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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가미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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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터 흡입력이 대단한 소설이었다.
잠들기 전에 누워 읽다가 잠이 달아나버렸다.
계속해서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지는 소설.

상황 묘사가 굉장히 세밀해서 장면과 캐릭터가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져, 물에 젖은 듯 축축하고 비릿한 냄새와 해조류 냄새가 났다.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비극적인 장면을 작가는 그저 목도하듯이 건조하게 묘사한다.
등장인물에 적합한 배우를 떠올려 볼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진다 싶었더니, 역시나 영화로 제작된다고 한다.
낯선 단어들과 신선한 표현들로 써낸 문장들이 너무 좋았다.
등장인물의 생각의 속도를 그대로 따라가며, 한 문장을 긴 호흡으로 썼는데도 전혀 막힘 없이 쉽게 읽혔다. 오히려 그 인물이 하고 있는 생각을 내가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작가와 제목을 듣고 듣다가 이제야 읽게 된 책.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곧 세상에 홀로 남을 이 아이가 겪게 될, 종류와 정도를 가늠 못 할 폭력과 곤궁을 떠올렸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골몰하는 거야말로 무의미하나 가능성만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었으며,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가혹하고 비참한 일인지를 저울질하다가 결국 이 아이에게 삶이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더 늘리는 일에 불과하다는 결론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이 아이의 앞날은 뜨거운 물에 뿌려진 한 줌 설탕의 운명만큼이나 명백해 보였다.

비좁은 세상을 포화 상태로 채우는 수많은 일들을 꼭 당일 속보로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 없고 속도를 내면화하여 자기가 곧 속도 그 자체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아다지오와 같은 삶. 그 어떤 행동도 현재를 투영하거나 미래를 예측하지 않고 어떤 경우라도 과거가 반성의 대상이 되지 않으니 어느 순간에도 속하지 않는 삶이었다.

노인의 마음은 해토머리의 잔설처럼 녹아내렸다.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살아줬으면 좋겠다니! 곤은 지금껏 자신이 들어본 말 중에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예쁘다‘가 지금 이 말에 비하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폭포처럼 와락 깨달았다. 언제나 강하가 자신을 물고기 아닌 사람으로 봐주기를 바랐지만 지금의 말은 그것을 넘어선,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것만 같았다.

그 불안정함과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이 마음과 앞으로의 운명에 확신이라곤 없다는 사실뿐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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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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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나라, 도시를 여행하며 정세랑 작가 자신의 이야기와 작품 탄생의 뒷이야기 등을 담은 에세이.

여행은 늘 그렇듯 계획대로만 진행되진 않는다.
새롭고 경이로우며 매 순간 설레지만, 낯선 곳에서 긴장도 놓지 않아야 하는 법.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당시 당황스러웠던 경험도 추억으로 미화되어 ‘역시 집이 최고‘지만 우리는 또 여행을 떠나는 것 같다.

여행하며 눈에 보이는 세상은 아름다운데, 낙담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반인륜적인 뉴스는 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려오는지.
이 책의 제목 앞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가 생략되어 있지 않을까.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여행 전 잔뜩 기대하며 설레고, 여행 중엔 충만함이 가득 차고, 여행 후엔 상실감이 찾아오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작가와 함께 걷고 있었다.
작가의 추천 여행지와 맛집, 여행지에서 떠올리는 책을 나의 리스트에 올리는 일은 덤이다.
책을 덮은 지금 약간의 여행 후유증이 느껴진다.
여행 가고 싶다.

어쨌건 좋아하는 것을 열렬히 좋아하는 편이고, 새로 좋아할 만한 것을 만날 준비가 항상 되어 있기도 해서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뭔가 힘든 일을 만나 마음이 꺾였을 때 좋아할 만한 대상을 찾으려고 하면 이미 늦은 감이 있다. 괜찮은 날들에 잔뜩 만들어 두고 나쁜 날들에 꺼내 쓰는 쪽이 낫지 않나 한다. - P41

세계는, 인류는, 문명은 순식간에 백 년씩 거꾸로 돌아가기도 하고 그럴 때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견뎌야만 한다. - P47

지구는 45억 년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결국 항성과 행성의 수명이 다하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을 텐데, 우리는 짧은 수명으로 온갖 경이를 목격하다가 가는구나 싶었다. 경이를 경이로 인식할 수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특별해질 것이다. 덧없이 사라진다 해도 완벽하게 근사한 순간들은 분명히 있다. - P75

소소한 것, 언뜻 무용해 보이는 것, 스스로에게만 흥미로운 것을 모으는 재미를 아는 사람은 삶을 훨씬 풍부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수집가만큼 즐거운 생물이 또 없고 수집가의 태도는 예술가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항상 다니는 길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 자신이 사는 곳을 매일 여행지처럼 경험하는 사람들이 결국 예술가가 되니까. - P95

마음속의 저울이 잘 작동하는 사람들과만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것 같다. 마음속의 저울은 옳고 그름, 유해함과 무해함, 폭력과 존중을 가늠한다. 그것이 망가진 사람들은 끝없이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힌다. 사실 이미 고장 난 타인의 저울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저 내 저울의 눈금 위로 바늘이 잘 작동하는지 공들여 점검할 수밖에. - P107

메모리얼파크 바깥에는 그날 순직한 구조대원들을 기리는 기념물이 있었다.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도록 닦는 사람은 사실 먼지보다 망각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 공동체가 죽음을 똑바로 애도하고 기억하고 전하지 않으면....... 죽은 자들을 모욕하지 않는 방향으로 기억을 단단히 굳히지 못하는 공동체는 결국 망가지고 만다. - P116

필수적인 휴식이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고 일부에게만 주어지고 있는 것 같다. 누구나 당연히 인간적인 휴식을 누릴 수 있는 사회는 요원해 보이고, 혹사와 착취는 종종 근면과 편의의 표면을 하고 있어 구분을 하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듯하다. 모두가 쉴 때 쉴 수 있게, 일하다 병들거나 죽지 않게 조금씩 불편해지는 것도 감수하고 싶은데 변화는 편리 쪽으로만 빠르고 정의 쪽으로는 더뎌서 슬프다. - P150

여행한 공간이 늘어나고 또 늘어나면 정보를 건질 그물망이 촘촘해져서 책이 훨씬 재밌어지는 게 아닐지, 그렇다면 지금껏 놓친 정보는 또 얼마나 많을지, 종종 허술하게 흘려보냈을 반짝임들을 안타까워한다. - P220

좋아하는 대상을 정교하게 좁혀나가는 데는 특별한 즐거움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사람 내 작가야, 내 화가야, 그 그림 내 소유는 아니지만 내 그림이야....... 모호함을 덜어내고 확신을 보석처럼 꽉 쥐는 일의 충족감이 있었다.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이 쉬워진 세상이지만, 좋아하는 것이 많은 사람이 분명 더 행복하지 않을까? - P362

영영 비산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이 책의 장면들은 흩어져 사라진 것들 뒤에 남은 잔여니까. 모래 그림을 보존하려는 노력처럼, 사람들이 기록하고 또 기록하며 포착할 수 없는 것들을 포착하려 애쓰는 게 좋다. 그러다 보면 아주 희귀한 알갱이들이 전해지기도 한다고 믿는다. -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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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기쁨 - 책 읽고 싶어지는 책
김겨울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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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독서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책.
이런 책을 읽고 나면 나도 더 많은 책을 읽고 싶어서 마음이 급해진다. 웬지 책장 정리도 해야될 것 같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 세상에 읽을 책이 늘어난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래도 허겁지겁 읽어치우기 보다는 하나씩 꼭꼭 씹고 되새기며 읽고 싶다. 책 한 권에서 단 하나라도 배우고 기억하기 위해서.

덧붙여 이 책을 읽고 나면, 읽는 속도로는 절대 따라가지도 못 할 속도로 책을 사제끼는 나의 소유욕을 정당화할 수 있는 변명(?)을 찾을 수 있고, 책장 가득한 새 책들의 시선이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다. 에휴.

굳이 철학까지 가지 않더라도 책을 읽는 일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추상 근육‘을 쓰는 행위다. 여러분이 책을 읽을 때에만 느끼는 피곤함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인간에게만 주어진 이 능력을 쓰는 데에 익숙해질수록 책을 읽는 일이 점점 더 즐거워질 것이다. 머릿속에 창조한 세계가 점점 더 풍요로워지고, 지식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빨라지며, 자신과 책의 의견을 교환하는 폭이 넓어진다. 이 능력은 한 번 획득하면 쉽게 퇴보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책은 가장 지속성이 높은 유희 활동이기도 하다. - P55

또한 어렵지만 좋다고 평가되는 책에 도전하면서 이게 왜 좋은지를 탐구하고 이해하는 과정도 진행중이다. 아직 책을 읽을 수 있는 수많은 날이 남아있고, 그 시간 동안 더 좋은 책을 깊이 향유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다.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에게 좋은 기준을 세울 것이고, 이건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있는 과정이 아니다. 인생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 P124

나의 방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책장을 바라볼 때, 수천 년 전의 인간이 남긴 말부터 지금의 인간이 그 말을 해석한 책까지 있는 광경을 바라볼 때, 나는 인간이란 죽으며 한낱 활자만을 남길 수 있는 존재임을, 동시에 그 활자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임을 상기한다. 책에 대한 소유욕은 그래서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자 애정의 발로다. 구체적인 하나의 인간에 대한 소유욕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의 정신성에 대한 소유욕인 셈이다. - P137

그렇다면 정신성을 소유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소유는, 언제든 내가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언제든 그 세계가 나를 재구성함을 허락하는 행위다. 여기서의 세계는 단순히 지금 살고 있는 세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이 파악해온 역사 전체, 탐구해온 우주 전체, 서로 다른 대륙에서 벌어진 사건들, 그 사건을 체험한 서로 다른 기억 모두를 의미한다. 이 모든 기억과 사건과 원리가 세상을 굴려갔음을 잊지 않고, 언제든 나를 침범할 수 있도록 늘 마음을 열어두는 것이다. 책에서 필요한 정보만 파악하고 말 거라면 굳이 소유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사는 내내 책의 영향을 허락할 셈이라면 가지고 있는 수밖에는 없다. 가지고 있다면, 읽었던 책의 책등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어떤 메시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 데에 책만큼 좋은 수단은 없다. 그저 책장에서 책을 뽑아 펼치면 된다. - P138

진부한 얘기지만, 많이 읽고 적게 읽고보다 중요한 것은 책을 얼마나 ‘충실하게‘ 읽었는가 하는 것이다. 천 권을 읽어도 읽는 내내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면 슬픈 일이다. 천 권을 읽으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셨을 텐데, 이왕 오래 할 거 좀 즐겁게 하시지. 책에 집중하고, 책과 대화를 나누고, 책에게 질문하고, 반박하고, 때로 귀퉁이를 접고, 밑줄을 치고, 메모를 하는 독서가 조금 더 충실한 독서일 것이다. 밑줄을 치고 메모를 하는 것이 귀찮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책에게 말을 건다는 게 중요하다. 말을 많이 걸면, 책은 꽤 믿을 만한 인생의 친구가 되어 준다. - P161

내가 살면서 책에서 얻은 가장 큰 기쁨의 순간들은 좋은 책을 천천히 읽는 시간들에 있었다. 어려운 개념을 이해하고, 감정에 깊이 공감하고, 타인의 이야기에 위로받고,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고, 작가의 농담에 껄껄 웃고, 이런 순간들을 속독으로도 만날 수 있는지 모르겠다. - P164

사람들이 책을 더 많이 읽었으면 한다. 책이라는 좋은 친구를 다들 곁에 두고 살기를 바란다. 책을 읽음으로써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추상적인 사고를 하고, 몰랐던 것을 배우고, 혼자 있는 시간을 풍요롭게 보내길 바란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새로운 관점을 접하는 계기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읽으면 읽을수록 일을 책이 까마득히 많아지는 그 역설을 공감하길 바란다. 어떤 계기로 읽게 되든, 책은 일단 친해지기만 한다면 평생 배신하지 않는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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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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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어린이에 대해 얼마나 편협한 생각으로 살았는지, 어느새 몸만 자란 어른의 생각으로 굳어져 있는 나를 발견하고 읽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도 어린이였던 적이 있었는데...
한 명의 인격 존재인 ‘어린이‘를 당연히 어른보다 부족한 0.5의 사람으로 생각해왔던 것 같다.
추천사에도 그랬듯이 주변에 어린이가 있든 없든, 어린이였던 적이 있는 어른으로서 이 책은 모두가 읽어야 한다.
어린이와 무관한 사람은 없는 것이다.
따뜻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어린이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글에 생각지도 못 했던 위로를 받는 건 그 때문인 것 같다.

버스를 타고 내릴 때, 문을 열고 닫을 때, 붐비는 길을 걸을 때나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머뭇거릴 때 어린이에게 빨리 하라고 눈치를 주는 어른들을 종종 본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간단한 일이라 어린이가 시간을 지체하면 일부러 꾸물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렸을 때 기다려주는 어른을 많이 만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 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부분은 시간의 흐름만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이에게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이 보다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기다려 주는 순간에는 작은 보람이나 기쁨도 있다. 그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와 어른은 함께 자랄 수 있다.

어린이의 허세는 진지하고 낙관적이다. 그래서 멋있다. 결정적으로 그 허세 때문에 하윤이가 옥스퍼드(또는 케임브리지)에 갈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바다 건너까지 유학을 가겠는가. 어린이의 ‘부풀리기‘는 하나의 선언이다. ‘여기까지 자라겠다‘고 하는 선언.

어린이에게 ‘착하다‘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세상이 거칠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착하다는 말이 약하다는 말처럼 들릴 때가 많아서이기도 하다. 더 큰 이유는 어린이들이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 두려워서다. 착하다는 게 대체 뭘까? 사전에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고 설명되어 있지만, 실제로도 그런 뜻으로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어른들의 말과 뜻을 거스르지 않는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니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하는 건 너무 위계적인 표현 아닌가.

‘착하다‘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어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어린이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 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어린이도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며, 품위를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으로서 어린이도 체면이 있고 그것을 손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도 남에게 보이는 모습을 신경 쓰고, 때와 장소에 맞는 행동 양식을 고민하며,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 무가치한 두려움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성범죄에 대한 관용 없는 판결과 완전한 법 집행뿐이다. 단 한 명의 성범죄자도 빠짐없이 죗값을 치러야 한다. 가해자는 어떤 요행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곳곳에서 날마다 확인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어린이를 피해자로도 가해자로도 키우지 않을 수 있다.

가해자가 성장 과정에서 겪은 일을 범행을 정당화하는 데 소비하는 것은 학대 피해 생존자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학대 대물림‘은 범죄자의 변명에 확성기를 대주는 낡은 프레임이다. 힘껏 새로운 삶을 꾸려 가는 피해자들을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예비 범죄자‘로 보게 하는 나쁜 언어다. 가정에서 아이를 학대해선 안 되는 이유는 아이를 아프게 하고, 존엄을 무너뜨리고,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악‘이라는 개념 말고 다른 것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악행의 기승전결은 알고 싶지 않고, 합당한 벌을 받기를 바랄 뿐이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작다. 그래서 어른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큰 어른과 작은 어린이가 나란히 있다면 어른이 먼저 보일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가 어른의 반만하다고 해서 어른의 반만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아무리 작아도 한 명은 한 명이다. 하지만 어떤 어른들은 그 사실을 깜빡하는 것 같다.

우리가 어린이를 위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린이 스스로 그렇게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안전한 세상은 결국 모두에게 안전한 세상이다. 우리 중 누가 언제 약자가 될지 모른다.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한다. 나는 그것이 결국 개인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제 어린이에게 하는 말을 나에게도 해 준다. 반대로 어린이에게 하지 않을 말은 스스로에게도 하지 않는다. 이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래야 나의 말에 조금이라도 힘이 생길 것 같아서다. 일의 결과가 생각만큼 좋지 않을 때 괜찮다고, 과정에서 얻은 것이 많다고 나를 달랜다. 뭔가를 이루었을 때는 마음껏 축하하고 격려한다. 반성과 자책을 구분하려고,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 덕분에 나는 나를 조금 더 잘 돌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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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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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볼 꼭지가 많았던 소설.
기계와 클론과 인간.
그 모든 것의 끝.
끝이 있기에 의미있는 현재.
끝이 없는 세상.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팔, 다리, 뇌의 일부 혹은 전체, 심장이나 폐를 인공 기기로 교체한 사람을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 P69

그때 이미 선이에게는 남다른 사생관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의식과 감정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는 인간이든 휴머노이드든 간에 모두 하나로 연결되고 궁극에는 우주를 지배하는 정신으로 통합된다고 생각했다. 선이는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부터, 우주의 모든 물질은 대부분의 시간을 절대적 무와 진공의 상태에서 보내지만 아주 잠시 의식을 가진 존재가 되어 우주정신과 소통할 기회를 얻게 된다고 여겼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의식이 살아 있는 지금, 각성하여 살아내야 한다고 했다. 그 각성은 세상에 만연한 고통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 인식은 세상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개개의 의식이 찰나의 삶 동안 그렇게 정진할 때, 그것의 총합인 우주정신도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그 무렵 선이가 만트라처럼 외우던 말은 이것이었다.

"우주는 생명을 만들고 생명은 의식을 창조하고 의식은 영속하는 거야. 그걸 믿어야 해. 그래야 다음 생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거야.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 P100

이 우주에 의식을 가진 존재는 정말 드물어요. 비록 기계지만 민이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 감각과 지각을 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어요. 고통도 느꼈지만 희망도 품었죠. 이 우주의 어딘가에서 의식이 있는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은 너무나 드물고 귀한 일이고, 그 의식을 가진 존재로 살아 가는 것도 극히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동안 존재는 살아 있을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어요. - P151

여기서 구조되더라도 육신이 없는 텅 빈 의식으로 살아가다가 오래지 않아 기계지능의 일부로 통합될 것이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더이상 묻지 않아도 되는 삶. 자아라는 것이 사라진 삶. 그것이 지금 맞이하려는 죽음과 무엇이 다를까?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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