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는 고양이 세마리와 함께 살고 있고 인간보다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더 크다. 이게 이 친구와 나의 가장 다른 점인데, 아마도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고양이를 싫어해'라고 말하던 사람이었다가, 가끔은 가방 안에 고양이 간식을 넣고 다니며 주기도 하는 사람이 된 것은 이 친구의 영향이 아주 클 것이다. 친구에게 고양이는 언제나 1순위 였고, 고양이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들과 하지 않는 일들이 있으며 또 고양이 때문에 참는 일들도 있다. 처음에 이 친구를 알고 점점 친해지면서 어떻게 도대체 고양이한테 저런 관심과 애정을 가질까, 어떻게 저런 것들(집안을 마구 휘젓고 다니는 것, 집사를 할퀴는 것, 나는 자고 있는데 어떤 존재가 돌아다닌다는 것, 옷 가득 털이 붙는 것)을 참고 견딜까, 하다가 이제는 '아 내가 조카들을 보듯 저 친구는 고양이들을 보는구나' 하고 있다. 친구는 내게 고양이를 찬양한 것도 아니고 내게 고양이를 좋아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고양이와 함께 하는 삶을 저대로 소중히 살았을 뿐이고, 나는 그런 e의 삶을 보았을 뿐이다.
한번은 함께 길을 걷고 있는데 어린 아이가 제 엄마와 가다가 울고 있는 걸 보게 됐다. 아이고 저 아이 왜 울지, 울지마, 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보다가 e에게 '저 아이 왜 울지' 하고 돌아보았는데, e의 시선은 저쪽의 고양이를 향해 있었다. 고양이 한마리가 길을 지나고 있었던 것. 나에겐 고양이가 먼저 보이지 않았고 e 에겐 고양이가 먼저 보였다. 그때 되게 놀랐던 기억이 있다. 어떻게 아이가 우는 소리가 나는데도 고양이를 볼 수가 있지? 하고. 그리고 아마도 그 때 알았던 것 같다. e 의 우선순위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 나의 우선순위는 고양이가 될 수 없다는 것.
지난주에 e를 만났다. 그리고 도나 해러웨이의 책을 읽고 있다고 얘기했다. e는 도나 해러웨이도 그리고 이 책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지만, 내가 <반려종 선언>을 썼다고 하자 그 내용을 궁금해했다. <사이보그 선언>을 쓴 사람인데 <반려종 선언>도 썼다하니, 도대체 그게 어떤 연결이 되느냐, 무슨 내용이냐 물었던거다.
내가 어떤 것의 내용을 잘 파악하거나 알고 있다는 것은 내가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느냐 아니냐로 판단할 수 있을 텐데, 아아, 나는 e 에게 설명을 하려고 최선을 다하면서도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했고 또 듣는 e 도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어려워.. 내가 나중에 제대로 파악하게 되면 다시 말해줄게.. 라고 했다. 아, 나는 왜 설명할 수 없는가. 흑흑 ㅠㅠ
그렇지만 대략적인 맥락에 대해서라면 말할 수 있다. 도나 해러웨이가 반려종 선언을 통해 하려는 얘기는 '개는 개다'(p.129) 라는 것. 개는 우리가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사는 개의 주인이 아니다. 우리가 개를 선택했듯 개도 우리를 받아들여야 했고, 그렇게 개는 우리와 함께 사는 존재라는 것.
개는 인간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 바로 이 점에 개의 매력이 있다. 개들은 투사 대상도, 의도를 구현한 물체도, 다른 무언가의 텔로스도 아니다. 개는 개다. 즉, 인간과 의무적이고 구성적이며 역사적이고 변화무쌍한 관계를 맺는 종이다. 이 관계는 다른 관계들보다 특별히 나을 것은 없다. 기쁨·발명·노동·지성·놀이로 가득한 만큼, 낭비·잔인함·무관심·무지함·상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공동-역사의 이야기를 잘 들려줄 방법과 자연문화적 공진화의 결과를 물려받을 방법을 배웠으면 한다.
반려종은 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반려종을 만들려면 적어도 두 개의 종이 있어야 한다. -p.129
나는 비혼이고 아마 특별히 어마어마한 사랑에 빠져서 정신을 잃는 게 아니라면(응?) 앞으로도 혼자 살게 될텐데, 그래서 가끔 엄마는 내게 '너도 앞으로 개를 키우고 싶냐'고 묻곤 하신다. 어릴 적에 몇 년간 개와 함께 살아본 적도 있고 그 때 개를 예뻐하긴 하였지만, 그러나 나는 엄마에게 '아니'라고 말했다. 엄마, 개 데리고 맨날 산책도 다녀야 되고, 개가 싼 똥도 다 치워야 되잖아. 밥도 챙겨 먹여야 되고. 한 생명을 돌보는 일인데 그걸 어떻게 해, 어휴, 못해. 아프기라도 하면 그걸 무시할 수가 있겠어? 당장 데리고 병원 가야겠지, 그리고 그 마음고생은 어떻게 해? 아니, 엄마 나는 안해. 그러자 엄마는 말했다. '맞어, 너 하지마, 너는 남들보다 더 신경쓰고 괴로울거야' 라고. 내가 나 아닌 다른 존재와 살아간다면 게다가 그것이 나와 다른 종이기까지 하다면 나는 그 개가 어떤 상황에 있는건지, 어떤 기분으로 있는 건지를 항상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도나 해러웨이가 하는 말은 인간이 함께 살아갈 다른 종들의 상태를 살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에 앞서, 반려종, 즉 특별히 예로 든 개들은 인간이 그러는것보다 더 그러해야 함을,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음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문장에서.
개가 종 또는 개체의 시간 차원에서 생존하려면 인간의 마음을 잘 읽어야 할 필요가 항상 있었다. -p.178
한쪽은, 그러니까 조금 더 힘이 센 쪽은, 다른 한쪽의 마음을 읽으려는 것이 선의를 베푸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이 존중하고자 하는 기본적 태도임에도 불구하고, 강자가 약자를 살피는 것은 호의로 보인다. 그러나 약자가 강자의 마음을 살피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다. 개는, 인간과 함께 사는 세상에서, 게다가 인간과 한 집에 살거나 주변에 살기 위해서, 인간의 마음을 잘 읽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생존에 '필요'하다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은 개의 반려종임과 동시에 인간이 개의 반려종이면서, 그러나 인간은 인간들 틈에서도 반려종이 되고 있는게 아닌가. 부모랑 함께 사는 아이, 남편과 함께 사는 아내, 백인과 함께 살아가는 유색인, 남자와 함께 살아가는 여자. 상대적 약자의 입장에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의 마음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보통 '여자들이 공감능력이 뛰어나다'고 전제하고 '남자들은 공감능력이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실제로 남자에게 그 능력이 부족하거나 여자에게 그 능력이 선천적으로 뛰어나서가 아니고, 그들이 놓인 상황 탓에 어쩔 수 없이 발현되는 것일테다. 개는, 생존하기 위해서 인간의 마음을 잘 읽어야 할 필요가 항상 있었으니까.
아직 <반려종 선언> 읽기가 끝나지 않았다. 뒷부분이 남아있어서 어떤 식으로 맺게 될지는 모르겠다. 밑줄 그은 부분을 다시 읽어보고자 앞으로 돌아가다보면 반려종, 개, 동물권 에 대해 언급하다가 왜 갑자기 팩트, 과거분사.. 같은 용어가 나오는지, 읽었으면서도 물음표 천 개 되기도 한다. 그러나 191 쪽, 도나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의 핵심은 이것이다, 라고 본인이 직접 말해준다.
다른 이와 나누는 애정, 헌신, 솜씨에 대한 열망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비키 헌이 말한 의미에서의 훈련 같은 애정 행위는, 연쇄를 이루며 창발한 다른 세계들을 배려하는 애정 어린 행위를 낳는다. 이것이 내 반려종 선언의 핵심이다. -p.191
같은 말이겠지만, 내가 현재 읽어온 부분까지의 반려종 선언은 내게 '우리가 다른 종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알아가고자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함께 살아간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온 삶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이다. 나의 반려종(그것은 개를 포함한 다른 모든 생물이기도 하고 나는 인간이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과 관계를 맺고있는 삶은, 그것과 관계 맺지 않은 삶과는 다른 삶일 것이라는 것, 그리고 다른 삶으로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 이 현재까지 내가 파악한 도나 해러웨이의 주장이다. 사이보그 선언은, 반려종 선언에 앞서 그런 이야기를 사이보그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했는데, 반려종 선언에서는 우리가 태어나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미 존재하는 것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고, 그것들을 우리가 소유하는 게 아닌 만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배워야 한다고 한다면, 사이보그 선언에서는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시기는 이제 지나가고 있고 이것과 저것 둘로만 나눌 수 없는 숱한 존재들이 앞으로 태어날 것이니 우리는 다양한 삶의 형태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또 변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제대로 파악한건지에 대해서는 해러웨이 선언문을 다 읽고난 후 해러웨이 에 대한 해제를 또 읽어봐야 알 것 같다. 아니, 그렇게 해도 알 수나 있을지.
오늘 아침 출근길, 191쪽까지 읽었다. 이제 꼭 절반을 읽은 셈이다. 자, 계속 읽어보겠다.
개들은 벗어날 수 없는 모순적 관계의 설화 속에 있다. 이러한 공구성적 관계를 이루는 어느 쪽도 관계보다 먼저 존재하지 않고, 이런 관계는 한 번에 맺어 완성할 수도 없다. 역사적 구체성과 우발적 변이 능력이, 자연과 문화 속으로, 또 자연문화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길을 계속 좌우한다. 기초 같은 것은 없다. - P130
인간은 개를 동반자로 삼으면서 삶의 방식이 상당히 바뀌었다. - P153
인간, 돼지, 가금류, 바이러스 사이에 공진화가 이루어졌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인플루엔자의 역사를 상상하기 힘들다. - P155
기쁨은 분명 반려종 관계의 중요한 측면 중 하나다. 다만 애완동물이라는 지위는 내가 사는 사회와 같은 곳에서는 개를 특별한 위험에 빠지게 만든다. 인간의 애정이 시들거나, 사람의 편의가 우선하는 상황이 되거나, 개가 무조건적 사랑의 환상을 충족시키는 데 실패하면 버려질 위험을 겪게 되는 것이다. - P164
간단히 말해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주문은 우리 대부분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바로 그것, 더 정확히 말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추상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일대일 관계, 연결된 타자성otherness-in-connection을 통해 개가 누구이며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 P173
대체 누가 있는가who is at home는 영원한 질문으로 남을 것이다. 핵심은 타자나 자신에 대해 알 수 없지만, 관계 안에서 누구와 무엇이 출현하고 있는지를 항상 질문하는 것이다. 종과 관계없이 진정한 사랑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는 내용이다. - P177
나는 종 안팎에서 맺어진 모든 윤리적 관게는 관계-속의-타자성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라는 가늘고 섬세하며 질긴 실로 뜨개질한 편직물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며, 함게 살아감으로써 존재한다. 누가 있으며 누가 생겨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의무다. - P178
자신이 키우는 개을 복종시키는 방법을 솔직하게 배우기란 주인에게 벅찬 일이다. 헌의 언어는 정치와 철학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개를 가르침으로써 관계에 "참정권을 준다"라고 못을 박는다. 마치 이미 있어서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양 동물권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어떻게 한 동물과 권리의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와 같은 권리는 서로에 대한 점유possession를 토대로 하며 해체되기 어렵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런 권리에 대한 요구는 파트너 모두의 삶을 바꾸게 된다. - P181
반려동물의 행복, 서로에 대한 점유, 행복 추구권에 대한 헌의 주장은 "애완동물"을 포함한 모든 가축의 상태를 "노예 상태"라고 보는 입장과는 한참 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다. 그보다는 반려종과 얼굴을 맞댄 관계가 무언가 새롭고 멋진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새로운 것은 통념적인 이해 방식대로 소유 관계를 뜻하지 않는 경우에서조차, 인간의 관리자 역할human guardianship이 소유권을 대체하는 문제도 아니다.헌은 인간뿐 아니라 개 역시 종에 특유한 방식으로 상황을 도덕적으로 이해하거나 성취를 진지하게 열망하는 능력을 타고난 존재라고 본다. 점유-자산property-는 호혜성 및 접근권과 결부된다. 내가 개를 하나 데리고 있다면 나의 개는 인간을 하나 데리고 있는데, 이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묻는 게 핵심이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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