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런트 러셀과 이청준의 책을 읽고난 뒤에 나는, 잘 읽히는 소설을 읽고 싶었다. 책장에 아직 읽지 않은 책, 그러니까 내가 고를 수 있는 책은 아주 많았다. 그레이트 하우스를 읽을까,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어떨까. 한창훈은? 조경란은? 그러다가 며칠전부터 내내 침대위에서 나랑 함께 잤던 책을 펼쳤다. 읽어야지, 하고 꺼내두었지만 아직 읽지는 못했던 책.
책을 펼치자마자 나는 살짝 놀랐고 그리고 살짝 웃었다.
책 표지와 똑같은 책갈피가 첫장에 꽂혀있었던 것. 나는 책을 읽을때 책갈피를 꽂지 않는다. 그저 책날개나 가름끈으로 읽던 곳을 체크하는데, 그래서 책갈피는 누가 줘도 안갖고 공짜로 생겨도 버리기 일쑤였는데, 이 책갈피는 그럴수가 없었다. 너무 예쁜거다. 게다가 심하게 센스있지 않은가. 이 책갈피는 버리지 말아야지, 읽는 동안 이걸로 읽던데를 표시해야지, 다 읽고나서도 이 책안에 꽂아두어야지. 정말 예쁘다.
그런데 이 책은 책 표지와 책갈피만 예쁜게 아니다. 세상에, 작가도 이쁘다.
이 사진은 책 날개에 실린것인데, 책 날개와 알라딘의 작가 설명을 보면 이렇게 써있다.
버네사 디펜보(Vanessa Diffenbaugh)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에서 자란 버네사 디펜보는 스탠포드 대학에서 창작과 교육을 공부한 뒤 저소득층 아동들에게 미술과 창작을 가르쳤다. 그녀와 남편은 슬하에 세 자녀를 두고 있다. 열여덟 살 트레본, 네 살 첼라, 세 살 마일즈 중 고아였던 트레본은 2011년 현재 게이츠 밀레니움 장학금을 받고 게이츠 대학에 재학 중이다. 디펜보와 그녀의 가족은 현재 매사추세츠 캠브리지에 살고 있으며 그녀의 남편 PK는 하버드 대학에서 도시 학교 개혁을 공부하고 있다.
버네사 디펜보는 <꽃으로 말해줘>를 쓰기 위해 실제로 빅토리아 시대에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는 데 사용한 꽃말과 모든 꽃마다 깃들어 있는 각각의 특별한 의미를 연구했다. 무엇보다 자녀를 입양해서 키우는 부모로서의 바네사 자신의 경험이 이 소설에 현실감을 실어주었다.
또한 버네사 디펜보는 자신이 받은 돈의 상당한 금액을 카멜리아 네트워크 재단에 기부했다. 이 재단은 18세가 되어 위탁 자격을 상실한 아이들을 물질적으로 후원하고 돕는 재단으로, 그 돈은 집안 살림 장만, 교재, 집세 등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곳에 쓰인다.
이 책은 그러니까 고아인 소녀가 주인공이다. 이제 열 여덟살이 된 소녀, 그래서 보육원을 떠나 혼자 살아가야 하는 소녀. 그 소녀는 꽃과 함께 지내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고, 꽃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그런 그녀가 꽃가게에 일자리를 구하게 되고, 자신이 너무나도 강하게 플로리스트가 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모든 꽃의 꽃말을 알고 있으며 그 꽃말을 이용해서 꽃가게를 찾는 손님들에게 맞춤한 꽃을 골라준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을 보여주는 이 책의 분위기는 지금까지 내가 70페이지 남짓을 읽은 현재, 전혀 밝지 않다. 오히려 슬프고 쓸쓸하다. 소녀가 꽃으로 '대화'를 한다는 것은 오로지 소녀만이 꽃말을 알아서 되는 일은 아니다.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말을 걸면 대답해줄 사람. 그리고 꽃도매시장의 한 남자가, 그녀와 대화를 한다.
소녀는 처음 본 그 남자(자신보다 대여섯살 더 많아보이는)의 관심이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다음에 만났을 때 그것을 꽃으로 전한다. 철쭉을 내밀면서.
"철쭉이에요."
계산대에 꽃가지를 내려놓으며 내가 말했다. 자줏빛 꽃들은 아직 피지 않았고 단단하게 여며진 독을 품은 꽃봉오리들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조심하라'.
그는 꽃을, 그리고 내 눈빛에 담긴 경고를 읽었다. (p.66)
그러나 그 남자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도, 자기가 할 말을 그녀에게 한다. 겨우살이로써.
나는 그가 내민 것을 받아 들고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의 곁을 지나쳤다. 모퉁이를 들고 나서야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연두색의 뒤엉킨 가지에 동그란 회색빛 잎사귀들이 자랐고 투명한 공들이 빗방울처럼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자른 모양이 내 손안에 꼭 들어가는 크기였고 여린 잎사귀들이 손바닥을 찔렀다.
겨우살이.
'나는 모든 역경을 이겨내리라.' (p.74)
아....진짜 너무 궁금해서 미칠것 같은데, 나는 지금 사무실이고 일이 많고 일을 해야한다. 오늘 결제올릴 것도 있고, 약속도 있고, 내일도 일이 많고, 회식이 있고...이 남자와 여자는 앞으로 어떤 대화를 더 하게 될지 궁금하고, 어떤 꽃들이 그들의 대화수단이 될지 궁금해서 미치겠는데, 그런데 현실의 나는 왜 지금 이 책을 더 읽을 수 없는걸까. 왜 나의 부모님은 재벌이 아닌걸까. 나를 재벌로 낳아서 회사같은거..다니지 않게 하지. 집에서 엎드려서 책 읽으며 살게 해주지. 하아-
고작 70페이지쯤을 읽었으니 앞으로의 내용을 나는 짐작할 수 없고, 어쩌면 이 책은 처음 시작과는 다르게 별달리 아름다운 결말을 보여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궁금하다. 그녀가 앞으로 꽃으로 하게 될 이야기들이.
그러고보니 크리스마스가 되기전, 알라딘의 ㅍ 님으로부터 받은 꽃무늬 머리끈이 생각났다. 나는 아기자기한 소품에는 별 관심도 흥미도 없는 사람인데, 머리끈은 얼마나 실용적인가. 나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머리를 묶는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머리끈을 모두 잃어버리면 편의점에 가서 또 사야한다. 심플한 고무줄로. 머리핀은 전혀 꽂지 않는다. 나는 아기자기한건 질색 팔색. 그런참에 받은 이토록 예쁜 머리끈. 실용적이면서 예쁘기까지 하다니!
선물받은 뒤로 매일, 이 머리끈을 하고 있다. 닳아서 끊어질때까지 할 예정이다. 정말 너무 예뻐서, 나는 이 머리끈으로 내 머리를 묶는순간 뭔가 공주가 된 기분이다. 기분이 아주 좋다. 엄청. 므흐흐흐흣
자, 이젠 열심히 일하자.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