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 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첫날처럼 아프진 않아 조금 더 기다려보려고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허리가 아팠다. 아, 병원에 가자. 집 근처에는 내가 다니던 정형외과가 있는데 회사 근무로 인해 평일 정형외과는 못갈 것 같았고, 한의원에 가 침을 맞아보자, 라고 생각했다. 마침 보스가 오전에 두 시간 정도 자리를 비울 예정이었던 화요일, 나는 회사 근처 한의원으로 검색했다. 대부분 10시나 10시30분에 오픈하던데 유독 한 군데만 08:40에 오픈한다고 되어있는게 아닌가. 게다가 원장은 여자분이었다. 오, 그러고보니 나 그간 한의원 다니면서 여자 한의사는 처음 만나는 것 같네? 바로 여기다, 하고 나는 보쓰가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택시를 불러 한의원으로 향했다. 걸으면 30분 걸리는 거리였는데 그러면 왕복에만 한 시간이 걸리는 터라 시간을 너무 많이 쓴단 말이지. 하여간 그렇게 택시를 타고 한의원에 도착했는데, 흐음, 정작 한의원 앞에서는 좀 망설였다. 너무나 낡은 작은 건물의 2층이었는데 그렇다보니 안의 시설도 좀 걱정이 되는거다. 검색해 찾아본 한의원 후기는 원장선생님과 간호사쌤들 친절하다고 되어있었고 나는 친절한 닥터를 만나고 싶었고, 하여간 일찍 오픈한다, 여자분이 닥터다, 친절하다, 보고 여기 왔는데 너무 낡았... 흐음. 그래 침만 잘 놓으면 되지, 하고 나는 한의원에 들어갔다.
도착해보니 손님은 나 혼자 뿐이었고 그래서 바로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작은 규모의 한의원이었고 접수대 간호사쌤도 한 분이었고, 진료실과 대기실은 문이 열려있어 알 수 있었는데, 하여간 내가 진료를 받는 중에도 손님은 오지 않았다. 원장쌤은 어디가 불편해서 왔냐고 물으셨고 나는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무거운 거 들다가 찌릿, 했다고. 선생님은 본격적인 질문을 던지시기 전에 내게 말씀하셨다.
"에너지가 있고 근육도 있으셔서 아주 좋으시네요"
라고 하시는게 아닌가. 읭? 내가 여기서 인바디를 한것도 아닌데 내 근육이.. 보여요? 그래서 어떻게 아셨어요? 여쭈니 그냥 웃으셨고, 그러더니 내 생활 습관이나 음주, 운동등에 대해 물으셨다. 그리고는 내 증상이 단순히 무거운 걸 들어서 생긴것만은 아니라면서 책에서 보여드리겠다고 책상 오른쪽에 있던 아주 두꺼운 책을 가져와 펼치셨다. 그 책은 무려 동의보감 이었는데, 와, 나 동의보감 그렇게 큰 거 처음봐. 종이는 성경책의 그 얇은 종이었고 사이즈가 어마어마했다. 동의보감 어마어마하구나, 하고 놀랐는데 선생님은 내 증상을 설명하기 위해 책을 펼치셨고, 그게 어디인지 너무 한 번에 펼치셔서, 이 책을 다 외우고 계시는구나 싶었다. 아니나다를까 책은 공부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참지 못하고 말했다.
"와, 엄청 열심히 공부하셨네요."
그러자 원장쌤은 아니에요, 하시면서
"이렇게 안하면 안돼요." 라고 하시는게 아닌가.
친절한 닥터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이 한의원에 방문전 잠깐 후기를 살펴보았었는데, 거기에는 원장쌤의 약력도 있었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가천대학교 한의학과 졸업, 가천대학교 한의학 석사 의 이력이 적혀있었다. 공부가..체질인 사람이구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졸업했는데 한의대를 또... 이걸 다 해내다니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던 사람일까. 그 흔적이 어마어마한 동의보감에 그대로 녹아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추혜인 작가도 생각났다.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의 추혜인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지만, 성폭력센터 자원봉사를 하다가 '성폭력 피해자의 입장에서 지원해줄 의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다음해에 같은 대학 의과대학에 진학했다고 했다. 대단하다.. 추혜인이 공과대학에서 의대로 진로를 바꾸는데 이런 이유가 있느니만큼, 내가 화요일에 방문한 한의원 원장쌤도 공대를 졸업했지만 기어코 한의대를 다시 들어간 어떤 이유가 있을것 같은데 나는 그게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너무 묻고 싶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내가 아무리 사람들하고 대화하는 거 좋아해도 처음 본 닥터한테 그런 사연까지 묻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일전에도 미용실에 머리 자르러 갔다가 나 잘라주는 남자 디자이너 분이 나이가 좀 젊은 편이길래 되게 묻고 싶었다. 어떻게 이 길로 오게됐냐고, 왜 헤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냐고. 이런거 너무 궁금하지 않나. 듣고 싶지 않나. 나는 이런게 진짜 궁금하단 말이야. 그러나 묻지는 않았다. 다시 원장쌤 얘기로 돌아가서, 그렇지만 정말 이야기가 들어보고 싶기는 했다. 왜 한의대에 또 가고 싶었는지 말이다. 게다가 동의보감을 그렇게 달달 외우고 있는걸 보면 공부를 잘하기만 한게 아니라 즐기기도 한 것 같지 않은가!
닥터는 나에게 묻고 나의 대답을 듣고 나는 어떤 사람이라며 책을 찾아 보여주었고 그러면서 내가 코어의 힘도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술을 자주 마셔서 자꾸 코어가 무너진다고. 나는 여기에서 정말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는데, 왜냐하면 이렇게 근육이 있는 내가 코어에 힘이 없단 말인가! 하고 절망하기도 했었고 또 어느 날은 이거봐 나 코어에 힘 있는데, 했다가 또 어느 날은 코어에 아무 힘도 없네 했었는데, 그게 코어에 힘이 있지만 술 때문에 무너지는거였구나, 하는 답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닥터는 내게 술을 좀 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책에서 술에 대한 부분도 찾아 보여주었는데, 숫제 그 페이지는 찢어져서 너덜너덜되어 있었고, 이 부분은 하도 많이 찾아서 찢어졌다며 책을 다시 사야되는데 .. 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가 줄여야할 것은 술이기도 했지만, 나한테는 섹스도 안좋다고 했다. 이것도 책에서 찾아서 밑줄그어져 있는 부분 보여주셨다. 내 얼굴 형태로도 책 찾아서 보여주시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무튼 엄청 재미있는 시간이었고, 대체적으로 다 수긍할만한 맞는 말이었다. 아무튼 그런데 섹스도 나빠요? 네, 알겠습니다. (뭘?)
에너지와 기운이 좋고 아주 잘 살고 있다고 하셨는데 술만 좀 줄이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너무 다 잘하고 있다고. 아 그리고 종이책 들고 다니지 말고 전자책 보라고 하셨다. 나 무거운거 들고 다니면 안된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는 무슨 사주 보러온 줄 알았네? 그러면서 집에 있지 말라는 얘기도 해주셨다. 내 안에 당연히 울증이 있는데 그게 집에만 있으면 발현되는거라 나는 계속 나가야 한다고, 집밖으로 나가라고 하는거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가야 에너지를 받는 사람이라고. 집에 있지 말고 밖으로 무조건 나가요, 라고 하셨다. 걷든지 운동을 하든지 뭘하든지 일단 집 밖으로 나가라고. 선생님, 저 집에 잘 안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게 내가 다 살려는 본능적인 움직임이었구나. 나로 말하자면, 혼자 있고 싶어해서 가끔 엄마랑 아빠가 동시에 집을 부러 비워주기도 한단 말이지. 너 혼자 있고 싶어하니까 좋아하는 책 읽고 글도 쓰고 그래, 하고 나가시는데, 그러면 내가 집에서 혼자 있는거 즐기면서(물론 즐긴다)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그러면 되잖아? 그런데 꼭 기어나간다. 아니 걸어나간다. 시장을 가든 백화점을 가든 하여간 나가. 그래서 엄마가 지청구를 늘어 놓으신다.
"너는 왜 집에 혼자 있으라고 집을 비워줘도 나가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엄마 미안, 나도 나를 어쩔 수가 없어... 그러니 내가 코로나 걸렸을 때 얼마나 미칠 것 같았겠나. 나갈 수가 없어서 대환장이었던 나는, 식탁 의자 가져다가 베란다에 두고 거기 앉아서 베란다 밖을 쳐다보았던 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내가 끊임없이 나가려는 건 본능이었어. 아 겁나 웃기네.
몇해전 해외에 거주하던 당시 애인이 날 보겠다고 나의 회사 근처에 호텔을 잡아두었을 때, 퇴근하면 쪼르르 그 호텔로 갔더랬다. 평일은 괜찮았는데 주말이 문제였다. 둘이 온전히 같이 있게 되는 시간이었고 그는 호텔에서 그렇게 나랑 같이 있기를 바랐는데, 그게 되는 사람이었는데, 아침 먹고 들어온 나는 미쳐버리겠는거다. 아 돌겠네. 어떻게 이렇게 가만히 이 안에 있을 수 있지? 나는 그에게 올림픽공원에 가자고 제안했고, 겁나 뜨거운 여름날 올림픽 공원 걷다가 완전 땀범벅 되어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는 내게 물었었다.
"너 나한테 왜이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나는 안에 못있겠다고. 먀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도 엄청 땀범벅 됐지만 그도 땀범벅이 되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갑자기 나는 미친년처럼 웃음이 터져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손수건 꺼내서 내 땀 닦다가 그의 땀 닦아주다가, 나는 정말 미친것 같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막 이렇게 되었더랬다. 햇볕과 햇빛을 받으면 좀 조증이 오는 편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여간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하는 사람이 접니다. 나는 엄빠도 그렇고 동생들도 주말에 제발 집에만 좀 있어보라고 하는데, 나도 이번 주말엔 정말 집에만 있어야지, 이러다가도 갑자기 옷 갈아입고 튀어나가버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밖이 나를 부른다. 둠칫 두둠칫~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게 다 내가 살려는 본능적인 몸부림이라니까? 내가 집을 싫어해서 나가는게 아니다. 나도 집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자꾸 나가. 이건 본능이었음을...
디스 이즈 마이 인스팅크트.
아무튼 재미있는 시간이었고 공부 의욕 돋는 시간이었다. 그 너덜너덜한 어마어마한 동의보감 보노라니, 내가 또 미쳐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동의보감 살까?' 이렇게 된건 이제 뭐 비밀도 아니다. 정확히 이 책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색해보니 22만원 상당의 책이네요. 선생님, 이 책입니까?
아 진짜 책 뽐뿌 넘나 엉뚱하게 잘 받아버리는 것 같다. 동의보감 사서 밑줄 그으면서 읽고 싶은 이 미친 마음 어떡하지? 그런데 저거 사봤자 벽돌책들하고 나란히 꽂아놓고 안볼거 아녀? 아쉬운대로 고미숙의 동의보감이라도 살까?
자, 드디어 침을 맞는 시간.
허리가 아프니 허리에 침을 놓을 줄 알았는데 무릎과 손바닥등에 침을 놓았다. 침을 놓기 전에 복진한다며 배의 여러 부분을 눌러보았고 어느 부분에서는 내가 너무 아프다고 소리도 질렀는데, 신기하게 침을 놓고나서 그 부분 다시 누르자 안아픈게 아닌가. 나는 육성으로 오!! 안아파요!! 하고 깜짝 놀랐다. 신기하네.. 원장쌤도 나처럼 사람들 얘기 듣는거 좋아하는지 어떤 직종에 근무하냐부터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하여간 그렇게 침 다 맞고 나오는데 허리가 기적처럼 나았다면 좋겠지만, 음.. 딱히 좋진 않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도 오후에는 조금 괜찮은 것 같아 요가를 하러 갔다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전굴을 할 수 없어서 요가의 반 정도밖에 따라하지 못했고, 역시 침은 소용없는가, 라고 생각했는데 어제는 그제보다 낫고 또 오늘은 어제보다 나아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이게 왜그런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침을 맞아서 좀 더 좋아진건지, 시간이 지나니까 좋아진건지, 모르겠슴.
하여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동의보감도 사고싶어지고 말이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크레마.. 사야할까.....
그나저나 술은 어떻게 줄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