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투쟁] 재생산 거부

그런데 무엇보다도 세계의 모든 거주민이 전적으로 돈에 의존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를 얼마나 누릴까? -P.402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의 《페미니즘의 투쟁》을 다 읽었다. 읽는 내내 그리고 다 읽고나서도 너무 좋고 뭔가 막 내 안에서 꿈틀거림이 느껴진다. 7월이었나,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읽을 때는 도대체 이게 지금을 살아가는 여성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어떤 도움이 되나 싶어 물음표 천개 되었었고 그래서 굳이, 부러 의미를 찾아야만 했다. 내가 이 책을 읽는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영향을 미칠것이다, 하는. 그렇지만 버틀러의 주장들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었고(드랙이 젠더정체성을 전복하는 대표존재라고 하는 거에 나는 읭??????????????? 되어버림 -.-), 주디스 버틀러의 이 책 안에 담긴 생각과 주장들이 현재의 여성들에게 도대체 어떻게 가 닿아 어떤 영향을 주느냐고 물었을 때 삶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것이다. 그런데!!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읽으면서는 완전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고 너무나 충만하게 충족되는 느낌인것이다.


1960-1970년대의 여성들의 살아남고자 하는 투쟁, 가사노동과 재생산노동을 거부하는 투쟁에 대한 기록을 읽을 때에도 지금의 현실과 비교하면서 읽는 것 자체로 흥분했었는데, 뒷부분은 뜻밖에 토지와 식량에 대해 얘기한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빈곤한 자들이 더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우리는 우리의 식량을 자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선진국의 대기업들은 살아남고자 하는 그들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들을 이야기해주는 거다. 이 지점에 대해서는 몇달전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였던 '마리아 미즈'와 '반다나 시바'의 책 《에코 페미니즘》에서도 읽었던 이야기라 쑤욱 쑤욱 잘도 들어왔다. 선진국의 대기업이 들어와 토지를 소유하고 그 땅의 사람들을 빈곤하게 만드는 일들, 화학 비료를 써서 건강을 해치고 식물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까지. 결국 그로 인해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일들.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는 이 일들에 대해 심각하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래서 반다나 시바를 만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의논하기도 한다.

















에코 페미니즘을 읽기 전에는 읽어야 할 것 같으니 읽어보자 라는 마음이었는데, 읽으면서 내가 에코 페미니즘의 영향을 생각보다 많이 받는다는 것에 내 자신에게 놀랐다. 나는 이 책의 공저자 중 한 명인 반다나 시바가 궁금해졌고, 나 역시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시작되었던 거다. 반다나 시바는 농장의 사람들과 땅을 지키며 농사 짓고 살고 있는 삶에 대해 얘기했었는데, 인간은 결국 그렇게 살아야하는게 아닌가 싶었던 거다. 그래서 반다나 시바 너무 궁금해져서 반다나 시바의 다른 책을 사놓았던 거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스트레스를 참아가며 아침에 눈을 떠 회사에 출근하고 월급을 받고 그 돈으로 책을 사고 술을 사마시고 여행을 다니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여기에서 살아남는 것이지 궁극적인 삶의 방향이라 할 수 있을까? 내 생애 어느 정도는 훌쩍 반다나 시바의 곁으로 가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에코 페미니즘을 읽으면서 했던 거다. 그런데, 꼭 굳이 거기까지 가서 살아야 하나?





'반다나 시바'가 잠깐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내일》을 친구로부터 소개 받아 보기 시작했다.





아직 다 보진 못했지만 초반에 디트로이트 사례가 나오는데,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의 책에서도 디트로이트는 언급된다.



아이비엠IBM 이 제3세계로 이전하고 슈퍼마켓들이 폐업하자 사람들은 남은 땅을 새롭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그 땅에는 생물학적으로 재배하는 작물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재배하던 것과는 다른 작물도 재배할 수 있었는데, 시간을 새롭게 활용하고 지역 내 보호 구역에 사는 아메리카 토착민과 새롭게 관계를 맺음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과거 자동차 산업의 수도였던 디트로이트 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고, 샌프란시스코 역시 마찬가지였다. <샌프란시스코 도시 농업연합>회장인 모하메드 누루는 "우리는 하나의 개별적인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인 순환 구조를 다루고 있다"고 말했다. -P.258



《내일》에는 지역 농업의 사례들이 나온다. 어제는 잠깐 영국 토드모던의 <놀라운 먹거리>프로젝트에 대한 부분을 보게 됐다. '팜'과 '메리'는 지구환경 강연회에 갔다 익히 알고 있던 자원고갈 문제에 대해 듣게 됐고, 우리가 지구를 구하는 거창한 데까지 나아가진 않더라도 우리 동네에서 시작해 우리 아이들의 먹거리 문제에 대해서는 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 라는 생각을 하게됐고 그래서 혹시 같이할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어 주민회의를 열었는데 60명이나 참석했다는 거다. 팜과 메리는 한 다섯명 쯤 오지 않을까 했는데 60명이나 와서 너무 놀랐다고 했다. 이들은 거리마다 정원과 텃밭을 만들기로 한다. 병원, 기차역, 경찰서 앞, 길과 길 사이, 공터를 텃밭과 정원으로 만들어서 누구든 먹고 싶으면 가져가도 된다고 부추와 당근 각종 허브 옥수수등의 식물을 잔뜩 심어둔다. 이걸 보면서 그래, 왜 나는 반다나 시바가 있는데까지 가겠다고 생각한건가..역마살 때문인가.. 그냥 동네에서 시작해도 되지 않나 싶은 거다. 아니, 거리를 돌아다니는데 그게 어디든 텃밭이 있고 사람들이 경찰서 앞에 야채 따러 가는거다. 너무 좋은것입니다.



반다나 시바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던 나는 시간이 지나 '장 지글러'로부터도 강한 인상을 받게 되는데, 그의 책 《인간 섬》을 읽고 나서였다. 그 책을 읽고 나서는 인생의 몇 년쯤은 난민들을 위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나 인생의 몇년쯤은 이렇게 몇년쯤은 저렇게 하는게 너무 많아서 절대 죽으면 안된다. 할 게 너무 많아.. 여튼 그래서 그의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도 뒤늦게 사두었었는데, 어제 페미니즘의 투쟁을 다 읽고 덮은 뒤, 책장 앞으로 가 이 책을 찾아 꺼내 오늘 아침부터 바로 읽기 시작했다.


















일전에 지구 반대편의 굶주리는 아이들을 위한 기부를 하자는 광고를 보고 나도 모르게 '왜 저렇게 굶주리는 아이들이 많을까'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했었고 그때 옆에 있던 여동생이 '그러게' 하며 나랑 같이 씁쓸해하고 있는데, 그때 우리와 함께 있던 남동생은 "큰누나가 너무 많이 먹어서 그래" 라고 말해서 갑자기 빵터지게 했더랬다. 빵터졌는데, 그때 뭔가 웃고 지나가기 보다는 그 광고와 그 순간이 강하게 남아, 그때부터 나는 유니세프에 정기후원을 시작했더랬다. 남동생의 말은 그 순간에 우리를 평소처럼 웃게한 말이었지만 그래서 나도 깔깔 웃었지만, 그런데 그 후에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는거다. 나 때문이야, 라고 할 순 없겠지만, 그러나 '나 때문이 아니야' 라고도 할 수 없지 않은가.



왜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는지는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와 반다나 시바가 말해주고 있고 장 지글러도 말해주고 있다.


아무튼, 살아서 할 게 많다, 내가.



최근에 읽었던 페미니즘 책들 중 가장 좋았다.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매우 두꺼워 들고 다니며 읽기 힘들었지만 읽는 내용 자체가 어렵지 않았고 문장도 어렵지 않아 또 좋았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이대로 살아서는 안된다고,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굶어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다른 삶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글로 써준다니, 어쩌면 지구가 계속 이렇게 유지되는 건 그런 사람들 덕이 아닌가 싶다. 미래가 희망적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우리 손에 달렸다면, 우리가 그렇게 하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 매우 좋은 책읽기였고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만세만세 만만세다.



여러분 페미니즘의 투쟁을 읽으세요!!



우리에게도 이동 방목의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농촌 사회와 만나려고 길을 나선다. 이제 외투를 벗어던지고 유럽 중심, 인간 중심에서 멀어지자. 조금 더 동물적인 존재로, 시골스러운 것과 윤리적인 것 사이로 나아가자. -P.399







1차 녹색 혁명은 농업 근대화로 전 세계 기근을 해결하겠다는 엄청난 공약을 내걸었으나 실제로는 기근을 양산하여 많은 이들을 굶주림에 빠뜨렸다. 질이 좋은 대규모 땅을 강제 수용함으로써 기근이 발생했고, 강제수용에 앞서 종종 군사적 개입이 있기도 했다. - P402

경작할 땅이 없으면 영양가 있는 음식도 없다. 영양가 있는 음식이 없으면 신체도 없다. 신체는 죽음을 맞는다. 이 문제에 맞서지 않고는 생명정치에 뛰어들 수 없다. 우리는 ‘대탈출‘이 일어나는 상황에서조차 여전히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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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21-09-30 0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는데 “읽으세요!!” 소리 쳐서 정신 차렸어요 ㅎㅎㅎㅎ

다락방 2021-10-01 16:27   좋아요 0 | URL
정신차려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되셨나요? ㅋㅋㅋㅋㅋ

오거서 2021-10-01 16:33   좋아요 0 | URL
정신 차리고 36계를 행하였는데 불러 세우시는군요 ㅋㅋㅋㅋ

vita 2021-09-30 10: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399쪽 인용하신 구절 너무 좋아서 밑줄 박박 쳐놨어요. 퇴직하고난 후 다락방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막 궁금하고 막 기대되고 그럽니다.

다락방 2021-10-01 16:28   좋아요 0 | URL
퇴직 후의 삶을 살고 싶어서 얼른 퇴직하고 싶어요. 여기에도 가고 싶고 저기에도 가고 싶고. 저는 사실은 떠나고 싶은게 아닐까 싶어요. 익숙한 곳도 좋지만 낯선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크니, 저도 앞으로의 제가 어떤 삶을 살지 궁금합니다. 우리 서로의 삶을 계속 응원하며 지켜봐주도록 합시다!

독서괭 2021-09-30 10: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3년이나 여성주의책읽기를 해오신 다락방님께서 최근 읽었던 페미니즘 책들 중 가장 좋았다고 표현하시다니!! 꼭 읽어..아니 사두겠습니다..;;

다락방 2021-10-01 16:29   좋아요 1 | URL
내용이나 문장이 어려운건 아닌데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진 않거든요. 왜일까 골똘히 쳐다보니 한 페이지가 너무 커요. 그래서 글자수가 많은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주 좋은 책입니다, 독서괭님. 기회 된다면 읽어보세요!

미미 2021-09-30 11: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 읽은 페미니즘 책 중, 아니 사실 모든 페미니즘 책 중에서 가장 좋았어요~♡ 달달 외우고 입력하고 싶은 내용들인데 (이건 가능하진 않겠지만) 전태일 사건이 있던 우리나라처럼 동시대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투쟁의 역사가 있었다는것도 놀라웠고 그녀 덕분에 그런 통찰,역사를 훑을 수 있었단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이 귀한 책을 경험하도록 이끌어주신 다락방님께도 감사해요~♡😍

다락방 2021-10-01 16:31   좋아요 2 | URL
전 앞에 가사노동 거부, 재생산노동 거부 의 투쟁들 만으로도 오오 하고 좋았는데 갑자기 땅과 식물 얘기 나와서 놀랍고 좋더라고요. 제가 그런 이야기를 좋아할거라고는 저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건 아닐까,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라서 진짜 너무 좋아요, 미미님! 언제나 지치지 않고 함께 해주셔서 감사해요!!

붕붕툐툐 2021-09-30 17: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저는 10월에 제 2의 성 읽고 11월에 이 책 읽을까 해요~ 내 맘대로!ㅎㅎㅎㅎㅎ

다락방 2021-10-01 16:31   좋아요 2 | URL
오, 그것도 역시 베리베리 굿입니다. 툐툐님과의 제2의 성이 기다려지는군요!! 움화화화핫

책읽는나무 2021-09-30 19: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어요.저도 11월에 이 책을 읽어봐야 겠어요.

다락방 2021-10-01 16:32   좋아요 4 | URL
네, 책나무 님. 이 책은 정말 정말 누가 읽어도 좋을 책이에요.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붕붕툐툐 2021-10-01 17:51   좋아요 2 | URL
책읽는나무님이랑 같이 읽으면 되겠어요!!😊

책읽는나무 2021-10-01 19:21   좋아요 3 | URL
붕붕툐툐님...같이 읽도록 해요^^
나머지 공부 같은 느낌이 약간 들긴 하지만,여러 사람들이 극찬하는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테니 읽어봐야겠죠.
압박하는 사람 없다면 저는 또 흐지부지 11월을 넘길지도 모를텐데...누군가 같이 걸어가 준다면 외롭지 않아 새로운 목표가 생길 것 같아요^^

붕붕툐툐 2021-10-01 21:09   좋아요 3 | URL
오~ 나머지 공부 너무 정겹고 좋은데요? 책읽는나무님이랑 나머지 공부하는 맘으로 열심히 읽어볼게요! 근데 그러려면 일단 제2의 성 10월에 다 끝내야할텐데.. 이것부터 걱정이..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21-10-01 22:08   좋아요 2 | URL
아오 이분들 뭐야 ㅠㅠ 너무 좋잖아 ㅠㅠㅠ 제가 알라딘에 계속 있는 건 여러분 때문이에요 이 다정한 분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