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틴 팀버레이크'와 '밀라 쿠니스' 주연의 영화 『프렌즈 위드 베네핏』에서, 남자와 여자는 섹스를 나누는 친구사이었는데, 어느날 여자가 자신은 이제 연애를 하고 싶다고 선언하자, 그 둘은 이제 각자 연애 상대를 찾기로 한다. 센트럴 파크였나, 여자는 산책하던 남자사람에게 말을 걸기로 하고, 남자는 계단의 한 구석에 서서 책을 읽던 여자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걸기로 한다. 그러자 여자는 그에게 말한다.
저거 소설책일걸?
그래도 남자는 다가가서 말을 걸긴하는데, 아니, 소설책을 무시하는듯한 저 발언은 뭐지? 만약 내가 그녀 옆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이 대화를 들었다면, 내가 읽던 책의 책등으로 이마를 한 대 때려주었을 것 같다. 너 소설책에 대해 알기나 하고 말하는거냐고. 니가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읽어보기나 했냐고. 어디서 소설을 읽지도 않고 무식하게 막말하냐고.
그렇다. 나는 지금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를 읽고 있다.
『레 미제라블』다음으로 위고의 책은 『파리의 노트르담』을 읽자 싶어서 민음사 판으로 준비해두고 있었는데, 지지난주에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가 영화 『웃는 남자』의 예고편을 보게됐다. 3월 28일에 개봉한다고 한 것 같아, 오, 그전에 책을 읽어볼까, 하고 부랴부랴 주문해서 파리의 노트르담 보다 먼저 읽게 된 것. 아무리 읽을 책을 많이 사둬봤자 언제나 이렇게 예고도 없이 다른 책들이 불쑥 끼어들어 사 둔 많은 책들은 쌓이고만다...흠.. 아니, 그건그렇고.
당연히 위고의 책이니 좋을거라고 생각했지만, 너무 좋아서 미치겠다. 아직 '상'권의 절반쯤 밖에 읽지 못했는데, 아직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도 안한 상태인데, 그저 등장인물들이 나왔을 뿐인데, 포스트잇을 수두룩하게 붙여두었다. 오늘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는 정말이지 울 뻔했다. 바로 이런 부분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여자 아이는, 피가 엉겨 심장이 멎기 직전이었다. 그 어미가 죽음의 일부를 이미 그녀에게 주었다. 시신은 스스로 번지는 바, 그때 제일 먼저 옮는 것이 냉각 현상이다. 어린것의 발과 손, 팔, 무릎은, 얼음에 마비된 듯했다. 아이는 무시무시한 차가움을 느꼈다.
그에게는 젖지 않아 따뜻한 옷, 즉 선원 작업복이 있었다. 그는 어린것을 죽은 여인의 가슴팍 위에 내려놓은 다음, 옷을 벗었다. 그것으로 아기를 감싼 후 다시 품에 안았다. 그리고 삭풍이 몰고 온 눈보라 속에서 거의 벌거숭이가 된 채, 어린것을 안고 다시 길을 떠났다.
아기는 아이의 볼을 다시 찾는 데 성공해 그것에 입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다시 온기를 느꼈는지, 잠이 들었다. 암흑속에서 두 영혼이 나눈 첫 입맞춤이었다.
아기의 엄마는, 눈 위에 등을 대고 얼굴은 하늘을 향한 채, 누워 있었다. 그러나 어린 소년이 어린 여자 아이를 감싸려고 옷을 벗엇을 때, 무한의 저 깊은 곳에 있던 그녀는 아마 소년을 보았을지도 모른다.(p.216)
아이는 어른들로부터 버려졌다. 그의 나이 고작 열 살이었다. 아무도 없는 눈 쌓인 벌판을 걸으며 그는 굶주림에 시달렸고 당연히 바지는 눈에 다 젖고 말았다. 그는 추웠고 배가 고팠으며 그가 걷는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날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절망만이 그를 감싸려는 그때에, 그는 한 여인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 시체위에는 눈이 덮여 있었고, 거기, 아직 생명을 붙들고 있는 아기가 있었다. 자기가 얼어죽을지도 모르는데, 굶어죽을지도 모르는데, 아이는 그 아기를 거둔다. 뿐만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옷중에 유일하게 젖지 않은 외투를 벗어 아기를 감싼다.
춥고 미끄러운 길을 걷는데 아기가 그에게 장해가 됨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어린 여자 아이는 곤경에 처한 물그릇을 넘치게 하는 한 방울의 물이었다. (p.219)
아이가 아기를 안고 그 길을 다시 걷고자 하는 결심과 행위는 분명 위대하고 거룩하지만, 그러나 아이가 선택하기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른에게도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 그러나 아이는 아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아기를 더 감싸안는다.
어린것이 두세 번 울음을 터뜨렸다. 그럴 때마다 그는 서성거리며 걸었다. 그러면 아기가 평온을 되찾고 입을 다물었다. 결국 아기는 잠이 들어 달게 잤다. 그는 오들오들 떨면서도, 아기의 체온이 따뜻한지 확인하곤 했다.
그는 아기를 감싼 작업복 자락으로 어린것의 목둘레를 자주 여며 주었다. 혹시 벌어진 틈 사이로 서리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녹은 눈이 옷과 아기 사이로 스며들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p.218)
그는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결심을 다시 굳건히 하고, 아기를 돌보고, 옷자락으로 아기를 여며 주고, 머리를 덮어 주고, 다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가다가, 미끄러지면 즉시 몸을 일으키곤 했다. 바람은 비겁하게 그를 밀었다. (p.219)
아이의 마음때문에 세상이 위대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눈앞의 이익에 연연해 하긴 하지만, 자기 욕심 채우느라 급급하긴 하지만, 그러나 어쩌면 인간의 바탕 저 안에는, 저 깊숙한 곳에는 선한 마음이 굳건히 자리를 버티고 있는건 아닐까? 그 위로 세상의 때가 쌓이고 먼지가 묻어 가끔 우리가 선한 마음을 잊고 살긴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본디 선하게 태어난 존재가 아닐까. 자신이 바로 '버려진' 존재이면서, 눈 앞에서 자신을 버려두고 등을 돌리는 어른들을 숱하게 봤으면서, 그러면서도 버려진 다른 존재에 대해 손을 내밀 수 있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정말 눈물이 핑- 돌지 않는가. 게다가 이 문장을 소설로 완성시키는 힘은 저 마지막 문장에 있다. '바람은 비겁하게 그를 밀었다' 라니. 하아- 감탄이 절로 나온다.
강남역에서 내려 회사로 걸어오면서 나는 문득 소설의 전도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좋은 소설을 혼자만 읽는다는 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 사람들이 소설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소설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강의같은걸 해보는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를테면, 나는 수능을 마치고 조금 여유로워진 고등학생들을 혹은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대학생활을 시작하려는 신입생들을 찾아가는거다. 아니면, 사회초년생들이어도 좋고. 그 사람들을 찾아가 앞에서서 처음에 이렇게 묻는거다.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길때, 어떤 말로 그 관심을 표현하게 되나요?
그러면서 '에이모 토울스'의 『우아한 연인』을 들어 모두에게 보여주는거다. 이 책에서 팅커는 관심있는 상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걸 내게 말해줘요.
'빅토르 위고'의 이 책, 『웃는 남자』를 집어 들었다면, 이렇게 시작할 수 있을거다.
여러분은 모두에게 버려져 혼자가 됐습니다. 눈이 내려 몹시 추웠어요. 배도 고팠죠. 인적이 있는 곳을 찾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지만 좀처럼 찾을 수 없었어요. 그러다 버려진 아기, 그러나 숨이 아직 붙어있는 아기를 맞닥뜨리게 되는거죠. 그 추위에 배가 고프고 어디까지 가야 구원의 빛이 비출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여러분이라면 그 아기를 품에 안아들 수 있을까요?
라고.
이렇게 해서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설을 읽게 하고 싶다. 소설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으면서 소설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기좋게 한 방 날리고 싶다. 늬들이 소설을 알아? 되묻고 싶다. 소설에 대해 말하고 싶다면 일단 빅토르 위고를 읽어보란 말야, 머저리들아, 라고 소리치고 싶다. 소설 안에는 다 있다. 버려지고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오고가는 감동과 따뜻한 마음이, 그것들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있다. 도대체 이런 소설을 읽지 않고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또 버텨낸단 말인가. 소설이야말로 인간이 끝까지 쥐고 있어야 할 거룩한 예술이 아닌가. 암튼 위고는 감동이다. ㅠㅠ 위고 아저씨 진짜 짱멋져요! ㅠㅠ 존경합니다 ㅠㅠㅠㅠㅠ
내 방 책장의 밑에서 두번째 칸이 33개월된 조카에게 가장 잘 맞는 위치인가보다. 그 자리에 있는 책을 잘 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조카는 유독 그 중의 왼쪽 한 구석을 몽땅 차지하고 있는 수키시리즈만 뺀다. 며칠전부터 우리집에 와있는 조카는 이모 책읽자, 라더니 또 내방에 들어와서 수키 시리즈를 차례로 빼고는 표지와 책을 분리시킨다. 조카가 그 놀이에 질려 내 방을 떠나고 나면, 나는 다시 표지와 책을 맞추어 입혀놓고는 책장에 꽂아놓고, 잊을만할 때쯤 조카는 내방에 들어와 그 책들을 다시 꺼내 표지와 몸통을 분리시킨다.
옆칸에는 문학동네 책도 있고 펭귄의 책도 있다. 그런데 자꾸 수키시리즈만 뺀다. 저 비어있는 곳에 있는 책들은 이미 조카가 빼서 안방에 가져다 둔 상태. 알록달록한 표지 때문일까? 왜 자꾸 저 책들만 뺄까? 나중엔 한 번 생각나면 물어봐야겠다. 조카야, 이 옆에 이 책들도 있고, 이 책들도 있잖아. 그런데 너는 왜 이 책들만 빼는거야? 라고. 조카는 뭐라고 답할까?
여하튼 책은 진짜 짱이다. 소설 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