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주의의 혹세무민 능력은 때로 그 비이성적이고 뒤죽박죽인 논리에서 비롯된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흑인은 지적 성취를 이룰 능력이 없었다. 어쨌든 이들은 인류의 본보기인 백인에 비하면 태생적으로 열등한, 재물이었다. 하지만 흑인이 정말로 생물학적으로 열등하다면 지식 습득의 욕구도 능력도 표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학습을 금지할 필요도 없다. 물론 현실에서 흑인들은 언제나 교육의 기회를 얻는 데에 맹렬한 열성을 보였다. -p.164
영화 《그을린 사랑》에는 다른 종교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명예살인을 당할 위기에 놓인 여자가 등장한다. 여자는 그 남자의 아이를 낳았고 그 사실 때문에 남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이에 여자의 할머니는 갓난 아이에게 나중에 알아볼 수 있는 표식-발뒤꿈치에-을 남긴 뒤, 그 여자에게는 혼자 떠나라고 한다. 떠나서 도시로 가라고, 도시로 가서 교육을 받으라고. 교육을 받으면 이곳의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등떠민다.
'호시노 미치오'의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에는 이런 일화가 등장한다.
무엇이 계기였을까. 서로 친밀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날로 친구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이 왜 알래스카 대학에 진학하려고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파이프라인이 생기고 나서 무스가 눈에 띄게 줄었어. 옛날 스티븐스 마을은 들판에 고립되어 있었지. 그 마을에 가려면 유콘 강을 거치는 수밖에 없었어. 지금은 파이프라인 도로가 마을 근처를 지나가고 있어. 가을 사냥철이 되어도 무스를 볼 수 없게 된 것이 그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그걸 알아내고 싶은 거야." (pp.143-144)
영화 《그을린 사랑》속 할머니는 본인이 교육을 받았던 것이 아니다. 그 마을에서 태어나 그 마을에서 살았고 그 마을 전통에 익숙하다. 그러나 자신들의 문화가 옳지 못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자신이 사랑하는 손녀를 살리기 위해 도망치도록 도우면서 교육에 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의 '알'은 자신의 마을에서 삶을 살아오다가 파이프라인이 생기고 난 후 환경이 그전과 같지 않다는 걸 인지하고 그 답을 찾고 싶어 교육을 받기로 한다.
재차 언급했지만, 내가 페미니즘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최명희' 의 소설 《혼불》을 읽으면서 였다. 혼불을 읽으면서 그 시대 여성들의 삶이 답답하고 억울했는데, 거기에 가슴을 치다가, '왜 이랬을까, 왜 이래야 했을까' 의문을 갖게 됐고,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여기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본격 페미니즘 책읽기를 시작했었던 거다. 한 권 읽고 또 한 권 읽고 지금은 몇 년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오면서 나는 전세계적으로 그리고 아주 오래전부터 이 세상은 여성을 혐오하면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읽었던 수많은 페미니즘 책은, 당연하게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혼불을 읽으면서 혹시 페미니즘을 알면 도움이 될까? 하고 생각하게 되기 전까지 학교 교육을 받았고 책을 많이 읽었다. 내가 무언가에 의문을 갖고 그것에 대한 답을 얻고 싶다면 공부를 하면 될 것이라는 사고가 내게는 딱히 어려운 건 아니다. 그동안 교육을 받았고 학습이 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을린 사랑속 할머니도, 알래스카의 알도 교육과 학습의 기회를 제공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이 점이 경이롭다. 내가 교육을 받은 적 없는데 어쩌면 교육에 답이 있지 않을까, 라는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 거기에 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뻗어갈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과 똑같은 환경이 내게 주어졌을 때 그 답을 교육에서 찾자는 사고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점이 무섭다. 내가 학교를 가자, 교육을 받자, 라는 사고를 하지 못한 채로 그저 답답하거나 모르는 걸 당연시 여기면서 살아갔을까봐 너무 무섭다.
대부분의 경우 의지는 해결책이긴 하지만, 의지가 발현되기 전 일단 인지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아, 그렇다면 그걸 하면 되겠구나, 아 그렇다면 그걸 시도해야겠어. 이런 깨달음이 없다면 내 안에 아무리 커다란 의지가 산처럼 자리잡고 있다고 해도 발현될 수가 없다. 나는 내가 지금과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 떨어져 교육없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런 내게 이런 깨달음의 순간이 반드시 찾아오기를 바란다. 가급적이면 빨리. 쉰이나 예순에 말고 열살 즈음에 찾아와라. 그래야 큰 사람이 되어서라기 보다, 그래야 내가 받은 교육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테니까.
흑인들에게 학습의 기회는 제공되지 않았다. 많은 흑인들이 문맹이었다. 그들은 노예 해방과 참정권을 외치면서 또한 교육을 받고자 한다. 흑인들은 학습능력이 떨어진다, 열등하다는 그 수많은 세뇌는 그러나 교육받고자 하는 흑인들의 욕망을 죽이지는 못했다. 그동안 내 주변의 힘있는 사람들이 '너는 열등해, 너는 학습받을 능력이 안돼, 니가 배워서 뭐해' 라고 주입시켜왔는데, '반드시 글을 읽을 수 있도록 하겠다, 교육을 받겠다' 하는 깨달음은 그리고 의지는 도대체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나는 이 점이 너무 놀랍고 정말 감탄스럽다. 내가 어느 때 어느 곳에서 태어났더라도 반드시 그걸 깨닫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주변에 어떤 부조리하고 불합리하고 부정의한 상황을 목격하고 혹은 내가 직접 당했을 때, '이건 아니다'라는 감각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주변에서 '넌 멍청해' 하면 '아 나는 멍청하구나'로 끝내는 게 아니라, '너는 게을러' 하면 '아 나는 게으르구나' 하는 사람이 아니라, '넌 해도 안되니까 하지마' 하면 '응, 그러면 안해야지' 하는게 아니라, '왜 너는 되는데 나는 안된다는거야?' 하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왜 너는 하는데 나한테는 하지 말라는거야?' 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나한테도 교육이 필요한 건 아닐까, 그것이 나를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문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 자리에 멈춰서서 고생스런 환경에 그대로 순종하며 응, 이게 삶이지, 하고 묵묵히 오늘도 고생하고 내일도 고생하고 평생을 고생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숙녀 여러분, 우린 싸워서는 안 된다고, 적들에게, 전쟁에 찬성하는 인간들에게 상냥하고 친절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살았습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다들 전쟁의 이유를 알잖아요. 자본주의 때문이라는 걸. 우린 그 나쁜 자본가들에게 저녁 식사를 차려줄 수 없고, 아이들에게 해주듯이 잠자리를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그들과 싸워야 합니다. -p.245
내 고생과 고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이건 이상하다, 이건 뭔가 이상해 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싸우러 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동시에 손가락이 소세지로 구성되어 있는 행성에 살아도, 내가 돌멩이로 절벽위에 놓여진 행성에 살아도, 이상하다 안되겠다 싸우자!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멀티버스 속 나들아, 교육을 받으러 뛰쳐나가, 교육이 답이야, 그리고 싸워라, 싸우자!! 일어나라 수많은 나여!!!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