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미소에 대해 말하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굳이 '미소'로 딱 지정하진 않고 웃음으로 확장해도 될 것 같다.
일전에도 내가 소설을 읽고서였나, 웃음에 대해 말했던 적이 있다. 내 경우에는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지 않는다. 이건 내가 페미니즘을 알기 훨씬전부터 갖고 있는 나의 성격이었다. 아마 나같은 사람은 많을텐데, 나는 상대가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갖고있다 해도, 혹은 상대가 아주아주 웃길 의도로 어떤 농담을 던진다 해도, 그래서 함께하는 모두가 웃고 있다해도, 그 말을 하는 상대가 싫으면 웃지 않는다. 그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이 하나도 재미있지 않고 그 사람에 전혀 웃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질 않는다. 웃고 싶지 않으면, 나는 웃지 않는다. 웃고 싶지 않은데 웃는 건, 내가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반면, 상대가 좋으면 굳이 나를 웃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나는 웃는다. 상대가 좋을 경우 나에겐 웃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 게다가 상대가 좋으면,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웃는 표정으로 그 사람을 상대하고 있다. 내 표정은 내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어서 상대가 싫은데, 이 농담이 싫은데 웃을 수는 없다. 내 웃음은 그런 식으로 발휘되지 않는다.
이건 그냥 내 성격이다. 그리고 아마 나만 이런건 아닐 것이다. 지구상에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웃고 싶지 않은 상대나 상황에서 굳이 웃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그저 웃지 않는것만이면 다행이게. 적극적으로 웃고 싶지 않아, 웃지 않는 날 봐, 를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게 아닌가!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여성 해방 운동을 위해 "꿈꾸는 행동"이 "미소 거부"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미소 거부를 선언하면 모든 여성들은 즉각 '남을 즐겁게 하는' 미소를 버릴 것이고, 그 후로는 자신들이 즐거울 때만 웃으려 할 것이다" (Firestone 1970: 90[132]). -p.127
내 웃음은 그러고보면, 남을 위한 것이 아니었구나 싶어졌다. 나는 널 위해 혹은 분위기를 위해 웃을 생각은 없다.
각설하고,
이 책의 제2장의 제목은 <분위기 깨는 페미니스트> 이다. 나는 이 책을 선정할 때 '사라 아메드의 책을 한 권쯤 다같이 읽어야겠다'로 생각하고 골랐고, 그중에서도 좀 덜 어려워보이는 걸로 선택했다. 제목의 '행복'과 '약속'은 어렵지 않음을 말하는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그러면서 목차도 보지 않고 선택했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펼치고 '분위기 깨는 페미니스트'라는 제목을 봤을 때 살짝 당황했으며, 그러나 그보다 더 크게 웃음이 났다. 아 그럼 그렇지, 그럼 그렇지!! 그래, 페미니스트 얘기를 하고 있었어, 사라 아메드는!! 아직 2장도 채 다 읽지 못했지만, 와, 진짜 아직 2장도 다 못읽은 현재 이 책은 별다섯을 예약한다. 진짜 너무 좋다. 페미니스트이든 아니든 읽으면 너무나 좋을 책이다. 게다가 사라 아메드는 자신의 이론과 주장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가 익히 아는 소설들을 가지고 온다. <댈러웨이 부인>,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디 아워스> 를 가져와서 이야기하고 벨 훅스와 오드리 로드도 끌어들인다. 이미 여성학 책을 여러권 읽어왔던 사람들은 익히 아는 이름을 만나니 즐거울 것이고, 플로스강의 물방앗간 이라면 우리가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통해 만나지 않았던가. 단 하나 유감이라면, 플로스강의 물방앗간.. 스포 당해버려쒀… 아놔…Orz
자, 무슨 말을 하는지 인용문을 좀 가져와보겠다.
즉, 트러블 메이커는 깨질 듯한 평화의 조건을 위반한 사람이다. 이 모든 사건에서 매기는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는데, 이때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그녀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도록 만든 폭력, 주변을 맴돌며 그녀를 도발하는 폭력이다.(플로스강의 물방앗간)-p.113
결국 페미니스트들은 기꺼이 소란을 일으키겠다는 사람들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심지어 고집을 부려야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주체의 의지가 다른 사람들의 의지, 즉 그의지가 일반의지 또는 사회의지로 물화物化된 이들의 의지와 일치하지않을 때 고집스럽다고 말한다.
따라서 여성 트러블 메이커의 형상은 분위기 깨는 페미니스트의 형상과 동일한 지평을 공유한다. 두 형상 모두 행복의 역사라는 렌즈를 통해 해석하면 이해가 가능하다. 페미니스트는 행복을 약속하는 대상들이그렇게 장밋빛이 아님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를 깰 수 있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은 그래서 불행으로 흠뻑 젖어 있다. 페미니스트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바로 그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생각하고 행복을 가져온다고 생각되는 그 어떤 것을 파괴한다고 미리부터 읽버린다. 분위기 깨는 페미니스트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깬다." -p.120
우리는 또한 페미니스트의 불행에 대한 집착(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즐겁지 않기 때문에 분위기를 깬다는 신화)을 목격할 수 있다. 여성들이 불행하기 때문에, 아마도 자신들은 성취하지 못한 행복을 성취한 사람들에 대한 시기심이 전위된 결과 페미니스트가 됐을 거라고 믿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p.123
나는 오늘 아침 지하철안에서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얼마전에 보게 된,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의 구매자평이 떠올랐다.
나는 이 책(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을 사서든 빌려서든 읽을 생각이 없다. 그렇지만 이 책이 무슨 말을 할지는 알겠다. 요즘의 나는 이런 류의 책을 별로 좋아라 하질 않아서 살 생각이 없는데, 어쨌든, 나는 이 책에 달린 이런 구매자평을 보게 된거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3/0421/pimg_7903431033830349.jpg)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으니 책의 내용에 대해 확신할 순 없다. 어쩌면 이 책의 내용은 되게 구릴 수도 있다. 내가 읽는다면 책의 내용에 동의를 안할 수도 있고 나 역시 어떤 점을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거랑 별개로 나는 아직도, 여전히 페미니스트=사랑받지 못하는 여자 라고 생각하는 이 낡고 고루한 사고가 부끄럽다. 이 구매자평은 내가 위에 인용한 모든 것들이 가리키는 방향과 일치한다. 바로 위, 123 쪽에서 뭐라고 했는가.
'여성들이 불행하기 때문에, 아마도 자신들은 성취하지 못한 행복을 성취한 사람들에 대한 시기심이 전위된 결과 페미니스트가 됐을 거라고 믿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 고 하지 않았는가! '소외되고 사랑받지 못하는 여성들' 이라는 전제가 너무 낡아서 진짜 깜짝 놀랄 지경이다.
물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아직 학생이던 때, 그러니까 가만 보자 그때가 언제냐, 가만있자…그러니까…한 30년전쯤이었던 것 같다. 30년전쯤, 나 역시 페미니스트는 사랑받지 못하고 못생긴 여자들이라고 생각했었단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렀고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책들을 읽었고, 많은 경험을 했다. 그 결과, 30년 후에는 페미니즘, 여성주의에 대해 완전히 그 때와는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고, 그리고 그 때의 나를 부끄러워하는 내가 되었다.
나는 지금 완벽한 인간이 아니지만, 그러나 과거의 나보다는 훨씬 나은 인간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과거의 나의 말과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알고, 지금 알고 있는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로도 그걸 안다. 고전을 비판하는 일이 소외되고 사랑받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로하는 거라고 생각하다니. 소외되고 사랑받지 못하는 여성들에 대해 머릿속에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알겠다. 더이상의 말은 생략하겠다. 그냥, 너무, 부끄럽다 … 저 구매자평을 보았을 때, 와,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네… 하고 으… 부끄럽다 하고 돌아섰었는데, 오늘 아침 사라 아메드의 글을 읽는 순간 샤라라랑~ 마법처럼 저 구매자평이 똭! 떠오르는 거다. 오오, 사라 아메드가 말한 게 바로 이거네!!!
사라 아메드 책 너무 좋다. 행복은 그저 선이고 참이라고만 생각했다가 아주 여러 갈래로 생각해볼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다. 2장에서는 페미니스트를 소환하고 3장에서는 퀴어가 나올 참인가보다. 단순히 문장으로만 보면 행복을 '깬다'는 것은 악인듯 하지만, 그러나 '어떻게' 만들어진 행복을 '왜'깨는가, 로 좀 더 들여다보면 행복은 선이 아니고 억압일 수 있으며 깬다는 것은 내 삶을 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사라 아메드가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일은 즐겁고, 이 책을 선택하기를 몹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라 아메드의 《행복의 약속》은 모든 사람들이 살면서 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사실, 인생에 있어서 이 책을 좀 더 일찍 만난다면 삶을 좀 더 주체적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아직 2장도 채 안읽었으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특히나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은 정말 삶에 도움이 될 것이다.
계속 읽어보도록 하겠다.
아, 그리고 매직 마이크 페이퍼 쓰러 가야겠다. 슝 =3=3=3=3
(이러고 이 페이퍼 보다 먼저 등록함. 여러분, 오늘 페이퍼 하나 더 있숑!!)
페미니즘의 역사는 문제 일으키기의 역사,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따르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일을 거부함으로써 소피가 되기를 거부한 여성들의 역사이다. - P111
페미니스트 주체들이 사람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것은, 성차별 같은 불행한 주제들을 놓고 떠들어대서이기도 하지만, 행복이란 게 잘 지내지 못함을 나타내는 바로 그 기호들을 지워 버림으로써 유지되고 있다는 걸 폭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 P122
유색인 페미니스트로서 당신은 심지어 긴장을 초래하는 어떤 말도할 필요가 없다. 어떤 신체가 단순히 근접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서적전환이 일어난다. 어울려서 잘 지내려면 당신은 누군가에게는 그 공간에들어올 수조차 없음을 의미하는 그런 것들에 동조해야 한다. 이런 예들은역사가 무형의 분위기에 혹은 걸림돌처럼 보이는 유형의 신체에 어떻게응축돼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아마도 분위기는 긴장의 지점들을 어디에위치시킬지에 대한 합의가 존재할 때 공유되는 것 같다. 유색 여성으로서 화를 내며 말하면, 당신은 긴장을 야기하는 사람이라는 당신의 위치를 확증해 주는 셈이 된다. 당신의 분노는 사회적 결속을 위협하는 것이다. 오드리 로드가 묘사하듯이 "유색 여성이 백인 여성과 만날 때 분노를 느끼는 경우가 너무 많다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보통 ‘참 난감한 기분이 들게 만드시네요‘, ‘백인 여성이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시네요‘, ‘신뢰에 기초한 대화와 행동에 방해가 됩니다‘라고한다" - P125
즉 자신의 지평을 넓히는 것은 세상에 우리가 불행을 느낄 상황이 얼마나 많은지 더더욱 의식하게 되는 것일 수 있다. 불행은 또한 우리가 꾸준히 정서적으로 불행의 원인에 관심을 두게 해줄 수 있다. 당신이 불행한 것은 불행의 원인들 때문이다. 의식화가 불행한 가정주부를 행복한 페미니스트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소망할 순 있겠지만 말이다! - P129
행복이 우리를 특정 지점에 도달하게 해주는 것이라 해도, 당신이 거기 도달했을 때 반드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댈러웨이 부인에게 이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은 사라짐이다. 이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의 핵심은 어떤 사라짐, 가능성의 상실, 신체 역량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어떤 실패, 그녀의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하는 어떤 실패이다.19 우리는 가능성을 의식해야 그것의 상실을애도할 수 있다. - P130
셉티머스는 셸쇼크shell shock[전쟁신경증의 하나를 앓고 있다. 그의 느낌, 전쟁에 대한 공포가 기억으로 침투해 들어올 때의 패닉과 슬픔은 우리에게도 전해진다. 그의 고통은 과거를 현재의 시간 속으로 들여온다. 전쟁은지속되고, 피부에 후유증으로 끈질기게 남아, 지나간 것이 되기를 거부한다. - P132
보부아르가보기에 파티라는 선물은 곧 의무가 되어 버린다. - P134
불행은 그것이 익숙한 느낌일 때조차, 낯선 방문객처럼 도착해 익숙함을 방해하거나 익숙함 속에 있는 불편한 요소를 드러낸다. - P136
"우리의 행복에 대한 생각"을 전제로 한 삶이 로라에게는 견딜 수 없는 삶이었던 것이다. 그런 행복은 죽음과 같았다. 그녀는 행복을 위해 그 삶을 떠난 것이 아니다. 삶을 위해 이 행복을 떠난 것이다. - P141
로라의 행동이 극단적인 것으로만, 심지어 폭력으로, 회복될 수 없는 고통의 원인으로만 서술 가능하다는 사실은 행복 관념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보여 준다. 이는 행복 관념이 타인의 행복을 보살피는 충동과도 밀접히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불행을 초래할까 두려워, 공감 받지 못할까 두려워, 매정한 사람으로 남을까 두려워 불행한 상황에 머무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삶을 위해 행복을 떠나기는 어려운 일이다. 행복 관념에 따라 살아가면서 상실한 것들을 의식하는 것과 삶을 위해 행복을 떠나는 것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있다. 이 간극에서 일이 벌어지고, 삶을 살기도 하도, 상실하기도 한다. - P143
페미니즘의 유산을 재생산하는 데는 한 세대 이상이 걸릴지도 모르고, 그로부터 우리는 공적으로 공감을 얻지 못한 채 기억돼 온이들을 향한 공감(아마도 정서 이방인들을 위한 공감 혹은 이질적인 공감을 얻을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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