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전에 회사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계속 기분이 나쁘고 또 크게 나빠서 신경이 쓰였다. 이게 뭐라고 이 사소한 일이 내 기분을 잡칠까. 그래서 마그네슘도 먹었고 점심도 먹었는데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이게 정말 그 일 때문인가 아니면 내 컨디션이 지금 안좋은건가. 나는 기분을 억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어제 오후에는 영화 <연애 빠진 로맨스>에 대한 페이퍼도 썼다. ☞ [알라딘서재]사랑은 용기
그걸 쓰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퇴근후 집에 가면서 KFC 에 들러 닭도 세 조각을 먹었다.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그래 자자, 자고 일어나면 나아져있을거야. 그렇게 열시도 되기 전에 잠을 잤는데 새벽에 가위에 눌려 깼다. 여전히 기분이 좋질 않네. 다시 잤다. 아침이면 말끔해져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컨디션이 나빴다. 버터와 간장을 넣고 밥을 비벼 아침을 먹었다. 밥은 맛있었는데 기분은 여전히 구렸다. 아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기분으로 계속 지낼 순 없는데. 이게 정말 그 일 때문인가 아니면 내 컨디션이 지금 안좋은 때인가. 동굴각인데.. 하다가, 자 끌어올리자. 오늘 아침 밥먹으면서 잠깐 책을 읽었는데 그걸로도 안됐어. 그렇다면 어떤게 있을까. 그래, 음악. 나에겐 음악이 있지! 뮤직을 들어보는거야. 내가 기분이 좋아질만한 음악이 뭐가 있을까. 그래 <LOVE ME LIKE YOU DO>를 듣자! 그렇게 오랜만에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엘렌 굴딩의 이 노래를 들으면 그 다음 차례로는 어김없이 테일러 스위프트의 <ME!>를 듣고 싶어진다. 내게 이 두 노래는 셋트처럼 따라다닌다. 김밥에 쫄면같은 그런 셋트. 그렇게 연달아 두 곡을 들으면서 기분을 억지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래 나아지고 있어, 내 기분은 나아지고 있어! 자, 더 들어보자. 테일러 스위프트 가자! 하고 애플뮤직에서 테일러 스위프트를 검색하고 노래의 목록들을 보다가, 나는 그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노래의 제목과 앨범 자켓에 눈이 간다. 어? 이런 노래가 있었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나왔었다고??? 테일러 스위프트가 부른 노래가?
나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1부를 책으로 읽었고 별 두개 리뷰를 썼었는데 영화는 끝까지 다 봤다. 친구들과 시리즈의 처음부터 끝까지 극장에 가서 함께 보았고, 그래서 마지막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고 행복해지는 과정을 다 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더랬다. 나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책에 별 두개를 주었지만, 그러나 영화를 싫어하지 않는다. 그레이는 못생겼고 이십대 중반의 남자가 세상 모든 일에 능하다는 것도 억지 설정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런데도 친구와 나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영화를 싫어하지 않는다. 거기엔 뭔가 그들과 함께 살았던 것 같은, 친구와 나의 추억이 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도 그렇다.) 무엇보다 아나스타샤 는 나 같아서... 물론, 내가 아무리 주장해도 다코타 존슨과 내가 닮았다는 걸 인정하는 사람은 세상에 나밖에 없긴 하다. 역시 인간은 외로운 존재야. 나의 생각에 공감해주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 나 뿐이다. 시방 나는 외로운 짐승이여..
어쨌든 그런 그레이 50가지 그림자 영화에 테일러 스위프트의 노래가? 오케바리. 이걸 들어보자, 하고 재생했다.
좋...좋아.....좋다.... 아니, 이게 그레이 시리즈 어떤 거에 나왔던 노래인거지? 검색해보니 <심연>이더라. 이 영화 심연 다시 봐야지, 나는 웨이브에 이 영화를 검색해서 찜해놓았다. 그리고 이 노래가 너무 좋아서 반복해 들으며 가사를 함께 보았다. 그러니까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면 연인과 헤어진 것 같았다. 헤어지고나서 힘들어하는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랄까. 너 없이 살 수 없고 너가 없는 곳에 가기 싫고 너가 돌아오길 기다린다,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긴거냐, 하는 거다. 그런데 가사 중에 이런게 있더라.
Now I'm in a cab I tell 'em where your place is
여자가 부르는 파트인데 택시에 타서 니가 사는 곳이 어디인지를 말한다는 거다. 크- 이 부분에서 나는 추억속으로 빠져든다... 샤라라랑~
그러니까 J 와 나는 아주 오래전 알라딘에서 만났다. J 와 나는 나이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다. 사는 곳도 달랐다. J 는 바다가 있는 도시에서 살고 있었고 나는 서울에 살고 있었다. 글로만 소통하던 우리가 만났을 때 나는 J 의 외국어 실력에 대한 질문을 했었고 그 때 J 는 내게 열심히 했노라 말했더랬다. 죽어라 외운다고. 우리는 그 뒤로 이메일을 주고 받은 적도 있고 함께 안나 카레니나를 읽은 적도 있다. 읽다가 인상 깊은 구절들을 서로에게 보내주었더랬다. 내가 그 친구랑 안나 카레니나를 읽은 것은 정말이지 잊지 못할 추억이다. 무려 J 와 무려 안나 카레니나를!
J 와 내가 좋아하는 책의 취향도 아주 많이 달랐지만, 그런데 우리가 공통적으로 좋아한 책이 있었으니, 그 책이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였다. 우리는 이 책을 너무너무 좋아했다. 너무너무 좋아해서 이 책에 대한 얘기라면 언제든 할 수 있었고 이 책을 좋아하는 다른 친구 두 명과 함께 다른 도시에서 만나 한참을 이야기 나누면서 우리 모임의 이름을 '새벽 세시'라고 정하기도 했다. 그래, 내가 정했다. 모임 이름에 크게 고심하지 않는 사람. 샹그릴라 모텔에서 처음 함께 잤으므로 모임 이름 샹그릴라, 더덕집에서 처음 만났으므로 모임 이름 더덕단,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좋아서 만났으니 모임 이름 새벽 세시, 노가리 집에서 만났으니 모임 이름 노가리파.. 뭐 이런 식인거다. 우리는 정말이지 새벽 세시를 좋아했다. 아무 때고 새벽 세시의 문장을 적어 문자메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루는, J 가 지금 새벽 세시의 아무 문장이나 하나 보내달라 요구했고, 그래서 나는 얼른 책장으로 달려가 책을 꺼내 아무데나 딱 펼쳤다. 거기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왔다.
<305페이지. 에미, 나에게 와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택시비는 내가 낼게요.>
친구는 내가 보낸 문장에 환호했다. 좋다고, 정말 좋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런 걸로 함께 좋아할 수 있는 사이였다. 오늘 아침 듣던 노래에서 택시가 나오자 나는 택시비는 내가 낼게요 문장을 쳐서 보냈던 그 날이 떠올랐고, 그 문장에 환호할 수 있었던 J 생각이 났다. 생각은 자연스레 J 에게로 이어졌다.
J 는 지금 미국에 살고 있다. 간혹 내게 초콜렛과 차(tea), 쿠키를 보내주고 라벤더 오일을 보내준 적도 있다. 나는 자기 전에 가끔 라벤더 오일을 바르고 잔다. 그리고 여전히 J 는 내게 잊지 않고 매해,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준다. 내게 매해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주는 두 친구가 있는데, 둘 다 미국에 있다.
J 의 크리스마스 카드는 요란하지 않다. 그저 한 문장,
'즐거운 성탄과 복된 새해 되시기를 에미 로트너가 빌어 드립니다'
가 적혀있을 뿐이다. 나는 또 이걸 받고 환호한다. 이번 성탄에는 에미와 자신의 이름을 함께 넣어 보냈다. 이 단순한 문장이 정말 자지러지게 좋다. 이걸 보내는 J 가 좋은데, J 가 이걸 보낼 수 있는 이유는 이 문장만으로도 내가 기뻐할 걸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또 좋다. 크리스마스 카드에 저 문장 하나만 보내도 서로를 기쁘게 할 수 있고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특별하지 않은가.
나는 J 에게 가끔 책을 한 권씩 보낸다. 내가 읽고 좋아하는 책을 보내기도 하고 내가 좋진 않았어도 J 가 좋아할 것 같은 책(시와 산책)을 보내기도 한다. J 는 그곳에서 주로 영어책을 읽는데, 한국에서 내가 보내준 책들이 다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덧붙였다. 자신의 방 책장에는 '다락방 컬렉션' 이 따로 있다고. 나는 J 에게 최근에 정희진의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를 보내주었다. 그 책 자체가 좋기도 했지만, 그 책을 읽다가 J 생각이 너무너무 났거든. 그래서 긴 편지를 써 함께 보냈다.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에서 우리가 그 때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영화를 보며 했던 대화가 떠올랐어. 나는 그 때 나의 상상력이 부족한 것 같아, 과학상상화 같은거 그리기 되게 못했어, 라고 말했고 그런 내게 너는 '너처럼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들에게 공감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하는 사람이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건 말이 안돼, 너는 상상력이 뛰어난거야' 해주었었지. 그 때가 너는 기억나니? 나는 그 말을 내내 기억하고 살아, 라고 보냈더랬다.
J 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 때 우리가 봤던 영화가 무엇인지 기억나고 그리고 그 때 나의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말을 더 하고 싶었는데 우리의 대화가 다른 쪽으로 흘렀다는 것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리고, 내가 보내준 책이 너무너무 좋았다고.
상상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인식자의 위치가 달라짐에 따라 어떤 대상 혹은 세계가 다르게 보이는 경험이 주는 자원, 이것이 상상력이다. - P113
인생에 있어서 아주 가끔, 뜻하지 않게, 누군가의 말이 내내 붙잡는 위안이 된다.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서 선택한 노래가 나를 추억으로 데려갔고 그래서 당시의 친구와 지금까지 지속되는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살아온 시간들의 어느 시점에 J 를 만났고 그런 J 와 나의 물리적 거리가 이렇게나 멀어도, 그래도 우리가 함께 무언가를 읽고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내가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다. 어제 하루 나는 나의 못남이, 나의 게으름이, 나의 한심함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그런 나를 떨쳐낼 수가 없어서 괴롭고 화가 났다. 별 거 아니라고 나에게 수십번 말하는데도 그게 별 게 되어 있었다. 나의 좋은점과 긍정적인 면을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나의 부정적인 면이 나를 후려치고 있었다. 보통 스스로 회복하고 또 회복이 빠른 편인데 이번 감정이 쉽게 사라지질 않고 있었다. 그런데 노래를 들으면서 J 를 생각하고 그 때의 우리를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따뜻해졌다. 가끔 나는 내가 존재 자체에 위안을 받는다는 생각을 한다. 그 존재와 무얼 해서가 아니라 그 존재가 있다는 그 사실 만으로 위로를 받는 거다. 나에게 J 가 있다는 것, 저 멀리 있지만 그러나 저기에 있다는 것, 나는 그게 참 좋다. 조금 따뜻해졌어도 여전히 나쁜 컨디션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나의 바이오리듬이라면 아마 언젠가는 회복되겠지. 내가 내내 이런 기분으로 지내진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J 에게 보내줄 다른 책을 골라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