의 문제를 조목조목 다 짚어내면서, 그것을 '문화'로 보고 있는 거다. 성매매나 성폭력은 '범죄'다. 그것을 범죄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전형적인 남자문화'라고 받아들이다보니 현상 파악을 잘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책이 문제시 될 수밖에 없다. 저런것을 남자들의 문화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여자의 '아니오'가 아니오라는 것을 말하면서도, 아내와의 섹스는 내가 필요할 때마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하면서도, 성소수자를 차별하면 안된다고 얘기하면서도, 우울증은 정신적 질환이므로 병원에서 치료 받아야 하지 숨길 게 아니라고 말을 하면서도, 거기에 별로 설득력이 실리질 않는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잘 알고 있는데, 이걸 왜 이렇게밖에 표현을 못하지?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람에겐 어차피 남자들의 생래적 본능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걸 인정하고 가기 때문에, 차별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힘이 실리질 않는다. 쉽게 말하면 '남자의 성욕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남자의 성욕은 본능이다'를 인정해버리고 있는 거다. 애초에 본인이 멀리 떨어진 제삼자의 입장에서 쓰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본인의 주장은 거의 '없고' 인용문으로 현상만 나열한 글이 된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저자는 실생활에서 다른 남자들보다는 차별하지 않는 삶, 평등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남자의 성적 본능'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책은 어느 한 쪽에 가까운 책이 되지 못하고, 이도저도 아닌, 그저 인용문 나열에 그친다. 



이 책에 인용된 책은 장르도 다양한데, 이렇게 책도 많이 읽고 평등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고 하는 남자조차도, '남성의 성욕 본능' 같은 거, '젊은 여자를 간절히 원하는 본능' 에 대해서 '남자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걸 인정해버리고 시작하다니, 이것은 그저 남자들이 가진 어쩔 수 없는 한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뷰의 제목을 '중년 남자의 한계' 혹은 '한국 남자의 한계' 같은 걸로 쓰고 싶었는데, 자극적인 걸 지양하자는 나만의 신념에 따라 자제하도록 한다. 




이 책은 왜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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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7-06-15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한계인가 싶어요. 다른 부분에서는 진보(?)라고 여겨지는 남자(!)들이 유독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계를 보이네요.
사실 좀 실망이긴 합니다. 맥락을 이해한다고 해도 말이죠.

다락방 2017-06-15 16:00   좋아요 0 | URL
저는 책을 읽고나니 이분이 여성을 바라보는 인식이 잘못됐다기 보다는, 어쩌면 본인도 남성이기 때문인지 남성에게 굉장히 기울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굉장히 안타까운 시선으로 남자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저랑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레와 2017-06-1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해를 못 하는걸까, 안 하는 걸까?

다락방 2017-06-15 16:00   좋아요 0 | URL
‘남자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걸까... 이렇든 저렇든 안읽어도 되는 책임.

블랙겟타 2017-06-15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핫(?)한 책을 얼른 읽어보셨군요 다락방님,
나름 안 내정자는 보통의 남성들 중에선 진보적인 관점을 많이 가졌을꺼라 봐요. 하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이 책이 접근하는 방식부터가 에러네요. ˝ㅎㅎ 우리가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놈이잖아. 어쩌겠니?˝ 라는 투의 관점으로 대부분의 문제들을 사회적 맥락을 무시한채 생물학적인 본성으로 접근해버리면 남성들의 본능이나 인식을 스스로 바뀔때까지 여성들은 기다려야만 하나요? 이런식의 접근이 아무리 현실의 한계를 고려해서 썼을지라도 얼마든지 잘못된 결론으로 이어질수 있을 가능성이 있기때문에 잘못된 접근이라고 생각해요.

다락방 2017-06-15 16:03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블랙겟타님. 진보적인 관점을 갖고 있고 페미니즘에 대한 것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이 사회를 이만큼까지 끌어올린게 성평등을 주장하는 여성들이라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더라고요. 지금의 젊은 남성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역시 가지고 있는데, 글 자체가 뭐랄까, 뭘 어쩌라는건지 잘 모르겠어요. 남자는 왜 젊은 여자를 안고 싶은 것도 본능이고 여자끼고 술마시는 것도 다 본능인걸까요... 본능은 대체 뭐란 말입니까!

블랙겟타 2017-06-16 14:03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언론사에서도 서평을 썼더라구요 ㅎㅎ
‘프레시안‘의 서평인데요 시간되시면 읽어보셔요 ㅎㅎ
https://goo.gl/X1Si3j

다락방 2017-06-16 14:15   좋아요 1 | URL
잘 읽었어요. 은하선에 대한 평가부분은 저도 ‘이게 왜 자기가 평가할 일인가‘ 하고 리뷰에 언급할까 하다 말았는데(밑줄 그어놨어요), 프레시안 서평에서도 언급하네요. 올려주신 리뷰의 뉘앙스는 제가 쓴 리뷰랑 같네요. 그렇지만 뭐랄까, 저보다 훨씬 잘썼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질투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블랙겟타님.
잘 읽었어요.
블랙겟타님, 제가 응원합니다. (뭘?)
아무쪼록 열심히 읽고 써주세요. 그리고 여기에도 자주 오셔야해요!!

안전가옥 2017-06-15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발췌한 글에서 나름 좋게 봐서 주문할라고 왔는데.... 리뷰보고 어떤책인지 딱 각이 나오네요... 제목의 선입견을 뛰어넘지 못했군요. 어쩐지 제목부터가 좀 껄쩍지근한 느낌이 있어서 들고 다니거나 책장에 꽂아두기 좀 그렇겠다 걱정했는데..
리뷰 잘 봤습니다.

다락방 2017-06-15 16:05   좋아요 0 | URL
분명히 남성의 성적인 본능만 가지고 책 전체를 채우지는 않아요. 리뷰에 쓴것처럼 오히려 세상을 보는 눈은 다른 남자들보다 더 낫다고 보여집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문제‘를 ‘문화‘로 이해해버리면, 발췌독 가지고 사람들이 분노하는 데에 대해서 딱히 변명할 순 없다고 보여져요.
이런 책은 왜 쓴건지..모르겠어요.

2017-06-15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7-06-15 16:06   좋아요 0 | URL
어휴, 정말 지치네요. 한자리 차지하기 위해서는 착하게 살아서는 안되는가 봅니다.
착하다는 건 뭔지...

비공개 2017-06-15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자책으로 사서 읽다가 재미가 너무 없어서 때려치웠는데, 다락방님은 다 읽으셨군요. 남성들이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해온 범죄행위들이 어쩔수 없는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니 이해는 해주자 라는 생각을 기저에 깔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남성분. 아.. 답이 없네요. 핵심을 짚어주심에 감사합니다.

다락방 2017-06-16 08:39   좋아요 0 | URL
저도 전자책으로 사서 읽었어요.
이 책이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더라고요. 다른 책들 짜집기한 책을 읽는 기분이랄까요.
누구를 위한 책인지, 왜 쓰게 된 책인지 모르겠어요. ㅠㅠ

자강 2017-06-15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제목과 내용이 매치가 안되는 책이었습니다

다락방 2017-06-16 08:39   좋아요 0 | URL
자강님도 읽어보셨군요.
맞아요. 그러고보니 남자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한 답은 그냥...본능적으로 성욕을 갖고 태어난 동물이다..밖에 안되는거네요. -_-

2017-06-15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17-06-16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어찌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남성‘의 심정을 토로?하기 위해 쓴 게 아닐까요. 방향도 의미도 사람까지 다 빻았는데 저자와 출판사만 모르고 있었던 어떤 그러한 것

다락방 2017-06-16 11:15   좋아요 1 | URL
뭐 딱히 또 토로?한 것 같진 않고요. 뭔가 이 책은 그냥 이도저도아닌 책인 것 같아요. 단순한 짜집기의 나열... 뭐라 설명할 순 없고, 아치 말대로, ‘어떤 그러한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요. 아 웃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떤 그러한 것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맞다. 아치, 나 그 책 샀어요. 부엌 에세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Arch 2017-06-16 22:00   좋아요 0 | URL
어떤 그러한 것. 진짜 다락방은 이런거 잘 찾아내

샀을 것 같았어요. 맘에 들길. ^^

책한엄마 2017-06-17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하네요.이 책 사고 말아서-ㅠㅠ사지 말걸..

다락방 2017-06-17 10:45   좋아요 1 | URL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안타깝네요 ㅠㅠㅠㅠㅠ
 
페미니스트 모먼트
권김현영 외 지음 / 그린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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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이 '무뇌아적 페미니미스트'에 대한 언급을 할때만 해도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내 자신을 정의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서 페미니즘은 내 관심밖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우습게도 단 한순간에, 뭔가 잘못됐다, 라는 걸 인식하자마자, '페미니즘을 공부하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 잘못됐다는 인식은, 내 주변의 어떤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책 속 등장인물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책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과 남성들 때문이었는데, 왜 이렇게 여자들이 불공평한 삶을 살아냈지, 이거 왜이러는거지, 이거 너무 화나는데, 혹시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게 되면, 그러면 이 답답함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게 될까? 했던 거다. 그리고 그 책은, 몇 번 언급했지만, '최명희'의 《혼불》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김태훈의 칼럼 때문에 또 누군가는 장동민의 발언 때문에 분노했을텐데, 나는 혼불 속의 강모 때문에 이미 딥빡침이 왔던 거다. 아아, 독서는 이렇게 어디로 나를 데려갈지 모른다. 최명희는 그 글을 쓴 의도가 어찌했든간에, 나를 페미니즘으로 이끌어버린 것이여. 어쩌면 그것은 최명희가 의도한 바로 그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주말에는 한 남자사람이 내게 페미니즘에 대해 내 생각을 물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는 남자사람이었고, 혼자 책을 읽다가 머릿속에 고민이 쌓이고, 그러다보니 내게 말을 걸게 된 것이었는데,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얘기하고 있고, 또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고 정리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누군가 내게 의견을 묻는다는 것은 조금 긴장되고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명징한 답을 주기보다는, 그 답을 알았다기 보다는, 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점점 더 답에 근접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답은 아닐지 몰라도 어떤 방향을 잡게 된다고 할까. 페미니즘에 대해 물을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고, 내가 그것을 잘해낼 수 없을 것 같아 조심스러웠는데, 페미니스트가 어떤 정답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스스로에게도 계속 얘기해야 겠다고, 그 대화 후에 생각했다. 확정된 답, 정해진 답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추구하는 그 방향을 계속 보면서 그러나 수시로 '잘 가고 있나', '맞게 가고 있나'를 확인해야 겠다고 생각한 거다. 



여섯명의 공저자가 쓴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읽으면서, 이 사람들, 이렇게나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말하고 쓰고 있구나 싶어서 고마워졌다. 그리고 나 역시 궁극적으로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러지 않으려고 하지만, 진짜 내가 그런거 싫어하지만, 또 잠깐동안, 대학교를 다시 들어가거나 대학원에 진학해서 본격적으로 여성학을 공부해볼까, 하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안돼... 나 학교 다니고 숙제 하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야..... 괜히 등록금 날리지마. 이십년전에 대학 다닐 때 등록금 날린 거로 이미 내 생애 등록금은 다 날린 거야... 지금처럼만 해, 지금처럼만... 욕심내지 마....



지금처럼만 하자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더 발전이 없는 것 같아서 초조하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어떠한 물음에도 답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고, 더 넓은 시야를 가졌으면 좋겠고, 더 확장된 사고를 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좀더 전문적인 공부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싶어지는 거다.


아니야, 학교갈 생각하지마. 방통대 자퇴한 거 떠올려봐...




'되돌아갈 길은 없다'는 책의 표지에 적힌 문구는, 모두에게 그렇겠지만, 내게도 역시 그러하다. 나는 되돌아갈 길은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페미니즘의 세계로 들어와버린 이상, 나는 다시 예전의 내가 될 수가 없어. 그렇지만 멈춰 있고 싶지도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내가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고 있지 못할까봐 조바심이 난다. 그래서 지금처럼 하는 공부지만, 본격적인 공부랄 수도 없지만, 멈추지 말아야지, 책장을 덮으며 생각했다. 




이 여섯명의 공저자가, 이미 페미니스트로 책을 쓸 수도 있는 이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내가 페미니스트인가',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하고 고민하는 게 너무 좋았다. 페미니스트는 고민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들도 과거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잘못 알았다고 반성하고 후회하며, 그리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은 어떤 것일까를 또 끊임없이 고민한다. 나도 내 자리에서 계속 나를 들여다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거운 다리를 들어올려야겠다. 그리고 그 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라면 친구들이, 연인이라면 연인이, 페미니즘을 향해 걷고 있는 길에 함께였으면 좋겠다.



2015년, '코르셋'을 벗어 던진 이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만연한 여성혐오에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 과거에 그랬듯이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들이 딴지 거는 방식이 과격하다고 진단 내리는 중이고 이들이 말하는 핵심(몰래카메라 근절, 성차별 금지, 성폭력 근절 등)을 버릇처럼 외면한다. 어떤 이들은 메갈리아를 '여자일베'라고 부르는 일('여자'라는 접두어를 붙이는 일)을 서슴지 않으면서 성에 따른 차별이 난무한 사회구조를 뭉개고 '상호혐오'로 퉁쳤다. 언론은 메갈리아를 남성혐오 집단으로 몰아가는 일에 톡톡히 기여 중이다. 이런 걸 보면 지금의 한국사회는 분노를 기각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나의 스무 살때보다 더 세련됐고 더 고약해졌다. '그 정도로 화가 나 있었구나. 그동안 여성혐오를 이렇게까지 방치했다니. 이제부터라도 같이 바꿔 보자'라는 정도의 공감과 이런 수준의 연대를 기대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적어도 메갈리안이 한국사회에 왜 등장했는지에 대해서 질문해 보고, 단 몇 분만이라도 이분법적 젠더 위계로 구획된 세계에 대해 숙고해 볼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는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사람들은 여성들의 분노를 기각하고 '여성이 (감히)분노했다'는 것에 더 격하게 분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성들의 분노에 대한 1997년의 응답이 '어리둥절'이었다면, 2016년 한국사회는 분노한 여성에 대한 '응징'으로 답한다. 누가 너희에게 분노해도 된다고 허락했느냐며 버럭 하는 모양새다.

2015년 5월 메르스 갤러리의 문이 열린 후 여기저기 페미니즘에 눈뜬 이들이 메갈리아로 몰려들기 '시작'할 때, 그러니까 성차별적 사회를 알아 가기 시작한 사람들이 메갈리아로 채 몰려들기도 전에 이미 사람들은 메갈리아를 부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곳곳에 메갈리아를 비난하지 못해 안달난 이들이 즐비했다. '메갈리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혐오에서 시작해서 혐오로 망할 것'이라는 진단 속에서, 사람들은 '분노해도 될지 말지'를 생각하고, 설사 분노하기로 결정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메갈리아로 몰려들지 말지를 두고 머뭇거렸다. 메갈리아가 일평생 미러링(만)을 할 건지, 성-비하(만)를 쏟아 내다 망할 건지, 어떻게든 결국 망할 건지, 아니면 움직이는 시도들 속에서 분화하고 논쟁하고 숙고하고 변화할 것인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메갈리아에 대한 사망선고는 생후 3개월을 넘기지 않고 일어났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었던 건지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모든 것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변화하고 이동하는 것일 텐데 사람들은 왜 메갈리아의 필멸(必滅)을 탄생 한 달 후부터 줄기차게 예측하고 있었던 걸까. 마치 메갈리아의 죽음을 선언하기 위해 처음부터 죽이기로 결정한 것처럼, 그렇게 세상은 작정한 듯 한통속으로 메갈리아를 궁지로 몰아갔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예측한 대로, 혹은 목표한 바대로 '메갈리아'는 그 이름을 잃어 가는 중이다. 우르르 몰려들어 함께 분노하고, 그 분노를 어떻게 조직화하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이야기하기도 전에 그 공간은 오명에, 오명에, 오명을 뒤집어썼다. 성폭력 생존자들의 네트워크이자, 언어를 갖지 못해 입 없이 살던 이들이 언어를 찾은 공간이고, 지지받지 못해 온 이들이 힘 받는 공간이면서, 먼저 코르셋 벗은 이들이 알려 주는 소소한 노하우로 키득거리던 공간은 이쯤에서 변태를 꿈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김홍미리, p.155-158)





'메갈리안이 페미니스트냐 아니냐'라는 질문은 참 의미 없지만, 굳이 물어 오고 또 굳이 답해야 한다면, 그렇게 묻는 이의 의도에 맞추어 '물론 그러하다'라고 답해야겠다. 메갈리안은 특정되지 않는다. (메갈리안은 누구이고, 페미니스트는 누구란 말인가?) 메갈리아를 방문하거나 메갈리아에 관심 있는 모두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자처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와 반대로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아닌 것도 아니다. 때문에 그 질문은 메갈리안과 페미니스트 둘 다를 물화시킨다는 점에서 위험할 뿐 아니라 그 둘의 분할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더욱이 페미니스트는 인증을 통해 확인받는 자격증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젠더로 구획된 세상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하고, 질문하기를 시작한 이상 삶의 장소로서 세상이 나를 향해 던져 오는 질문에는 끝이 없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는 '나는 페미니스트 맞나?'라는 질문 속에서 산다. 질문을 시작한 이상 누군가가 나를 페미니스트로 부르든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정하든 그건 그리 중요하지가 않다. 페미니스트 '이다/아니다'라는 타인의 진단이 나를 규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김홍미리, p.164-165)

여성심리학자의 창시자인 카렌 호나이(1885-1952)는 성차별적 환경의 영향으로 남자들은 업적을 통해 성취를 이루려고 하는 반면, 여자들은 사랑을 통해 성취를 이루려 한다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대문에 여자들이 자신의 재능과 꿈을 밀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때로는 주변의 평가에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가 필요하다. 같은 시기 영미문학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던 헨리 제임스는 조르주 상드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상드의 재능이 천재적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여성에게 천재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의심스러운 것은 상드가 정말 여자인가 하는 사실이다."
당시 상드의 친한 친구였던 그는 자신이 상드에게 최고의 찬사를 바쳤다고 생각했지만 이 말은 여성의 천재성을 전혀 인정할 수 없어 하는 대표적인 문장으로 두고두고 비아냥거리가 되었다. 조지 엘리엇은 "나는 확실히 여자들이 어리석다는 걸 안다. 신이 여자를 (어리석은)남자에게 어울리게 만들었으니 당연하다" 라며, 여자들이 어리석은 존재라면 남자 또한 반드시 그러할 것이라며 여자를 폄하하는 남성비평가들을 비웃었다. (권김현영, p.23-24)

인도의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의 표현대로 무지는 그 자체로 ‘특권‘이다. 누가 이 상황을 참아 내고 있는지 모를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을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특권을 가진 이들에게만 가능하다. 서 있는 위치를 바꾸어 보기면 하면 얼마든지 다른 질문이 만들어지고, 다른 질문은 다른 지식으로 우리를 안내하 간다. 때로는 질문이 문제가 아니라 대답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왜 위대한 여성예술가, 여성철학자는 없지?‘라는 질문에 천재성은 남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던 헨리 제임스가 있었는가 하면, 미국의 급진주의 여성미술 단체 게릴라걸스와 여성철학자들은 이 질문을 추적하던 중 기존 미술사에서 대가로 칭송받은 남성 예술가들이 자신의 딸과 애인의 작품을 가로챘다는 걸 발견하기도 했다. (권김현영, p.39)

이 글의 모든 참고문헌은 여자들의 말과 글로 이루어졌다. 분리주의나 자매애 때문이 아니다. 내게 필요했던 대부분의 지식은 여자들이 만들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쓰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되었다. (권김현영, p.44)

여하튼, 덕분에 여성학과에 진학하고 언니네트워크 활동을 병행했던 약 5년여 동안 아버지와 남동생을 제외하고는 인생에 남자가 주요 인물로 전혀 등장하지 않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여성들만으로도 충분했고, 완전했다. (전희경, p.201)

(대담중에서)
권김: 그러면 덧붙여서 잠깐, 미디어 비평을 하시기도 하니까, 김태훈 같은 칼럼니스트가 ‘무뇌아적 페미니즘‘에 관해 쓴 칼럼에 대한 코멘트를 들어보고 싶기도 한데요. (웃음) (p.238)

손: 사실 그 칼럼의 의미는 2015년까지의 한국의 페미니즘 지형이랄까, 아니면 문화적 지형이랄까, 여혐 지형도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징후적 칼럼이었다는 점에 있는 것 같아요. 그야말로 페미니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무 말이나 해도 괜찮은 사회. 그게 한국사회이자, 한국 사회의 페미니스트 혐오였던 거고요. 여러 가지 현실적인 상황들이 중첩되면서 염증을 느끼고 있던 여성들이 드디어 ‘악!‘하고 소리를 지르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준 것 같아요. 그리고 저 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글을 써도 남자들은 부끄럼 없이 지면을 쓰는구나. 그러니까 우리도 부끄러워하지 말자‘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고요. 우리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글은 안쓰잖아요. (웃음) 그리고 그때부터 더 적극적으로 ‘지면은 기회가 오면 무조건 잡아서 누그든지 내가 동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나눈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 사람들이 더 이상 그런 식으로 활개를 치게 놔두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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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2017-06-15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이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을 하나만 알려드리면 여성의 의무군복무에 대해 적극적으로 찬성하면 됩니다
그런데 페미니스트 분 가운데 여성의 군복무, 최소한 공익근무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분은 한 분도 없는게 페미니즘 발전의 가장 큰 장벽이예요.

다락방 2017-06-15 10:17   좋아요 1 | URL
페미니즘을 1도 모르는 댓글이네요.
공부좀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최소한 제가 페미니즘 관련 책 리뷰 쓴 것만 읽었어도 이렇게 댓글 쓰진 못할텐데요.
실망입니다.

제이슨 2017-06-15 17:5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여기에 대해서는 대부분 페미니스트들이 거의 같은 반응을 하는것 같아요
컨텐츠에 대해서는 함구...

다락방 2017-06-15 18:19   좋아요 1 | URL
여성들도 군대에 가야 한다고 헌법소원 제기한 게 여성이라는 사실은 알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페미니스트들을 다 만나보셨어요?
페미니즘 책 조금만 읽어도 군대에 대해 얘기하는 페미니스트들 좌르륵 나오거든요?
그리고 어디 페미니스트한테 페미니즘 인정받는 방법 얘기를 해요... 지금 뭘 잘못한건지 감이 전혀 안잡히세요?
‘알지도 못하면서‘ 맨스플레인 하고 계십니다 지금.

2017-06-15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굿모닝 말레이시아
조경화 글, 마커스 페들 글 사진 / 꿈의열쇠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에 대한 리뷰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평이 나쁜데, 아마도 '나쁠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봐서인지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저자가 똑똑하고(학창시절에 공부를 잘했던 것 같다), 많이 생각하는 사람인 것 같아서, 더 열심히 글쓰기를 한다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실망스런 부분은 사진 부분이었는데, 한국인 아내가 글을 쓰고 캐나다인 남편이 사진에 취미를 붙여 사진을 찍었다고 했는데, 사진이 안좋더라. 뭐 각자의 취향이니, 자기가 좋은대로 찍고 싶은대로 찍었겠지만, 여행기는 대체적으로 사진이 큰 영향을 미치는 바, 내게는 맞지 않는 취향의 사진들이었다. 나는 역시 베트남 쌀국수 여행 책이 여태 읽은 여행 책 중에 최고로 좋았어.....



어떤 호텔에서는 '두리안'이 반입금지인데, 가격이 비싸고 날카로운 돌기가 나있고, 냄새는 화장실 변냄새와 같은데 맛에 대해서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 두리안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렇게 끝맺는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개성 있는 사람은 속된 말로 튄다. 눈에 띄게 되어 있다. 모든 사람과 결코 다 잘 어울릴 수 없다. 모든 사람이 결코 다 좋아하지 않는다. 예전 우리 풍토에선 이런 유의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개성을 우스갯소리로 '개 같은 성질'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21세기가 요구하는 인간형은 창의적인 인간 즉 개성이 뚜렷한 사람이다. 두리안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반입금지'와 같은 피할 수 없는 외로움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가장 필요한 것 같다. (p.156)




읭?

여기 뭔가 이상해.. 뭔가, 억지스럽달까... 이 부분 읽으면서 읭???? 했더랬다.




안좋은 리뷰를 보고난 후에 선택해 읽은 책이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말레이시아 여행을 결정하는데, 한 방이 더 필요해!! 하고 있다가, 그 한 방이 되어주기에는 충분했다. 맛있는 먹거리가 많다고 한다................ -0-





영국의 한 대학에서 조사한 바로는 인간이 습관을 만드는 데는 ‘66일‘ 정도가 걸린단다. 이게 습관이 되면 오히려 안 하면 찝찝해진다. 습관은 사람의 성격을 만들고 성격은 인생을 변화시킨다고 했다. 난 내가 나를 위해 직접 정해봐야겠다. 하루에 다섯 번, 아니 한 번만이라도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는 것으로 뭐가 좋을까?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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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7-06-13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레이시아 가세요? ... 쿠알라룸푸르.. 좋은데 말이죠. ㅎㅎㅎ

다락방 2017-06-13 09:28   좋아요 0 | URL
네, 쿠알라룸푸르에 먹방 ... 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마땅히 마음에 드는 말레이시아 여행기가 없네요... (시무룩)

비연 2017-06-13 12:25   좋아요 0 | URL
저도 그 때 갈 때 마땅한 여행기가 없어서 그냥 여행책자 들고 갔던 기억이...;;;;;
아 그래도 다시 가고 싶네요. 쿠알라룸푸르 먹방여행이라닛! 으. 놀고 싶어요.

다락방 2017-06-13 16:02   좋아요 0 | URL
저도 여행책자 들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직 사진 않았는데, 여행책자 들고가는 건 싫은데 ㅠ 그것 말고는 답이 없을 듯. 베트남은 국수책 들고 가면 진짜 끝내줬는데요!

비공개 2017-06-13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생이 말레이시아에 살던 2013년에 3주간 가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정말 갈데가 쇼핑몰밖에 없더라구요.. 쇼핑몰에서 유모차에 꽂아둔 아이폰을 잃어버렸던 기억만 ㅠ 말레이시아 먹방은 몰까 궁금합니다. 다녀오셔서 후기 남겨주세요^^

다락방 2017-06-13 16:03   좋아요 1 | URL
ㅎㅎ 거기 꼬치도 있고 면도 있고 그래서, 제가 며칠 안있겠지만, 가서 죄다 먹어보고 오겠습니다! ㅎㅎ
지금 당장 갈 건 아니고요, 여름에 갈 거예요. 휴가때요. 후훗.
아이폰 조심해야 하는군요.
호치민 갔을 때 안그래도 길에서 어떤 아저씨가 제 손에 든 아이폰을 보고는 가방에 넣으라고 충고해주시더라고요. ㅠㅠ
 
단어의 사생활 - 우리는 모두, 단어 속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제임스 W. 페니베이커 지음, 김아영 옮김 / 사이 / 201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감정을 바깥으로 표현해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감정들은 입밖으로 내는 순간 더 진해지지만, 어떤 감정들은 입밖으로 내는 순간 그 크기가 작아지고 따라서 내 속도 편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감정을 입밖으로 내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그들이 말을 했으면, 싶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들을 더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내 경력으로 말하자면 초기에는 건강, 감정, 트라우마 경험의 특징등을 연구했다. 그러다 1980년대 초반, 나는 우연히 발견한 사실에 마음이 끌렸다. 지독한 트라우마 경험을 혼자서만 간직하는 사람들은 그 경험을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들에 비해 건강상의 문제가 훨신 많았던 것이다. 비밀을 간직하는 것이 왜 그리 해로울까? 더 중요한 질문을 하자면, 강렬한 감정을 수반하는 비밀을 터놓는 사람들은 더 건강해지는 것일까? 나와 제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금세 알게 되었다. 답은 <그렇다> 였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루 15분에서 20분 정도씩 사나흘 연속으로 자신의 트라우마 경험에 대해 글로 써보라는 실험을 시작했다. 그 결과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 글을 쓴 사람들은 아무런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주제에 대해 글을 써야 했던 사람들에 비해 건강이 호전되었음이 증명되었다. 이후의 연구들에서는 감정을 표출하는 표현적 글쓰기expressive writing 가 면역 기능을 높이고, 혈압을 낮추며, 우울한 감정을 줄이는 한편 평소의 기분도 더 나아지게 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최초의 글쓰기 실험 이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계 전역에서 2백 건 이상의 비슷한 실험이 수행되었다. 연구 결과는 그리 대단치 않을 때도 많지만, 감정의 격변을 <언어의 변환>하는 단순한 과정은 신체적 및 정신적 건강과 꾸준히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p.26)




내가 이토록 건강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언제나 말과 글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다. 나는 계속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므로, 앞으로도 이렇게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겠구나. 실제로 나는 아주 많은 감정을 글을 쓰면서 다스리곤 한다. 분노도 슬픔도 기쁨도 행복도, 뭐든 글로 쓰는 것이 내게는 좋고 편하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책의 내용이 막 어렵다거나 한 것은 아닌데, 우선적으로 이 책은 '영어로 읽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은거다. 번역된 채로 이 글이 원래 전하던 바를, 다른 문학작품이 그러한것보다, 완벽히 전달하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싶은 거다. 원서로 읽으면 뭔가 더 와닿지 않았을까 했던 것. 또한 사람들의 단어(내용어와 기능어)를 연구해서 그 사람에 대해 파악한다는 것은 의미있고 중요한 일로 보이지만, 그것은 그저 우리가 추측하는 것에 비해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일뿐 완전한 방법도 아니며, 매번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라는 식으로 되어서 흐음, 하고 약간 갸웃하게 되는 것이다. 


그건그렇고, 아니, 이 세상에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말과 글을 계속해서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거기에 흥미를 가지고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 넘나 신기하고... 이 세상은 내가 알지 못하는 분야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어서 굴러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일전에 고래를 연구했던 박사에 대한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처럼, 내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누군가는 꽤 흥미를 갖는다는 거,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지 않은가.



이 책에서 이메일을 연구하고 단어와 말, 트윗을 연구하는 이 심리학자 덕에, 나는 이메일로 언어를 연구한다던 레오(그래, 바로 그 레오!) 생각이 났고, 덕분에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다시 읽게 되었다. 이 새벽 세시 얘기는 몹시 길어질 것 같으므로 따로 페이퍼를 작성하기로 한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요, 당신 남자예요 여자예요?" 독자 여러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는 말아요." 라고 시작하는 문장 치고 듣는 사람에게 좋게 끝날 수 있는 문장이 있을까? 브리타니는 자기가 못되게 굴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예고한 것이다. (p.89)





일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상사가 내 밑에 직원에게 늘상 하는 얘기가 "기분나쁘게 듣지 마, 나는 속에 품지는 않아, 금세 잊어버려" 였단다. 그러면서 그 직원은 내게 하소연 했더랬다. '아니, 자기는 꽁하고 있지 않는다면서 나한테도 그러라고 잔소리 실컷 하는데, 제가 목석이에요?" 하는 거였다. 저 말 너무 웃기지 않나.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 라니. 어디다대고 명령질이야 ㅋㅋㅋㅋㅋㅋ 내 기분을 왜 니가 컨트럴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겁나 어처구니 없는 말이다. 하하하하하. 저 말 딱 듣는데 그 상사 생각 넘나 났고..... 아 싫어...


무릇 상사들이란 그래야하는걸까..싫어야 하는걸까...그런데 나도 상사..이지.....인생 뭘까?



신디의 발견에 따르면 다이어트 성공을 가장 잘 예측하는 지표는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 참여 여부다. 요컨대 다른 사람들과 메시지나 게시물을 더 많이 주고받을수록 살 빼는 데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글을 쓴 사람들은 음식과 다이어트에 대해서만 글을 쓴 사람에 비해 훨씬 성공적으로 살을 뺐다. (p.198-199)



위의 문장대로라면, 아아, 나는 지금 모델을 하고 있어야 하지 않나......?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인지적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인지적 단어는 다양한 사고 과정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통찰력을 보여주는 단어(이해하다, 알다, 생각하다), 인과적 사고를 나타내는 단어(왜냐하면, 이유, 근거), 이와 관련 있는 여러 차원들의 단어를 포함한다. 여자들이 이러한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는 사실은 여자는 남자보다 합리적이지 못하고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없다고 믿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뺨을 후려갈기는 셈이다. (p.248)



후훗. 아리스토텔레스의 뺨을 후려갈겼다!




서로의 지위를 판단하는 행동은 영어를 사용하는 대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사실 훨씬 더 간단한 잣대로 지위를 가늠하는 사회도 있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사회적 서열을 판단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가 나이다. 나이가 같으면 그 다음에는 재산이나 수입으로 파난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서로의 생활에 관해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일이 흔하다. 서양에서는 이런 행동이 무례하다고 여겨질 수 있다. 한 예로, 나는 치ㅗ근 한국에 다녀오는 길에 나와 나이가 얼추 비슷해 보이는 한국 남자 옆에 앉았다. 비행기가 이륙한지 10분 정도 지나자 그는 내 나이를 물으면서 말문을 텄다. 우리가 정확히 같은 나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그는 내 연간 수입이 얼마인지 물었다. 내가 대답하자 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만 말했다. "뭐 둘 다 비슷하네요." 아마 그가 나보다 수입이 훨씬 높은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후 나와 대화하면서 더 편안하게 느낀듯했다. (p.90-91)

수치스럽거나 자신의 평판을 해칠 수 있는 사건은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질 때가 많다. 나는 이것을 일찍이 발견하고, 17세 이전에 트라우마가 될 만한 성경험을 한 적이 있는지 묻는 항목을 설문지에 넣었다. 수천 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여자의 경우 22퍼센트, 남자의 경우 11퍼센트가 그런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특히 충격적인 점은 이렇게 답한 집단이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 비해 건강 상태가 훨신 나빴다는 사실이다. 이후 수행된 연구들에 따르면 문제는 그런 성적인 트라우마가 거의 모두 비밀이라는 점에 있었다. 어떤 유형의 사건이든 사람들이 혼자서만 알고 있는 일은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해로울 가능성이 높았다.
중요한 감정적 격변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에 어긋나는 일이다. 우리는 감정적 사건을 겪으면 대화를 나누고 싶어진다. (p.199-200)

감정은 단순히 사건에 대한 반응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다양한 감정들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다른 사람들에게 반응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감정은 사람들을 가까워지게 하거나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사회적이다. 감정은 다른 사람들의 동기, 목표, 의도에 대한 의미 있는 신호이기도 하다. 기능어와 감정 상태는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감정은 우리가 세상을 다르게 생각하게 하고, 기능어는 이런 생각의 변화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p.201)

생각과 감정의 관계는 여러 세기 동안 철학과 심리학에서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논리와 감정도 근본적으로 다른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17세기 학자 데카르트는 한 발 더 나아가 감정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훼손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초기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 역시 감정과 열정이 어떻게 판단을 흐리는지 강조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근본적인 감정의 문제들이 성격과 행동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우리는 감정과 이성에 대해 매우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뇌과학에서 발견된 점들 덕분이기도 하다. 이런 새로운 관점을 가장 설득력 있게 대변하는 사람 중 하나는 안토니오 R. 다마지오다. 다마지오는 전두엽이 손상된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써온 신경과학자다. 전두엽은 원시적인 감정 담당 영역과 추상적 논리 및 언어와 관련된 영역에서 보내는 정보를 통합한다. 이 통합은 상당히 광범위하게 일어나므로 감정과 생각을 뚜렷하게 구별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p.201-202)

즉 감정은 생각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 장의 핵심 메시지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감정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은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생각은 우리가 기능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반영된다. 한 발 더 나아가, 기능어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p.202)

글쓰기와 말하기에서 나타나는 형식성은 중요한 문제들과 관련이 있다. 형식적 사고를 주로 하는 사람들은 지위와 권력에 관심이 더 많고 자기반성적인 경향이 낮은 편이다. 이들은 덜 형식적인 글을 쓰는 사람들에 비해 음주와 흡연을 적게 하고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지만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덜 정직한 경향도 있다. 또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글쓰기과 말하기 스타일이 즉각적인 쪽에서 형식적인 쪽으로 변한다. (p.213)

분석적 사고는 그 사람이 인지적으로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말하거나 글을 쓸 때 구별을 하는 사람은 대학에서 더 높은 성적을 받고, 더 정직한 경향이 있으며, 새로운 경험을 열린 태도로 대한다. 이들은 또한 분석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낮은 사람에 비해 글을 더 많이 읽고 자기 자신을 더 복합적인 관점으로 본다. (p.214-215)

두 사람이 서로의 언어 스타일에 얼마나 빨리 적응할 수 있는지 알아내기는 어렵다. 앞서 살펴보았듯 낯선 사람과 대화할 때 이 적응은 보통 몇 초 안에 일어난다. 이때 두 사람은 상대방의 형식성, 명확성, 감성적인 정도, 사고방식에 맞추어 즉시 적응한다. 두 사람 모두 어떤 대명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즉 그녀, 그,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따라간다. 대화라는 공이 계속 굴러가게 하려면 둘 다 주제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사실 둘 중 한 명이나 둘 다 순간적으로 한눈을 팔거나 이상하게 행동하기 시작한다면(거짓말 등) 상대방은 대화를 계속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p.312)

한편 <우리>라는 단어는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한 연구에서는 심부전증 환자들을 배우자와 함께 인터뷰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비롯하여 여러 질문들에 대답했다. "두 분이 심장병을 극복해 오시면서 제일 잘한 일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배우자가 이 질문들에 답할 때 <우리>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 사람일수록 6개월 후 환자의 상태가 더 좋아졌다. 배우자가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환자의 건강 문제를 부부가 함께 전념해야 할 공통의 문제로 보았다는 의미였다. 부부가 병을 극복하려고 함께 노력하는 경우 환자의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줄어들었다. (p.318)

아마 우리는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넘치도록 행복하게 하거나, 미친 듯이 화나게 하거나, 깊은 슬픔에 빠지게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이대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그 사람의 이름은 뺀 채 그 사람을 가리키는 다양한 대명사를 넣어 말할 때가 많다. 따라서 말하는 사람이 한 친구에 대해 생각하면서 말하고 있다면 3인칭 단수 대명사를 높은 비율로 사용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p.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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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에게 간다
    from 마지막 키스 2017-05-29 11:05 
    우리는 미래에 대해 알 수 없다. 내가 언제 누구를 만나 어떤 상황이 될지 알 수 없고, 내가 당장 내일 무슨 책을 읽을 지도 알 수 없다. 나는 제임스 W. 페니베이커의 《단어의 사생활》을 읽다가, 심리학자인 저자가 언어에 대해 연구한 책을 읽다가, 아아, 언어를 연구한다고 했던, 내가 오래전에 사랑에 빠진 남자, '레오' 생각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마침 그냥 가볍게 훑어볼까, 하고 출근길에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들고 나왔는데, 가만있자
  2. 내가 얼마나 당신의 일기를 읽고싶은지,
    from 마지막 키스 2018-11-07 09:21 
    나는 자주 일기를 쓴다. 매일 쓰진 않아도 언제나 글을 쓰는 편에 속한다.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과 느낌은 이 곳에 쓰지만, 책과 상관이 없는 사적인 것은 네이버 블로그에 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사적인 내용,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좀 더 깊은 속내에 대해서는 늘상 가방 안에 넣고 다니는 다이어리에 쓴다. (이것이 나의 다이어리들...)기록은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있다. 내 경우엔 그렇다. 이 책, '서민'의 《밥보다 일기》에서도 일기의 중요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