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데 필요한 영어는 대단한 수준의 것이 아니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영어 공부에 손을 놔버린 나같은 사람도 여행지에 가서 짧은 영어로 원하는 장소에 가고 원하는 음식을 먹기에는 무리가 없다. 여행지에서 내가 쓰는 영어라는 것은 아마도 우리나라 중학교 수준의 영어정도가 될 것이었다. 이거 얼마니, 나 여기 가고 싶은데 어떻게 가면 되니, 등등.
이번 여행에서 아마도 가장 길게 말한 영어는 고작 이정도였다. 헤이그의 한 까페에서 여동생에게 선물할 원두를 주문하고 또 내가 마실 커피를 한 잔 주문했을 때.
직원: 너 헤이그에 사니?
다락방: 아니, 나 사우스코리아에서 왔어.
직원: 오, 홀리데이야?
다락방:배케이션이야.
직원: 굿이구나. 너 바깥에 앉을 거니?
다락방: 아니, 여기 안쪽에 앉을게.
직원: 그럼 가서 앉아있어, 내가 갖다줄게.
다락방: 고마워.
중학교 교과서에서 숱하게 봤을 지문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지 않은가. 고작 이정도의 영어. 고작 이정도의 영어를 가져도 여행자의 시간은 딱히 불편함이 없다. 나는 나의 짧은 영어로 갈 곳을 갔고 먹을 것을 먹었다. 기차를 탈 줄 몰라 한 남자에게 물었는데 그 남자가 친절히 시간표와 플랫폼을 자신의 폰으로 검색해 알려주기에 "내가 너의 폰화면을 사진 찍어도 되겠니?" 라 물었고 그는 물론이라고 했다. 이걸 친구에게 말하자 그 앱을 가르쳐달라 하라는거다. 오, 그러네? 나는 다시 그 남자에게로 가 그 어플리케이션이 뭔지 알려줄 수 있니? 물었고 그는 앱스토어에 들어가 어떤걸 설치하면 되는지 알려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기차 타는 것을 마스터하게 된다.
결국 바꾸지 않았지만 기차의 시간을 바꾸는 것도 시도해볼 수 있었고 맥주병뚜껑을 모으는 친구를 위해 뚜껑은 오픈하지 말아달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중학교 수준의 영어로 이런 대화쯤은 가능하다. 아마 학창시절 영어를 배웠으나 이만큼도 못한다고 한다면, 그건 영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아직 말할 수가 없어서' 정도, 그러니까 낯선 사람과의 대화가 어려워서, 정도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외국에 장기간 체류하는 사람도 아니고 고작 며칠 정도 짧게 여행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동안 숱한 나라를 여행하면서 나빴던 기억이 없다. 영국에 갔을 때는 캐리어를 들고 낑낑대며 계단을 오르는 나를 보고 한 남자가 친절히 다가와 짐을 올려다주었다. 한 아주머니는 기차역을 묻는 내게 나도 그쪽으로 가니 같이가자, 해주기도 했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 사용할 동전이 어떤건지 몰라 한 청소년으로 보이는 여성에게 동전들을 보이며 '어떤걸 넣으면 되니? 물었을 때, 그 여성은 내게 자신이 가진 동전을 주며 '이걸 넣어' 하기도 했다. 싱가폴에서는 버스를 어디에서 타는지 몰라 길을 묻자 한 아저씨가 나를 친히 데려다주기도 했다. 정작 너 중국인이냐 묻고 한국인이라는 대답에 자신의 양쪽 눈을 찢어 보이며 '너네는 다 비슷해서 모르겠어' 라고 한건, 홍콩 공항에서 대기하며 마주 앉아있던 동양인 여성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내 짧은 영어로 여행을 다니는 것에 불편함이 없었고 즐거운 기억만 가득하다. 그런데,
중국에 갔을 때는 달랐다.
청도에 갔던 때는 입국심사 할 때부터 문제가 생겼다. 친구들은 통과됐지만 나는 저쪽으로 불려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들에게 나는 나의 영어로 무슨 문제가 있냐, 내가 왜 여기있는 거냐 물었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고, 자기들끼리 중국어로 한참을 얘기했다. 나는 그들의 중국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끼리의 대화나 행동으로 보건데 여권과 실제의 이 사람은 같은가에 대해 얘기중인 것 같더라. 내가 대기하는 곳에는 나처럼 대기하는 사람들이 좀 더 있었는데, 그런 나를 바깥에서 기다리던 친구들에게 중국 직원은 내려가라고 내려가라고 했다. 친구들은 나를 걱정했고 나도 나를 걱정했다. 한 명씩 통과 시켜주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나를 통과시켜주었고, 나는 이 과정에서 아무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바깥을 나섰을 땐 더했다. 간판이 온통 한문이었다. 한문을 모르는 나를 원망했다. 택시 기사도 영어를 몰랐고 호텔 직원도 영어를 하지 못했다. 호텔에서의 직원은 스맛폰을 이용해 나와 영어로 대화했다. 나는 길을 구경하고 싶었는데 거리 가득 간판들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꼬치구이를 먹으러 갔을 때 꼬치 종류가 수십가지 였는데 이것은 뭐고 이것은 뭔지 알 수 없어 한 번은 '이것은 양이냐?' 라고 물어도 의사소통이 안돼 한문으로 양을 스맛폰에 쳐서 보여주었다. 직원은 아니라고 했고 돼지냐라고 묻고 싶었는데 급한 마음에 내가 내 코를 돼지코 만들면서 꿀꿀? 했더니 그렇다고 하며 직원들과 내 친구들까지 모두 웃었다. 청도를 떠날 때쯤엔, 다시는 중국에 오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읽을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 너무 답답하고 조금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이 느낌은 답답함과 무서움과 조금 더 다른 차원의 것인데 그것을 단어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비참함? 위축됨?
이번 여행에서 잠깐 프랑스에 들렀다. 우리는 돌아가는 기차표를 사야했고 그래서 프랑스의 친구에게 초면에 실례지만 표 좀 사달라고 부탁했다. 친구와 기차역의 직원은 프랑스어로 얘기했다. 나는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친구는 호텔에서도, 식당에서도 불어로 대화해 주었고 나는 역시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또다시 내가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여기 있지만 있지 않은 느낌이었다. 나의 존재가 이곳에서 무용하게 느껴졌다. 듣지도 못하고 말할 수도 없는 곳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프랑스어를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그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비참했다. 내 앞에서 오고가는 대화를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참담함일까? 그들이 나를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는게 아니었으니 모멸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쨌든 좋지 않은 기분임에는 분명했다. 나는, 내가 프랑스어를 못하는게 당연한데도, 그런데도 왜 이렇게 비참한 것인가. 왜 쪼그라드는 것인가. 이것은 내가 느껴 마땅한 감정인가?
어제 퇴근길 시사인을 읽었다.
짧게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회 활동이 위축돼요"
신선영 ssy@sisain.co.kr
최상민씨(42)와 김대민씨(36)가 서울 마포구의 한 패스트푸드점에 설치된 주문용무인정보단말기(키오스크)에 바짝 다가섰다. 전맹(全盲) 시각장애인 최씨의 손이 음성지원 기능이 없는 ‘유리벽‘을 더듬었다. 선천성 미숙아망막증으로 형체만 보이는 시각장애인 김씨도 확대경을 사용했지만 주문이 불가능하긴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매장에는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섰다. "여러 대 중에 한대라도 배리어프리 키오스크(점자 패드나 음성안내 기능이 있는 키오스크)를설치할 수는 없을까요.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회 활동이 위축되는 것 같아요."
키오스크가 보편화하고 있지만 장애인이 사용 가능한 기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가 올해 6월 전국 15개 지역 공공·민간업체 1002대 기기를 조사한 결과, 발달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기기는 인천의 병원 한 곳에만 설치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키오스크 사용이 어려운 장애인들에게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도록 강제하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일부 개정 법률안‘이 내년 1월28일 시행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가 밝힌 시행령 초안이 법안의 취지를 잘 담아내지 못하면서 두 사람의 걱정도 깊어졌다. 최씨는 시행령에 배리어프리 키오스크가 갖춰야 할 기능을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최대 2026년까지 ‘단계적 적용‘을 명시한 부분을 문제로 지적했다. "안내견과 자주 가던 동네 애견마트가 무인 점포로 바뀌면서 혼자서는 더 이상 갈 수 없게 됐어요." 두 사람은 지난 7월11일 시각장애인 당사자 60여명과 서울 중구의 맥도날드를 방문해 주문 퍼포먼스를 벌이는 항의 시위에 참가하기도 했다. 당시 내세운 구호는 ‘응답하라 키오스크 유리장벽이 말할때까지’였다. "장애인이 편하면 모두가 편해질 수 있어요. 지하철에 설치된 엘리베이터처럼." 빈손으로 매장을 떠나던 김씨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나는 대단히 대단히 빡이쳐서 숨을 골라야 했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영어 간판이나 영어 메뉴판을 만들 때 한글을 반드시 병기하는 법률을 제정해달라고 국민청원을 올리려고 했었는데 정부가 바뀌어버렸다. 나는 이게 대단히, 대단히 부조리하다고 생각한다. 깊이, 깊이 빡친다.
일전에도 얘기했지만 hair salon 이라는 간판을 보고 우리엄마는 저게 뭐하는 덴지 알지 못하신다.
일전에도 한 아주머니가 다른 사람과 어떤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 커피숍을 찾을 수 없었노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간판이 죄다 영어였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SNS 에서는 쇼핑몰에서 식사를 하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아버지가 '이 쇼핑몰안에서 내가 읽을 수 있는 간판은 없구나' 라고 하셨다는 경험이 올라오기도 했다.
배우지 않았으면 모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모두에게 배움이 허락되는 것도 아니다. 영어는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아니다. 하면 좋지만 안해도 사는데에는 지장이 없어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에서라면. 왜 내가 나고 자란 나라에서 저 가게가 무슨 가게인지 모르고 이 메뉴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야 하는가. 왜? '이것을 읽을 줄 아는 사람만 들어오라'는 뜻이 너무나 명백한데, 그것은 차별이 아닌가, 배제가 아닌가. 이 메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만 주문하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은 손님으로 받지 않겠다는 것이 아닌가. 왜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 갈 수 없고 살 수 없는 것이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왜 그게 점점 더 많아지는가. 그거 이상한거 아닌가. 이거 안이상해?
키오스크만 해도 그렇다.
키오스크 주문은 처음 하는 사람들에게 낯설고 어렵다. 그나마 나는 사용할 기회가 자주 있어 괜찮지만, 키오스크를 사용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이것은 매우 힘든 일일 것이다. 나는 키오스크 앞에서 여러번 다른 사람을 대신해 도와준 적이 있다. 할아버지를, 내 또래의 아이엄마를 도와 주문을 완성시켜 준 것이었다. 왜,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 햄버거 하나 먹는 일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야 하는가. 이거 이상하지 않은가?
기사 속의 장애인이 햄버거가 먹고 싶어 주문하려 했을 때, 메뉴가 보이질 않아 한참 걸려 뒤에 대기줄이 길게 늘어설 때, 그 장애인이 느껴야 할 불편함과 대기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복잡한 마음-그리고 이준석류가 느낄 마음-은 도대체 누구의 잘못인가. 사실, 고백하자면, 나조차도 키오스크에 대해 분노하고 이것은 부조리하다고 생각할 때, 노인들은 염두에 뒀지만 장애인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 점이 부끄럽다. 보이지 않는 사람을 배제하기가 이렇게 쉽다. 기본적 셋팅 자체가 비장애인, 젊은사람, 배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는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 장애가 있는 사람들, 젊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아주 어린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데, 우리는 모든 '돈 쓰는 인간'에 대한 기본을 '가질 거 가진 사람들'로 맞춰두고 있는게 아닌가.
빡친다 대단히 빡친다.
어제 퇴근길에 저 짧은 기사를 읽고 이것이 그저 빡침으로만 있으면 안되는데,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역시.. 정치인이 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나의 의식의 흐름은 나의 '털어서 먼지만 수두룩한 과거'에 이르고, 그렇다면.. 내가 나인 걸 모르게, 신상털이 안당하게,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서 정치인이 되어야 할까, 그러기 위해서 성형수술을 해야 하나.. 여튼 별 생각을 다했다.
내가 생각하는 정치인은 똑똑한 사람이다. 똑똑하다는 것은 하버드를 나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출신 대학이 어디이든 혹은 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보이는 바로 이 장면에 보이지 않는 다른 것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다. 그런 똑똑한 사람이 리더가 되고 지도자가 되고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자꾸 숨게 한다. 먹고 싶은 햄버거 먹는데 눈치를 봐야 되고 누가 대신해주길 기다려야 하고 차라리 먹기를 참아야 하게 된다.
이 나라에서 나고 자랐는데 마치 내 앞에서 외국어만이 가득한 것 같은 비참함을 이 나라 국민이 느껴서는 안되는 거 아닌가. 내 앞에서 행해지는 말들이 내게도 들리고 또 나도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보이는 곳에 있는 것을 나는 읽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게 아닌가. 적어도 여기가 내가 나고 자란 곳이라면, 내가 프랑스에서, 중국에서 느꼈던 그런 초조함과 비참함을 느끼게 해서는 안되는거 아닌가.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 먹고 사는 일에 위축되는 거, 그거 너무 이상하잖아.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 햄버거 하나 사먹는 일에 쫄보가 되는거, 그건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이 나라가, 이 나라의 시스템이, 이 나라의 문화가 잘못한 게 맞다.
대한민국의 영어 간판, 영어 메뉴, 키오스크.. 다 좆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