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외출을 했다. 이촌역에 볼 일이 있었는데, 일요일 아침 일찍 하늘은 푸르르고 날이 좋아서 기분이 몹시 좋아졌었다. 나는 일요일에는 아저씨 모드로 돌변해서 세수도 저녁때 할까 말까 하는 게으른 여자사람인데, 그래서 일요일 아침일찍 내 컨디션이 엉망이지 않을까 했는데 웬걸, 아주 좋았다. 팔랑팔랑 하는 기분. 그래서 집 앞에서 맑은 하늘 사진도 찰칵 찍고 이어폰으로는 노래를 들었다. 랜덤으로 해놨더니 제시카 심슨의 [I've Got My Eyes On You]가 나왔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몇년전에 제시카 심슨의 노래 [when you told me you loved me]를 며칠 내내 들었던 적이 있다. 아우, 이렇게 슬픈 노래는 다신 없을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친구를 만나러 외출중이었고, 마침 이 노래를 들으며 지하철 안에 있었는데, 아뿔싸, 정신을 차려보니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 있었다. 으이쿠, 늦겠군. 나는 친구에게 노래를 듣다가 역을 지나쳐서 조금 늦을거라며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는 지하철을 타고 내려야 할 역에서 내렸는데, 이번에는 나가야 할 출구가 아닌 다른 출구쪽으로 무작정 걷고야 말았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누나, 어디가."
고개를 들어보니 내가 만나기로 한 녀석이었다. 앗. 이어폰을 빼고 여기가 어딘가 둘러보니 엉뚱한 곳.. 뭐야,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는거야. 녀석은 내게 잔소리를 해댔다. 대체 무슨 노래를 듣길래 그래, 라고 말하면서.
제시카 심슨의 목소리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데 when you told me you loved me 는 참 지겹게도 많이 들었었다. 그러다가 한 가십기사에서 보았다. 제시카 심슨은 '수술하지 않은 가슴중에 가장 예쁜 가슴 1위' 를 차지했단다. 아니 대체 그런건 누가 뽑는걸까? 나는 한번도 그런것에 투표한 적이 없는데? 웃겨, 증말. 어쨌든, 아 제시카 심슨은 수술하지 않은 가장 예쁜 가슴을 가지고 있구나, 라고 무심히 넘기며 그녀의 앨범을 들었었고, 여전히 그녀는 내게 아웃오브안중 이었는데, 나는 이 책속에서 제시카 심슨에 대한 이런 구절을 읽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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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승리의 전율이 단 하룻밤을 목표로 한 경쟁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2008년 가수이자 배우인 제시카 심슨이 댈러스 카우보이스(Dallas Cowboys, 미식축구 팀이다. -옮긴이) 에서 쿼터백으로 활약 중인 남자친구 토니 로모와 공개석상에 나타났다. "진짜 여자는 고기를 먹는다(Real Girls Eat Meat)"는 문구가 찍힌 셔츠를 입은 채였다. 팬들은 경쟁심을 느낀 심슨이 이런 과시 행동을 통해 로모의 이전 배우자를 빈정댄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녀가 채식주의자였던 것이다.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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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쿠, 심슨아. 그랬어? 진짜..그런거야? 그런 구린 행동을 한거야?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빈정 댄거야? 진짜? 금발의 예쁜 외모를 가지고서, 가장 예쁜 수술하지 않은 가슴을 가지고 있으면서, 멋진 남자친구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데도 다른 여자한테 그런 식의 행동을 한거야? 구리고 유치하잖아. 찌질해.
그러나 그 티셔츠를 입고 남자친구의 전(前)여자친구를 빈정댄 심슨은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집에 돌아와 티셔츠를 벗으면서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내가 지금 무슨짓을 한거지, 내가 왜이렇게 유치한 행동을 했지? 하고 스스로 고개를 젓지 않았을까? 사람을 가슴 아프게 하는 일은 대부분 유치한 일들.
우리는 모두 유치한 짓을 하고 살지만, 그것이 유치하다는 것은 남들이 말해주지 않아도 잘 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진짜 창피하게 느껴지는 유치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테면 이런거다. 아니다...관두자. 괜히 말하지 말자. 말하면서 스스로 찌질해진다. 관두자, 관둬. 아니야, 말할까? 그래, 말하자, 뭐 어때.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내가 별로 안좋아하는 여자를 만나는게 너무 싫다. 미칠것 같다.
그렇지만 너무 유치해서 이 말을 그 남자들 한테는 할 수가 없어. 아 진짜.
암튼 저 위에 분홍 티셔츠를 입고 춤추는 제시카 심슨은 팔이 예쁘네.
어제는 혼자서 사주를 봤다. 평생 사주가 아니라 일년 운세 같은것을 보았는데, 나는 이런걸 보는게 처음이라 정말 많이 망설였다. 어쩌지, 볼까 말까.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서 어쨌든 보게 되었는데, 사주를 봐주시는 분은 내게 '연애하기 힘든' 사람이라고 했다. 원리원칙대로 하려고 하고 고집이 세고 자존심도 세서 연애가 어렵다고. 좋아하는 남자가 있으면 밥먹자고 불러도 내고 커피를 마시자고 불러도 내야 되는데 애교도 떨고 사랑받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하는데, 나는 그런걸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아, 너무 웃겨서 그 앞에서 한참을 웃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그간의 몇번 안되는 연애에서 한번도 남자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이 늘 해야했고, 그들이 늘 와야했다. 그들이 인천에 살건 의정부에 살건 나는 그들이 사는 동네 근처에는 한번도 가본적이 없었다. 나는 그들을 만나기 위해 한순간도 움직였던 적이 없다. 아, 뭔가 미안해지는데.. 심지어 나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 적도 거의 없다. 나한테 모텔에 가자고 하면 콱 죽어버릴거라고 말했고(그래서 나는 남자와 단 둘이 모텔에 들어가본 적이 없다), 오늘밤 같이 있어주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남자한테 그럼 길에서 얼어죽으라고 말하고 집에 가버리기도 했고, 늦은밤 집앞에 찾아온 남자한테 내가 오라고 말한 적 없으니 나가지 않겠다고 문자를 보낸 뒤 핸드폰 밧데리를 빼버리고 잠을 자기도 했다. 아..완전 사악한가.. 정말이지 나와 연애했던 남자들은 참.. 멋진 놈들이로구나. 그런데도 데이트가 지속됐다면 그건 모두 당신들의 노력이었어. 미안해요. 어디서든 잘 살아요. 흑흑 ㅠㅠ 그런데 난 계속 이럴것 같아요. 그분의 표현을 빌자면, 나는 눈이 너무 높아서 '찌질이들은 댈게 아니'라고 했다. 푸하하핫. 나 좀 멋진데? (그러나 나는 결코 눈이 높지 않아요. 진짜 못생긴 남자랑 사귄적도 있어요.) 그분은 내게 또 그런말도 했다. 남들이 지름길을 알려주고 돌아가는 길을 알려주면 그 말 좀 들으라고. 여태 사람들이 알려줬지만 나는 그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난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는거야..
그리고 큰 손을 가진 남자운세라 재물운이 대박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 덕 보는게 아니라 순전히 내꺼라고 했다. 남자들과 대등하게 일하면 남자들보다 더 성공한다고. 그러더니 한참을 뭔가 쓰고 중얼거리시다가 으음, 공부는 좀 못했군, 법조계는 가면 안되겠어, 라고 하셨다. 푸핫. 나는 내가 공부 못하는거 알고, 그렇게 말하고 다니지만, 그래도 막상 다른 사람의 입에서 공부 못했다는 소리를 들으니..유쾌한 기분은 아닌걸? 그러더니 내게 전공을 물었고, 나는 전공을 말했다. 그러자 그분은 그치, 그거면 돼, 라고 하셨다. 그런데 어쩌나. 나는 전공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하핫. 어쨌든 나 사주에 돈 많은 여자. 후훗.
일요일에 아저씨 모드로 쉬지 못하고 아침일찍부터 밤까지 돌아다니다 집에 왔더니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그래서 일찍 자려고 열한시 반부터 잠자리에 들었는데, 젠장, 한시간마다 잠에서 깼다. 물론 내가 새벽에 깨는걸 좋아하긴 하지만, 그것도 한두번이지 한시간 마다..는 곤란하잖아. 열두시 이십분, 한시 이십분, 두시 이십분...다섯시 이십분까지. 아아, 너무 피곤해서 그런건가. 진짜 피곤에 쩔었다. 어제를 교훈삼아 이제 일요일엔 역시 게으른 아저씨 모드로 돌아가자고 생각했다.
근데, 나 어제 이촌역에서 완전 똑똑한 여자였다. 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