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에 '에밀리 클라크' 주연의 영화 《라스트 크리스마스》를 보고 엄청 울었더랬다. 그렇지만, 만약 내가 울었다는 얘기를 듣고 누군가가 이 영화를 본다면, '도대체 왜 울었지?' 할 영화라고 생각했다. 아마 이 영화를 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울기는 커녕 '뭐야?' 할 것 같은, 그런 영화였다. 사람들의 반응이 그럴 거라는 걸 알지만, 그런데도 나는 엉엉 울었다. 나는 왜 울었을까? 도대체 왜 운거지?
일전에 친구가 보고 엉엉 울었다는 영화는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더랬다. 아마 내 생각엔 그 친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울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재미없다고 생각할 듯.
그래서 생각했다. 왜 그친구는 울고 나는 울지 않았을까. 무엇이 그렇게 한걸까? 물론 당연히 사람은 저마다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그 환경으로 인해 만들어진 지금의 우리도 역시 다 다르니까 우는 이유나 자극받는 꼭짓점이 다를텐데, 그렇다면 그게 뭘까? 왜 나는 남들이 안울거야, 남들은 이 영화 좋아하지도 않을거야, 알면서도 우는걸까? 다른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는데 나만 건드리는 그게 도대체 뭘까? 그걸 알아야겠다고 생각한거다. 그걸 알기 위해서라면, 이 영화 《라스트 크리스마스》한 편으로는 안된다. 남들은 안우는데 나만 우는 그런 영화를 더 생각해보자. 그러면 도대체 나를 건드리는게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자 대뜸 생각난 게 이 영화였다.
《메디엄》은 공포영화다. 무서운 영화다. 그리고 귀신을 보는 소년이 주인공이다. 이 영화는 국내 개봉 당시 딱히 흥행하지 않았던 걸로 안다. 이 영화가 공포 영화인 만큼 보편적 감상은 아마도 무서움일 것이다. 당연히 나 역시 그런걸 느꼈으니까.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도 계속 울었다. 같이 영화보던 친구는 울지 않았는데 나는 계속 울었다. 이 영화를 보고난 당시에 백자평에도 내가 울었다고 써놨더랬다. 나는 이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제 거의 생각나지 않지만, 내가 어느 지점에서 울었는지는 기억한다. 소년이 모든것에 맞서 '혼자' 싸워야한다는 걸 인지하고 결정할 때였다. 답은 그거구나, 라는 걸 결국 찾아내고 그리고 혼자 행할 때. 나는 그 소년의 외로움에 울었더랬다. 그렇다면 나는 외로움에 우는걸까?
나는 극장에서 이 영화 《아마겟돈》을 처음 본 순간부터 텔레비젼에서 재방송을 해줄때도, 엉엉 울었다. 이 영화는 우리 삼남매가 극장에서 함께 본 영화인데 내가 대성통곡 하는 바람에 남동생이 부끄럽다고 이제 그만 울라고 했던 그런 영화다. 그렇게 한 번 울고 줄거리 다 알면서도 또 보면 또 운다. 어김없이 같은 장면에서 또 울어... 브루스 윌리스가 답을 찾아내고, 그리고 그 답을 알기에 자기가 실천하려고 결정할 때였다. 이 영화는 백인 남자 한 명이 세상을 구하는 위대한 영웅으로 나온다. 그런식으로 쳇, 하고 넘길만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데도, 그거 나도 아는데도 어김없이 운다.
초반부터 우느라 다 보지 못한 영화가 이 《겨울왕국》이다. 와, 나는 이거 초반에 너무 울어가지고 더이상 못보고 끄면서, '사람들 어떻게 이 영화 다 본거지?' 했더랬다. 아 쓰면서도 또 눈물 나와.
그러니까 이 영화속에서 언니는 자신이 가진 특별한 능력 때문에 가까운 사람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는 존재이다. 그걸 알고는 혼자 고립되는 것을 선택한다. 그간 동생과 사이가 좋았는데도 문밖에 늘 동생이 왔다가는 걸 알면서도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나는 언니의 이 결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고 실행하는 내내 얼마나 어려울까, 하는 생각 때문에 울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동생 역시 마찬가지. 매일 찾아가도 문을 열어 주지 않는 언니 때문에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동안 그렇게 다정한 사이었는데 갑자기 닫힌 문은 얼마나 큰 외로움을 줄까, 하는 것 때문에 더 보지 못하고 꺼버린거다.
이 일에 내 조카는 내게 전화를 걸어와서 끝까지 보라고, 그러면 다른 이야기들이 있다고 하는데, 응 알겠어, 하고는 여즉 보지 못했다. 조만간 봐야지, 그 힘든 순간을 견뎌내면 '그 다음'이 나오겠지.
이렇게 내가 울었던 순간들을 돌이켜보니, 저 위의 《라스트 크리스마스》에서도 그렇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 답을 내리는' 외로운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어떠한 결정이든 또 어떠한 상황이든 내가 울었던 그 순간에 주인공들은 그 결정을 스스로 내리고 그 결과를 오롯이 혼자 받아내야 했다. 《라스트 크리스마스》는 내가 생각한 것과도 결말이 완전히 다르게 진행됐지만, 주인공 '케이티'에게도 그랬을 거다. 이게 뭐지? 하는 그 당황스러움과 그리고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어떤 것인지 그 본질을 깨달았을때, 그 때 받아야 할 충격은 오로지 혼자만의 몫이었다. 그간 즐거웠던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그런데 사실은 이런 것이었다는 걸 깨달으면서,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스스로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는 일은, 설사 그 다음이 케이티의 '성장'이었어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그 당황함 앞에 자기가 혼자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것이 온전히 혼자만의 몫이라는 걸 깨달았을때의 케이티의 느낌이 너무 절절한거다. 혼자 극복하고 혼자 감당해야 하는 그 시간들. 후- 쓰면서도 또 벅차다.
나는 사주 보러 다니는 걸 좋아하고 다녀오면 상담을 받은 기분이라 울적했던 마음이 좀 나아진다. 사주를 봐주시는 선생님들이 '너는 앞으로 부자된다' 라거나 '너는 로또에 당첨된다' 같은 말들을 해주는 건 전혀 아니지만, 그저 나라는 인간에 대해 나와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니었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데에서 오는 어떤 마음 편함이 있는 거다. 그중에 한 선생님은 내게 그런 얘기를 하셨다. '너는 언제나 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대부분의 답을 다 찾아낸다'고. 그러면서 덧붙이셨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은 글을 쓰게 될거다' 라고. 그 때 당시에 듣고 너무 나에게 영향을 미친 말이었다. 답을 구하고자 하는 인간이라는 것과 그래서 답을 찾아내는 사람이라는 것.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는 내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그러니 선생님은 나를 아주 잘 보신 것이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은 사실 사주 선생님이 아니라 직장 동료나 친구들도 내게 했던 말이긴 하다. 나란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이런식으로 나와 같은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훅 공감하게 되어버리는 것 같다. 등장인물들이 어떤 문제를 맞닥뜨리고 거기에서 답을 찾아내는 것,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러므로 그 답을 몸소 실천하고 행하는 것. 나는 그런 부분에서 어쩔 수 없이 울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 그 마음이 어떨지, 그 마음 안에서 얼마나 짙은 내적 갈등이 벌어질지 아니까. 내 앞에 놓인 문제에 대한 답은 내 스스로 내려야 하고, 결국은 그럴 수밖에 없고, 그리고 찾아낸 답을 실행하는 것역시 온전히 나의 몫이다. 이걸 내가 스스로 해내는 것, 실행에 옮기는 것을 보는 것은 내게는 기쁨이자 격려이고 또 외로움이다. 저 순간에는 얼마나 외로울까. 이건 내가 해야 하는구나, 내 몫이구나, 깨닫는 그 순간에 얼마나 외로울까. 그 결정을 실행하는 것은 또 얼마나 큰 의지가 들어가는가. 그 행함으로 가져올 결과를 받아들이는 일, 그건 정말 쉽지 않은데, 그걸 혼자 받아내야 한다. 외롭지 않을 도리가 없다. 케이티도, 엘사도, 매트(메디엄)도, 해리(아마겟돈)도, 답을 내리는 것도 그리고 그 답을 받아들이고 실행하는데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의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엘사는 자기 방의 문을 닫고 그 닫힌 문을 열지 않기까지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외로움을 감당해야 했을까. 나는 이런걸 생각하면 울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는 언제나 자기와의 싸움, 스스로와 싸우는 것이 싫다고 말하는데, 내 안에서 일어나는 그 치열한 전쟁이 늘 외로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혼자 처절하게 분투중인 걸 보노라면, 어쩔 수 없다. 운다. 라스트 크리스마스 보면서, 에밀리 클라크... 나랑 같은 부류의 사람인가? 그래서 이 영화의 출연을 결정했나? 라고 잠시 생각했다.
오늘 아침에 친구와 단톡방에서 좀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는 지쳐서 좀비 드라마 《워킹 데드》를 봤다고 하는데, 내가 얼마전에 한동안 좀비 영화에 빠지면서 몇 편 연달아 보고, 그러면서 결국 좀비 영화가 '이상하게 희망적'이란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인간이 너무 신기하다. 결국 인간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좀비 영화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좀비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주인공은 끝까지 싸우고 도망치는 것, 그게 너무 대단한거다. 물론 얼마 안되는 인간들끼리 모여있노라면 또다시 그 안에서 음모와 비열함이 판을 치기도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살아남고자 하고 치료제를 개발하고자 하는 것도 인간이 아닌가. 그렇게나 좀비가 급속도로 번져가면 '차라리 물려버리자' 고 포기하는게 편할텐데, 이 인간들이 포기를 안하는거다. 좀비 영화 볼 때마다 도망치는 주인공이 되면 나는 영락없이 '아, 그만두자, 걍 물려버리는 게 속편하겠다' 하는데도, 주인공은 계속 도망치고 살아남는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어제는 힘겹게 《성의 역사2》를 다 읽어내고 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잘 오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이긴 했지만. 그리고 오늘 아침 출근길에 읽기 시작한 책은 이승우의 《사랑이 한 일》
이승우를 왜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정말이지 도대체 무엇이 좋다고 해야할까, 잘 답하지 못하겠다. 이야기 자체가 흥미있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남은건 문장인가 싶어, 한국어로 쓰여진 소설을 읽는 기쁨을 가장 크게 주는 작가다, 라고 생각하는데, 오늘 이 책을 읽으면서는 생각했다. 아, 역시 나는 '혼자' 결정하고 행하는 이야기들에 푹 빠지는구나, 라고.
소돔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롯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나는 이승우가 한 사람의 내면에 대해 풀어놓는 글들이 너무 좋다. 장황하게 설명하는듯 하지만 군더더기가 전혀 느껴지질 않는다. 오늘 아침에 이 문장을 읽으면서 아, 역시 진짜 이승우 좋아. 나는 이런 문장이 정말 자지러지게 좋다, 했다.
길 위의 사람은 어딘가로 가는 중에 있는 사람이다. 길 위에서 사는 것은 어딘가로 가는 중의 상태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다. 도착은 한없이 연기되고 머묾은 영원히 유보된다. 어딘가로 가는 중의 상태를 유지한 채 사는 것만 허용된다. 이십몇 년 동안 소돔에서의 롯의 삶이라는 것이 그러했다. 롯은 그 도시에 매혹되어 이십 년 넘게 그곳에 살았지만 아직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 도시 사람들이 그를 향해 '나그네살이를 하는 주제에'라고 비난한 이유이다. (p.32)
아, 미치겠다. 진짜 너무 좋은 거다. '이십 년 넘게 그곳에 살았지만 아직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다니. 그것은 무엇인가. 그런 인생은 어떤 인생인가. 이십년 넘게 살았지만 아직 닿지 못했다는 것에서 오는 그 마음이야말로 고독함과 외로움이 아니겠는가. 끊임없이 자기를 달래야하는 게 아닌가.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써내느냐 말이야. 나는 저 문장에서 롯의 외로움과 허망함이 느껴지는거다. 더불어, 저 문장 자체에 공감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은 수많은 외부인 혹은 외지인들이 떠오르는 거다.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끊임없이 정착하자 정착하자 하면서 자기를 달래고 이끌어가고 있을텐데, 그럼에도 순간순간 나는 이곳에 정착민이 아니라 외부인이구나 깨달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저 문장을 맞닥뜨린다면 훅, 자기만의 것이 되지 않을까 싶은 거다. 나는 지하철 안에서 저 문장을 보고는 너무 외롭고 힘겨웠다. 순간순간 기쁨과 행복을 누리겠지만 저 안 깊은 곳에 남아있는 이르지 못함, 닿지 못함, 여전히 손님이라는 그 느낌을, 이승우가 표현했다. 너무 잘. 아 진짜 너무 좋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나는 내면을 잘 표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좋다. 그걸 들여다봐주는 게 그렇게나 좋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승우 소설을 읽는데 진짜 살 것 같다. 흑흑 ㅠㅠ
오늘은 일이 많으니까 이쯤하자.
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말을 했군.
오늘 아침엔 사무실에 혼자 있으면서 이 노래를 들었다. 이 노래를 알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