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나는 아침마다 하워드 스턴Howard Stern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청취했다. 나는 하워드 스턴을 정말 좋아했었고 아직까지도 그렇다. 페미니즘에 대한 내 확신이 공고해짐과 동시에 그에 대한 지지를 쓰라린 마음으로 어느 정도 철회해야 했지만 말이다(어떤 면에서 보면 페미니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아가는 기나긴 과정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p.42)
내게 2017년 한 해는 '린디 웨스트'의 저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자리를 빌어 이 책을 선물해준 알라디너 책친구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페미니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아가는 기나긴 과정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현실에서도 그리고 책속에서도,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나를(우리를)미워한다는 사실을 번번이 깨닫게 되었다. 린디 웨스트가 '하워드 스턴'에 대해 지지를 철회한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누군가와 인연을 끊고 누군가에게 실망하는 일들이 곧잘 일어났다. 저 문장은 내내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필립 로스'에게 실망했고, '존 스타인벡'에게도 실망했다. '스티븐 킹'의 초기 작품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런데 그들이 너무나 유명한 작가들이란 사실 때문에 속이 상했다. 그들이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아왔고 또 앞으로도 받을 것인가. 필립 로스를 접으면서는 '이렇게나 글을 잘쓰는데, 이렇게 잘 쓴글로 우리를 미워하다니..' 하고 너무나 아픈 마음이 되었다. 저 문장은 2017년 나를 내내 사로잡는 문장이었지만,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다른 문장이 치고 나와 2018년을 또 2019년을 사로잡을지도 모르지만, 계속해서 저 문장은 함께할 것 같다.
'어떤 면에서 보면 페미니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아가는 기나긴 과정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페미니즘이 그런 걸 깨닫게 하기도 했지만, 반드시 페미니즘만이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다. 나는 어떤 인간관계에서는 상대가 내가 사랑한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아프게 깨닫기도 했다. 우리가 주고받는 사랑이란 게, 그 감정의 크기가 서로 같을 수는 없지만, 나는 내 안의 사랑이 커서, 어떻게든 유지하고 지켜나가려고 하고 받아들이려고 하고 공부해보려고 했는데, 사랑은 그저 사랑이라는 나 혼자만의 큰 감정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어떤 노력과 어떤 애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질없다. 그래서 2017년은 내게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깨닫는 아픈 해로 정리되고 있다.
그리고 이만큼의 책을 읽었다.
정리를 좀 해보자면,
의도했던 바는 아닌데 10월을 제외하고는 페미니즘 도서가 빠지지 않고 들어있다. 그런데 10월에 무슨 일이 있어서..책을 한 달동안 두 권밖에.. 못읽었지? -_-
5월달에는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와 《일곱 번째 파도》를 재독했다. (일곱 번째 파도는 옆으로 화면이 넘어가서 보이질 않는다. ireaditnow 앱이 열 권인가를 넘어가면 왼쪽으로 화면을 밀어야 책이 보여가지고.. 민 상태에서 내가 캡쳐한 모양이다.)
6월달에는 《올리브 키터리지》를 재독했다. 일곱 번째 파도와 올리브 키터리지 모두, 2017년에 새로 사귄 나의 다정한 책벗과 같이 읽었다.
책벗과 같이 읽은 책은 저 두 권말고도 또 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와, 아직 진행중인 '보부아르'의 《제2의 성
》. 제2의 성 올해까지 다 읽는 게 목표였는데, 2권 펼치자마자 멈춰있는 상태이다. 하아- 이거, 2017년에 끝내고, 2018년에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은데.... 도전할 책 많은데... -0-
2017년, 가장 재미있고 의미도 있었던 '올해의 도서'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다. 와, 여기엔 진짜 .. 다 들어있다. 그러니 그냥 다들 읽으라 말하고 싶다. 내가 그간 알고 있었던, 생각했던 것보다 풍부한 이야기가 이 책 한 권에 다 담겨있다. 한 권짜리인데, 문학동네 고전으로 읽으실 분들은 양장본으로 추천한다. 읽고나면 느껴지는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아진다. 일 년간 한 권의 소설만 읽을 수 있다면, 이 책을 고민없이 추천한다.
http://blog.aladin.co.kr/fallen77/9757697
http://blog.aladin.co.kr/fallen77/9755298
http://blog.aladin.co.kr/fallen77/9753104
2017년 '올해의 노래'는 '심규선'의 <아라리>에 주기로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박정현'의 <그 다음해>를 알게 되어, 요즘은 사실 그 다음해를 흥얼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아라리를 처음 들었을 때, 밥 먹기도 힘들었던 그 감정에 대해 기억한다(그렇다고 밥을 못먹은 건 아니고 차돌된장 시켜서 삭삭 다 먹긴했다). 그렇게 심규선의 콘서트에 가서 울었던 것도.
엊그제 여동생에게 '박정현'의 <그 다음해>를 들어보라 했는데, 어제 듣고 나서는 내게 감상을 말해줬다. 나는 언니처럼 그렇게 그 노래를 느낄 순 없는데, 완전 언니 노래더라. 언니가 어디에 꽂혔는지도 알겠어, 가사가 언니 가사더라고, 하면서 내가 꽂힌 부분의 가사를 얘기하는데, 와- 소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확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 여동생이라 나를 잘 아는건가, 아니면 나는 유독 파악이 쉬운 인물인가. 여러분도 듣고 내가 어디에 꽂혔을지 맞혀보세요~ ㅎㅎ
올해의 영화는 《티스》. -모든 여자들의 질에 이빨을!!
올해의 뉴페이스는 syo님, jsshin 님
올해의 인물은 엄마.
겸손함을 배우는 한해였다. 내 몸이 얼마나 비루한지에 대해서 알게되었고, 아직도 더 많이 배워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생각한만큼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절감했고, 전체적으로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에 대해 알게되었다. 아, 나이 들면서 나는 겸손을 알게 되는구나, 했다. 그런 한편, 내가 나에 대해 끊임없이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좀 더 자랐다는 증거이겠다. 결정이나 선택을 함에 있어서 나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뇌곤 한다. 재차 묻는다. 자, 나는 이 결정에 후회하지 않을것인가.
그러나 그렇게 고민한다고 해서 언제나 최선의 결과만 내 앞에 놓이는 것은 아니다. 이만큼이나 나이를 먹고 계속 공부하고 생각하고 노력하는데도, 여전히 모자란 발언을 하고, 몸은 마음대로 안움직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떠난다. 나이들면 아픔에 무뎌지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인간은, 어쩌면 나에 한정된 얘기겠지만, 끊임없이 깨지고 부딪치고 쓰러지고 울고 아파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것 같다.
물론 좋은 일들도 많았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고, 오래된 친구들과는 더 단단해졌다. 생애 가장 근사한 섹스(인생 섹스!)도 올해 있었다(그는 나에게 맞춤한 자지가 되기 위해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걸까?). 잘 팔리진 않지만 새 책이 나왔고, 잘 팔리지 않는데도 다음 책에 대한 제안도 들었다. 마감이 있는 글쓰기는 못한다는 걸 알게되었고(한 기업의 사보에 글을 썼는데 생애 가장 엉망인 글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돈을 받고 글을 쓰는 일도 해보았다. 규칙적인 운동을 시작했고 아직까지 그 운동에 지치지 않았다. 페미니즘 강연을 여러차례 들었고, 나의 전투력은 상승했다. 내가 옳다고 믿는 쪽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서도 역시 생각했다. 아직 부족하고 모자란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또 앞서 나가고 있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호치민의 땀지랄과 쿠알라룸푸르의 공기 그리고 냄새, 프라하의 예쁨과 런던의 친절함을 경험했다. 동남아를 사랑하는 뜻밖의 나에 대해 알게된 것도 수확이다.
2018년에도 나는 상처 받는 일들에 맞닥뜨리겠지만, 물론 좋은 일들 역시 꾸준히 생길 것이다. 꾸준히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여행을 다니고 사랑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단단해져야 겠다고도 결심한다. 전투력은 풀파워로 충전할 예정이다. 싸울 일에는 싸울 것이고 물어 뜯을 일에는 물어 뜯을 것이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얘기를 하고 좋은 곳엘 가고 좋은 것들을 먹고 마셔야지.
몇 해 전에 내내 외우고 싶었지만 한 구절만 떠올랐던 시는 '김이듬'의 <겨울 휴관> 이었는데, 올해는 '이규리'의 <많은 물>이다. 이 시는 5월에도 내내 내 머릿속에 있던 시였는데, 12월에도 그렇다. 나의 2017년, 올해의 시.
'결국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많은 물
비가 차창을 뚫어버릴 듯 퍼붓는다
윈도브러시가 바삐 빗물을 밀어낸다
밀어낸 자리를 다시 밀고 오는 울음
저녁때쯤 길이 퉁퉁 불어 있겠다
차 안에 앉아서 비가 따닥따닥 떨어질 때마다
젖고, 아프고,
결국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삶에 물기를 원했지만 이토록
많은 물은 아니었다
윈도브러시는 물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밀어내고
있으므로
그 물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저렇게 밀려났던 아우성
그리고
아직 건너오지 못한 한사람
이따금 이렇게 퍼붓듯 비 오실 때
남아서 남아서
막무가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