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엄마 아빠 모시고 영화 <헌트>를 보고 와서 이정재가 이 영화를 왜 만들었나 궁금해졌다. 영화는 나에겐 별로였는데 그런데 이 영화를 만든 의도가 뭘까. 그렇게 검색을 해보노라니 시나리오를 사게 됐고 그걸 자기가 직접 고치게 됐고... 뭐 이런 기사가 있더라. 특별히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어떤 생각이나 마음이 있는 건 아닌건가, 하고 있는데 엄마가 유퀴즈에 이정재가 나왔다는 거다. 오, 거기서 그 얘기를 풀어냈으려나? 하고 검색해보니 이정재가 유퀴즈에 출연한 건 1월이었다. 그러니 이 영화가 아니라 오징어게임으로 나온 것. 어쨌든 어제 실컷 먹고 배도 부른 터라 그거나 보면서 쉴까, 하고 다시보기로 유퀴즈를 재생했다. 이정재는 맨 마지막 순서였고, 덕분에 앞출연자들을 보게 됐는데, 거기에는 덕업을 일치시킨 한 남성이 나왔다. 신발을 너무 좋아해서 신발을 파는 곳에 취직했다는 남자였다. 남자는 나와서 신발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신발장으로도 모자라 신발만 넣는 룸이 있는데 이젠 거기도 모자라서 서재에까지 신발을 옮겨둔다고 했다. 이에 아내분은 그걸 받아들이시냐, 진행자들이 물었고 남자는 아내랑 취미가 같다고 했다. 신발은 엄청난 고가의 것들이었고, 한정판도 있고.. 여튼 이게 참 돈이 드는 취미일 것 같았다. 신발을 모은다는 건 돈이 많이드는군, 역시.. 책이 좋아. 책이 짱이다, 하다가, 그런데, 정말 그런가? 갸웃하게 됐다. 그러니까,
나는 최근 <윌라>를 통해 토지를 듣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는데 한 번쯤 다시 읽어야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21권이나 되는 책을 다시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던 차에 오디오북으로 듣는다는 친애하는 알라디너 님의 얘길 듣고 오오, 그런 방법이? 하고 윌라를 구독하면서 토지를 듣기 시작한거다.
근 이십년만에 다시 듣는 토지는 너무 재미있었다. 성우들이 연기를 해줘서 더 재미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내가 변한 탓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인지 이제 고작 1권의 절반쯤인데도 막 불끈불끈 하고 싶어지는 얘기가 많은 거다.
오디오북에 밑줄긋기가 되나 보았더니 내가 찾지 못하는건지 그건 없는 것 같다. 하는수없이 나는 종이책을 꺼내와야 했다. 토지라면 내가 버리지 않고 다 가지고 있지. 심지어 어디 있는지도 안다. 그러니까, 여기 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여기 어디? 나는 여기 있는 걸 '알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나나 알지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 것이다. 그러나 안다고 다 되느냐 하면, 보이질 않으니 꺼낼 수가 없어. 어디 있냐? 아아 나는 꺼낼것이냐. 이 앞에서 한참 망설인다. 뭔가 할 말이 있고 밑줄을 그으려면 종이책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 종이책을 내가 손에 쥐려면 저 책탑들을 치워야 해 ㅠㅠ
치울까 말까, 들어낼까 말까, 토지 이야기 할까 하지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저 책들을 조금 치웠다. 1권만 꺼내면 되니까.
자, 보이지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만큼만 치워도 꺼낼 수 있어! 나는 그렇게 1권을 꺼냈다.
이정도라면, 내가 고가의 물품을 모으는 취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괜찮은 것인가? 정말 고가의 신발을 모으는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런가? 정말 그런가?
인생..
토지 1권을 펼쳤다. 하하하하. 정말 나는 내가 귀엽다. 그 당시엔 이거 읽은 날짜를 적어두었네?
귀요미.. 나는 정말 귀여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최치수는 양반이고 부자이다. 그의 집에서 거느리는 하인만 해도 여럿이다. 이 커다란 집의 대장이며 우두머리이다. 모든 종들은 그의 눈치를 봐야 한다.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부터 더욱 흐느끼는 듯 꽹과리 소리는 여전히 마을 먼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밤을 지샐 모양이다. 하기는 마을 처녀들의 놀이는 이제부터, 달 뜨기를 기다려 강가 모래밭에서 호작거리는 물 소리를 들으며 시작될 것이다.
"진지상 올릴까요."
방문 앞에 계집종 귀녀가 와서 묻는다. 벌써 두 번이나 물어보는 말이다. 방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다.
"등잔에 불을 켜야겠습니다."
하며 귀녀는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최 참판댁 당주(當主)인 최치수(崔致修)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오래 묵은 한지(韓紙)같은 저녁 빛깔이 방안에 밀려들고 있다. 등잔불이 흔들리면서 밝아온다. 어둑어둑한 방에서 정말 글을 읽고 있었는지, 최치수 콧날에 금실 같은 한줄기 불빛이 미끄러진다. 수그러진 그의 콧날이 날카롭다. 이 세상 온갖 신경질과 우수(憂愁)가 감도는 옆모습, 당장에라도 벌떡 일어서서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칠 것 같은 위태위태한 분위기가 방안 가득히 맴돈다.
"자리나 깔아."
"예."
거들떠보는 것도 아니었건만 귀녀는 눈웃음치며 도토롬한 입술을 오므린다.
병약한 치수로서는 번거로웠던 명절날 집안 행상에 어지간히 시달리어 피곤했던 것 같다.
"저녁은 안 드시겠습니까?"
아랫목에 자리를 깔아놓고 다시 확인하려 했으나 귀녀는 대답을 듣지 못하고 방에서 물러난다. (토지, 제1부 1권 p.43-44)
아 진짜 최치수 답답이.. 정말 너무 싫다. 저 장면 듣는데 너무 화딱지가 나서. 야 이 자식아, 먹으면 먹겠다 안먹으면 안먹겠다, 말을 해라! 종인 여자아이가 도대체 거기서 뭘 어쩌라는거냐. 니가 대답을 해줘야 밥을 차리던지 아니면 오늘 밥을 안차려도 되는구나 하고 그 다음 자기 볼일을 보러 가지 왜 사람 전전긍긍 만들어, 만들기를? 아주 너무 고약한거다. 그래, 사람이 피곤하고 우울하고 그러면 말하기 싫을 수 있다. 그렇지만 저기서 한 마디 말이라면 '오늘 저녁 안먹을래' 라고 한마디만 해줬다면 귀녀도 자꾸 묻는 일이 없었을 거 아닌가. 확실한 대답을 알지 못해 도대체 밥을 먹겠다는건지 아니겠다는건지 몰라서 재차 물어야 하는 마음, 그렇게 재차 물으면 또 상대가 그만좀 하라고 화낼 수도 있잖아?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물론 최치수의 입장이라는 것은 그런 것을 알아도 그만이요 몰라도 그만이요 이겠지만, 너무 괘씸한거다. 괘씸한 새끼..
그러나 최치수의 이 괘씸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일단 방에 들어온 뒤에는 나가도 좋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서희는 일어설 수 없다. 숨소리를 죽이며, 그래서 가냘픈 가슴이 더 뛰고 양 어깨로 숨을 쉴 수밖에 없었는데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은 어린것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가.
이따금 책장 넘기는 소리가 났다.
"길상아!"
별안간 귀청을 찢는 것 같은 고함에 서희는 용수철같이 앉은 자리에서 튀었다.
"길상아!"
"예에!"
대답과 함께 급히 뛰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뜰 아래서
"나으리마님 부르셨습니까."
앳된 소년의 목소리였다.
"방이 왜 이리 차냐!"
"곧 불을 지피겠습니다."
"내가 지금, 방이 왜 이리 차냐고 묻지 않았느냐!"
푸른 정맥이 이마빼기에서 부풀어올랐다. 서희의 얼굴이 질린다.
"예, 지금 곧, 곧 불 지피겠습니다."
"이놈! 방이 왜 이리 차냐고 물었겠다! 고얀 놈!"
"잘못했습니다, 나으리마님."
소년은 겁을 먹은 소리를 냈으나 매양 당하기 때문인지 길들은 사냥개처럼 뒤쪽으로 달려가서 장작 한아름을 안고 뛰어온다. (토지, 제1부 1권 p.54-55)
'방이 왜 이리 차냐'는 물음에 정확한 답은 '아직 불을 지피지 않았다' 라든가, '불을 지피는 걸 깜빡했어' 등등이 올 수 있겠다. 원인을 묻는 질문에 해결을 답하는 것은 정확히 오고가는 대화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친구와 하는 대화였다면 '방이 왜 이리 차?' 라고 물었을 때 '아 그래? 불 지펴줄게' 라든가 '아이쿠 이런 불 지피는 걸 까먹었네' 등의 대화로 마무리 될 수 있을 테지만, 최치수와 길상의 처지는 다르다. 밥을 먹겠냐는 종의 물음에 자신은 이렇다저렇다 답을 한 마디도 해주지 않고 '자리나 깔아!' 해놓고서는, 그러나 자기가 묻는 물음에 정확히 대답하지 않았다고 고얀 놈~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최치수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는 양반이고 이 집의 주인인 어른 남자이다, 나는 너네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아도 되고, 그러나 너네의 대답을 강제할 수 있다, 는 자세, 태도, 생활 습관은 그에게 어릴 때부터 새겨져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되니까, 그래도 누가 뭐라 하지 않으니까. 만약 친구들 사이라면, 그러니까 평등한 사이라면, 저녁 먹을래? 재차 물어도 대답 없는 상대에게 '야 먹겠다는거야 아니라는거야 대답을 해!'라고 나도 같이 쏘아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야, 나는 배고프니까 혼자 먹을게 애새끼 대답을 안해..' 하고 돌아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귀녀는 종이었으므로 재차 묻고 대답을 기다리는 것 밖에 도리가 없었다.
묻는 말에 대답을 안하는 것, 대답을 기다릴 상대의 초조함이나 답답함을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것.
자신이 기대하는 답이 아니기에 윽박 지르고 고얀 놈이라고 욕하는 것.
이것은 최치수의 화법이다, 최치수에게만 가능한 화법이다. 토지 속 다른 인물들에겐 허락되지 않는 화법. 저 혼자 잘난 화법. 최치수에게는 모든 것이 허락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모든걸 허락할 수 있는 사람이 최치수였다. 그래서,
최치수의 화법이 싫다.
저런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려는 사람과는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다.
묻는 말에 대답 안하는 사람,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면 윽박지르는 사람.
최치수 같은 사람.
한편 길상이에겐 손재주가 있다. 눈대중으로도 근사한 탈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림도 그린다. 그걸 알게된 구천은 어린 길상에게 너 혹시 글공부도 했냐 묻는다.
"자비상이구나."
"야."
길상이 기뻐서 얼른 대답했다.
"어디서 배웠노."
"절에서 맨날 그렸소."
"절에?"
"연곡사 혜관 스님이."
구천이의 눈빛은 더 얘기할 것을 바라는 것 같았다.
"장차 저도 금어가 될 기라 하심서 맨날 초화를 그리게 했심다."
"글공부를 했느냐?"
말씨가 달라져 있었다.
"예, 조금."
저도 모르게 길상이 역시 '야'에서 '예'로 말이 달라져 있었다.
"안 하면 잊어버린다."
"노스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싰습니다."
구천이 눈이 순간 흔들렸다.
"세상이 달라질 거라 하시믄서."
흔들리고 있던 눈에 조소가 지나갔다. 그후 구천이는 틈이 날 때마다 길상을 손짓하여 불러다가 남몰래 글을 가르쳐 주었다. 혜관 스님은 성미가 급하고 변덕이 심해서 꾸짖기를 곧잘 했으며 잘못도 없는데 쥐어박곤 했는데, 그러나 길상은 글을 가르칠적에 말이 적고 엄격해 보이는 구천이가 혜관 스님보다 더 두려웠다. (토지, 제1부 1권 p.143)
어릴 적에 당연하게 주어졌던 공부는 '공부하라'는 잔소리와 함께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되었을 수도 있다. 왜 글자를 알아야 하는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자신이 모른다면, 공부가 재미있을 수 없다. 그게 뭐가 됐든,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이유, 목적을 알아야 한다. 그 목적이 거창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이걸 '왜'하는지 안다면, 그걸 할 의미도 생기고 재미도 생긴다. 공부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던 학창시절이 나는 그래서 너무 후회된다. 어릴때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이라는 후회는 아무리 하고 또 해도 끝나지를 않는다. 세상에 알아야할게 이렇게나 많은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정말이지, 잘도 살았네.. 하아- 혜관스님도 그리고 구천이도 글공부가 중요하다는 것,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어른이었고, 그래서 어린 길상이에게 글을 알려주려 했을 것이다. 양반집에 소속된 종이지만, 그러니 종의 신분으로 살아갈테지만, 글을 모르는 종도 많을 것이고, 자신의 신분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보이질 않는다면 딱히 글을 배우려는 생각이나 의지도 없을테지만,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들에게 모두 글을 배우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물론, 당시에 내가 태어나 어느 큰 양반집의 종이었다면, 그 때에도 내가 '나는 글자를 깨우칠테야!' 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현실에 안주하며 이것이 내 삶이다, 하고 살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렇지만 내가 그 때에 태어났다 해도 내가 글을 알고 싶어햇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글자를 알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책을 읽으렴. 설사 네 신분이 변하지 않는다해도, 그렇게 모르는게 많은 상태로 모든게 당연한거라는 상태로 살다가 죽지는 마.. 라고 말해주고 싶다. 과거의 어느 때에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나도 글은 알려고 했으면 좋겠다. 글을 알려는 생각과 의지가 내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기꺼이 글을 가르쳐주려는 어른도 길상이에게 구천이 있었던것처럼, 있었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혜관스님이, 그리고 나중에는 구천이가 '안 하면 잊어버린다'며 글공부를 시켜줬던게 나는 진짜 너무너무 좋다, 너무 좋다.
사실, 내가 별당아씨였어도 최치수랑 사느니 구천이랑 도망갔을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 서희는 어쩌누..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