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각종 반찬들과 또 정육점의 고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놀다 오시겠다고 시장에 나가셨다. (응?)
나는 좀전에 나가서 내일 먹을 김밥 재료를 사왔다. 김밥 싸야지. 엄마는 '너 또 스트레스 받으려고 그래, 그냥 사먹어' 라고 하셨지만 나는 그런 엄마에게 '여자가 한 번 말했으면 지켜야지!, 한다면 하는거야!' 하고는 기어코 나가서 김밥 재료를 사온 것이다. 김밥 재료를 사고, 무슨 기획전이라는 저렴한 와인도 사고, 연휴중에 하루는 이모가 놀러올 거라 이모가 좋아하는 맥주도 좀 샀고, 그리고 빵도 좀 사왔다.
집에 돌아와서는 손을 씻고 커피를 내리고 빵을 썰어두고서는 여성성의 신화 리뷰를 썼다. 정말이지, 좋은 시간이다. 한적한 오후, 빵과 커피, 그리고 책과 글쓰기... 정말이지 아름다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시간들이 있기 때문에 삶은 순간순간 반짝이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그것을 온전히 즐기는 삶. 그렇다면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속에서도 반드시 반짝이는 순간을 캐치할 수 있게 될테니까. 거창한 게 아니어도, 또 사람이 주는 게 아니라도, 내가 나 스스로에게 가슴 가득 충만한 그런 행복한 순간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가. 오후, 빵, 커피, 책.... 진짜 샤랄라 해피니스 아닌가.
여성주의책 같이읽기를 시작하고 1년을 넘기면서 나는 매달 완독했다. 멤버중 유일하게 나만, 매달 해당도서를 완독하는 열정(!)과 성실성을 보였다. 그건 아마도 내가 이 모임 자체를 주선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서 오는 책임감은 내가 게으르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지가 하자고 해놓고 지가 못읽어'라는 말 같은 거 내가 너무 듣기 싫어하는 말이고, 또한 '내가 하자고 했는데 내가 못읽네' 하고 나 스스로에게 쪽팔리는 걸 내 스스로 견딜 수 없어하기 때문에 나는 아마도 이렇게 성실하게 매달 책읽기를 마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번 4월도서를 말일을 하루 앞두고도 다 읽지 못해 초조해서 퇴근후에 까페에 들러 읽기 시작했다. 배고플까봐 샌드위치까지 먹고 온거였는데, 그렇게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데, 아아, 멤버중 한 명이 이 책을 읽고 있다가 배고프다고 육개장을 먹으러 간다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멤버들중에 나를 포함 세 명이 이 책을 동시에 읽는 중이었다. 한 명은 오므라이스를 먹은 뒤였고 한 명은 배가 고픈채였고 한 명은 샌드위치를 먹은 뒤였는데, 배고픈 멤버가 육개장을 먹으러 가서는 아니, 육개장의 사진을 보내는 게 아닌가.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나는 육개장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갑자기 배가 너무 고파졌다. 샌드위치, 그거 양도 얼마 안됐어. 그렇지만 나는 샌드위치로 오늘 저녁을 해결하기로 한건데 갑자기 밥을 먹으면 어떡해. 게다가 먹을 거면 일찍 먹었어야지,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밥을 먹겠다는 거야? 안돼 참아, 계속 책을 읽어라, 나여!! 하다가 가방 싸들고 육개장 집으로 향했고, 주문하고 음식을 받은 시간은 20:42 ...
내가 주문한 건 매운 육개장이었는데 진짜 너무 맛있었다. 평소에 육개장을 좋아하지 않고 엄마가 만들어도 나는 육개장을 잘 먹지 않는데, 아니, 어젯밤의 그 육개장 왜이렇게 맛있어. 게다가 다 먹고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했는데 뱃속이 편안하고 따뜻하다. 너무 늦게 먹었지만 뭐랄까, '아, 되게 잘먹었다, 먹기를 잘했다'는 느낌이 드는거다. 내 속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준 느낌적 느낌... 그래서 나는 힘을 내어 책을 계속 읽기로 한다. 4월 말일이 되기 전에 이 책을 반드시 다 읽겠다! 그렇게 나는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책을 들고 침대로 향했다. 침대...는 무엇인가요? 침대에만 들어가면 왜 졸려요? 나는 졸음이 쏟아지는 걸 참아가며 읽고 또 읽고 넘기고 또 넘기고, 그렇게 새벽 한시를 넘기면서 이 책을 드디어 다 읽었다. 4월 30일 01:00... 되시겠다. 내친 김에 리뷰를 쓰려고 했지만 진짜 너무 졸렸다. 평소에 내가 잘 시간을 넘겼으므로 더이상 버틸 수가 없어. 나는 이 책을 완독하고 잠이 든다. 딥슬립...은 아니었지만 어쨋든 잤다.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는 다른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들과 마찬가지로 읽기를 잘한 책이었다. 해답이 교육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너무 짜릿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그래, 공부해야해, 여자들아, 공부하자! 배워! 공부해! 교육이다! 막 이런 마음이 되었고, 해답이 교육이라고 말해준 베티 프리단에게 너무 고마운거다. 그런데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는 부분은 사실 내 개인적으로 이 결론에 앞선, <13 박탈당한 자아> 꼭지였다. 제목은 박탈당한 자아이긴 하지만, 우월감을 가진 사람에 대해 계속 기술한다. 이 꼭지에서 가장 많이 가져온 연구 결과는 1930년대 후반의 '매슬로 교수'의 것이었다. 섹슈얼리티와 '우월감', '자아 존중', '자아 단계'의 관계를 연구한 결과인데, 이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다.
나는 일전에 남자친구 때문에 괴로워하는 회사 동료에게 '니 삶의 우선순위와 유일한 가치가 남자친구이기 때문에 그렇게나 괴로운거다, 니 삶의 목표를 여러갈래로 찢어라'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바라보고 사는게 단 하나라면, 그 하나가 무너졌을 때 나 역시 무너지지 않겠는가. 나는 동료에게 남자친구 말고도 널 살게할, 너를 기쁘게 해줄 다른 것들을 더 찾아보라고 말했었다. 그렇게 남자친구만 보며 살지 말라고. 이건 무슨 가치이든 마찬가지다. 단 하나라면, 그 하나 때문에 내 삶이 무너지기가 너무 쉬운 거다. 이 책에는 섹스에 집착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도 나오는데, 자신의 가치 혹은 삶의 기쁨이 섹스인 사람이라면, 그 섹스에 더 열중하게 되고 최선을 다하게 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섹스에 만족할 확률은 적다는 거다. 그리고 섹스에 만족하지 않으면 그때부터 또 괴로워지기 시작하는거다. 당연한 얘기가 아닌가.
매슬로 교수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서 자신에 대한 '우월감'이 높은 여성이 성적 만족감을 더 크게 느낀다는 걸 밝혀냈다. 뭐 이건 그냥 아는거라서 굳이 연구까지 해야했었나 싶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당연한 거다. 이를테면 다시 섹스얘기로 돌아가서, 남자들 중에는 특히 유독 더 섹스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다. 섹스 영상을 뒤져보려고 하고 더 섹스를 잘하고 싶고 더 섹스를 많이 하고 싶고, 그래서 많은 여성과 섹스한 게 자랑이고.... 그러니까 섹스섹스 하다가 섹스로 망하게 되는거다. 하지 말아야 할 짓까지 하게 되고, 그렇게 이섹스 저섹스 섹스천국 섹스만세 하노라면, 내 여자친구와의 섹스에서 만족감을 느낄 확률은 매우 적어지는 거다.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여자친구에게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자꾸 요구하게 되기나 하고. 게다가 분명 여자친구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섹스하고 나면 왜이렇게 공허할까...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이다.
반대로 섹스에 미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하는 게 좋고, 하고 싶고, 하면 즐겁지만, 하지 않는 매순간에 섹스섹스 머릿속이 온통 섹스로 가득해~ 이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사는 것. 돈도 벌어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하고 타인과의 관계도 유지해야 하고. 세상엔 내가 에너지를 쏟을 게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자아실현을 위해 자기계발을 위해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삶을 이런 형태로 조금 바꿔보면 어떨까, 같은 다른 많은 생각들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 귀에 섹스.. 이렇게는 안되는거다. 섹스는 삶에 있어서 부차적인 것이 되는거지. 매슬로 교수의 연구에서는, 그렇게 섹스를 부차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섹스에 만족감을 얻고 오르가슴을 느낄 확률이 매우 크다고 말하는 거다. 아니, 너무 당연한 얘기 아닌가. 내 경험을 놓고 봐도 섹스에 안미친 남자가 섹스를 가장 잘했다.
무엇보다 '우월감이 강한 여성' 에 대한 매슬로 교수의 모든 연구결과들이 하나를 가리켰다. 뭐냐, 나다. 나는 읽다가 '뭐야, 내 얘기하는건가' 했어.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까페에서 읽다가 다이어리에 메모했다. '내 얘기 하는 줄?' 이렇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 몇 구절 가져와보겠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매슬로 교수는 자신의 연구에서 자아실현에 성공한 사람들이 항상 삶에 사명감을 느끼고 헌신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이 사명감은 거대한 세계 속에서 그들을 살아가게 하며, 매일매일 살아가는 매우 소소한 것들에 대한 개인적 느낌과 선입견을 넘어선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삶에서 어떤 임무를 가지고 있고, 성취해야 할 과업이 있으며, 외부에는 자신들의 에너지를 대부분 쏟는 어떤 문제들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과업들은 개인적이거나 이기적이지 않으며 일반적인 인류의 이익이나 일반적인 국가의 이익에 관심을 가진다. 보통 기본적인 문제와 영속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관습적으로 가능한 한 광범위한 참도의 틀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넒고 작지 않으며, 일반적이고 지엽적이지 않으며, 순강적이기보다는 지속적인 가치관의 틀 안에서 일한다. (p.555)
매슬로는 더 큰 세상에 살며 자아실현을 달성하는 사람들은 어찌된 일인지 그날그날의 삶을 즐기는 것과, 그들만이 유일한 세계인 사람들에게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날 수 있는 사소한 일에 결코 지루해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이런 경험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진부한 경험이 된다 해도 경외, 즐거움, 경이, 심지어 황홀감을 가지고 새롭고 소박하게 삶의 기본적인 것들을 계속해서 감상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또한 ˝성적 쾌락은 자아를 실현하려는 사람의 가장 격렬하고 황홀한 완벽함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는 강한 인상을 준다.˝고 보고했다. 더욱 넓은 세계에서 개인의 능력을 성취하는 것이 성적 환희의 새로운 전망마저 열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섹스나 사랑도 인생을 추동시키는 힘은 아니다.(p.556)
자아를 실현한 사람들은 관계를 맺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사랑하게 되고 성적 만족도도 증가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성관계는 에전보다 더 나아졌으며 항상 더 나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이런 사람들에게서 밝혀지는 매우 평범한 보고다.˝) 이런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자신이 되고 스스로에게 진실해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더 깊고 심오한 관계를 맺고, 더 포용하고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더 완벽하게 식별할 수 있고, 자신의 경계를 더 많이 초월하며,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p.557)
자아실현에 힘쓰는 사람들,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은 고차원적인 욕구를 가지고 살아간다. 매슬로 교수는 이런 사람들은 섹슈얼리티의 부재를 쉽게 인정한다고 한다. 그래, 없어도 사는데 지장이 없는 거다. '고차원적인 욕구 수준에서 산다는 것은 기본적인 욕구의 좌절과 만족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받아들이며,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쉽게 소홀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들이 기쁠 때 진심으로 즐기도록 한다. (p.556)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이 무엇보다 삶에 있어서 습관적으로 어떤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를 함께 하는 사람들, 그들 모두가 삶에 있어서 습관적으로 어떤 임무를 가지고 살아가는 게 아닌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들. 4월이 하루 남았다고 다들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책을 읽고 끝마치려는 사람들. 아, 정말 내가 성공했지만, 내가 멋지다. 뭐랄까, 뭐가 돼도 될 사람이야, 정말. 이런 습관적임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게 사실 내게도 좋다. 매일 책을 읽는 것도 그렇고 글을 쓰는 것도 그렇다. 어제 퇴근 후에 까페에 들러 책을 읽고 있다고 했더니 여동생은 '언니 피곤하지 않아? 여태 회사에서 일했잖아' 라고 물었다. 나는 여동생에게 '이렇게 책 읽는 시간을 잠깐이라도 부러 내지 않으면 내 스스로가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돼' 라고 말했다. 특히나 일이 고되고 지칠수록 책읽기를 멈출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는 하루종일 회사에서 일도 많았고, 그래서 평소보다 늦게 끝났다. 이럴 때 나는 꼭 부러 책을 읽는 시간을 내고 싶어진다. 그렇게 읽는 걸로 그치는 게 아니라,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메모하고 이렇게 글로 써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게다가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은 관계 유지도 잘하고 또 사랑도 더 단단해진다고 하는 것 역시 인상적이었다. 내가 그랬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오래 사랑했다고 애정이 식는게 아니라, '매일매일 어제보다 더 사랑해' 라는 마음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렇게 상대를 사랑하는 나 자신에 대한 만족도도 함께 커져간다. 사랑은, 그러니까 내가 하는 사랑은, 상대와 나에게 동시에 기쁨을 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매슬로 교수가 연구한 결과에 나오는 그 '우월감을 지닌 여성'에 다름아닌 것이다.
아... 멋져. 매일매일 나는 스스로 내가 너무 멋져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매슬로 교수는 사람들 모아놓고 연구를 한건데, 그냥 나만 관찰해서 써도 충분히 연구결과가 나온다. 우월감을 지닌 여성이 어떻게 사는지, 어떤 태도로 사는지 다 알 수 있어.
어제 엄마는 아빠와 동네 지인분과 함께 쑥과 미나리를 캐러 다녀오셨다. 집에 미나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나는 엄마에게 '그렇다면 미나리 삼겹살을 먹자!' 했고, 그래서 엄마는 돼지고기를 사러 가신 거다. 으하하하하하하핫. 그렇다. 우월감을 가진 여성은 매순간 삶의 목표를 하나씩 정해두고 그걸 클리어하면서 살아간다. 오늘 나의 목표는 미나리삼겹살이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