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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박해일)은 아주 능력 있는 형사다. 산 정상에서 떨어져 죽은 남자의 사건을 수사하다 죽은 남자의 아내 서래(탕웨이)와 만나게 되고 잠복수사를 거치며 그녀의 삶을 훔쳐보고 신문하며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그들 사이에는 형사와 살인사건 용의자 라는 관계 이외의 것이 생겨나게 된다. 사건은 자살로 종결짓게 되고 동료 형사는 거기에 대해 불만이 많다. 해준 조차도 사건이 끝난 후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판단했다는 걸 알게 되는데, 그런 자신에게 크게 실망하며 서래에게 얘기한다.
"나는 내 일에 자부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여자한테 빠져서 다 망쳤죠. 나는 붕괴됐어요."
여기까지는 영화의 절반쯤이려나, 영화는 그 다음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또 넘어간다. 붕괴된 해준은 그래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랑이야기. 일전에 '문목하'의 소설 《돌이킬 수 있는》을 읽었을 때도 그 책 속의 극진한 사랑에 마음이 일렁였더랬는데, 그 책에 대한 어떤 독자의 평에는 '사랑한다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사랑소설'이라는 게 있었다. 그 평을 읽으면서 나는 맞아, 바로 그렇지! 했었는데, 《헤어질 결심》에서 그 독자의 평이 다시 떠올랐다.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극진한 사랑 이야기. 오죽하면 등장인물인 해준 조차 '나는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라고 스스로가 했을지도 모를 말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나도 해준의 그 말에 기억을 더듬어가며 '없는데,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지' 라고 했고, 그러나 서래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음성 파일을 들었을 땐, '맞아, 그러나 그 부분에서 나는 극진한 사랑을 느꼈지. 그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한 사랑이었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것은 사랑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를 사랑이야기 만으로 좋아할 순 없다. 그러니까 이 사랑도 좋았다는 거다. 이 사랑이야기가 좋았다는 거다. 다만, 내가 오래 머물고 계속해 생각하는 장면은 사랑 보다는 신념이었다. 해준이 말하는 자부심과 그것의 붕괴. 해준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있었다. 가장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춘 사람이 그였다. 주머니가 여러개 달린 옷을 입고 언제 필요할지 모를 작은 필수품들을 주머니에 챙겨넣고 범인을 잡아들이는데 맞춤한 사람, 그런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 집 안 가득 벽에 미해결사건의 사진을 붙여두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 우수한 성적으로 형사가 되었고 되고 나서도 능력이 있었던 사람. 그게 남들이 보는 해준이었고 또 스스로가 생각하는 해준이었다. 해준은 해준의 삶에 불만이 없었고 해준의 일에 대한 능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수사를 망쳤다. 주변에서도 너 지금 수사를 망치고 있다고 말할 때조차도 듣지 않았는데, 이젠 자신이 수사를 망쳤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살인사건의 용의자에 대해 감정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도 안다. 결국 '여자한테 빠져서 수사를 엉망으로 만드는' 일을 자신이 벌인 셈이다. 해준은 그런 그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그것은, 갑작스레 다가온 사랑보다 더 큰 충격이다. 어쩌면 자신과의 관계에 만족하는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받아들인 충격을 방어하느라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해준에게 큰 충격이다. 이, 내가, 이, 능력있는 내가, 이 자부심 있는 내가, 이 빈틈없는 내가, 수사를 망쳤다. 왜? 여자한테 빠져서.
이 때의 해준은 아마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입에서 '붕괴'라는 단어가 나온게 아닐까. 붕괴되었다. 그는 붕괴되었다. 그 붕괴는 누가 했냐. 스스로가 했다. 스스로가 그 붕괴에 발을 들였고 스스로가 그 붕괴에 문을 열어주었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자신의 붕괴를 눈치챘다. 그 붕괴는, 자부심을 가졌던 그에게 몹시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자부심을 말하다가 이내 붕괴를 언급하는 해준을 보게 되는 그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나는, 신념에 대해 생각했다.
'신념'이란 것을 떠올리면 이내, 어쩔 수 없이,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 생각이 난다. 주인공이 옳다고 믿는 것, 확신하는 것을 갖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생각대로 행동했던 것. 필립 로스가 쓴 소설은 지독하게 재미있어서 천재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좋아할 순 없는데, 네메시스 는 달랐다. 네메시스 속 주인공은 내가 이해하지 못할 바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것이 옳아, 그렇다면 나는 그대로 행동해야지. 그것은 약속을 했다면 지키는 것을 의미하고, 옳다고 믿는 바가 있다면 그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에게 이것은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성향, 덕목인데,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 나는 내 자신에게 한 점 부끄럼없이 살자, 남들이 약속을 안지켜도 나는 지키고 남들이 예의를 안지켜도 나는 지키고 내가 옳다고 믿는 바가 있다면 행동하자, 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으며 그렇게 살아갈 사람이라서 그 등장인물이 바로 나같았던 거다. 그것은 고지식함일 수도 있고 꼿꼿함일 수도 있다. 강한 신념은 고지식하고 꼿꼿함을 자연스레 불러온다. 그런 등장인물이 그러나 그 꼿꼿함으로, 그 고지식함으로, 그러니까 옳다고 믿고 행하는 바로 그 신념대로 살아서 행복해졌는가?
옳다고 믿는 바가 있고 그것이 약자의 편에 서는거라면 여기에 '틀림' 이 어디있고 '부조리'가 어디있을까. 그렇다면 그 뒤에는 반드시 선한 결말이 와야 하는게 아닌가. 선한 의도는 선한 결말을 불러와야 하는거 아닌가. 남들이 다 좀 더 쉬운 그러면서 나쁜 걸 선택할 때, 나만은 그래선 안된다고 부조리와 멀어졌다면, 그렇다면 그 사람에겐 해피엔딩이 와야 하는게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왜, 인생은 그렇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걸까. 왜 선한 말과 선한 행동을 한 나 자신에 대해 오히려 '그러지 말았어야 했던걸까?'를 생각하게 할까? 나는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를 읽으면서 그렇다면, 선한 결말이 오지 않는 것이라면, 주인공 역시도(나 역시도) 함께 혐오해야 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께 비난하고 함께 욕해야 했을까? 그들이 혐오할 때 같이 혐오했다면, 그랬다면 지금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텐데. 내가 옳다고 믿는 건 누구에게 옳은 것이었나. 그것이 적어도 나는 아니구나. 그렇다면, 그렇게 살아야 했을까?
그것은 붕괴였다. 그 책을 읽는 나는 붕괴됐다. 그 당시에 나는 붕괴란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지만, 헤어질 결심을 보고 나니, 그 때 내가 느낀게 붕괴라는 걸 알겠다. 나 이렇게 잘해왔는데, 잘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런데 망쳤어! 를 느낀 해준이 느낀 붕괴는 내가 네메시스를 읽고 느꼈던 붕괴와는 결이 다르다. 그러나, 해준에게도 그리고 네메시스의 주인공에게도 꼿꼿함이, 자부심이 있었고, 옳다고 믿는 바가 있었고 스스로를 믿는 바도 있었다. 그리고 붕괴되었다.
헤어질 결심은 사랑이야기이다. 나는 붕괴됐다고 말하는 해준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고, 그 붕괴의 뜻을 찾아보고 붕괴를 자신의 입에 올리는 서래를 보고 울었다. 이것은 사랑이야기이다. 나는 결말을 보면서 살아남자고, 살자고, 우리 모두 살아남자고 재차 생각했다. 당신이 내 옆에 있지 않아도 괜찮아, 다만 살아있어줘. 내가 당신이 살아있다는 걸 알면 더 좋겠지만, 우선해야 할 것은 당신이 살아있는 것. 살자, 살아남자, 나는 당신의 평안을 바라고 그리고 나는 당신의 생존을 바란다. 살아남자. 미해결된 사건처럼 결코 해결지을 수 없는 사랑으로 남아있다 해도, 그래도 살아남자.

토르나 그 뭣이냐 울트라맨.. 아 그 울트라맨 말고 ... 아이언맨! 내가 맨날 울트라맨이라 그러면 둘째 조카가 아이언 맨으로 고쳐주는데, 나는 아이언맨이 왜이렇게 안외워지는지 모르겠다. 자꾸 울트라맨이 튀어나와. 하아-
여튼 그런 종류의 영화를 딱히 좋아하진 않고 챙겨보지도 않는데, 이번 토르 제목이 무려 '러브' 앤 썬더란다. 읭? 나탈리 포트만이 근육을 가지고 나온대. 씐나게 이 여름을 보내자! 하고는 극장으로 달려갔다.
영화는 재미있었고 좋은 장면이 여러군데 있었다. 그리고 난 운동한 사람들의 몸을 보는 걸 너무 좋아해.. 하하하하하. 나탈리 포트만 운동하는 영상 혹시 유튭 찾아보면 있을까? 운동해서 만든 몸 보다는 운동해서 몸을 만드는 그 과정을 보는게 왜그렇게 좋은걸까. 아무튼 햄스워스 라는 배우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다 라고 말할 순 없는 배우지만 확실히 단단한 몸을 보는 건 나에겐 참 .. 좋다. 이건 뭐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어. 내가 다시 태어나야 돼. 다시 태어나서 내 몸을 그렇게 만들자! 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제 양념갈비에 소주를... 인생이여.... 내가 너무 직딩이라 고기랑 술을 먹는 것 같다. 휴...
아무튼 《토르: 러브 앤 썬더》에서는 1편에서 나왔다 사라진(기억이 잘..) '제인 포스터(나탈리 포트만)' 가 토르의 망치를 갖게 되고 토르가 되어 나온다. 쨔쟌 등장해서 악의 무리를 다 쳐부수는데 짜릿하고 또 짜릿함. 그렇게 악당과 싸우는데 악당이 제인 포스터에게 '레이디 토르'라고 하자, 제인이 그런다.
'나는 ('레이디 토르'가 아니라) 마이티 토르다, 그게 아니라면 '제인 포스터 박사'라고 불러라!'
크- 토르는 아이들도 많이 보는 영화이니 이런 대사가 나오는게 너무 좋지 않은가. 후훗.
얼마전에 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티비를 틀었고 <유퀴즈온더블럭>의 '구준엽' 편을 보게 됐다. 20년만에 사랑했던 사람과 재회하고 결혼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 사랑했지만 주변에서 그만두는 게 너를 위해 낫지 않겠냐 라는 말을 무수히 들었고 그런 결정 후에 마음이 아팠던 것, 상대가 그러나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이해해줬던 것, 상대의 이혼 소식을 접하고 20년만에 전화했는데 전화번호가 바뀌지 않았던 것, 서로가 그 때처럼 전화를 걸고 받았던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20년동안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다니. 그것은 어쩌면 결국은 서로를 다시 만나기 위함이었을까? 20년만에 만나 시간이 없다고, 그래서 구준엽은 끊임없이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고 했다. 20년간 못했던 것 다 해야 한다고. 서로가 연예인이었던 만큼 서로의 활동에 대해서도 헤어져있는 동안 알고 있었고 구준엽은 상대의 결혼도 그리고 이혼 소식도 매스컴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나랑 헤어진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리고 그 사랑이 깨어지는 걸 보는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구준엽의 이야기를 듣다가, 바로 이런 이야기가 있었지, 하고는 몇해전에 읽었던 '필립 베송'의 《그만해 거짓말》을 꺼내왔고, 다시 읽었다.
이 책속에서도 고등학교 시절 잠깐 뜨겁게 사랑하고 헤어진 동성커플이 나온다. 한 명은 유명한 작가가 되어 작품이 발표되고 세계를 돌아다니고 텔레비젼에도 나오고, 한 명은 마치 이성애자인 것처럼 이성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그러면서 자신과 헤어졌던 남자의 소식을 매스컴을 통해 접한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내가 옆에 없으면서도 알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작가 주인공이 상대의 소식을 듣는 내용으로 기억하고 있기에 다시 읽었는데, 읽으면서 어떤 부분에서 불편하고 불쾌하기도 해서 '흐음 이제 필립 베송이 좋지 않네' 했다. 나는 《포기의 순간》을 정말 좋아했었고 그래서 필립 베송을 다 찾아 읽었더랬다. 《그만해 거짓말》을 읽으면서 필립 베송은 포기의 순간부터 한결같았는데, 내가 달라졌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젠 필립 베송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내가 《그만해 거짓말》을 몇해전에 읽고 뭔가 써놓지 않았을까 싶어 찾아봤더니, 하하하하, 지금 느끼는 불편함과 이제 별로 좋지 않음에 대해서 내가 쓴 리뷰에 다 적혀있더라. 아, 나는 이때도 똑같은 지점에서 똑같은 불만을 갖고 있었구나. 구준엽의 20년만에 이루어진 사랑에 아련해진 마음으로 다시 읽었다가 오, 필립 베송 이제 그만.. 이 되어버렸어.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어제 친구와 이성애 삽입섹스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영화에 대해 언급했다. 내가 얼마전에 이 영화를 어떤 이유로 다시 보게 되었는데, 영화는 많은 부분 책에서처럼 엉망이고 클리셰 범벅이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좋은 지점이 있는 거다. 상대를 때리면서 성적 쾌감을 얻는 남자주인공 그레이가 주인과 하인이라는 설정의 성적 계약을 맺고자 하는데, 이에 아나스타샤는 그레이에게 로맨틱한 감정으로 끌리면서도 계약서의 서명은 뒤로 미룬다. 그레이는 의도한 바가 아니었는데 계약서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로 아나스타샤와 섹스를 하게 되고, '우리 사이에 로맨스는 없어, 나는 그런거 싫어해, 다만 섹스가 있을 뿐이야' 라고 하면서도, 그런데 아나스타샤에게는 자꾸 다르게 행동하게 된다.
가학적인 남자가 있고 상대 여자가 있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이야기는 여자가 가학적인 남자의 말을 들어주고 참아가면서 결국 그것을 자기 욕망화 시키면서 대부분의 이야기가 진행될것이다. 그러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가학적인 남주가 변한다. 이렇게 때려서 아프게 만드는게 네가 원하는 것이냐, 고 묻는 아나스타샤 때문에 그레이가 변한다.
1편의 중간지점까지 보다가 너무 가슴이 아파서 멈췄는데, 음 내가 왜 가슴이 아팠는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레이는 계약서에 대체 언제 도장 찍어줄거냐고 하면서 아나스타샤랑 섹스를 나누고, 그러면서 아나스타샤를 보고 '도대체 너 나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라고 되뇌인다. 어쩌면 이것은 그레이식의 붕괴일 지도 모르겠다. 가학적이기만 하던 나, 너를 만나 붕괴됐어. 둠칫 두둠칫.
나는 극진한 사랑은 결국 우정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정이 결코 극진한 사랑의 작은 부분 집합인 것은 아니다. 극진한 사랑과 우정은 다르지 않다. 그레이와 아나스타샤가 이성에 대한 갈망, 호기심, 욕망으로 섹스를 했다면, 섹스 후에 서로의 눈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우정이 탄생된다고 믿는다. 결국 연인은 가장 좋은 친구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내가 연인과 헤어진 후, 사랑을 잃고난 후 가장 그리웠던 건, 그의 단단한 육체보다, 그와 나누었던 육체적 친밀감보다, 그와 나누었던 우정이었다. 그 우정을, 다른 사람과는 결코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도, 나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 친구만큼 나를 이해해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리워하는 건 네가 아니라 그 때의 우리야' 라는 말을 나는 이렇게 바꾸고 싶다. '내가 그리워하는 건 너와의 사랑이 아니라 너와의 우정이야' 라고.
헤어질 결심, 돌이킬 수 있는, 네메시스, 토르, 그만해 거짓말,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그리고 구준엽의 사랑이야기까지.
모두 각자의 '마침내' 이며 '붕괴'를 품고 있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것은 각자의 마침내와 각자의 붕괴를 지나치며 유지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붕괴 그리고 다시
마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