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에 채널을 돌리다가 <치즈인더트랩>이란 드라마를 잠깐 보게되었다. 그 잠깐동안 본거라 전체적인 내용파악은 어려웠지만 김고은은 박해진과 연인사이였고 서강준이 김고은을 좋아했지만 좋아해서는 안되는 사이인 것 같았다. 김고은을 위한다면 김고은의 곁을 떠나야 하는게 서강준의 역할인듯 했는데, 김고은이 서강준의 집앞에 나타난 것이다. 김고은의 엄마가 서강준에게 김치를 갖다주라 하셨기 땜시롱. 그래서 그걸 건네주고 가려는데 서강준이 쌀쌀맞기 그지없고 눈도 마주치지 않고 들어가버렸다. 김고은을 외면하고 집에 돌아온 채로 서강준의 마음은 불편하기 짝이 없어 잠깐 멈칫하고 현관에 서있다가 눈에 띄는 목도리를 가지고 얼른 뛰어나가서는 김고은의 목에 둘러준다. 날이 춥다고, 이거 하고 가라고.
그 장면을 보는데 단번에 '젊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 젊구나. 그 장면의 어떤 지점에서 젊다는 생각을 하게된건지 모르겠다. 바로 뒤쫓아 뛰어나가는 것 때문에? 목도리를 둘러주는 것 때문에? 사실 지금 내 또래의 사람들이라면 바로 뒤쫓아 뛰어가는 일을 할까, 귀찮아서 안하지 않을까, 굼떠서 결국은 늦지 않을까, 무릎이 아파 뛸 수 없지 않을까, 하면서도 내가 놓치기 싫은 상대라면 뛸것 같기는 했다. 그러니까 서강준이 김고은을 향해 다시 뛰어가는 그 장면이 지금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 아닌데도 나는 그 장면에서 젊다, 그래서 너무 부럽다는 생각을 하게된거다. 젊다, 부럽다, 좋겠다.
버락 오바마의 《약속의 땅》은 원서로는 무지하게 어렵고 번역서로는 재미가 별로 없다. 사실 어린 시절 책에 파묻혀 사는 얘기라든가 처음 미셸 오바마를 만나는 부분등은 재미있긴 했는데 분량이 지나치게 적다. 만약 그런 얘기들이 좀 더 길었다면 책이 더 재미있고 쉽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이렇게 어린 시절 이야기 여기서 나와버렸고 미셸 만나서 결혼도 이 앞에서 다 해버렸는데 대체 이렇게나 두꺼운 이 책의 뒷부분에서는 더 무슨 얘기를 한다는걸까. 어쩐지 재미없을 것 같은 확신이 강하게 든다.
아무튼 지금 읽는 부분에서는 버락 오바마가 미셸을 만났다. 직장의 상사로 만나서 미셸은 오바마에게 복사기의 위치를 알려주고 점심도 같이 먹어주고 그가 적응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하는데, 그러다보니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업무적인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나중엔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면서 친구이자 연인이 된다. 그들은 결혼을 한다. 결혼을 하고 오바마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실무를 뒤로 미룬 뒤, <프로젝트 보트Project Vote!>라는 유권자 등록활동을 한다. 미셸은 비영리 청년 리더십 프로그램을 이끌게 되었고 둘은 시민단체와 자선단체 사업에 관여한다. 오바마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미래계획에 대해 미셸에게 얘기했었다. 지역사회 조직 사업에 몸담을 것이고 법률회사도 다닐 것이지만 기회가 생긴다면 공직에 출마할 생각이라고. 미셸은 놀라지 않고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하라고 그를 격려해준다. 나는 이 부분에서 또 와 젊다, 라고 생각했다. 학업을 마치고 어떤 일을 할 것인지 계획하고 나는 앞으로 이걸 해볼까 해, 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들이, 사실 지금의 나라고 해서 하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너무 젊게 느껴지는 거다. 미래가 앞으로 쭉 뻗어있고 그것을 앞으로 자기가 그려나갈 거라는 생각에 함께할 상대에게 이야기하는 이 장면들이 너무나 젊게 느껴지는 거다. 그래서 부러웠다. 나야 시간을 돌린대도 어차피 대통령 할 사람은 아니지만, 거대한 꿈을 꿀 사람은 아니지만, 나는 지역 사회를 위한 활동을 할까 해, 시민단체의 활동을 하고 싶어, 공직에도 나가고 싶어, 라는 생각들로 자신의 미래를 꿈꾸는 그와 그 얘길 듣는 상대의 이 장면이 정말이지 너무나 젊게 느껴지는 거다.
그런 한편 미셸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몇 번이나 공직에 출마할 사람과는 연인관계가 되지 않을 것이고 또 나 역시 공직에 나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데 미셸은 완전히 나랑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나. 물론 그녀와 나는 태어난 곳부터, 환경부터가 달랐지만, 자신이 만날 사람이 대통령이 될 줄 어떻게 알았을까. 만약 나였다면 내가 만나는 상대가 나는 기회가 된다면 공직에 나갈까 해, 라고 했을 때 상대에게 어떻게 말했을까. 아마도, 그렇다면 나랑은 헤어지는 게 너에게 좋아, 라고 하지 않았을까. 나는 털면 먼지가 나는 사람이야, 먼지가 제법 많이 나오는 사람이지, 그러니 너가 흠없는 사람이어도 나 땜에 시끄러워질지도 몰라, 그러니 니가 공직에 나간다면 나랑 헤어지는게 좋아, 멀리서 너의 행복을 빌어줄게 세이 굿바이, 했을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미셸의 삶이 더 궁금해지는 거다. 내가 젊은 시절 열심히 일하다 만나 사랑에 빠진 남자가 공직에 진출할 수도 있다고 했을 때 상대를 응원할 수 있으려면, 그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신감과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공격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런것들을 견딜 수 있을만큼 충분히 강한 사람이었던 게 아닐까. 오바마를 처음 만났을 때의 미셸은 이십대였는데, 나의 이십대와 비교해보니 너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도대체 뭐하고 살았나. 나는 내 미래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설계하지 못한 채로 살았었는데. 지금이라고 딱히 뭔가 더 하고 있는 건 없지만.
공직에 나가고 싶다, 그럴 것이다, 라고 상대가 말했을 때 응원하는 것까지는 해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런데 그 사람이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와, 이건 또 어떻게 감당하나 싶다. 오바마가 처음 주상원의원 자리에 출마했을 때, 미셸은 자기 일을 하면서도 토요일아침이면 지역을 돌며 유권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선거활동을 했다.
한번은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는 건 말이지, 토요일 오전을 이렇게 보내려면 자기를 정말로 사랑해야 한다는 거야." -책속에서
주상원의원일 때 이랬다면 대통령 선거일 때는 미셸은 도대체 자신의 남편이 하고자 하는 일을 응원하고 격려하고 지지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노력을 했을까. 내가 내 꿈이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꿈을 위해 행동을 취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게 아니다. 마땅히 해야지, 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게 아니니까. 공직에 나갈거야, 라는 말은 그 안에 '결국은 대통령까지 할거야'를 포함한 거였을까? 나는 아마도 스케일이 작은 사람이라 상대가 그 말을 했을 때 '오, 그러다 대통령?' 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대통령은 너무나 커서, 나로서는 겁을 집어먹었을 것 같다. 미셸에게는 그 시간들이 어땠을까. 오바마의 책을 읽으면서 오바마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얘기하고 그리고 자신의 젊은 시절을 얘기하고 공직에 나가는 걸 얘기할 때, 나는 그의 젊은 시절에 만나 그를 응원하고 격려하며 옆에 있어주었던 미셸이 너무 궁금해지는거다. 하는수없이 나는 어제부터 미셸 오바마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은 진작에 준비해둔 터였다. 나란 사람...
버락 오바마는 자신이 결국은 대통령이 될 거라는 걸 알았을까? 아직 오바마의 책 초반이라 오바마가 언제 대통령 꿈을 꾸게 되었는지, 될 거라고 짐작을 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걸 몰랐음이 틀림없다. 공직에 나가려고 해요, 라고 어머니에게 말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몸이 많이 아프셨고, 그리고 주상원의원에 당선되는 것도 보지 못하신채 돌아가셨다. 남편 없이 혼자서 자식들을 키우셨는데, 그렇게 키운 아들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고야 마는데, 그런데 그걸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니 너무 안타까웠다. 전자책으로 이 부분을 듣다가 눈물이 핑돌았다. 사람은 어차피 누구나 죽는다지만, 그래도 혼자 꼿꼿하게 자식들 키워왔으니 그렇게 키운 아들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걸 보고 가셨더라면 좋았을텐데. 자식으로서의 오바마를 보는 것도 안타까웠다. 자신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위해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을 그 누구보다 어머니께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을까.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지금의 오바마가 될 수 있었으니 어머니 제가 이렇게 되었어요, 라는 걸 누구보다 어머니께 보여드리고 싶었을텐데. 그게 너무 안타까운 거다. 가장 자랑스러운 모습 보여드리고 싶었을텐데.
나는 예전부터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오바마라면 그 누구보다 어머니께 자신이 대통령이 된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을 것 같았다. 누군가 어머니께 당신의 아들은 미래에 미국의 대통령이 됩니다, 라고 말해주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러나 그 당시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아들이 미국의 대통령이 될지. 아마 오바마 자신도 몰랐겠지만. 그게 너무나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마는 참 행운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이 좋은 사람. 그것은 대통령이 되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되고자 했을 때 그리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 옆을 지켜주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어머님은 돌아가셨지만 아내와 아이들이 그 옆에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가. 때때로 내가 잘 사는 것,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자 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 지켜봐주는 사람이 없다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도 그만큼 줄지 않을까. 굳이 그런 꿈을 꾸지 않게 되는건 아닐까.
오바마도 미셸도 나보다 나이가 많다. 내가 읽는게 지금 그들의 젊은 시절이니만큼 와 젊다, 하며 부러워하는데, 그 젊은 시절은 내게도 있었다. 다만, 나의 젊은 시절은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젊음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대학 때는 수업 안들어가고 만화방 갔던 것,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했던 것 생각나고, 나쁜 연애를 했었고, 시간을 낭비했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지금에 와서야 그런건데, 오바마나 미셸 처럼 자서전을 쓴다면 나는 아마 솔직하지 못할 것 같고, 그렇다면 이십대에 쓸 말이 별로 없을 것 같다. 이십대의 나는 좋은 남자를 만나지도 못했다. 어리석었고 멍청했다. 젊음은 젊은이라는 자체만으로도 부럽지만, 내 젊은 시절은 유독 못났었기 때문에 이토록이나 잘난 사람들의 젊음이 부러운건지도 모르겠다. 미래가 활짝 열려있는 삶이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부러운지도 모르겠다. 왜 어떤 사람은 공직에 나갈까 해, 라고 말하는 사람과 연인이 되는데 나는 인생에서 털어내버리고 싶은 나쁜 연애를 했을까. 왜 어떤 사람은 공직에 나갈까 해, 라는 꿈을 꾸었을 때 나는 맨날 술이나 퍼마시고 살았나. 오바마 부부의 젊은 시절을 부러워하는만큼 내 젊은시절이 너무나 안타깝다. 더 공부하는 젊은 시절이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런데 이렇게 이천번 말한들 무엇하나.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데.
젊은 사람들이여, 공부를 열심히 하고 미래를 설계하며 살아요. 나처럼 살지 말고...
도대체가 끝나지 않는 긴 문장을 써서 읽기 힘들게 만든 오바마 책이지만, 그래도 읽는데까지 읽어보겠다. 미셸을 아마도 먼저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오바마 궁금해서 읽기 시작한건데 읽다보니 미셸이 더 궁금해졌다. 사람 일은 참 알 수 없다니까?
보부아르 읽다가 버락 읽다가 미셸 읽다가 하다보니 도처에 잘난 이들 투성이라 조금 위축되는 것도 같지만 쫄지 않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의 이십대 내다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삼십대부터는 좀 괜찮았어. 지금도 좋고.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