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때부터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었다. 소설을 쓰며 먹고살기를 꿈꾸는 소설가, 라기 보다는 근사한 소설 한 편을 세상에 내놓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런 '글을 썼던' 사람이기를 희망했다. 대단한 문학상을 받아서 문학적으로 인정 받는것도 바랐지만, 그보다 더 내가 바랐던것은, 문학상을 받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는거였다. 이야기로 그리고 그 이야기를 구성하는 문장들로.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읽는 베스트셀러가 되지는 못해도, 읽은 사람이라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그런책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내가 나 자신을 몰랐기 때문에 가졌던 꿈이라는걸 알게 됐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소설 쓰기에는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나는 소설을 쓰는게 아니라 읽는걸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소설을 쓰는게 아니라 읽는걸 더 잘하는 사람이었다. 매번, 소설 속에서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이야기 그리고 상상하지 못했던 표현이 나올때마다 나는 역시 내가 소설가가 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을 몇장 넘기지 않고 이런 표현을 만났다.
"허리케인이 이쪽으로 온 적은 몇 년째 한 번도 없었잖아. 이제는 이리로 오지 않는다니까. 내가 어렸을 때는 늘 우리 쪽으로 돌진했었는데." 매니 오빠였다. 나는 그가 나를 못 보았기를 바라며 욕실 창가로 몸을 숨기고 섰다. 매니 오빠는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농구공을 옮기고 있었다. 그를 본 순간 내 가슴 속에 있던 고치가 찢어져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가려고 날개를 활짝 펼쳤다. (p.16)
누구나 사랑을 한다. 누구에게나 사랑이 찾아온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볼 때 마음이 들썩거리는 것을, 정신이 사나워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런데 작가는 이럴때를 '내 가슴 속에 있던 고치가 찢어져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가려고 날개를 활짝 펼쳤다'고 표현한다. 나는 이 부분을 읽다가 아, 역시 내가 소설가가 되기를 포기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건 역시 읽으며 감탄하는 일이라고, 이런 표현을 나는 결코 생각해낼 수 없을거라고. 그래서 작가가 존재하고 독자가 존재하는가보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거절하는 것보다 그들이 원하는대로 하는게 더 쉬워서 남자들의 섹스 상대가 되는 십대 소녀 에쉬, 그녀가 임신을 한다. 그녀는 매니를 사랑한 순간부터는 매니 이외의 다른 남자는 받아들인 적이 없다. 그게 5개월간 지속된 일이었다. 그런 그녀가 임신을 한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으나 그녀는 자신의 배 안에 자라는 생명을 느낀다. 그 사실을 모르는채로 자신의 여자친구 몰래 또다시 에쉬를 안으려던 매니에게 그녀는 얘기한다. 아이를 가졌다고, 오빠의 아이라고.
그녀는 사랑을 했다. 언제나 매니만 찾았다. 그리고 매니가 자신을 보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매니는 그녀에게 와서 그녀를 품을지언정 그녀에게 키스 한 번 해주지 않는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쓰다듬게 허락하지도 않는다. 매니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계속, 그녀는 사랑을 했다. 그녀의 작은 오빠가 매니는 영 쓸모없는 놈이고 너와는 어울리지 않아, 라고 말해도 그녀는 사랑을 했다. 매니는 아이의 아빠다. 여전히, 그녀는 사랑을 했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그 남자에게 임신 사실을 고했을 때, 그녀가 그로부터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게 무엇이었든, 이런 반응은 아니었을 것이다.
"네가 아무하고나 붙어난다는 걸 걔네가 모를 것 같냐?" (p.309)
좋은 사람을 만나 아프지 않은 사랑을 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픈 사랑을 경험한다.
대체적으로는 어리석은 사랑에 푹 빠져있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을 좋아했는지에 대한건, 아픈 후에야 깨달을 수
있다. 나를 잘 알고 나의 상대를 잘 아는 사람들이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면 안돼' 라고 얘기해도, 이미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한 양동이만큼의 눈물을 쏟은 후에야, 아, 이래서 그런거구나, 한다.
그렇다한들 남는게 후회뿐일까?자신이 어리석은 상대를 향해 맹목적인 애정을 쏟아부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해도, 시간을 돌리면 아마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사랑앞에 '어리석은' 대신 '현명한' 을 붙이면 어색하지 않은가. 현명한 사랑은 노래가 되지
못하고 책이 되지 못하고 영화가 되지 못한다. 그건 그저 일상이 될 뿐.
그러나 내가 책장을 몇 번이고 중간에 덮으며 이 책 읽기를 그만둘까를 포기했던것은, 에쉬, 그녀가 어리석은 사랑에 빠져서가 아니다. 가치없는 남자를 쳐다보고 있어서가 아니다. 에쉬와 그녀의 가족들이 가난한 생활을 해서도 아니다. 그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했던건, 개(dog)들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투견장으로 이끌려 나오는 개들. 그리고 이 책에서는 투견장에서 개들이 어떻게 싸우는지를 묘사한다. 그들은 자신의 개가 강한것이 마치 자기가 강한것이라는 듯, 자신의 개의 강함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개들은 주인의 바람대로 싸운다. 물어뜯고 흔들고 놓지 않는다. 피가 나고 절뚝거린다. 싸움이 끝나면 주인의 품에 안긴다. 하아- 난 정말이지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투견장면을 읽는게 너무 힘들어서 그만 읽고 팔아치워 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의 끝부분을 읽으며 가까스로 눈물을 삼켜야 했던 까닭은, 내가 출근길의 지하철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다 읽었다. 힘들었다. 그러니 다음 책으로는 속 시원하고 에로틱하며 웃긴걸로 읽어야겠다. 물론 이미 나는 그런 책을 선택해 두었다.
어? 점심 시간이 끝났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