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해 만약 '올해의 책'을 선정해서 페이퍼를 썼다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오, 윌리엄》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너무 뻔한 결과라서, 그러니까 스트라우트 책을 읽었다면 그러지 않을 수 없지 않나, 하는 뻔한 결과라서 뭔가 올해의 책 선정 페이퍼 같은거 쓰기가 싫었다. 여기까지는 반만 진실이고 나머지 절반의 진실은 쓰기가 너무 귀찮았다...
요즘 친구들과 오, 윌리엄 원서를 읽고 있다. 읽으면서 진짜 너무 좋다고 다들 감탄하고 지금까지 읽은 스트라우트 작품중 이게 최고이다, 베스트다 호들갑을 떨고 있다.
좋은 지점이 너무 많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런 지점들이 나온다. 이 책을 읽으면서 친구들과 나는, 자식을 버리고 남자 좋다고 떠나버리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고-그것은 주체적이라고 해야 하는건가, 그러나 남겨진 아기는?- 그러나 그녀의 어린 시절 환경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것까지도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루시의 전남편 윌리엄의 세번째 결혼까지 실패하고 그과정들에 역시나 윌리엄의 불륜이 있었던 걸 알게 되면서 루시가 '그러니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구나' 깨닫는 장면도 소름돋게 좋았다. 윌리엄의 어머니와 자신에게서 비슷한 점을 발견하고 윌리엄에게 '너는 엄마같은 여자랑 결혼한거야' 라고 말했을 때는 가슴이 얼마나 쑤셔대던지.
스트라우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많지만 내가 오 윌리엄까지 읽으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그녀 소설의 최대 장점은, 그녀가 자신이 창조해낸 인물들에 대해 가치평가를 한다든가 변명을 해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남자가 바람을 폈어 나쁜 놈이지? 이 남자가 불법촬영을 햇어 죽일놈이지? 이 여자가 가난했어 불쌍하지? 이 사람은 물에 빠진 누군가를 구하려고 시도해 정의롭지? 라는 식의 흐름을 결코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스트라우트는 다만, 그들의 삶을 그려내보일 뿐이다. 자 이 사람은 이렇게 살아왔고 지금은 이렇게 살고 있다, 이 사람은 이 대화에서 이런 감정을 느꼈다, 이 사람은 이 대화에서 이런 반응을 보였다를 그저 이야기할 뿐이다. 그걸 읽고 느끼는 감정은 온전하게 독자의 몫이다. 왜 그녀는 그런 선택을 했을까, 왜 그는 그런 선택을 했을까, 아 이래서 그랬구나 하는 수많은 감정들이 책을 읽으면서 내 안에서 일어난다. 스트라우트가 대신 해주지 않기 때문에 온전히 나의 몫이 되는거다. 나는 이런 이야기가, 이런 소설이 바로 문학이 가진 힘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이야기하고 독자는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바로 문학이 그리고 책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어제 정희진의 오디오 매거진을 듣는데 '읽는 것은 곧 읽는자가 다시 쓰는 행위이다'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읽으면 나는 다시 쓰게 된다. 정희진 쌤의 말이 바로 그대로 실현된다. 책 속 인물들에 대해 변명을 하고 편을 들어주는 걸 스트라우트가 하지 않고 읽는 내가 하게 된다. 사랑도 동정도 분노도 연민도 기쁨도 스트라우트가 내게 심어주려 하지 않는다. 그저 펼쳐보일 뿐이다.
《올리브 키터리지》가 너무 좋아서 읽고 나서도 재차 훑곤 했는데 그 뒷이야기 《다시, 올리브》가 더 좋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대부분 후속작은 실망하기 마련 아닌가?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 좋았는데 《오, 윌리엄》의 출간 소식에 좋으면서도 그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루시의 헤어진 남편 이야기가 도대체 어떤식으로 흘러갈까? 그런데 놀랍게도, 오 윌리엄은 내가 그동안 읽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최고 작품이 되었다. 오, 윌리엄. 진짜 너무 좋다. 게다가 원서로 한 번 더 읽고 있노라니 홀랑 빠져들어. 나는 스트라우트의 모든 책을 원서로도 소장하자고 새삼 결심하게 되었다. 이미 올리브 키터리지,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오 윌리엄, 다시 올리브를 갖추었다. 그렇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도 사야겠어! 하고 알아보던 중에,
친구가 보내준 선물이 도착했다.

아니, 루시 바턴 후속작이 또 나왔다. 오, 윌리엄의 후속작이기도 하다. 아아, 책이 너무나 아름답고 이 책이 내게 있음에 나는 너무나 행복하다 흑흑 ㅠㅠ
한나 아렌트 책장의 그 수많은 책들 중 읽지 않은게 너무 많아서 토요일에는 어디 한 번 읽어보자, 하고 책장 앞에 섰다. 무얼 읽을까. 작년 한해 알라디너 들이 극찬했던 한나 아렌트의 전기를 읽을까, 하다가 생일에 선물 받았던 크리스테바의 한나 아렌트를 꺼내들었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예정이었던 터라 가방을 가볍게 하고 싶었다. 그러니 얇은 책이 나았다. 그렇게 나는 이 얇은 책을 들고 아가 조카네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한나 아렌트의 철학서를 읽어본 게 없어서-아이히만, 전체주의, 인간의 조건- 과연 내가 이걸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총 5강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1강과 2강은 정말 좋았다. 특히 이런 부분을 읽을 때는 울고 싶을 만큼 좋았다.
이 위협에 직면해서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The HumanCondition에서 삶에 대한 맹렬한 방어를 구축한다. 소비주의의생기론적 결정론과 ‘생명 활동‘ vital process에 대한 현대 과학기술의 헌신 속에서 단지 틀에 박힌 듯이 재생산되는 삶에 대한정반대 극단에서 아렌트는 그녀가 기꺼이 ‘삶의 기적‘ the miracleof life 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 각각의, 그리고 모든 탄생의 고유함에 대해 찬양을 올린다.
세계, 인간사 영역을 그 통상적이고, ‘자연적인‘ 파멸로부터 구하는 기적은 궁극적으로 탄생성이라는 사실인데, 그 안에 행위능력이 존재론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고 새로운 시작이며, 그들이 태어남으로 인해서 가능해지는 행위인 것이다. - P15
한나 아렌트는 행위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는데, 인간이 태어남으로써 일단 그 행위가 가능해진다는 거다. 태어나는 게 행위라고, 인간이 태어남으로써 인간을 파멸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거다. 이게 《인간의 조건》에 나오는 구절이라는 거다. 아 진짜 너무 좋지 않나. 한나 아렌트의 철학서들중 내가 만약 읽게 된다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가장 첫 책이 될거라고 막연히 짐작하고 있었는데, 토요일 지하철 안에서 이 부분 읽고 너무 좋아서 당장 교보문고에 바로드림으로 《인간의 조건》을 주문해버렸다. 당장 필요하다. 당장 읽진 않더라도 당장 갖추어야 한다! 이 책을 지금 가지고 있어서 바로드림 가능한 곳은 잠실점이란다. 오케바리, 내가 간다. 잠실점에 있는 책 내가 갖겠어!
그렇게 일요일에 교보문고에 《인간의 조건》을 찾으러 가면서, 그런데 딸랑 한 권 남아있다고 하니 책 상태가 좀 안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이 책 너무 갖고 싶고 (안읽었지만)벌써 너무 좋고, 내가 그렇게 책 상태에 막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책이 지저분한 건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만약 교보가서 책 찾는데 책 상태가 마음에 안든다면 거침없이 환불요청 하겠어! 으르렁- 하는 마음으로 교보에 도착해서 바로드림으로 책을 수령하는데, 아니.. 책이.. 비닐 포장이 되어있었던 겁니다. 세상에!! 나는 직원분께, 이 책 원래 이렇게 포장되어 있었나요? 물었더니 직원분은 그렇다고 해주셨다. 그러니 책 상태는 좋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샤라라랑~ 너무 기분이 좋아버렸어..

(부러 원서들 앞에서 사진 찍어 보았다. 뽀대를 위해! for 뽀대!!)
한나 아렌트 책을 읽기 전에는 《보부아르의 말》을 읽었다.
여느때처럼 책을 펼쳐 책날개의 작가 소개를 읽는데, 아니 보부아르를 인터뷰한 '알리스 슈바르처'도 완전 페미니스트이고 슈바르처가 쓴 저서중에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가 있다는 게 아닌가! 꺅 >.< 내가 또 이 책을 가지고 있지. 나란 여자, 없는게 없는 사람! 내 스스로 다 갖추는 사람. 슈바르처 님, 제가 님의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껄껄... 좋구먼. 좋다. 내 책장에 슈바르처의 책이 있다니. 어쩐지 좋구먼유.
《보부아르의 말》을 읽으면 굉장히 보부아르가 급진페미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슈바르처도 짱 급진이다 ㅋㅋ 사르트르 공격한다 슈바르처가 ㅋㅋㅋㅋㅋ 아무튼 슈바르처 좋아서 이 책도 곧 읽어야겠다.
아무튼, 그래서 월요일의 책탑은 이렇습니다.

소박하다. 으하하하.
《바바야가의 밤》은 《올랜도》읽다가 머리 식힐겸 꺼내들었는데 재미있어서 내친김에 다 읽었다. 얇은 책이라 가능했다. 영화로 만들어지면 볼 의향이 백프로다. 특히 활과 화살을 이용해 나쁜놈 고환을 명중시키는 장면 같은 거, 자주 화면에 등장했으면 좋겠다.
《죄와 속죄의 저편》은 워낙에도 도덕, 윤리, 죄, 선과 악 같은거에 관심 많은데, '장 아메리가' 가 말한다니 읽어보고 싶었다. (오리지널 신만 생각나네요~)
《SKEPTIC》은 저 큰 타이틀에서 보이는 것처럼 성격이란 무엇인가.. 읽어볼라고 샀다. 성격이란 무엇인가욤?
토요일에 아가 조카 보고왔다. 아가조카랑 같이 밥먹었던 마트 건물에 알라딘 중고서점이 생겼다고 해서 아가조카랑 함께 갔었는데 요즘 공룡에 관심 생긴 아가 조카 공룡 스티커북 득템한 부분.. 가방에 넣고 가져가려고 했더니 아가조카가 자기가 들고 가겠다고 한다. 나 보더니 공룡 흉내 내더라. 진짜. 와. 너무 귀욤.

월요일이 오는 게 싫었다. 너무너무 싫었다.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시간이 가지 않기를 바란다는 건,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포기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그래서 잘 견뎌보자고, 잘 버텨보자고, 어디 한 번 해보자고 생각했다.
요즘은 매일 머시 수아레스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전거보다 훨씬 더 간절히 바란 것들이 있는데, 아무리 원해도 얻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다. 나는 할아버지가 병들지 않기를 바랐고, 내 주변의 세상이 ‘늘 그대로‘이기를 바랐다. 소중한 것들이 변치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늘 그대로‘라는 것은 이네스 고모가 사이먼 아저씨를 사랑할 기회가 없을 거라는 뜻이다. 오빠가 대학에서 훨씬 더 똑똑해지지 못할 거라는 뜻이다. 내가 조금도 성장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늘 그대로‘라는 건 할아버지의 변화만큼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년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무슨 일이든 헤쳐 나갈 수 있다.
조금 더 힘든 기어로 바뀔 뿐이다. 난 그저 크게 숨 한번 쉬고 힘차게 페달을 밟아 나가면 된다. - P417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