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혼자다 - 결혼한 독신녀 보부아르의 장편 에세이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박정자 옮김 / 꾸리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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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뤼스Pyrrhus, BC319~272는 주변의 많은 나라를 정복한 고대 희랍의 왕이다. 시네아스Cineas라는 신하가 왕의 끝없는 정복 전쟁을 저지하고 싶어 했다. 특히 로마 원정에 반대하였는데, 이때 왕과 나눈 대화가 유명하다. 시네아스는 끊임없이 "그다음에는?" 이라고 묻다가 피뤼스가 마지막 정복 후에 휴식을 취하겠다고 말하자 겨우 질문을 끝낸다. 그리고는 원정의 허망함에 대하여 왕에게 충고한다. 그 모든 제국들을 정복하느라 고생하고 결국 나중에 돌아와 쉴 텐데 굳이 뭐하러 떠나느냐는 것이다. -역자 후기 中, p.155-156



SNS에서는 가끔 초콜렛, 사탕, 아이스크림, 쿠키,빵들을 자르고 녹이고 굽고 쪼개서는 다시 섞어서 새로운 디저트로 만드는 영상들을 마주치게 된다. 따로따로 먹어도, 그것들중 하나만 먹어도 이미 달고 맛있는데 굳이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건 도대체 왜 그러는걸까? 굳이 왜 이래야할까? 이렇게까지 해서 더 달고 맛잇는 걸 먹어야 하나? 나는 이 영상들을 무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만드는 사람은 내가 아닌데, 과연 내가 타인의 행동에 대해 무용하다고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내가 이런 나의 생각을 반성하게 된건, 나 역시 누군가 무용하게 생각할만한 일들을 누구보다 많이 한다는 걸 깨닫고 나서이다. 쉽게 예로 들자면 여행이 그렇다. 나는 여행이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을 사랑한다. 계획을 세우는 것부터 짐을 싸고 공항에 가는 리무진을 타는일, 공항에 도착해서 수속을 밟고 라운지에 들르고 면세점을 들르고 비행기에 탑승하고 기내식을 먹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낯선 공항에 도착해서 그곳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호텔에 도착하고 낯선 거리를 걷고 낯선 음식을 먹고 호텔에서 잠을 자는 그 모든 순간과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바로 그 순간까지. 그렇게 내 집, 내 방, 내 침대로 돌아오면 그제야 비로소 여행이 완성된 느낌이고 나는 그 느낌을 몹시 사랑한다. 와, 내 방 내 침대 너무 좋네, 나는 내 침대가 얼마나 좋은지 깨닫기 위해서 여행하는가봐, 라고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말하는데, 그런 나의 말을 들으면 아빠는 어김없이 "나는 여행 안해도 내 침대 좋은거 아는데 너는 왜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서 여행해야만 그걸 아는거냐?" 라고 물으시는 거다.


한 번은 가족이 모여서 텔레비젼을 보는데 캐나다에서 오로라를 기다렸다가 만나는 사람들이 나오는거다. 와, 저걸 눈앞에서 실제로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너무 좋겠다! 라고 내가 감탄하고 부러워하자 예의 아빠는 또 그러시는 거다. "내 집에서 가만 있어도 다 볼 수 있는데 왜 부러 저기까지 가서 저걸 봐야되냐?" 라고.



스물아홉에 뉴욕으로 드디어 가게 되었을 때, 그것은 나의 중학교때 부터의 목표였으므로 나는 너무나 기쁘고 떨렸다. 하루하루 빨리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터에 친구들과 만나 얘기를 나누는데, 그중 한 친구가 내게 그랬다. 고작 일주일 동안 미국에 가다니 너무 돈지랄이라고, 비행기값이며 호텔값이며 그 먼데를 가는데 고작 일주일 가느냐는 거다. 나는 그 친구에게 그렇게라도 나는 꼭 가고 싶고, 그게 내가 원하는 바라고 얘기했다. 나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내게 주어진 휴가는 일주일 뿐이었다. 만약 그 친구 말대로 그곳이 먼 곳이기 때문에 더 오래 머물기 위해 때를 노려야 했다면, 여전히 그 직장에 다니고 있는 나는 아무데도 가지 못한 채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멀기 때문에 가지 않기를 택하는 것은 그 친구가 선택하는 것이지 나의 선택은 아니다. 나를 세상 한심하게 보았던 그 친구의 냉소는 나로서는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왜 힘들게 굳이 여행을 하면서 그래봤자 어차피 집이 좋다는 걸 깨닫느냐는 아빠의 냉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는 보부아르의 이런 문장을 읽는다.



스키 선수는 오로지 내려가기 위해 올라간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가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은 단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운동을 아무렇게나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산꼭대기 혹은 계곡의 바닥을 목표로 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종합적 의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그의 행위의 모든 요소들은 그 의미들을 향하여 스스로를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오르내림은 산보나 운동을 위한 초월적 행위인데, 이와 같은 좀 더 넓은 총체의 관념을 배척하는 것은 너무 자의적인 결정이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스키를 타는 사람이지 냉소가가 아니다. - p.42



앞서 말한 디저트를 새로 만드는 영상을 보고 내가 한 것도 바로 그 냉소였던 것 같다. 내가 그 디저트를 만드는 혹은 그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면서 나는 냉소가가 되어 바라보지 않았는가.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방향과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무용하다 생각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냉소가가 아닌가. 내려가기 위해 올라갈거라고 냉소하는 사람은 스키를 탈 수 없다. 돌아올건데 뭐하러 떠나냐고 말하는 사람은 여행을 할 수 없다. 먼데에 그 짧은 기간 뭐하러 가느냐고 말하는 사람 역시 여행할 수 없다. 우리는 각자 분야가 다르지만 자기가 생각한 것들을 목표로 하고 있고 방향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이걸 생각하다가 책을 읽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이 '읽었는데 내용 다 까먹었어, 이럴 거면 책을 왜 읽을까.' 그러나 까먹을 거라서 안읽는다면, 거기에는 책을 읽지 않는 내가 남는 거다. 어떤 행위를 하면 하는 사람이 된거고, 그 행위를 한 내가 미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혼자 여행하는 것도 좋아한다.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혼자 준비하는 것, 그리고 낯선 장소와 낯선 음식, 낯선 사람을 오롯이 혼자 만나는 것에서 오는 충만한 기쁨과 만족이 있다. 얼마나 짜릿한지 매 시간이 행복으로 가득찬다. 그러나 그렇게 혼자 걷고 먹고 보는 걸 마치고 호텔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우면 외로움이 찾아든다. 오늘 내가 보낸 이 시간, 내가 보았던 것과 먹었던 것과 느꼈던 것을 함께 나눌 누군가가 이 밤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디가 특히 아름다웠는지, 어느 음식은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든지, 어디를 걸을 데는 좀 두려웠다든지 하는 것들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좀 더 근사하고 완성된 여행이 될 수 있을텐데. 그렇게 아쉬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고 또 나는 혼자 이 거리를 걸어야 하니까! 이런 경험들이 쌓일수록 '나는 혼자인 걸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혼자이고 싶다는 건 아니야' 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인간이란 무릇 그런 존재라고 보부아르가 말해주고 있다.



때때로 우리는 타인의 도움 없이 우리의 존재를 완성하려 한다. 나는 들판을 걸어간다. 풀을 꺾고, 발로 돌을 차고, 언덕에 오른다. 이 모든 것을 아무런 증인 없이 한다. 그러나 누구라도 평생 이러한 고독에 만족할 수는 없다. 산책을 끝내자마자 나는 친구들에게 그 산책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칸다울레(BC 8세기 리디스의 왕) 왕은 왕비의 미모가 만인의 눈에 아름답게 비치기를 원했다.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몇 년동안 숲 속에서 혼자 살았지만, 그러나 숲에서 나와 『월든』을 썼다. - p.89



캬- 나는 위의 인용문이 너무 좋다. 자지러지게 좋다. 특히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몇 년동안 숲 속에서 혼자 살았지만, 그러나 숲에서 나와 『월든』을 썼다'는 부분.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다.



이 책은 2016년 12월에 읽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재독해야겠다고 이미 리뷰를 썼던 책이다. 그 당시에 도대체 뭐라는거야, 당황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언젠가 재독할거라고 생각했던 책이어서 2020년 12월에 재독했는데, 한장 한장 너무 재미있고 신나게 읽으면서, 도대체 내가 2016년에 이걸 왜 이해하지 못한걸까 궁금했다. 어쩌면 내 독서근육이 그 때 더 약했기 때문인걸까. 이 책에는 평소에 내가 늘 생각해왔던 것, 그래서 알라딘에서도 썼던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친구랑 홍콩에 여행갔을 때는, 홍콩 호텔에서 그 다음에는 태국으로 여행가자고 비행기표를 검색하고 있었다. 몇해전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게 과연 맞는 걸까 답답한 마음에 사주를 보러 갔을 때, 사주 선생님은 내게 '너가 그게 무엇이든 하물며 네 적성에 꼭 맞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시간 너는 너를 돌아보며 이것이 맞는걸까 답답해하고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라고 했더랬다. 나는 자꾸 앞으로 가려고 하고 그리고 이렇게 가는게 맞는건지 중간중간 멈춰서 돌아보는데, 보부아르는 인간이 원래 이런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내가 혼자라면 내 생각대로 됐을 일들이, 그러나 세상은 나 혼자 사는게 아니기 때문에 내 예상과는 다른 일들로 변해버리게 되는 것, 보부아르는 세상이 원래 이렇게 돌아가는 거라고 한다. 내가 누누이 말했던 바로 그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자기 자신이 온전히 자신으로 잘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던 것을, 보부아르 역시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고 또 살아가기 위해서 다른 이들의 안녕을 바라야 하는 거라고, 우리는 다른 사람과 섞여서 살아가고 그들이 우리를 밀어주거나 반대하거나 끌어주더라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방법이며 모습이라는 거다. 다만, 보부아르는 이 모든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이야기,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 우리가 삶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이야기에 '기투', '초월', '초월성', '지양', '실존' 등의 철학 용어를 더했다. 이 용어들이 낯설어서 중간중간 책을 읽다가 턱- 하고 막힐지도 모르지만, 이 책의 <역자 후기>는 크- 한줄기 빛이 되어 이 용어들에 대해 설명해준다. 너무 알기 쉽게 설명해줘서 아니, 이 사람 뭐하는 사람이지? 했더니 옮긴이 '박정자'는 '사르트르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역자 후기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읽어도 좋겠고, 이 책을 읽고 역자 후기를 읽어도 좋을 것이며, 이 책을 읽고 역자 후기를 읽은 후에 이 책을 다시 읽는 것은 더 좋을 것 같다. 나도 언젠가는 또 이 책을 읽을 것이다.



나는 항상 애인에게도 친구들에게도 그러니까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물론 가장 처음 나 자신을 포함해서,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자고, 지치지 말고 나아가자고 말하고 다닌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 때로는 '앞으로 나아가자고 하는 게 그런데 절대선인걸까?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을 선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의문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제 와서 '뒤로도 가자'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사 우리가 돌아가고 뒷걸음질 치더라도, 결국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함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부아르는, 나의 이런 생각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이 책 한권을 통해 이야기해준다. 인간은 현재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미래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 우리가 지금 사는 이 현재는 미래의 나를 구성하는 것이고 그 미래는 또다시 현재의 내가 되어서 또 그 다음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거다. 내가 항상 작은 목표라도 만들고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면서 살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환하게 설명될 수밖에 없다. 내가 자꾸 여행을 떠나는 것, 어차피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부득이 그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자 내가 잘 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살아가는 이 모든 순간은 분명 의미가 있고 어떤 식으로든 미래에서 나를 맞이할 것이며, 나는 잘 살고 있다. 내가 잘 살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바로 얼마전에 이 책을 읽었던 과거가 있고, 그 과거는 그 책을 읽는 동안에는 현재였다. 이런 미래를 위해 준비된 현재였다.




피뤼스는 정복하기 위하여 출발한다. 그러니까 그는 정복할 것이다. "그럼 그다음은?" 다음 일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 p.78











고착되어 있는 순간은 결코 새롭지 않다.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순간은 새로워진다. 바로 지금 출현한 형태는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배경이 뚜렷하고 분명해야만 자신의 모습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나무 그늘의 시원함이 귀중한 것은 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대낮의 길가에서이다. 휴식은 고된 일과를 마친 뒤의 편안한 긴장 이완이다. 작은 산꼭대기에서 나는 내가 돌아다녔던 길을 바라본다. 내 성취감의 기쁨 속에 현존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길 전체이다. 이 휴식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보행이다. 그리고 이 한 잔의 물을 귀중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갈증이다. - P33

인간이 기투企投인 이상, 인간의 행복은 인간의 쾌락과 마찬가지로 기획일 수밖에 없다. 행운을 잡은 사람은 곧 다른 행운을 잡으려고 한다. 파스칼이 정확하게 말했듯이, 사냥꾼이 흥미를 가진 것은 토끼가 아니라 사냥 그 자체이다. 자기가 그 안에서 살 생각도 없이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그런 행위를 비난할 수 없다. 목적지는 저쪽 깊숙한 곳에 있을 경우에만 목적지일 수 있다. 목적지에 이르면 그곳은 곧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 P39

스키 선수는 오로지 내려가기 위해 올라간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가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은 단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운동을 아무렇게나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산꼭대기 혹은 계곡의 바닥을 목표로 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종합적 의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그의 행위의 모든 요소들은 그 의미들을 향하여 스스로를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오르내림은 산보나 운동을 위한 초월적 행위인데, 이와 같은 좀 더 넓은 총체의 관념을 배척하는 것은 너무 자의적인 결정이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스키를 타는 사람이지 냉소가가 아니다. - P42

인류가 소멸할 것이라고 단언할만한 근거는 하나도 없다. 개개인의 인간은 반드시 죽지만 인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 P60

사람은 무산계급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쳐 일하면서 동시에 인류 전체를 위해 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무산계급을 위해 투쟁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산계급과 함께, 무산계급 이외의 인류에 대항하여, 어떤 기획을 추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산계급과 더불어 일한다는 것이 계급의 차이가 없어질 미래의 인류를 향하여 하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 오늘날의 자본가로부터 한 세대 혹은 수 세대에 걸쳐 재산을 빼앗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그 이외의 사람들에 반反하여 일하는 것이다. - P66

자기 행동의 예상치 못한 결과를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쳤던가? "나는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노벨은 자신의 일이 과학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전쟁을 위해 일했던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학설을 뒷날 사람들이 향락주의라고 부를 것을 예상하지 못했고, 니체는 니체주의를, 그리스도는 종교재판 같은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은 곧 역사의 밀물과 썰물에 떠밀려 새로운 순간마다 새로 만들어지고, 그 주위에 무수한 생각지도 못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다. - P69

나의 행위가 완료되면 그것은 최초에 내가 바라던 바와는 다른 행위가 된다. 그렇다고 하여 그 행위가 완전히 낯설게 변질되는 것은 아니다. 즉 그 행위는 자기의 존재를 완료하는 것이고, 이때 비로소 그 행위가 진실로 완성되는 것이다. - P72

피뤼스는 정복하기 위하여 출발한다. 그러니까 그는 정복할 것이다. "그럼 그다음은?" 다음 일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 P78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한다. 그는 오늘 저녁 리옹Lyon에 도착하려고 서두른다. 그 이유는 내일 발랑스Valence에 가고, 모레 몽텔리마르Montelimar에, 그리고 그다음 날에 아비뇽Avignon에, 또 그다음 날은 아를Arles에 가기 이ㅜ해서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비웃을 수도 있다. 아무리 해 보았자 실제로 그는 님Nimes이나 마르세유Mareille도 보지 못핫 채 집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니 말이다. 본Beaune이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상관없다. 그는 자신의 여행을 할 것이다. - P79

사람은 죽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이유 없이, 목적 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장 폴 사르트르도 『존재와 무』에서 밝혔듯이 인간 존재는 사물처럼 응고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존재해야 한다. 순간마다 그는 자신을 존재시키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바로 기투이다. 인간 존재는 기투의 형태하에서 실존하고 있지만, 그 기투는 죽음을 향한 기투가 아니라 각기 개별적인 목표를 향한 기투이다. - P82

때때로 우리는 타인의 도움 없이 우리의 존재를 완성하려 한다. 나는 들판을 걸어간다. 풀을 꺾고, 발로 돌을 차고, 언덕에 오른다. 이 모든 것을 아무런 증인 없이 한다. 그러나 누구라도 평생 이러한 고독에 만족할 수는 없다. 산책을 끝내자마자 나는 친구들에게 그 산책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칸다울레(BC 8세기 리디스의 왕) 왕은 왕비의 미모가 만인의 눈에 아름답게 비치기를 원했다.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몇 년동안 숲 속에서 혼자 살았지만, 그러나 숲에서 나와 『월든』을 썼다. - P89

아들이 원하는 결혼을 막는 권위적인 아버지는 자신이 아들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 대신 이 상황 아닌 저 상황을 선택하여 주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자기가 아들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고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는 자기 자신의 의지에서 살짝 벗어나, 건간이라든가, 부라든가, 명예라든가 하는 기존 가치의 객관성을 제시한다. - P95

하나의 생명을 준다는 것은 생명을 받은 사람의 자유까지 좌지우지할 권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아이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므로 아이에게 최대의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는 알고 있다.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이 현존해 있음에 의해서만 그에게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기획에 의해서만 자기 자신일 수 있다. 태생이나 교육은 그가 반드시 지양해야 할 사실성facticite일 뿐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해 준 일은 상황의 한 부분이며, 이 상황을 초월하는 것은 바로 그의 자유이다. 그는 이런 상황 혹은 저런 상황에 있게 될 것이지만, 그 어떤 상황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항상 다른 곳에 있는 존재이므로. - P103

우리는 타인에게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칸트의 말처럼, 비둘기에 저항하면서 비둘기를 밑에서 받쳐주고 있는 공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의 장애물일 때조차 우리는 타인의 도구가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든 그에게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타인에 의해서이다. - P110

만일 내가 이 길을 가지 않았고, 그런 말들을 하지 않았고, 거기 없었더라면, 아마 타인의 삶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그의 인생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말이나 몸짓이 어떤 뜻을 가지게 되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다. 그는 자유롭게 그 의미를 결정한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주위에서 모든 것은 똑같이 충만되어 있었을 것이다. - P111

부동의 자세이건, 아니면 마구 움직이는 자세이건 간에, 우리는 언제나 지구 위에 올라앉아 있다. 모든 거절은 선택이고, 모든 침묵은 목소리이다. 우리의 수동성조차 우리 의지의 소산이다. 선택하지 않기 위해서는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선택해야 한다. 선택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P114

"철도나 비행기가 없었던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라신느Jean Baptiste Racine 없는 프랑스 문학, 또는 칸트 없는 철학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지금 현재의 만족을 넘어서, 자기 뒤로, 회고적으로, 하나의 필요를 던져 놓는다. 물론 그가 살고 있는 지금, 비행기는 하나의 필요에 부응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물건이 존재함으로써 생겨난 필요이고,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의 존재로부터 사람들이 만들어 낸 필요이다. - P121

우리들의 행위 하나에주어지는 칭송이 우리들의 전존재全存在를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신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란다. 이름은 대상 속에 마술적으로 집합된 나의 총체적 현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행위들은 분산되어 있다. 우리는 행위를 하고 있는 한에서만, 다시 말해 분열된 존재 속에서만 타인을 위하여 존재한다. - P124

내가 정립할 대상들을 정의하는 것과 나 자신을 정의하는 것은 결국 동일한 기획이다. - P135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세계 속에 하나의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 각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를 우선 내 주변에 출현시켜야만 한다. - P136

나의 기획이 그들의 기획과 일치하느냐 혹은 저촉되느냐에 따라 그들은 동맹자로서 혹은 적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이런 모순 또한 나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면서 그 모순을 존재시킨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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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12-10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책 재독이란 말입니까?! 전 그 옛날 사두고 아직 한 번도 안 읽었는데!
다락방 님 리뷰에 힘입어 조만간 저도 읽겠습니다!!!

다락방 2020-12-10 13:36   좋아요 0 | URL
저도 나오자마자 사서 읽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 때는 도대체 이게 뭔말이여...했었습니다. 그런데 4년만에 읽으니 와, 너무 재미있는 거에요! 씐나서 읽었습니다. 후훗. 잠자냥 님도 재미있게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빠샤!!

라로 2020-12-10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고 싶어요!! 아~~~ 근데 이러면 안 되는데. 😓

다락방 2020-12-10 18:21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아쉽게도 전자책이 없네요. 종이책도 아주 얇은데 비싸고요. ㅜ

난티나무 2020-12-10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 고고!!
밑줄 하나하나 읽다가 어제 읽은 <스토너>가 생각났어요...

다락방 2020-12-10 18:22   좋아요 0 | URL
크- 스토너 참 좋지요? 스릴러만 읽는 제 동생도 스토너 읽더니 한참 지난 후에도 생각나는 책이라고 말하더라고요. 즐거운 독서가 되실거라 감히 예상합니다. 후훗.

2020-12-10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0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12-10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12월에도 보부아르를 읽었다죠 ㅎㅎㅎㅎ 전 처음 보는 책이에요. 다락방님이 재독하셨다니 달리 보입니다.

다락방 2020-12-10 18:24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작년 12월에도 보부아르를 읽었네요? 아하하하. 근데 저는 보부아르랑 한나 아렌트랑 자꾸 헷갈려요. 바부팅 ㅜㅜ

서니데이 2020-12-10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시고,
항상 행복과 행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락방 2020-12-11 09:03   좋아요 1 | URL
아이고, 축하 감사합니다. 그러고보면 서니데이님은 해마다 축하해주시네요.
연말 잘 보내시고 건강하세요, 서니데이님. 새해 복도 많이 받으시고요!

파이버 2020-12-10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첫여행이 고작 일주일이었는데, 다들 아깝다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ㅎㅎㅎ 그래도 그때 일주일만이라도 갔다오길 잘한것 같아요
다락방님 글을 읽으니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현실은 방콕이지만요ㅎㅎ

다락방 2020-12-11 09:04   좋아요 1 | URL
저는 일주일 여행이 결코 나쁘지 않거든요. 주어진 일정에 따라서 여행을 즐기는 것이 저는 너무 만족스러워요. 직장생활 하면서 휴가를 그만큼 쓸 수 있으니 아 어느 때 어느만큼 가면 되겠구나, 계획 세우고 다녀오는 게 저는 행복합니다.
파이버님, 우리는 언제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요. 흑흑 ㅠㅠ

scott 2020-12-10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드디어 푸코 탈출! 추카 ㅋㅋㅋ

다락방 2020-12-11 09:04   좋아요 0 | URL
푸코 탈출 못했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떻게 탈출하나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