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외출, 지하철 안에서 읽은 단편은 『밤눈』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와- 이 몇장 안되는 단편에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붙였다. 지하철 안에서 그 단편 한편을 시작하고 끝냈는데, 전문을 다 옮겨오고 싶은 그런 글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꼭 읽어보라고 선물하고 싶은 그런 단편이랄까.
이제는 나이 들어 버린 여자가, 과거의 남자를 회상한다. 그 남자와 사랑했던 기억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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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란 것이 그런 겁디다. 아무리 단속을 해도 모기장에 모기 들어오듯이, 세 벌 네 벌 진흙 처바른 벼락박에 물 새듯이 그렇게 생깁디다. 말했듯이 손구락 하나 안 잡았는디, 새벽에 그 사람 갈 때까지 잠도 안 잤는디, 세상에, 한 지붕 아래 한방에 누웠다는 이유로, 날밤을 같이 샜다는 똑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이 남 같지가 안 합디다. (p.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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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정이란 그런 것. 아무리 단속을 해도 모기장에 모기 들어오듯 하는 그런 것. 손구락 하나 잡지 않아도 한 공간에 함께 날밤을 새웠다는 이유로 그가 특별해지는 그런 것. 아 젠장. 새벽에 이 글을 쓰고 있노라니 진짜 죽을맛이다. 밤은 자꾸 깊어가고 있으니까. 나는 이 공간에 홀로 있으니까. 아무리 열 손가락 활짝 펴봤자 손구락 하나 누가 잡아주질 않고 있으니까. 아니, 손구락 긴장 할 일도 없으니까. 하아-
그러니까 사랑이란 그런 것. 밤을 나누는 것이 특별해지는 것, 걸음을 나누는 것이 특별해 지는 것.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특별해 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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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하던 말이 그렇게나 좋았단 말이요. 밤새 나를 껴안고 조근조근 하던 그 말들. 그 여고생을 못 잊어 낙엽 진 길을 몇 날 며칠을 걸었다는 그 말. 내 눈을 들여다보며 눈동자 색깔이 어떻고, 머리카락 만지며 채석강 노을빛이 어땠더라고 속닥이던 말. 술만 취하면 마누라를 패고 기억도 못 하는 사내가 있었는디 탁발 온 스님 말이 남편은 전생에 소였고 마누라는 주인이었다, 그때 맞은 매를 되갚으려고 그러니 홍두깨는 버리고 커다란 싸리빗자루를 만들어놓으면 싸릿대 하나씩 한 대로 쳐서 몇 번 만에 업보가 풀릴 것이다, 했다는데 우리는 서로 아끼고 사랑만 하니 전생에서도 애타게 좋아만 하다가 죽었을 것이다, 내 손을 만지며 하던 그런 말이 그렇게 좋았단 말이요. 그렇게 재미나고 정답던 말을 인자 누가 또 할란고.. (p.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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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가 하던 말들이 무엇이든 상관없을 것이다. 밤새 나를 껴안고 조근조근 하던 그 말들은, 그러니까 이 얘기여도 좋고 저 얘기여도 좋았을 것이다. 그가 무슨 얘기를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람. 나를 껴안고 조근조근 말하는데. 엄지 발톱 만한 바퀴벌레를 때려잡아 죽인 이야기여도 좋았을 것이고, 밤을 새며 일을 하느라 눈알이 빨개졌었다는 이야기여도 좋았을 것이다. 조근조근 들려주는 그의 말을 들으며 여자는 그에게 취해버렸을테지. 얘기하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얘기하는 그의 눈동자를 마냥 바라보다가 그냥 그렇게 그 밤들을 보내보렸겠지. 그 밤들이 그렇게 그녀에게 켜켜이 쌓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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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음악을 좋아했는데, 밤에 잘 때는 어떤것 안 듣고 주로 [아들을 낳기 위한 발라드], 이런 것만 들었소, 우리는.
[아들린을 위한 발라드]라는 피아노곡을 떠올린 나는 헤헤 웃었고 그는 깔깔댔다.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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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하 아들을 낳기 위한 발라드. 그렇다면 딸을 낳기 위해서는 무엇을 들어야 할까? 하하하하
헤어진 사람, 헤어진 사랑. 그러나 그 사랑을 성공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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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사랑이 성공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헤어졌지마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요. 연애를 해봉께, 같이 사는 것이나 헤어지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디다. 마음이 폭폭하다가도 그 사람을 생각하믄 너그러워지고 괜히 웃음이 싱끗싱끗 기어나온단 말이요. 곁에 있다면 서로 보듬고 이야기하고 그런 재미도 있겄지만 떠오르기만 해도 괜히 웃음이 나오지는 않지 않겄서라우. 아, 곁에 있는디 뭐 하러 생각하고 보고 싶고 하겄소. 그러니 결혼해서 해로한 것만큼이나 우리 사랑도 성공한 것 아니겄소.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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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올리면 괜히 웃음이 나는 것, 아아, 그걸 대체 어쩌면 좋아. 생각하다 보면 괜히 히죽히죽 웃게 되고, 혼자서 걷다가도 실실 쪼개고 있고. 만약 그를 떠올리며 걷고 있는 나를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손가락질 했겠지. 정신이 살짝 나간 여자사람인가, 하고. 히죽히죽 실실 히죽히죽 실실. 그것은 사랑의 주문 같은 것. 싱끗싱끗 기어나오는 웃음은 사랑의 증거같은 것.
만약 내가 그에게 "당신을 떠올리면 싱끗싱끗 웃음이 기어나와요." 라고 한다든가, "당신을 떠올리면 자꾸 실실 쪼개게 되요."라고 한다든가, "당신을 떠올리면 자꾸 히죽히죽 거려요." 라고 한다면, 그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되묻지 않아 줬으면 좋겠다. 그것을 그것 자체로 사랑한다는 고백임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그렇게 말했는데, 그게 사랑이 아니고 대체 뭐겠어?
밤눈은 짧고 여름밤은 길다. 밤눈은 따뜻했고 이 여름, 이 새벽에 부는 바람은 시원하다. 밤눈은 여름에 읽어도 좋고 겨울에 읽어도 좋을 소설, 밤눈은 낮에 읽어도 밤에 읽어도 좋을 소설.
쓰고 나니 가슴이 두근두근, 자꾸만 밤이 깊어가고 있다. 도무지 이 밤을 잡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