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D 와 나는 연휴를 맞아 어딘가로 또 걷기 여행을 다녀오자, 했던 터다. 나는 자작나무숲이 좋다는 추천을 받고 인제를 가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인제 는 기차가 다니질 않는다. 나는..버스 타는 걸 몹시 두려워하고 버스를 타는 순간 긴장 상태가 되기 때문에 가급적 기차가 있는 곳을 선택하고 싶다. D 는 자신이 가고 싶어 했던 곳 여러 군데를 말했고, 그러다 우리는 기차도 있고 걷기 코스로 마련되어 있는 <김제 금구 명품길>을 택하기로 한다. 11km 를 걷는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풍경도 좋아보이지 않는가! 게다가 자작나무숲을 가지 못한 아쉬움을 '편백나무숲'이 달래줄 수 있을것 아닌가! 우리가 찾아본 블로그는 이랬다.
김제금구명품길
D와 나는 아침에 만나 무궁화호를 타고 김제로 출발했다. 우리 둘 다 책을 한 권씩 가져갔지만 둘 다 책 읽기는 멀리한 채 대화를 나눴다. 점심은 도시락을 주변에서 사서 걷다가 중간에 먹을까, 아니면 걷기 전에 든든하게 먹을까, 하는 이야기부터 회사 이야기와 가족 이야기까지 나누니 어느새 김제에 도착. 우리는 내려 출발지점인 금구면사무소에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데, 지평선 축제를 가기 위한 셔틀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버스가 오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니 우리 면사무소까지는 택시를 타자, 하고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은 계속 지평선 축제 말씀을 하신다. 정말 가볼만하다, 지역 축제중 최고다, 하는... 우리는 거길 가는 게 아니라 명품길을 걸을거다, 라고 하니 기사님이 그다지 좋아하질 않으신다...밤에라도 지평선 축제에 들러보라는 말씀 밖에....우리는 건성으로 알겠다고 대답한 뒤 면사무소 앞에 내려, 블로그를 통해 검색한 면사무소 앞 맛집에 들른다. 거기에서 든든하게 밥을 먹자, 그리고 걷자, 라고 얘기했던 것. 근사한 풍경을 만나 사진을 찍어댈 생각에 부푼 나는, 아이폰과 충전기를 식당에 부탁해 충전한다. 그리고 다양한 메뉴들 중 마음에 드는 걸 주문했다.
낙지덮밥과 멸치국수 정식이었는데. 이렇게 멸치국수와 보쌈이 나온다. 아..사진 보니 또 침나와. 낙지덮밥이 나오기 전, 친구와 나는 부지런히 보쌈을 싸 먹는다.
아웅..맛좋아 >.<
맛있는 음식에 대한 기쁨..그리고 앞으로 걷게될 길에 대해 내 마음은 기대로 부푼다. 밥을 다 먹고 물을 하나 사서 가방에 넣은 뒤, 우리는 시작점으로 간다.
면사무소 뒷편의 골목길에서 시작한다. 아, 이곳을 지나면 이제 산과 들과 숲과 물이 나오겠지, 나는 그 곳을 걷는거야. 친구와 나는 걷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이상하다... 그 다음 코스인 저수지로 가는 방향판을 만났고, 그대로 따라갔는데, 인도는 없다. 그나마 조금 있는 인도가 산에서 내려온 나뭇가지며 잎들로 뒤덮여 걸을 수 없고, 그 인도가 끊기고 나서는 차도의 갓길을 따라 걸어야만 한다. 아..이게 대체 뭐야...이 코스가 지나면 나아지려나.
그런데 웬걸, 갓길 코스를 지나고나면 이젠 갓길 조차 사라져 우린 숫제 차도로 계속 걷고 있다. 그러다 뒤에서 차가 오면 한 쪽 옆에 가만히 서있어야 한다. 이게...뭐야??????????????
어처구니가 없다. 걷다 보니 이곳은 '걷기'를 위해 만들어진 길이 아니었다. '명품길' 이라길래 걷는 사람들을 위한 좋은 코스를 만들어둔 것인줄 알았는데, 그저 '명품길'이란 이름을 원래 있던 차도와 원래 있던 산에 그냥 붙여버린 것. 산길을, 흙을 밟을 거라 생각했던 친구와 나는 당황한다. 게다가 이것이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 푯말만 가져다 붙인 것이니 더 큰 문제가 있다. 바로 화장실이 없다는 것.
씨발........
친구와 나는 이제나 저제나 화장실을 기다리다 이렇듯 끊임없는 찻길 찻길 찻길 만을 만난다. 결국 우리는.......어떻게 급한 일을 해결했는지는 전깃줄에 앉아있던 새 만이 알 것이다. 오, 버드...
이 길이 이런 길이라는 것을 김제 시민도 알고 다른 사람들도 알았는가보다. 이 날씨 좋은 날, 이 길을 걷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밖에 없었다. 우리, 단 둘. 아놔..orz
길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람들을 만날 거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가면서 내내 어처구니 없어한다. 이게 뭐야..사람들이 다 지평선 축제 가는데는 이유가 있었어...어떻게 11킬로에 해당하는 코스중에 화장실도 하나도 없고, 걸을만한 곳도 하나도 없고, 매점도 식당도 없고 심지어 사람도 없고...이렇게 아무것도 없다니....어떻게 하늘 아래 이 길에 우리 둘 뿐일 수가 있는 거냐... 아무것도 없어서 사람이 없는 건지 사람이 없어서 아무것도 없는 건지, 뭐가 먼저인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렇게 또 방향판을 만나지만, 아아- 이곳은 관리되지 않는 곳. 방향판은 밑의 저수지를 향하고 있다. 앞으로 가라 옆으로 가라 가 아닌, 밑....밑은 ... 저수지인데... 니미..
물론 나처럼 사소한 것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은 이 와중에도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기도 한다. 그래그래, 이런 것도 보니까, 하면서. 그래봤자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코스모스지만..
친구와 나는 8번째 코스인 편백나무숲에 온 기대를 건다. 어쩌면, 이 모든 걸 만회하게 해줄거야, 편백나무숲은. 거기에 가면 비로소 우리는 '아, 여기에 오기 위해 우린 그토록 어처구니 없어 했던 거구나' 하게 될거야. 친구와 나는 정말 그리될 거라 믿었다. 그렇게 계속 걸어 우리는 편백나무 숲과 가까워졌다.
본격적인 산 길이다. 우린 이제야 흙을 밟을 수 있어! 그러나!!!!!
산 길도 돌 길.....우린 흙을 밟지 못한다. 이건 차가 다니라고 만들어 놓은 길이다. 실제로 또 뒤에서 차가 들어와 우린 한 쪽 옆에 비켜서야 했다. 순간적으로 저 차 얻어타고 여길 나갈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차를 볼 때마다 그랬다. 그러나 꾹 참았다. 편백나무숲, 그래, 그게 아직 남아 있어!!
그렇게 우리는 편백나무 명상길을 드디어 만난다. 그런데 아...뭐지..이 살아있지 않은 듯한 어두움은...계단 몇 개를 거쳐 도착할 수 있는 편맥나무 명상길은, 아, 지나치게 어두웠다. 나는 차마 들어갈 용기가 나질 않았고, 그래도 우리가 이거 보러 왔는데 안들어가면 어떡해, 하며 친구가 나보다 앞서 계단을 올랐다. 괜찮아 올라와, 보기보다 그렇게 어둡진 않아, 라는 친구의 말에 용기를 내어 들어갔는데, 하아- 어두웠다. 편백나무숲에서 힐링해와- 라고 말하던 동생에게 문자를 보냈다. 힐링은 개뿔, 무섭다...
사진으로 보니 뭔가 약간 멋져 보이는데, 저기에 우리밖에 없었고 어두웠다. ㅠㅠ 게다가 이걸로 밀려고 했다면 어처구니 없는게 코스 조낸 짧아...여튼 빠져나와 이제 우리는 막바지 코스를 향해 가는데, 이번엔 편백나무 삼림욕 공간이 있다. 누워 있을 수 있는 긴 벤치가 아무도 누워본 적 없는 지저분한 모습으로 덩그러니 놓여있다. 하아- 그리고 그곳에서야 우리는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하는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아마도 편백나무 숲만 보려고 들렀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대실망을 안고 돌아섰다...
(이 사진은 좀 작품인듯??)
걷는데 세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고, 이게 나는 그다지 성에 차지 않았지만, 다음날 군산 관광이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아쉬운 마음을 접고 시내버스를 기다린다. 버스를 타면 전주시에 갈 수 있고, 전주시 터미널에서 군산으로 이동하기로 한 것. 이십여분을 기다려 버스를 탔는데 길에 차가 별로 없어 한적하기 때문인지 버스는 아주 신나게 속도를 내서 달린다. 뒷쪽에 앉아있던 나는 너무나 무섭다. 혼자 속으로 계속 외친다. 아저씨, 이렇게 세게 운전하지 마요. 잔뜩 긴장한 나는 머리까지 아플 지경. 그렇게 차는 전주 시내에 들어섰는데, 시내에서는 차가 많아 막히기도 한다. 약간 긴장이 풀릴 무렵, 우리가 가는 버스를 향해 왼쪽에서 자가용 한대가 서서히 달려온다. 나는 짧은 순간이지만 그 장면을 보면서, 어? 저렇게 달리면 우리 버스에 박을텐데? 하는 순간 쾅- 자가용이 내가 탄 버스를 박아버렸고, 버스 안에 탄 몇몇은 소리를 질렀으며, 서있던 누군가는 넘어졌다.
하아-
내가 이래서 버스를 안타는데, 일전에 사고나서 몇주간 깁스를 해서, 그래서 버스가 싫은데, 또, 또 ...하아- 무섭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행히 나는 무사했고 버스안의 승객들 모두 무사했다. 기사님은 넘어진 학생 괜찮은지 물었는데 그 학생은 괜찮다고 했다. 나 역시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난 괜찮은 줄 알았다가 시간이 지나자 인대가 늘어나고 온 몸에 멍이 들어 한참이나 깁스를 하고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녔었다. 저 학생도 지금은 괜찮지만 내일 아침에 아플텐데, 그러나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놀란 가슴만 진정시킨다. 그렇게 세게 박지는 않아 다행이었지만, 나는 내가 늘 두려워하던 일이 또 벌어진 것에 대해 매우 당황했다. 엄마에게 전화하고 싶었지만, 다치지 않았는데 멀리 있는 딸 괜한 걱정을 할 것 같아 전화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군산에 도착한 우리는 친구가 찾은 맛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D는 나와 해외며 국내 여행을 같이 한 적이 많은데, 늘 놀라운 것이 지도를 기막히게 잘 본다는 거다. 뉴욕에서도 길을 찾는 건 지도를 보는 D의 몫이었고 국내에서도 어떻게 이동해야 하는지 정보를 제공하는 건 언제나 D의 몫이었다. 오죽하면 이번 홍콩여행에서 구글 지도를 보고 길을 찾는게 외려 불안하게 느껴졌을까. D가 지도를 보며 방향을 정해주는 때에야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꼈다니까. 여행의 묘미는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은가 싶어졌다. 함께 서서 지도를 보는 것, 그리고 방향을 가늠하고 그곳으로 함께 걸어가는 것. 여튼 지도를 보고 거의 근처까지 와서 D 가 멈추어섰을 때, 여기서는 티맵을 켜자, 라고 내가 말하고 티맵을 실행했다. 우리가 있는 곳의 위치와 도착하는 곳의 위치가 빨갛게 표시되고 대각선으로 죽- 그어져있다. 티맵속에 나타나있는 국민은행과 미스터 피자에 맞춰 나는 핸드폰을 이리저리 돌린다. 그래야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으니까. 자, 이쪽이 국민은행 미스터 피자가 음, 하고 맞추고 있을 때 D 는 벌써 저쪽이네, 하며 몸을 움직인다. 나는 아직 미스터피자 방향을 못찾아서 여태 핸드폰을 들고 방향 맞추기에 몰입하다가 드디어 지도에서 표시한대로 은행과 피자집을 맞추어 가야할 곳으로 시선을 들었을 때, D는 이미 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
나는 계속 감탄해서, 아니 어떻게 지도를 보자마자 방향 파악을 하냐, 나는 시키는대로 은행을 맞춰야 하고 피자집이 어딘지 또 방향을 맞춰야 하는데, 어떻게 보자마자 저쪽 대각선이다, 하고 그쪽으로 가냐....암튼 대박이다, 하고 계속 놀란다. 여튼 그렇게 우리는 가고자했던 족발집에 갔다.
족발이 나왔고,
쌈을 쌌다.
친구와 서로 오늘 고생 많이 했네, 다음엔 다른데 가자, 남한산성은 어떨까, 아니면 내가 두눈 감고 인제에 버스타고 가자, 라는 말을 하면서 사실은 속으로 인제는 못갈것 같아, 난 도무지 버스 탈 자신이 없어, 라고 생각하면서 친구와 바쁘게 쌈을 싸고 건배를 하는데, 문자메세지가 도착했다.
아주 먼 데서 온 문자메세지였다. 그저 평범한, 금요일 밤 잘 보내라는 문자.
나는 갑자기 울컥, 했다.
내가 탄 버스가 오늘 사고가 났었고, 다행히 다치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순간순간 어떤 일들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는데, 이렇게 내가 그나마 가벼운 사고 속에 살아있고, 웃고 있고, 대화하면서, 술을 마시는데, 저 먼 데서 누군가가 안부를 물어오고, 내가 답할 수 있다는 것. 이 모든게 기적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그 친구는 내가 사고를 당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고, 그저 금요일 밤 잘 보내라는 문자를, 그저 일상적으로 보냈을 텐데, 나는 그 문자 하나에 그날 하루가 머릿속에 스쳐갔던 것. 내가 내 집을 떠나 먼 데로 왔고, 걸었고, 당화했으며, 버스를 탔고, 자가용이 박았고, 두려웠고, 이제 진정하려는 순간, 저 먼 데서, 내가 온 곳보다 더 먼 곳에 있는 친구로부터, 일상에 대한 문자를 받다니. 아, 이것이야말로 기적이 아닌가.
D와 얘기했다. 김제 금구 명품길은 진짜 뻐킹 쉿이지만, 이렇게 온 건 잘한 일이라고. 안왔다면 모르니 가고 싶었을 거라고, 왔으니 여기가 후졌다는 걸 알게 되지 않았냐고. 다음날 군산의 이성당 빵집엘 가고 동국사길을 걸으면서, 틈틈이 지도를 보며 방향을 정해주는 친구를 보면서, 갑자기 확- 아, 나, 이제 여행을 좋아할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좋다는 생각이 든것도 아니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옆에서 이 친구가 계속 지도를 봐준다면, 계속 계속 여행다닐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거다. 돌아오는 길에 또 우린 얘기했다. 남이섬을 갈까? 친구가 묻고, 더 많이 걸었으면 좋겠어, 라고 내가 답했다. 걸을 수 있는 우리나라의 곳곳을 다 가보고 싶어졌다.
덧붙이자면, 김제 금구 명품길 보다는 북한산 둘레길이 오천배쯤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