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에는 가족들과 만나 북적거리는 시간을 보냈다. 여동생네 식구 남동생네 식구 그리고 아흔셋의 외할머니까지 함께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고 그 집에서 이 모든 식구들이 한데 모여 잤다. 정신없는 1박2을 보내고 여동생네 식구와 남동생네 식구는 돌아갔고 이내 외삼촌과 이모가 왔다. 나는 인사를 나누고 사촌동생에게 용돈을 준 뒤, 바람을 쐬러 나갔다. 가방 안에는 책이 들어 있었다. 혼자 좀 걸어야했고 책도 읽어야 했다. 이런 시간이 필요했다. 찬 바람을 맞으며 한 시간을 걸었고 까페에 들어가 가져온 책을 꺼냈다.
에바 일루즈의 신간이 너무나 반갑게도 다정한 알라디너의 선물로 내게 도착했다. 후훗. 설 연휴 전에 도착해서 덕분에 설 연휴동안 읽을 수 있었다. 책은 생각보다 얇았는데 설 연휴동안 읽은 책이라곤 이 한 권이 전부였다. 껄껄. 그래도 다 읽어서 오늘 아침 리뷰도 썼다. 리뷰 읽으러 여러분 다녀오삼~
책을 사지 않으려고 했지만 책을 샀고(무슨 말이야..) 그렇게 오늘도 어김없이 책탑 사진을 올린다.
《카프카와 함께 빵을》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만화일 것 같아서 샀는데, 이해되는 부분은 좋았지만 이해 안되는 부분이 수두룩해서 읽다가 포기했다. 팔아버려야지..
《Josh & Hazel's Guide to Not Dating》은 영어책 같이읽기 도서다. 그래서 샀다. 번역본도 전자책으로 사두었다.
《섹스 자본이란 무엇인가》는 에바 일루즈의 신간인데 다정한 알라디너가 슝- 선물 날려주셨고, 덕분에 받자마자 읽었다. 감사합니다!
《생에 감사해》는 유퀴즈의 김혜자 편을 보고 한 일을 오래 해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져 샀다.
《운명의 딸》은 아시아계 남성과 결혼한 남미 여성이 미국에서 사는 이야기를 전편에서 보았던터라, 그들의 만남부터 사랑에 이르기까지가 이 책에 있다고 해서 읽어보고 싶어져 샀다.
《부와 가난은 어떻게 만들어지나요?》는 아동을 대상으로 부의 축적 그리고 가난에 대해 알려주는 만화인데, 성인인 내가 읽고 분노에 타올랐다. 내가 일하는데 부자는 왜 다른 놈이 되는것이냐!!
《겨울 이불》은 아가 조카 주려고 샀는데 정작 아가조카는 관심이 없다.. 명절에 울집 와서는 파리채들고 보이지 않는 모기를 잡는다고 소리 지르고 다니고, 휴지 얇게 뜯어서 사촌 오빠(10세)가 휭- 날려주면 좋다고 모~ 모~ (모기란 뜻이다) 이러면서 뛰어댕긴다... 아가야, 겨울 이불은 관심없니?
요즘은 나의 게으름에 대해 깨닫고 있다. 아빠의 입원으로 인해 엄마가 며칠 집에 안계셨고 그래서 내가 오롯이 혼자 집에서 며칠을 보내야 했다. 아빠는 여전히 병원에 계시고 엄마가 여동생 집에 머물러 가셨던 때에도 나는 혼자였다. 혼자인 나는 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게으르고 엉망이 되더라. 식탁 위에는 간신히 밥 공기 하나만 놓일 정도의 공간만 남겨두고 내 책들과 맥북과 아이패드가 놓였고, 빨랫대의 빨래는 개서 제자리에 넣어두는 대신 샤워하러 가면서 빨랫대의 수건을 가져가고 출근하면서 빨랫대의 양말을 걷어 신는 식이 되는거다. 엄마가 돌아오시기로 하는 전날이나 혹은 그 날 아침 출근 전에 후다닥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두면서 와, 나 혼자일 때 진짜 엉망진창 개판이 되는구나, 엄청 게으른 사람이구나 싶어지는 거다.
그나마 내가 식탁을 식탁으로 기능하게 하고 빨랫대의 빨래를 모두 걷고 개서 제자리에 넣어두고 수건은 욕실 수납장에 넣어두는 일들을 할 수 있는 건, 어쨌든 다른 구성원과 함께 그 공간을 쓰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일들이었다. 사람마다 특별히 더 강한 성격이 있고 또 그 성격이 그 사람을 지배할텐데, 내 경우엔 민폐끼치는 걸 진짜 너무 싫어한다. 그래서 가급적 다른 사람들도 내게 폐가 되는 일을 하지 않기를 바라고. 폐를 끼치는데 가장 주요한 요인이 바로 게으름이다. 내가 게으르면 누군가 나의 게으름을 보상해야 청결과 질서가 유지되는 건 당연하고, 그래서 나는 누군가와 함께 있는 공간에서는 가급적 정리정돈에 힘쓰는 거다. 나는 이게 집에서도 그런 성격이 발휘되는 건줄 몰랐다가, 아무도 없이 혼자 며칠 지내보는 일이 반복되면서 아주 처절하게 깨달았다. 나 게으르구나. 나 게으른 사람이구나. 내가 혼자 산다면 집은 정말 개판이겠어. 지금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에서 식탁이 식탁으로 기능하는데에 내가 신경을 쓰지만, 그러나 내 책장은 엉망진창인 것도 내 책장이 엉망진창인 부분이 다른 가족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무슨 책이 있는지 왜 저렇게 해두었는지 다른 식구들에게는 딱히 관심을 두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식탁과 거실은 다르다. 아아 나는 한없이 엉망이 되고 게을러지는 사람이었어. 나는 혼자이면 엉망이 되는거였어! 이 깨달음은 나를 깊은 충격에 빠뜨렸다.
그러다 얼마전 친구가 보내준 <포스텔러>라는 앱에서 나의 사주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말해준 걸 보게 되었는데, 하하하하,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와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러니까 내게는 천성적인 게으름이 있는 거였다. 내 안에 게으름이 아주 크게 잠재되어 있고, 그런데 그 게으름으로 폐끼치지 않고 살 수 있는 건, 내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살기는 싫다는 성향을 더 강하게 갖고 있기 때문이었던 거다. 그나마 엄마 아빠를 모시고 살기 땜시롱 이정도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는거였어. 나의 뒤메질은, 만약 내가 혼자 산다면, 책상과 책장 침실뿐만 아니라 거실과 부엌과 베란다까지 모두 뻗칠 수 있는 거였다.
오
마이
갓
신이시여..
왜 저를 이렇게 게으르게 만드셨나요. 왜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이 별자리인지 사주인지가 알려주기 전에 나는 깨달았던 것이다. 아, 나는 혼자라면 한없이 엉망진창 개판이 될 수 있구나, 라는 것을........나는 천성이 뒤메질러인것을..........................나는 인간이 결국 혼자라고 믿고, 혼자라는 걸 알고,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외로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나란 인간이 혼자 살게 된다면 엉망진창이 되는 사람일 수 있는 것이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눈물이 납니다요..
(오해할까봐 밝혀두는데, 누군가와 같이 있으면 게으르지 않아요...)
아무튼 명절에 식구들 잔뜩 올거라 지저분한 침대 위도 정리하고 방 청소도 하고 그리고 서재방도 한참 들여다보다가 이걸 어쩌나 저걸 어쩌나 하면서 책들을 좀 어떻게든 더 깔끔하게 정리해보고자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냥 더 넓은 집에 가지 않는한 답이 없었다. 어쨌든 이렇게 책들 바깥으로 가로로 눕혀 쌓은 책들을 꼴보기 싫으니 두줄로 넣어볼까 했더니 오, 절반의 책장에서 그게 가능해지더라. 그래서 나는 이미 읽은 책들을 안에다 넣고 바깥에는 안읽은 책들을 세로로 그렇게 두 줄로 쌓아두었다. 음.. 그렇다고 더 깔끔해지는 건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그렇게 해두었는데, 언제나처럼 타미가 오자마자 내 방에 들어와서 이모 책 정리했냐고(민음사 고전 좀 정리했다) 하더니, 왜 두줄로 쌓았냐고 하더라. 이모, 안에 어떤 책이 있는지 모르는데 두 줄로 쌓으면 어떡해!! 그래서 내가 자랑스레 말했다.
"그래서 안에는 이미 내가 읽은 책을 두었지."
그러자 타미가 말했다.
"내가 안읽었잖아!!!!!!!!!!!!!!!"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 이런 애가 다있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완전 빵터졌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서 내가 말했다.
"맞네. 타미가 안읽었는데 이렇게 꽂으면 안되는거였네?"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이 아이의 자기중심적 사고는 나를 닮은 것인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설 다음날은 친구랑 호캉스를 했다. 20층 호텔 bar 에서 술을 시켜두고 도시 야경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서 술을 마시기 전에는 한우 안심을 먹으러 갔는데, 마침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모가 우리집에서 자고갈거라 나는 이모와 엄마에게 와인냉장고에서 와인 꺼내마시라 일러둔 터였다. 돌려따는 거 있으니까 그거 꺼내서 마셔, 하고 집을 나선거였는데, 내가 이른대로 와인을 꺼내 마시려고 와인 냉장고를 열었던 이모는 나의 와인냉장고에 빈자리가 좀 있었다며, 나가서 와인을 사가지고 와서 채워주었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이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내가 준 와인 마시라니까 왜 내 와인 냉장고를 채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모가 비싼거 아냐, 그냥 싼 거 샀어~ 그리고 니가 마시라는 와인 마셨어~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은 이모다.
어제 오후부터 급격히 우울했다. 회사 가기 싫다고 이천번 생각했다. 직장인 싫다고 삼천번 생각했다. 내가 아무리 싫다고 발버둥쳐도 시간은 흘렀고 나는 다시 알람을 끄고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켜 출근 준비를 했다. 그리고 회사에 도착했는데, 내가 아무리 출근이 싫고 또 겨울은 우울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겨울이라서 아침마다 이런 풍경을 맞는다.
이른 아침 해가 뜨기 전의 하늘을 보면서, 나는 그런데 이거 좀 좋아, 했다. 이런거 보는 거 여전히 좋아. 그리고 내가 이런 풍경들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는 아무리 게을러도 커피와 함께 먹을 간식을 빼먹지는 않는다.
설 연휴가 지났고 나는 새롭지 않지만 그러나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새로운 결심 몇 개를 가슴에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