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이었나, 술을 마시다가 <유퀴즈온더블럭>을 보았다. 게스트로 유태오가 나왔다. 유태오 나왔다는 걸 듣고 내가 찾아보긴 한거지만..
딱히 유태오에게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어도 유태오와 그의 아내 니키 리의 사랑 이야기에 대해서는 들어봤을 것이다. 뉴욕 한복판에서 늦은밤에 우연히 마주친 둘은 강렬한 시선을 교환하고, 두시간 정도 후, 그를 마주쳤던 곳이 식당 앞이었는데 그는 거기서 일하는 것 같다, 하고 니키 리는 그 식당에 돌아와 유태오를 찾았다. 그들은 그 뒤로 대화를 하고 사랑에 빠지고 결혼했다는 거다. 니키 리는 유태오보다 11살 연상인데, 유태오의 소년미를 지켜주고 싶어 그에게 꿈을 향해 달려가라며 지원을 해주고 그렇게 혼자 경제활동을 하면서 때로는 통장 잔고가 0인 삶을 살기도 했단다. 니키 리는 세월의 풍파를 맞게 되면 유태오의 소년미가 사라질테니 그 풍파는 자신이 맞아 주고 싶다 했더랬다. 유태오는 다른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왔을 때도 아내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잊지 않고 표현하곤 했다. 이번에도 그랬는데, 이번에 그는 그들의 그 강렬한 첫만남 이후를 얘기했다. 그 날 우연히 마주치고 서로 반하고 니키리의 동행1인과 셋이 유태오가 근무하는 식당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니키리의 동행이 화장실 가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오늘 우리집에 올래요?" 라고 했다고. 그 말에 유태오는 "빨리 주소 불러봐요, 외우게." 라고 했단다. 그렇게 유태오는 주소를 외우고 일 끝나고 니키 리의 집에 갔다고 한다. 주소지에 도착해보니 니키 리의 집은, 그가 항상 지나치면서 '저2층 집은 샹들리에도 멋있고 참 예쁘네, 저 예쁜 집엔 누가 살까' 생각했던 곳이었단다. 니키 리는 그곳에서 유태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그렇게 니키 리의 집에서 만났고 유태오는 우리 대화를 하자고 하며 나름 '이 사람이 나랑 대화할 사람인지 보자'는 심산으로 '너 아까 영화 좋아한다고 했는데 가장 좋아하는 한국영화 세 편만 대봐라' 라고 했단다. 여기서 자기랑 겹치는게 없으면 유태오는 그냥 돌아서서 가려고 했다고. 그런데 이 질문을 받은 니키 리는 '어라 이놈 봐라? 니가 모르는 영화를 대주지' 라는 생각을 하며 <플란다스의 개>를 말했단다. 그런데 이 영화는 얼라리여~ 그 당시 유태오가 가장 좋아하던 영화였다고. 사흘뒤 니키 리는 한국에 가야해서 그들이 알 시간은 지금 당장 그 사흘 뿐이었는데 그 사흘 내내 그들은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리고 결혼해 부부가 되었고 오랜 시간을 거쳐 지금 유태오는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가 레드 카펫도 밟고 그렇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여러면에서 놀라웠는데, 나는 '나였다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나라면,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꿈을 일년이고 이년이고 응원해줄 수 있나, 심지어 세상 풍파는 내가 맞을게, 하며 무조건적인 응원과 지지와 격려를 해줄 수 있나? 나에게 천번 물어도 내 대답은 고민없이 나왔다. '아니' 라고. 나는 아마도 얼마 안가 그 사람이 허황된 꿈을 포기하기를, 월급쟁이가 되어서 한 달에 이백만원이라도 정기적으로 수입이 생기기를 바랐을 것이다. 마틴 에덴도 성공한 작가가 되었지만 루스는 그를 2년도 못 참아줬지, 아마? 2년이 다 뭐야, 나는 그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함께 바라면서 혹은 그의 성공을 믿으면서 기약없는 기다림을 선택하지 않을 것 같은 거다. 아니야, 난 안그래. 못그러겠어. 언제나처럼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대입해도 이건 역시나 한결같이 '아니'라는 답이 나왔다. 일년이고 이년이고 너가 바라는 모습으로 성공하기를 기다리며 너의 뒷바라지를 할게, 라니. 아 아무리 생각해도 안되겠어. 나는 재이슨 스테덤을 참 좋아라 하지만, 만약 재이슨 스태덤과 연인 혹은 부부가 되었는데 재이슨 스태덤이 계속 무명으로 살고 있고 내 통장에 잔고가 0이 되는 순간도 찾아오고 그랬다면, 그 사랑을 포기할 것이다. 아니, 머리로 하는 내 사랑, 금세 사랑을 끝냈을 것이다. 나, 너 사랑 안해. 사요나라. 굳바이.
그러다가 문득, 어쩌면 그건 내가 유태오를 혹은 유태오같은 남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닌가? 사실 내가 유태오에게 호감은 있지만 그렇다고 지금 막 좋아하는 건 아닌데, 그런데 그라면, 그와 함께라면, 유태오라면, 나도 '너의 소년미를 잃지마, 세월의 풍파는 내가 다 맞을게' 할 수 있을까? 유태오라면 가능해지는 지점인걸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전에 친구들과 '콜린 후버'의 <어글리 러브> 읽으면서 그런 얘기를 했었다. 섹스 파트너 남자가 섹스를 아무리 잘해도 그렇지 나를 이렇게 무시하는데 이 관계를 왜 게속하고 빠져나오지 못하는거야? 라고. 그러다가 '어쩌면 이 섹스는 우리가 경험한 섹스들 보다 훨씬 더 강한건 아닐까. 그러니까, 우린 이걸 못해봐서 이 남자랑 그만 만나기를 얘기하는 건 아닐까? 어떤 섹스라면 어쩌면 우리도 비참하지만 계속 만나자 하게 될까? 했던 얘기를 했던거다. 어쩌면 내 경험치가 고작 거기라서 그런 선택을 하는건 아닐까? 유태오라면, 달라졌을까? 그렇지만 나는 마틴 에덴과도 헤어졌을 것이야..
또 하나, 플란다스의 개다.
나는 한국영화를 별로 보지 않아서 당연히 플란다스의 개도 보지 않았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언급하는 좋은 한국영화들 몇 편에 대해서라면 나도 들어서 안다. 플란다스의 개도 마찬가지. 그러나 나는 보지 않았고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보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러니 나는 볼 일이 없을 것이다.
만약 내가 첫눈에 반한 남자와 그날 밤이 새도록 얘기를 나누고 싶었고 관계를 만들거나 이어나가고 싶었는데, 그가 나에게 유태오처럼 질문했다면, 아니 그래 내가 그 자리에 니키 리 대신 있었다고 해보자. 유태오가 나를 앞에 두고 '가장 좋아하는 한국영화 세 편'을 물었다면, 나는 대답할 게 없다. 플란다스의 개가 다 뭐야, 나는 지금도 뭐 딱히 생각나는 한국영화가 없어? 지금 묻는다면 음.. 파묘? 이랬을 것 같다. 생각나는 한국영화가 파묘 뿐이야. 그러니 설사 유태오랑 서로 첫눈에 반해 그 날 밤에 다시 만났다 해도 나는 유태오와 그 다음을 이어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한국영화를 좋아하지 않고, 많이 보지도 않았고, 플란다스의 개는 보지도 못했는걸. 나는 아마 '글쎄 한국영화..는 잘 안보는데?' 했을 것이고 유태오는 아마 '굿바이' 하고 뒤돌아갔겠지.
사랑은 운명일까? 라는 물음에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거라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이런 걸 보면 운명인 것 같다. 내 삶에 있어서 내가 보아온 그 많은 영화들 속에 유태오의 마음에 들만한 영화는 없잖아? 내가 영화를 적게 본 것도 아닌데. 왜 유태오는 그런 질문을 하고 왜 니키 리는 그런 대답을 했을까. 그건 아마도 그들이 그렇게 될 운명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질문자가 나여도 마찬가지다.
내가 질문을 했다면 나는 아마도 '좋아하는 한국영화 세 편' 같은건 질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마도
"가장 최근에 재미있게 본 책은 뭐야?" 라든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어?" ,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어?" 같은거 물어봤을 것 같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질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내가 상대에게 첫눈에 반했을 때, 처음 만난 그 순간 반했을 때, 그건 어떤 질문이나 답 때문은 아니었다. 나중에 우리는 어떤 질문과 어떤 답들에 대한 인상적인 것들을 나누긴 했지만,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에겐 그 순간 반했다는 감정 혹은 교감 혹은 느낌 같은것이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뉘앙스일지도 모른다. 너의 눈, 코, 입 날 만지는 너의 .. 그러니까 내가 만약 플란다스의 개를 보고, 유태오의 질문에 플란다스의 개를 답했다고 해도, 나는 유태오와 사랑에 빠지거나 결혼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대답이 니키 리를 완벽한 짝으로 만들어준 게 아니라, 그 대답이 니키 리 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완벽한 짝이 된 것일테니까. '어떤 질문과 어떤 답이어서 우리는 이렇게 되었다' 는 충분하지 못한 말이다. 그 앞에 '그 사람'이 와야 하는거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해서 우리는 이렇게 되었다'가 정확할 것이다.
첫 만남 후에 또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었을 때, 훗날 돌이켜 그 날의 얘기를 하다보면, 이 질문이 좋고 저 대답이 좋고 수십개가 끊임없이 나올 수 있었지만, 그런데 그 사람이어서 그랬다. 복숭아를 사 준 걸로만 치면 그 사람이 아니어도 되겠지만, 그 사람이 복숭아를 사줘서 특별해지는 그런 것. 질문이 중요하고 답이 중요한가? 그렇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이다. 아무튼 나는, 플란다스의 개를 보지 않은 사람이다.
책을 샀다.
아주 또 한주간에 구매한 책들의 책탑.. 난리가 났구먼유 ㅠㅠ
[노숙 인생] 은 무엇을 계기로 내 장바구니에 들어 있었는지 모르겠네. 장바구니에 들어있었는데 제목과 표지를 보니 보고싶어져서 샀다.
[나의 핀란드 여행]은 선물용인데 책탑에 넣어버렸네 ㅎ
[악의 유전학] 이런건 도대체 어떻게 알고 샀는지 모르겠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해부]는 좀 알고 싶어서 샀는데, 그러고보니 내가 작년인가에도 우크라이나 책 알고 싶다고 사놓고 안읽었네? 쩝..
[자아폭발] 이런 책은 왜 산건지.. 나 자아폭발이라서?
[정의가 잠든 사이에]는 진짜 엄청 망설이다가 샀다. 제목이랑 표지 보면 어쩐지 폭탄 .. 일 수도 있을 것 같단 말야? 으.. 어쩐지 별로일 것 같은데 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어쩌면 나의 느낌이 틀렸을지도.. 재미있다면 남동생도 좋아할 것이다, 라고 샀지만. 흐음. 어쩐지 여전히 아닐 것 같은데.. 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버려. 왜죠?
내가 처음 정윤수를 알게된 건 김혜리 기자의 팟빵에서 였다. 정윤수는 클래식 코너를 맡아 하고 있었는데, 아니 이 분이 축구 비평도 하신다는 겁니다. 네?? 클래식하고 축구요? 그런데 코너를 가만 듣다보면 이 분이 잘 아시는게 클래식과 축구 뿐만은 아니었다. 책도 엄청나게 읽으시고 뭔가 음악 얘기를 할 때에도 그 시대에 읽혔던 책들까지 다 끌고와. 대단하다.. 하면서 그 코너를 애정했었다. 정윤수가 소개해서 내가 [지휘의 발견]이란 책도 샀다니까? 안읽었지만.. 킁. 그 분이 클래식 책을 썼다니 어떻게 안 살 수가 있나욤?
[듄1, 2] 는.. 하하하하하. 아니, 다락방이 듄을? 하고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 맞다. 샀다. 샀는데, 나도 내가 이 책을 사게될 줄은 몰랐다. 이 책에 대한 좋은 리뷰도 읽어봤었고 또 영화로도 2편까지 개봉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책은 전혀 내 타입이 아니다. 나는 듄에서 창조해낼 세계가 전혀 궁금하지 않다. 영화도 보고 싶지 않다. 호기심이 전혀 안생기고 관심이 전혀 없단 말이지. 그런데 왜 샀는댜, 이반 일리히가 그러지 않았나. 지금의 나는 그간 내가 만난 사람들로 인해 구성되어졌다고.. 뭐 이런 뉘앙스의 말이었다. 무슨 얘기냐하면,
나는 e와 일전에 책을 한 권 같이 읽으면서 다음 책은 네가 골라라 했더랬다. 그 책이 코스모스였고 우리는 두달에 걸쳐 그 책을 다 읽었다. 그 후 내가 책을 고를 차례가 돼서 [유대인의 역사]를 골랐고 이게 이번 3월달까지 읽어야 할 책이다. e는 다 읽었고 나는 3월안에 유대인의 역사 읽으랴, 도나 해러웨이 읽으랴 아주 그냥 미치겠단 말이지. 그런 e와 지난 토요일에 판교에서 만나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마셨는데, 마침 근처에 교보가 있었단 말이지. 나는 우리 교보 들렀다 가자, 하고 교보로 갔다. 교보 판교역점은 사이즈가 크진 않았는데 우린 저마다 관심있는 책들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나는 어느덧 e가 멈춰서 책 읽는 앞까지 오게 되었다. 보니까 듄을 읽고 있는게 아닌가. 아, 듄 읽네 재밌어? 했더니, 오 재미있을 것 같다는 거다. 그러면서 '다음 책 골랐어요, 듄으로 해요' 이러는거다.
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우리에게 거부권은 없다. 알겠다고 답했다. 내가 고른 유대인의 역사 그 빡센 책을 읽은 친구인데 나라고 듄을 읽지 못할 일이 뭐란 말인가. 그런데 이 책 엄청난 사이즈이니만큼 3권까지 3개월에 걸쳐 읽자고 해두었다. 4~6은 각자 더 읽고 싶으면 읽자고. 그리고 나는 말했다. '나도 이 책 읽고난 뒤 다음 책 정했어. 오리엔탈리즘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는 그 자리에서 1권 사겠다고 바로드림 신청을 하려는데, 아니 6권 셋트는 더 저렴한거에요. 셋트가 저렴하네 왜지, 막 이러고 있는데 직원분 오셔서 '셋트 보여드릴까요?' 하고 가져다주셨고 셋트 본 e는 그 책을 바로 그 자리에서 결제하기에 이르는데..아니 잠깐만, 이거 어떻게 들고 가려고 그래, 했더니 직원분은 택배서비스 된다고 하셨고, 그래서 e는 1권은 가져가고 나머지만 택배 신청을 한 것이었다. 나는 교보에서는 안사고, 왜냐하면, 데스크매트 알라딘에서 받을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내꺼 받아서 깔았는데 조카1 줄라고 하나 받아놨단 말야? 조카2를 위해서도 하나 더 받으려고 했기 땜시롱 알라딘에 주문했다. 그렇게 듄을 사게 된 것이다. 이 책 너무 두꺼워서 사기 전에 전자책으로 살까 엄청 고민했는데, 종이책 사서 나중에 조카2 주자, 하고는 종이책 샀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카2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는 것은 빔!일! ㅎㅎ
마지막으로 [나의 첫 베이킹 수업]은 책탑엔 없지만, 저 주말 교보갔다 사들고 온 책이다. 일요일에 베이글 만들려고 언제나처럼 인터넷으로 레서피 검색했었는데, 우연히 교보에서 이 책 보고 베이글 있나 들춰봤더니 있더라. 그래서 오오, 이거 사진찍자 하고 베이글 편 사진 찍다가, 아니, 이걸 내가 왜 사진 찍고 있지? 걍 사면 되지!! 이러고 샀다. 갑자기 베이킹 책 사버린 나.. 어쩔 ;;
그래서, 저 책 사서 베이글 만들었냐고요?
만들었습니다. 그건 투비로 가세요. 고고씽!!
https://tobe.aladin.co.kr/n/171707
어휴 이거 쓰는데 한나절 걸렸네. 왜냐하면 일이 너무 많은데 페이퍼는 쓰긴 써야되겠고 그래서 짬을 내서 쓰느라 ..
한달에 책 열권쯤 읽는 것 같은데 사는건 서른권에서 마흔권을 산다. 그러면 매달 서른권의 책이 남고 그 책들은 다 어디에 보관하냐고 오늘 회사 동료가 물었고, 보관하지 않는다, 방치되어 있다, 고 나는 대답했다.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