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투쟁과 개입에는 대략 네 가지 주요 영역이 있다. 노동, 섹슈얼리티, 건강, 그리고 폭력이다. 그런데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이 영역들은 모두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타인을 위한 출산 및 재생산 노동의 기능으로 왜곡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가사노동의 중심 과업을 이루고 있었고, 가사노동이 대가 없는 노동이었으므로 폭력은 그런 노동을 훈육하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p.171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는 가사노동 분야의 여성학자라고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 《페미니즘의 투쟁》을 읽노라면 그녀가 다룬 것이 비단 가사노동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렷하고 날카롭게 페미니즘 전반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건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여성의 노동과 섹슈얼리티 건강 폭력 모두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불노동에 대해서 투쟁하는 여성들에 대한 흐름을 짚어주면서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고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또한 지금 읽는 2부에서는 에코페미니즘에까지 닿는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되는 것도 아니라고, 우리는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마리아로사 는 말하는거다. 그러다보니 기존에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에서 함께 읽었던 반다나 시바와 실비아 페데리치에 대한 언급도 이 책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나는 재생산을 마주한다.
여성은 또한 재생산을 대대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이 글에서 논의한 전반적인 문제 상황을 풀 수 있는 해답을 요구한다. 삶이란 견딜 수 없는 성적 위계질서 속에서 온통 노동하는 시간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재생산은 이와 같은 삶의 개념과 구조의 일부로서, 여성의 지속 불가능한 희생 위에서 구축된다. -p.189
자, 일단 재생산 이란 무엇인가.
우선 두산백과가 말하는 재생산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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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맑스 사전이 정의하는 재생산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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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을 하러 가기 위해서는 내가 먹고 입고 자는 과정들이 필요하다. 임금노동하는 자가 임금을 받기 위해 외부로 나갔을 때 집이 제대로 굴러가게 하는 것, 임금노동자가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을 준비를 하는 것, 아침에 일어난 임금 노동자가 출근하도록 아침을 차리는 것 모두 임금을 받지 않는 가사노동자의 몫이다. 여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하는 재생산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위의 페미니즘의 투쟁 인용문처럼 재상산을 거부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가사노동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을 여기까지 읽어오면 알 수 있다. 결혼과 출산 육아를 거부하는 것도 재생산 거부에 포함된다. 이에 대해서는 국내 여성학자 나영의 말을 가져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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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낙태죄 폐지가 말하는 '재생산권'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 재생산에 대해 읽다가 문득 출산이라는 재생산에 대해 이야기했던 책이 떠올라 책장 앞으로 가 책을 꺼내왔다.
재생산에 관하여 다룬 책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이름은 짐작할 수 있듯이,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다. 우리가 이미 《성의 변증법》으로 만난 이름. 자, 《재생산에 관하여》에서는 파이퍼스톤과 성의 변증법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1970년이 되어서야 급진적 페미니스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인공수정, 시험관 수정, 인공 태반, 단성 생식(파이어스톤은 『성의 변증법』[Dialetic Sex]에서 이를 '처녀 출산'[virgin birth]이라고 불렀다)이 여성을 재생산으로부터 해방시켜줄 미래를 상상했다.
그녀는 인공 자궁과 그 외의 재생산 기술이 이성애 위주의 가부장적 성 역할을 해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기술들을 이용하면 임신이라는 힘들고 단조로운 일-입덧과 극심한 피로, 진통과 분만, 산후 회복과 산후 우울증, 수유와 24시간 계속되는 육아-이 아이를 낳고 돌보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의 선택 사항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문제는 파이어스톤이 판단했듯이 재생산 기술에 대한 연구가 여성의 이익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수행된다는 점이었다. 예컨대 인공 자궁은 단지 임신에 딸려 오는 일들을 원하지 않는 여성의 고생을 덜어주는 장치가 아니라, 조산아의 생명을 구하는 장치로 정당화되었다. 파이어스톤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거나 인공적인 방법으로 낳겠다는 결정이 기존의 출산처럼 합법화될 때까지 여성은 여성의 역할을 강요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경고했다.
새로운 재생산 기술에 대한 파이어스톤의 열정은 많은 급진적 동료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불신과 조롱, 격분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기술이 유토피아를 불러올 것이라고 믿는 그녀의 천진난만함을 비판했고, 또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기술의 인간성 말살에 대립해 '자연적 방식'을 더욱 강하게 주장했다. -《재생산에 관하여:낳는 문제와 페미니즘》, 머브 엠리, 12~13
재생산 기술에 대한 연구를 할 수도 있고 그것에 발전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그것의 의도가 파이어스톤이 처음 기대한 것처럼 임신이란 것을 고통스레 경험하는 여성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여성이기 때문에 할 수있는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도 여성은 언제나 가장 뒷전이 된다.
슐라미스 파이퍼스톤은 그렇다면 임신에 대해 어떻게 말했을까. 나는 책장에서 이번에는 《성의 변증법》을 꺼내든다. 그리고 수많은 북마크중 하나를 찾아 읽는다.
나는 직설적으로 말하겠다.
임신은 야만적이다. 나는 임신이 아름답지 않게 보여지는 이유가 많은 여성들이 현재 말하는 것처럼, 엄밀하게 문화적 왜곡 때문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저 뚱뚱한 아줌마는 왜 저래?"라는 어린이의 첫 번째 반응, 죄책감에 기인한 남편의 성욕 감퇴, 그리고 8개월 때 거울 앞에서 여성이 흘리는 눈물 등은 문화적 간습이라고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본능적인 반응들이다. 임신은 종種을 위하여 개인의 육체가 임시로 기형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 출산은 고통이 따른다. 그것은 당신을 위해 좋지 않다. 3000년 전 '자연적'으로 분만한 여성들은 임신이 진정한 경험이고 신비한 (꿈꾸는 듯한) 오르가슴인 척할 필요가 없었다. 성경은 임신이 고통이고 산고travail라고 말했다. 여성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성적 매력이 불필요했다. 그들은 감히 시끄럽게 불평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진통하는 동안에는 그들이 원하는 만큼 시끄럽게 비명을 지를 수 있었다. 그리고 분만이 끝나거나 분만을 하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제한된 방식으로 용감성에 대한 존경을 받았다. 그들의 용기는 얼마나 많은 아이(아들)를 이 세계로 데려오는 것을 참을 수 있느냐에 따라 판단되었다. -《성의 변증법》,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P.287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여성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임금 노동자가 되고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하여 결혼과 출산을 거부한 것에 대해 얘기한다. 그리고 나라가 출산을 장려하고자 한것도. 마리아로사가 예로 든 때는 1960년대였는데, 그러나 2021년의 대한민국도 그때의 다른 나라들과 다르지 않다. 지금의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는 것은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차레씩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남성폭력의 기사를 마주하게 된다. 하다못해 할인받기 위해 반납한 핸드폰의 사진도 복원돼 유출된다. 어린아이들까지 대상이 되어 디지털 성폭력이 일어난다. 헤어지자고 하거나 자신과 사귀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가며 여성들을 납치하고 감금하고 폭행하고 죽인다. 이런 세상에서 여성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위대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종을 위하여 기꺼이 임신을 선택하여야 할까? 더 나은 삶이 아닌, 살아남기 위해 결혼과 출산을 선택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여성학 책을 읽다보면 그것이 오래전에 쓰여진 것이라도 지금에 와서 무용한 책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마리아로사는 1960-1970년대에 대해 이 책에서 쓰고 있는데(물론 그 뒤의 이야기들도 있다), 와 옛날엔 이랬구나 쯧쯧.. 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와 다를 게 뭐지? 하게 되어버리는거다. 그때 여성들이 했던 결심을, 그때 여성들이 했던 투쟁을 지금의 여기에서도 계속 해나가야 하는거다. 세상은 분명 조금씩 좋아지고 있지만, 그러나 너무 '조금씩' 좋아지고 그 속도는 매우 더디다. 바뀌지 않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이런식으로 수많은 백래시에 맞서 더디게 진행된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여성들에게 평온한 삶이 찾아들지 알 수 없다.
마리아로사가 고민하는 지점에 대해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없어 고통스러워하던 중에 다른 여성학자의 책을 읽고 반가워하던 부분을 읽을 때는 내가 다 감동했다. 마리아 로사는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즈에 대해 언급하는데, 반다나 시바의 업적을 무척 높게 평가하지만 마리아 미즈가 주장한 것처럼 제1세계에서 소비가 일어난다는 생각은 맞지 않다고 지적하고 간다. 제1세계의 빈곤한 자들은 그 소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짚고 넘어간다.
얼마전에 내가 어떤 책들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읽은 책들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자 친구는 읽고 리뷰쓴 책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왜 계속 읽는걸까? 에 대해 웃으며 대화했는데, 어제 페미니즘의 투쟁을 읽다가 책장 앞으로 가 이 책 저 책 한권씩 뽑아오면서, 이러려고 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읽은 책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고 또 모든 내용을 까먹는다해도 아 이것은 어느 책을 찾아보면 알 수 있지, 아 이건 어느 책을 참고할 수 있겠군, 하는 정도라도 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 아닌가. 일전에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고등학교때 선생님이 그런 얘기를 하셨다. 어차피 대학 가서 배우는 건 중,고등학교때 배웠던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우리가 수학을 배우고 화학을 배우고 국어를 배우면 나중에 무언가 찾고 싶어질 때 이건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군, 하는 걸 알수 있게 된다는 것, 그것으로 우리가 찾고 싶은 걸 찾을 수 있게 되므로 우리는 배우는 거라고 하셨던거다. 선생님들의 모든 말들을 당연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말은 당시에 딱히 인상깊었던 것도 아니고 그게 어쨌다는건지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최근에는 그 말에 대해 생각한다. 그래 어디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삶에 있어서 매우 유용하며 유리한 지점이다.
그래서 기억하지 못할지언정 계속 읽어야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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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책장 앞으로 가 꺼내온 책들)
시초축적과 인클로저 때문에 캘리번과 마녀 생각나 꺼내왔는데 페이퍼가 너무 길어지니 이만 총총.
새로운 페이퍼로 찾아옵니다. 두둥-
시초 축적기, 즉 대대적인 강제수용이 이뤄지면서 임금이 있는 자유로운 노동자가 생겨난 시기에, 역사사 가장 거대한 집단 성性 학살 사례가 발생했다. 대마녀사냥, 그리고 명백히 여성을 겨냥한 다른 일련의 조치가, 노동력을 생산 및 재생산하면서도 임금이 없고 부자유한 여성 노동자를 만들어 내는데 핵심적으로 기여했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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