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는 머리카락 색깔 때문인지 나이에 비해 꽤 젊어보이시는 편이다. 머리카락이 숱도 많고 건강하다. 숱도 별로 없고 두피도 건강하지 못한 나로서는 대체 왜 아빠 두피 안닮고 엄마 두피 닮은건가 원망하기도 여러번이었다. 작은아버지 두 분 모두 흰머리가 머리의 절반을 채울 때도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건강해서 형제 자매들도 부러워했는데, 이것은 아버지에게 꽤 큰 자부심을 가져다 주었다. 내 머리카락은 남들보다 건강하다, 새까맣다 등의 아버지의 자랑이었고, 그게 자랑이었으므로 그것을 잃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는, 혹여라도 흰머리가 보일라 치면 어김없이 나를 불러 뽑으라 하셨고, 어린 마음에는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것도 머리 크면 하기 싫어지는 법, 늙으면 머리 쇠는건 당연한 거라며 나는 언젠가부터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명절때 놀러오는 이모의 어린 딸에게 뽑아달라 했고, 그 아이는 한 개에 오십원~ 이라고 외치며 뽑아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아버지도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가 없었던 터라, 머리카락에 대한 자부심을 꺽어야 한다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되셨다. 그래서 이제는 염색을 선택하신 거다. 한계, 를 인정하셨다고 해야할까.
아버지의 흰머리를 뽑는 게 그렇게나 싫었으면서도 아버지가 흰머리를 못견뎌하는 그 마음만은 이해했다. 본인의 외모에서 모두에게 칭찬을 듣고 인정을 받는 게 그것인데, 그것이 자신감과 자존감을 높여주는데, 그렇기에 그것을 얼마나 지키고 싶었을까. 그래서 결국 미장원으로 향해 염색을 해달라고 하는 아버지를, 혹은 어머니께 염색을 해달라 부탁하시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 씁쓸했지만, 결국은 한계를 인정했다는 사실이 건강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염색을 한다는 것 자체도 언젠가는 포기해야겠지만, '나는 염색할 정도로 흰 머리가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 되는거니까.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집인 《대답은 필요없어》에 실린 단편중 <배신하지 마〉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여자가 나온다. 젊음과 그 젊음으로부터 오는 화려한 아름다움을 자랑으로 삼았던 여자, 그러나 그것이 사라지자 견디기 힘들어했던 여자, 더욱이 옆집에 사는 여자는 여전히 젊고 아름답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 그녀는 자신이 늙어가는 것을 분하게 여긴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는 것에서 자격지심에 시달린다. 자격지심이란 말 그대로 누군가가 불러 일으킨 것이 아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데도 스스로 느끼고 마는것이다.
"저, 그 여자애가 밉살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어요.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크리스마스에 그녀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쓰레기봉투를 뒤진 적도 있어요. 밉살스럽고 샘도 나서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죠. 왜냐하면 그 여자애는 젊으니까!"
당신도 아직 젊다. 취조하는 형사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웃었다.
"전혀 젊지 않아요. 젊음만으로 좋은 일이 생길 정도는 아니에요. 형사님, 지금 회사에서 저는 이미 아줌마예요. 누구도 돌아보지 않아요. 회사에서도 번화가에서도, 길을 걷고 있어도. 이미 길가에 널린 돌멩이 신세지요. 오우라 씨와 똑같은 옷을 입어도, 어떻게 화장을 해도 그녀에겐 이길 수 없어요. 그런 그녀가 옆에 있어요. 옆에서 살고 있어요. 옛날엔 저도 갖고 있었던 걸 그녀가 지금 전부 갖고 있어요. 그것을 제게 보란 듯 과시하죠. 저는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구요." (pp.205-206)
자신을 이미 '아줌마'라고 부르며 젊은애에 대한 시기심으로 불타는 이 여자 조차도 나보다 다섯살 이상이나 어리다는 슬픔..은 말하지 않기로 하고.
그녀가 무너지는 과정에 머리카락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다가 나의 아버지가 생각났던 것.
"긴 머리는 내 마지막 보루예요. 예쁘고, 여자답고,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자의 마지막 증표죠. 젊으면-좀더 젊으면 잘라도 끄떡없어요. 하지만 나는 이미 나이가 들었고. 머리까지 자르면 여자이기를 포기해야 해요. 그 여자애는 그걸 알고 일부러 짧은 커트를 해서 내게 과시한 거야." (p.207)
커트 머리가 여자가 그녀 앞으로 가 과시한 게 아니어도 그녀는 그것을 과시라 느낀다. 긴 머리가 마지막 보루였는데, 그것조차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그녀. 그녀가 절망한 까닭은 젊은 여자가 자신에게 과시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을 과시로 보는 자신의 나약함 때문이었다. 늙었는데 머리까지 길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한다는 그 절망감, 그것은 외로움으로 부터 왔을것이고, 자기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이유가 비단 그녀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고 사회로 나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리고 전파를 타는 모든 매체들은 젊고 아름다운 것을 칭송하니까. 자신이 그런 주류에 있었다가 밀려났다는 사실, 그걸 그녀는 견뎌내지 못했다.
사람은 누구나 무너질 수도 있고 망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 털고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며칠전 출근길에 아침 라디오 방송을 듣는데, '육체가 건강해야 고통을 잘 극복할 수 있다'는 뉘앙스의 말이 나왔다. 정신의 건강은 육체의 건강으로부터, 라는 말이야 불변의 진리이며 아주 오래전부터 누구나 다 알고있는 말이지만, 그 말이 그 순간처럼 내 귀에 쏙- 꽂힌 적은 없었다. 라디오에서는 하나의 에피소드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져 슬픈데 그 말을 듣던 상대가 '운동을 하라'고 조언해주는 거였다. 남자는 슬퍼하며 운동이라니 웬말이냐 물었고, 상대는 멘탈이 건강해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데, 그 멘탈이 건강하려면 육체가 건강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거다. 맞다, 맞구나. 나는 내 정신이 무척 건강한 편에 속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내 건강한 몸으로부터 온 것이겠구나, 했다. 나는 저 단편 <배신하지 마>의 주인공처럼 '마지막 보루'라고 할 만한 신체적 장점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치명적인 약점 또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머릿결도 나쁘고 두피도 약하며 피부도 엉망인데다 모델과는 거리가 먼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매스컴에서 온갖 미녀들이 성냥개비 같은 몸매를 가지고 왔다리갔다리해도 '그녀들처럼 되고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람이 초라해지는 건 시간문제다. 내가 나 자신을 초라하게 느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나를 초라하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내가 '초라해 보인'다고 해서 내 자신이 초라한 건 아니다. 단편 <배신하지 마>의 주인공은, 머리를 컷트한 예쁜 여자를 마주쳤을 때 자신의 옷차림 때문에 자신을 초라하게 느꼈다.
"그 여자애, 짧은 커트 머리를 했어요. 그러면서 우쭐거리는 얼굴로 가슴을 펴고 걷고 있었죠. 모델 같은 차림새로, 정말 모델이나 탤런트 같이 보였어요. 그런데 나는 평상복에 편의점 비닐봉투를 들고 있었고. 주말도 다 됐는데."
마주쳐 지나갔을 때 미치에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고 한다.
"무시당한 걸 그때 알았죠. 나를 깔보고 있었어요. 주말인데 어디 갈 곳도 없고, 아무도 초대해 주지 않는 불쌍한 아줌마. 나같이 짧은 커트를 하고 싶어도 이미 그런 모험도 할 수 없는 불쌍한 아줌마는 어디 가? 속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비웃고 있었어요. 확실히 알았죠." (p.206)
물론 나도 저 느낌을 너무나 잘 안다. 우연히 지하철안에서 아는 후배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녀가 그때 얼마나 아름답던지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던 거다. 그녀는 나보다 키가 크고 젊었고 예뻤다. 게다가 샤방샤방한 원피스를 입고 반짝거리는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그 당시의 내 옷차림이 나를 너무 후지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그녀가 내게 뭐라 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블라우스가, 치마가, 구두가 엉망인 것 같았고, 이 모두가 엉망이니 나라는 인간 자체가 구리게 느껴지는 거다. 그녀와 우연히 만난 반가움에 몇 마디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앞으로는 매일매일 찬란하고 이쁘게 하고 다닐거야, 라고 거듭 다짐했던 기억조차 선명하다. 물론 그 다짐이 지켜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고.
그러나 평상복, 약속 없는 주말, 편의점 봉투. 그것들이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사발면을 사들고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질질 끌어신고 감지 않은 머리를 노란 고무줄로 동여매도, 그래도 집에 들어가 콕 박혀서 내가 좋아하고 만족할 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지 않은가. 아마, 거기서 갈리는 것 같다. 저 여자와 나는. 나는 '그렇지만 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며 만족할 만한 시간을 보내지' 로 충분히 행복해할 수 있는 사람이고 단편 속의 저 여자는 '초라하게 보인것'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는 바로 그 차이.
자신이 만난 화려한 여자가 속이 얼마나 곪아있는 지는 모르는채로 마냥 그녀를 시기했다. 찬란하고 젊은 미모를 과시하듯 뽐내고 다니기 위해서 옆집 여자인 미치에는, 자신이 도무지 갚을 수 없을 정도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신용카드를 돌려막기 해가며 빚을 지고 있었고, 부모님 조차도 더이상 그녀의 돈을 갚아주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는데. 미치에도 역시 '화려해 보이는 것'에 더 많은 중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안으로는 자꾸 빚을 지고 더이상 안되자 친구의 이름으로 또 신용카드를 만들고...남아있는 건 빚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 같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분노로 들끓던 여자도, 카드 빚이 어마어마했던 여자도 모두 자신의 행복을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두었다. '내'가 아니라 '타인'이 내 삶의 주요지표가 된다면, 그들이 행복하기는 힘이 들지 않겠는가.
머리카락을 최후의 보루로 삼을거라면, 나는 그 외에 손톱과 발톱 손목과 발목 귀의 모양새와 목의 단단함까지 모두 보루로 삼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무엇이든 '단 하나'인건 위험하니까. 나의 사랑이란 감정 자체도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면, 무너지기가 쉽지 않은가. 그 사람이 없어도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내 사랑 역시 여러명의 사람들에게 다양하게 쌓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 신체중 어느 한 곳의 아름다움으로 버텨낸다면 그것은 얼마나 안타깝고 아슬아슬한가. 엉덩이를, 허벅지를, 종아리를, 겨드랑이를, 심지어는 온 몸의 털까지도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으면 어떨까. 편의점 봉투를 들고 오는 자신을 초라하게 생각했다면, 집에 돌아와 사발면을 후루룩 맛있게 먹는 자신에게 집중하면 어떨까. 아, 조낸 맛있어 눈물이 난다, 라고 그 순간에 행복해하면 어떨까. 초라한 나 자신이 금세 만족을 느끼는 내자신으로 바뀌어있지 않을까.
뭐, 이렇게 써봤자 나 역시도 허벅지가, 종아리가, 겨드랑이가, 온 몸의 털이 자랑은 아니다. 머리카락도 손목도 발목도 마찬가지.
같이 일하는 동료가 그만뒀다. 갑작스런 일이어서 지난 목요일 멘붕이 찾아왔고, 그 일이 당분간 모두 내 일이 된다는 사실에 앞으로의 내 직장생활이 걱정되고 두려워졌다. 그외에도 그 안에 숨은 사정들 때문에 혼자 있을 때마다 힘들어서 눈물이 자꾸 비져나오는 상황. 얼마나 힘들까, 언제까지 힘들어야 하나, 답답해하며 퇴근을 했다. 내 소식을 듣고 아빠는 집에 돌아온 내게 기운내라며 밥을 퍼주셨고 국을 데워 덜어주셨다. 남동생은 회식으로 늦게 돌아오고 엄마는 여동생 집에 가있는터라 밥 먹는 식구는 우리 둘 뿐이었고, 그래, 거기까진 괜찮았다. 그런데 밥을 다 먹어갈 때쯤, 아빠가 내게 그러셨다.
"설거지는 니가 해."
아놔. 진짜 폭발할 뻔 했다. 설거지는 물론 내가 하려고 했다. 설마 아빠랑 나랑 둘 뿐이데 내가 아빠한테 하라고 할까. 게다가 나를 위로한다며 밥과 국을 퍼준 게 아니라, 저렇게 말하는 순간 '차리는 건 내가 했으니 치우는 건 니가 해' 가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아빠는 늘 이런 식이었다. 다같이 술상이라도 봐서 놀다가 치울 때가 되면
"락방이가 치우느라 고생하겠구나"
해버리시는 거다. 당연히 치울건데 저렇게 말해버리는 순간 그 맥빠지는 느낌이라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 나는 한 번도 아빠한테 상 치우라고 한 적이 없는데, 대체 왜 저럴까. 왜 늘 해왔는데도, 설거지며 빨래며 밥하는 거며 청소하는 것까지, 엄마가 안계실 때는 동생과 내가 다 해왔는데, 물론 아빠도 그중에 어떤 것들을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엄마가 며칠 집을 비워도 문제없이 지내오고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되서 미리 저렇게 초를 치는 말을 하는걸까. 다 할테니까 미리 말하지 말라고 몇 번 소리 높여 얘기해보기도 했지만 절대 고쳐지지 않는다. 왜 화를 내냐는 식이다. 아..나는 요즘 아빠를 미워하는 시기인가 보다.
대꾸해봤자 싸움만 될 게 뻔하므로 묵묵히 설거지를 마치고 가방을 챙겨 '운동갔다올게'라고 말한 뒤 집을 나와버렸다. 그길로 헬쓰장에 가서 런닝 머신 위에서 걸었다. 우울하고 짜증날 때는 나는 운동 대신 가만히 있기를 선택하는 사람인데, 그러고 싶었는데, 편해야 할 집이 불편한 장소가 되어버려서 도무지 그 안에서 아빠랑 둘이 있을 수가 없었다. 아홉시를 넘기면 아빠는 주무신다. 런닝 머신위에서 좀 걷다가 샤워를 하고 돌아가자, 라고 마음먹었고 그렇게 했다.
나는 설거지를 싫어한다. 아주 많이 싫어한다. 끔찍하게 싫어한다. 할 때마다 우울에 시달린다. 그래서 '설거지는 니가 해' 이 말에 더 폭발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위에 말했다시피 아빠를 미워하는 시기인가보다. 그래서인지 요즘 독립에의 생각이 자꾸 치밀어 오른다. 나가살까, 혼자살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거다. 돈이 없다..에서 늘 막히지만 설사 대출을 받아 독립해서 나온다 해도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이 나의 독립을 막는데, 그런것들도 어떻게든 다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되어버리는 찰나, 참, 독립하면 매 끼니의 설거지가 내꺼잖아?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씨발설거지..
어떡하지?
오늘 출근길 내내 설거지에 대한 생각에 시달렸다. 지구를 위해 뭔가 한 가지를 더 하기로 하고 독립한 뒤의 내 끼니는 모조리 다 일회용품으로 해결할까? 밥도 반찬도 일회용 접시, 물도 일회용 컵, 술도 안주도 모두 일회용 용기에...하아- 그렇지만 지구를 위해 뭘 한 가지를 더 해야할지 생각도 안날뿐더러, 일회용 그릇들을 써대는 것이 맛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면에서 끔찍하게 느껴진다. 나는 와인이 와인잔에 마셔야 더 맛있다는 걸 안다. 소주는 소주잔에 맥주는 맥주컵에. 스테이크는 넓다란 접시에 담긴 게 맛있다는 걸 안다. 그릇에 욕심이 있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그릇이 음식의 맛을 한층 업그레이드 해준다는 걸 알고, 그래서 집에서 와인을 마실 때도 굳이 와인잔에 마시는 거다. 그 맛을 설거지 때문에 포기할 수 있을까?
없.다.
그렇다면 설거지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없.다.
그렇다면 어쩌지?
일전에 타부서 차장님이 '해결해야 겠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 이라며 다른 직원들 앞에서 나를 추켜세워 준 적이 있었더랬다. 그런 나는 역시 방법을 찾아냈다.
결혼. 그래 결혼을 하자.
결혼해서 설거지는 남편의 몫으로 하자. 대신 설거지로 인해 남편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와 함께사는 게 기분 좋지 않을테니 설거지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남자를 골라서 설거지를 하라고 하자. 그리고 이왕 사는거 즐겁게 먹고 마시며 사는거다. 술도 맛있게 먹고 고기도 맛있게 먹고, 제대로 된 그릇에 제대로 먹고, 그리고 설거지는 남편아, 니가 해. 이렇게 즐겁게 사는 거다. 그러면 되지 않을까. 물론 남편이 설거지를 하는 대신 나도 뭔가를 해야겠지. 지금 당장은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지만, 뭐 쇼부를 칠 수도 있는거 아닐까. 아니다. 쇼부고 뭐고 다 떠나서, 나한테 홀라당 빠지면 나는 아무것도 안해도 되지 않을까. '설거지를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없다면 나는 결혼을 생각하지 못하겠는걸?' 이라는 나의 말에 기쁜 마음으로 그것은 자신의 몫이라며 나설 수 있는 남자랑 결혼을 해야겠다. 아,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도 한 채 얻으라고 해야겠다. 한강이 안보인다면 울산 앞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아파트라도..아, 그 아파트는 가급적이면 욕실이 두 개이면 좋겠고, 욕실 하나에는 드레스룸과 연결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꼬박꼬박 고액의 월급이 입금되는 남자면 더 좋겠다. 팔 다리에 적당히 모양 좋은 근육이 자리 잡아 있다면 좋겠다. 설거지를 할 때도 근육들의 움직임이 보이면 좋으니까. 키도 좀 크면 좋겠다. 웃는 모습이 브래드 피트를 연상시켰으면 좋겠다. 스테이크를 잘 굽는 남자였으면 좋겠다. 잘 굽고 설거지도 잘하는 그런 남자..
음...
그냥 내 성격을 개조하는 게 더 빠른가..Orz
오늘이 아직 반나절 밖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