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다 읽고 친구를 만나기로 한 게 아니었다면, 이 책을 결코 한꺼번에 다 읽기를 시도하지 않았을 것 같다. 불꽃처럼 살다 간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인지라 요절한 예술가들을 다루고 있는데, 두번째 꼭지에서는 자살한 예술가들이 나오는거다. 그런데 자살이 투신자살이야. 높은 빌딩에서 떨어져 죽은 예술가를 읽는데 그 전에도 그 후로도 자살한 예술가들의 이야기인지라 읽으면서 기가 빨리는 것 같았다. 확 지쳐버려. 이 책을 읽을 사람들에게는 한꺼번에 이 책 읽기를 도전하지 말고, 시간차를 두고 한 명씩에 대해서만 읽으라 팁을 주고 싶다. 높은 빌딩에서 떨어져 죽은 예술가들의 이야기도 힘들고(그중에 한명은 심지어 타살일지도 모른다. 패싱, 생각나는 스토리임), 모딜리아니의 자살 후에 그의 아내 쟌 에뷔테른도 자살했는데.. 와 진짜 너무 힘들었네. 연속해 읽지 말고 한 명씩만 읽자. 안그러면 진짜 기빨린다. ㅠㅠ
그런데 내가 기빨리려는 얘기를 하는게 아니라, 반 고흐에 대한 얘기를 좀 해보고자 한다.
반 고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그림에 대해 어떤 상식이 없는 나조차도 그의 아몬드 나무 그림은 좋아한다. 반고흐 화집 엄청 크고 무거운 것도 집에 사두고 어쩌다가 들춰보곤 한다. 거기엔 물론 글도 빽빽한데 글은 안읽는다. 너무 작고 빽빽해. 반 고흐에 대해 책을 읽어본 적이 없지만 동생 테오가 그의 그림 그리는 삶에 많은 도움을 줬다는 것도 알고 테오와 엄청난 양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추상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도대체 추상화를 어떤 생각으로 그리는지 나는 어떤 식으로 감상해야 할지 몰라 그런 그림에 대해서는 흥미가 전혀 없지만, 그러나 고흐 라든가 드가 라든가 클림트가 그리는 그림들, 그러니까 추상화가 아닌 이해가 전혀 어렵지 않은 그림들에 대해서라면 아 좋다, 라는 생각이 든다. 계속 보면 나에게도 그림 보는 눈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 나름 한국에 있을 때에도 그리고 특히 외국에 갈 때면 미술관에 꼭 들르려고 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게 본다고 그냥 느는 건 아닌 것 같다. 난 그냥.. 그건 안되는 것 같아요. 그림 보고 이해하기... 각설하고,
이번에 암스테르담 여행을 하면서 반고흐 미술관을 갔다. 글쎄 피카소 미술관이었다면 딱히 내가 가고 싶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마 갔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반고흐 라니 어떤 거부감 없이 가볼래!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그림 중에는 아름다운 그림도 많으니까 가면 좋겠지, 하고 가서 그림들을 관람하는데, 아주 큰 미술관 답게 한국어로 된 오디오 설명도 듣는게 가능했다. 그렇게 듣다가 아몬드 나무 그림 앞에 섰는데, 고흐는 그 그림을 동생 테오의 어린 아들 빈센트에게 선물했다고 했고, 그리고 반고흐 미술관은 그 테오의 아들이 만든 미술관이라는 거다. 와- 너무 아름다운 스토리잖아?
그림그리는 가난한 형을 내내 지원한게 동생인데, 그래서 형은 동생의 아들에게 그림을 그려 선물했는데, 동생의 아들은 삼촌의 그림들을 모아 미술관을 열었다니... 너무 대단하지 않은가. 나는 그런 사연을 모르고 있다가 완전 감동을 먹었단 말이다. 아버지가 삼촌을 경제적 지원했다는 것에 대해서 보통의 다른 사람들이라면 무조건 좋은 시선으로만 보는게 아니라 삼촌은 왜 우리 아버지한테 들러붙지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이 조카는 삼촌의 그림들로 미술관을 열었어! 아버지와 아들 모두가 형(삼촌)의 그림의 가치를 알아보고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한건가. 이들의 서로에 대한 애정과 지원이란 아 너무나 아름답구나! 하고 미술관을 나왔단 말이다. 그런데,
이 책 《불꽃으로 살다》를 읽다가 나는 너무나도 당연한, 그러나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반 고흐가 죽은 뒤 10년이 채 못 돼, 파리의 아방가르드 예술가 집단 내부에는 고흐의 작품을 거래하는 활력 넘치는 작은 시장 하나가 들어섰다. 그렇지만 반 고흐의 전설을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하지만 서글플 정도로 안 알려진) 고흐의 처제 요한나 봉어르가 아니었더라면 고흐의 명성은 아마도 시들해졌을 것이고, 그의 방대한 유작은 이리저리 흩어지거나 심지어는 파괴되었을지도 모른다. -p.74
..응? .. 처제? 고흐에게 처제가 있었어? 처제는... 아내의 동생이잖아? 고흐..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내가 있었어? 아니면 결혼을 한 건 아니어도 어쨌든 같이 사는 여자가 잠깐이라도 있었던거야? 난 또 감쪽같이 몰랐네? 그런데,
테오가 죽은 뒤, 요한나는 차마 파리로 되돌아올 수가 없어서 소유물들을 네덜란드에 새로 마련한 집으로 보냈다. 이 화물 가운데는 그녀의 작은 집의 모든 공간을 가득 메운 무수한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가정부에게는 너무 안된 일이지만, 액자가 없는 그림 무더기들이 침대와 소파 아래에, 찬장 아래의 작은 틈새에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요한나의 동생은 물품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누나에게 금전적 가치도 없는 그림들을 처분해 부담을 덜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요한나는 반 고흐의 그림들을 보호하는 데 일생을 바쳤고, 그의 작품들이 응당 받아 마땅한 관심을 받을 수 있도록 매우 영리한 결정을 내렸다.
이후 요한나는 소문난 예술의 중심지였던 네덜란드 부숨 지역으로 이사를 가서 1900년에 이르기까지 20회가 넘는 반 고흐 전시회를 개최했고, <해바라기sunflowers> 같은 고흐의 대표작들을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대여해 주기도 했다. 1892년에 그녀는 자신의 일기장에다 "사람들이 빈센트의 작품에 큰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신문은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다" 라는 글을 썼다. 그녀는 야심 차게 고흐의 작품을 판매하는 국제적 규모의 시장을 만들어 갔고, 그림을 유럽 지역에 보급하도록 권장하기 위해 유럽 여러 도시에 있는 중매상들에게 후한 판매 수수료를 제안하기도 했다. 1905년, 그녀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스테델레이크 미술관Stedelijk Museum 에서 자그마치 500여 점에 달하는 작품들을 선보이는 사상 최대 규모의 반 고흐 전시회를 개최했다. 살면서 그녀는 거의 200점에 달하는 그림과 50점이 넘는 드로잉 작품을 판매했다. 반 고흐의 유산과 관련된 그녀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1924년에 고흐의 대표작인 <해바라기>를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판매한 것이다. -p74~75
그러니까 요한나는 아내의 여동생이 아니라 동생의 아내였다. 즉 제수씨인 거다. 이 책에서는 제수씨를 처제로 잘못 번역하는 오류를 범했다. 나중에 다른 화가 얘기하면서도 고흐와 요한나가 또 언급되는데 그 때에도 역시 처제 요한나라고 한다. 번역가 님, 무슨 일이죠? 아니면 내가 잘 모르는건가? 남동생의 아내를 처제라고 부르기도 하는건가?
어쨌든,
'고흐가 아몬드 나무 그림(Almond Blossom)을 조카 빈센트에게 선물했고 빈센트가 지금의 반고흐 미술관을 설립했다' 이 사이에는 요한나가 생략되어 있었다. 조카 빈센트가 반고흐 미술관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그간 삼촌 고흐의 그림을 알리고 전시하고 보존해야 했던 사람이 반드시 필요했고, 그게 빈센트의 엄마이자 고흐의 제수인 요한나였던 거다. 나는 고흐와 빈센트의 사연을 알게 되면서 와 좋네, 아름답다, 멋져, 인간은 뭘까..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더 크게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했던 요한나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거다. 요한나가 아니었다면, 요한나가 한 일들이 아니었다면 빈센트가 마음이 있었다한들 지금 같은 반고흐 미술관을 설립하는 것은 불가했을 것이다. 고흐와 빈센트 사이에는 요한나가 있었다. 아주 중요하게 말이다. 아, 내가 이 책을 안읽었다면 고흐와 빈센트 아름답다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알게 됐다. 고흐와 빈센트가 아름답게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사이에 요한나가 엄청 열심히 뛰어다녔기 때문이다! 라고. 크-
고흐와 빈센트 사이의 요한나에 대해 이 책을 읽고 알게 됐다면,
요즘 보고 있는 시트콤 <원데이 앳 어 타임>에서는 체 게바라에 대해 몰랐던 걸 알게 됐다. 시크톰의 주인공들은 미국에 살고 있는 쿠바 사람들이다. 할머니 리디아가 카스트로 정권 시절 부모 없이 미국으로 애들을 보내던 일 때문에 언니랑도 헤어져 미국에 와 정착해 살게 되었고 엄마 페넬로페 는 군인 출신 간호사이다. 이들의 옆집에는 캐나다에서 건너와 살고 있는 부자 남자 슈나이더가 있는데, 그는 수시로 페넬로페의 집에 와 함께 이야기 나누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신다. 한 번은 슈나이더가 체 게바라 얼굴이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왔는데, 페넬로페 가족이 모두 기겁을 하는 거다. 지금 네가 무슨 티셔츠를 입고 왔는줄 아냐, 무슨 일을 하는건줄 아냐, 너는 유대인 가족의 집에 히틀러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간 꼴이다, 라고 하는거다. 체 게바라 라고 하면 쿠바 혁명에 있어서 쿠바인들의 영웅인줄로만 알았던 슈나이더는 이에 깜짝 놀라는데, 나도 덩달아 같이 놀랐다. 시트콤 속에서 리디아와 페넬로페는 '그는 독재자 카스트로의 오른팔이었다'며 흥분해 욕을 하는거다. 아, 쿠바인들에게 체게바라는 끔찍한 인물이기도 한거였구나. 나는 또 미처 몰랐네. 나 오래전에 체 게바라 평전 읽었는데 그 때는 왜 그런 내용을 못본것 같을까. 평전이라 안나온거였나 아니면 오래돼 기억이 안나는건가. 아무튼 체 게바라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쿠바인들을 시트콤에서 볼 수 있었다.
이 시트콤 너무 좋아서 여동생에게도 재차 추천했는데,
시종일관 유쾌하지만 매 회차마다 굵직한 이슈를 넣어 진행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불법체류, 이민자, 성소수자, 싱글맘, 인종차별, 전쟁 트라우마, 심리치료, 페미니즘, 종교 등등. 말해야 할 것을 짚고 넘어가는 지점이 드라마 안에 꼭 포함되어 있는 것. 그러면서도 재미있게 만들 수 있다니, 볼 때마다 놀랍다.
이 시트콤의 장점은 아주 많지만, 내가 생각하는 큰 장점중 또 하나는, 그들이 쿠바인이라서 그런지 영어가 아주 잘 들린다는 거다! 굉장히 정직한 영어 발음으로 짧게 얘기한다는 것. 할머니 리디아는 영어에 완전히 능숙하지 않은 캐릭터로 나와서 가끔 답답하면 스페인어를 한다. 딸 엘레나는 스페인어를 잘 몰라서 할머니가 스페인어를 하면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들이 하는 영어가 정말 짧고 발음이 정직해서 들리는 단어나 문장이 너무 많은 거다. 잘은 모르지만, 영어는 영어이되 스페인어 억양이라 해야 하나 그런게 들리다보니 어쩔 때는 아 스페인어구나, 하다가 아 영어네? 이렇게 되는거다. 정직한 영어 발음으로 짧은 문장들을 듣노라니 그 또한 신나는데, 그러자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어졌다. (네?)
남동생이 회사에 다니던 시절 영업부였고 그래서 해외 바이어들을 상대해야 했다. 남동생은 영어를 잘 하는 편이 아니지만 바이어들과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고 접대도 하고 업무적 이야기를 나누는 일들을 해내기는 했는데, 거기에 구글 번역기가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한 번은 독일인들과 업무를 진행해야 했는데 서로 영어로 얘기하면서 의사소통이 미국인들보다 더 잘되었다고 한다. 미국 사람들하고 영어 하면 너무 어려워 그런데 독일인들은 자기들도 영어를 잘하는게 아니라서 서로 이해가 잘돼, 라고 하는거다. 와 무슨 말인지 너무 알겠어. 그러니까 내가 외국 여행을 다니다보면 사실 영어가 잘 통하고 서로 이해하려고 하는 건, 영어를 쓰지 않는 국가이기는 했다. 나의 짧은 영어를 상대의 짧은 영어가 이해하는.. 그런 느낌? 단어만 말해도 그냥 뜻이 통해버려. 우리에게 영어가 외국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더 대화가 쉬워지는 지점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서로 천천히 말해준달까.. 하하하하하. 그런 의미에서 미국인들하고 영어 하는 것보다 독일인들하고 영어 하는게 더 쉬워, 라고 했던 남동생의 말이 너무 이해가 되는거다. 아무튼,
어제 스페인어 공부하고 싶다, 배우고 싶다 생각하면서, 그런데 왜 구몬에는 스페인어가 없을까 슬퍼하다가, 아 그런데 그 전에 영어부터 좀 마스터해야 하지 않나? 싶다가, 아니 왜 스페인어를 잘하기 위해서 영어는 기본이 되어야 하는거지? 생각했다. 그러고보면 불어를 잘하는 한국인이다, 치면 영어를 기본으로 일단 할 것 같고, 독일어를 한다 싶으면 오 그러면 영어는 기본이네 생각하게 되지 않나. 러시아어 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내가 러시아어 한다고 하면 다들 영어도 하는 줄 알아, 그게 너무 스트레스야' 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나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생각을 하는거다. 오, 러시아어를 한다니, 그러면 한국어, 영어, 러시아어 3개국어를 하는군! 이렇게 너무 자연스럽게 되어버리는 것. 그러다보니 내가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싶다! 는 생각이 들라치면 '그 전에 영어를 마스터해야겠지'가 되어버리는 거다. 왜죠?
외국어를 취미로 공부하는 조지영에게도 오빠는 영어나 똑바로 하라는 말을 했더랬다.
"영어나 똑바로 하지" 하던 큰오빠의 말은 사실 틀리지 않았다. 업무로써 영어를 쓸 일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랄까 싶은데, 바로 그 이유로 더 잘하고 싶은 이유 또한 크지 않다. 세상에 재미있는 콘텐츠들은 대부분 영어가 많긴 하지만, 대체로 귀신같이 번역이 되어 있는 편이고, 어디 여행이라도 가서 영어가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수준은 되니까.잡기는 커녕 손에 제대로 닿은 적도 없으나 영어를 이미 잡은 언어 취급하면서 그럼 다른 언어를 만나볼까 하며 이 언어 저 언어 기웃거리고 다녔다. 꼭 배우고 말겠다는 목적성이 약하고, 잘하면 좋지 싶은 정도라서, 번번이 입문과 초급 수준에서 뱅글뱅글 도는 일상이 반복되고 있지만, 가서입 떨어지는 이 취미 아닌 취미를 앞으로도 꽤 오래 지속할 것 같다. -《아무튼, 외국어》, 조지영, p.158
왤까?
왜 다른 언어를 배우고 싶어지면 일단 영어를 먼저 똑바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걸까? 왤까? 영어 못하고 불어 하면 뭐 어때, 영어 못하고 스페인어 하면 뭐 어때. 그런데 '영어나 똑바로 해야' 되니까 그게 안돼서 불어, 스페인어 공부안하고 그러면서 영어도 안하니까.. 영어를 안해서 다른 외국어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거 아닌가?
뭐, 그렇다고 내가 스페인어를 공부하겠다는 건 아니다.
어제 스페인어 공부하고 싶다고 침대에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아니 잠깐만,
내가 여성주의 책읽기에, 원서 읽기에, 일주일에 두 번쯤은 요가도 가야 하고, 그리고 주말에는 친구들도 만나고 술도 마셔야 되고, 도대체 언제.. 언제 스페인어 공부를 한단 말이야? 현실적으로 답이 나오질 않는 거다. 지금 당장 이번주 원서도 못읽고 있는데, 그래서 오늘 퇴근 후에 각잡고 읽으려고 생각중인데, 도대체 스페인어 공부는.. 언제 한단 말이야? 할 시간이 없다.
그러니까 안하는 걸로.
이만 총총.
아, 그리고 오늘 아침의 캐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