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엔 건강검진을 받고 왔다. 이맘때쯤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면 병원에는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역시 연초에 해야해, 그래야 사람들 많지 않을 때 한가하고 여유롭게 할 수 있어, 다음엔 연초에 할거야, 다짐해 보지만, 그 다음이 되면 '음.. 몸무게를 좀 더 줄이고 해야지' 하고 자꾸 미루고 미루다가 별로 줄 생각 없는 몸무게 때문에 다시 연말이 되어버려... 늘 되풀이 되는 못낫이 회전..
사실 6월에 수술도 했겠다, 딱히 건강검진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다. 안해도 되지 않나, 라고 이백번쯤 생각했다. 하지 말까, 하지말자, 까지도 계속 생각했는데, 딱 하나 걸리는 게 갑상선이었다. 갑상선..갑상선 때문에 해야될 것 같다... 2년전 건강검진에서 갑상선 초음파를 했을 때, 갑상선에 혹이 있다고 했던 터였다. 위험해 보이지는 않지만 6개월마다 한번씩 점검을 받으라 했었는데, 나는 그 뒤로 검사를 받지 않았고... 그렇게 2년이 되어버린 것. 이번에 하자, 이번에. 그래, 귀찮아도 검진 받는거야!
그렇게 아침 일찍 병원을 찾았다. 문진표를 작성하고 일단 닥터를 만나 이것저것 체크를 했다. 닥터는 자연스레 유료 혈액검사를 권했다. 70가지의 검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여름에 수술도 했고, 그 전과후에 이래저래 혈액검사를 차고넘치게 했으니 그건 하지 않겠다 말했다. 그래도 기본적인 혈액검사는 해야했는데, 팔뚝에 주삿바늘 들어가는 걸 보면서, 와, 2019년은 진짜 피검사의 해구나, 싶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피검사를 했는가. 수술 전에는 수술 전이라 해야했고, 수술 직후에는 직후라 해야했고, 퇴원한 뒤에도 몇차례 가서 갈 때마다 피검사를 해야했다.
주삿바늘을 꼽는 건 단지 피검사 때문은 아니었다. 연초에도 곧 쓰러질 것 같은 상태가 되어 병원에 가 수액을 맞았고, 지난 토요일에도 병원을 찾았다가 드러누워 수액을 맞아야 했어. 간호사쌤은 수액을 놓기 위해 바늘을 꽂으면서 "어머, 바늘을 꼽자마자 피부 색이 파랗게 변하네요" 했다. 아직도 수액 맞았던 자리는 누런 멍이 남았는데, 이 상태로 또 오늘 피검사를 한거다. 내 팔에 주삿바늘이 2019년에 정말 많이 들어가는구나. 이것이 바로 나이들어간다는 것인가...
가장 걱정됐던 갑상선 초음파 검사. 크기와 모양의 변화를 본다고 했는데, 하아- 크기가 좀 커졌다고 했다. 그러나 모양이 딱히 변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그러니 6개월 뒤에 꼭 다시 재검을 하라는 거였다. 알겠다고 말하면서 물었다. 혹시 갑상선암이라면 이 초음파 검사로 알 수 있는거죠? 의심이 되면 조직검사를 하자고 할텐데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고 했다. 나는 꼼짝없이 6개월 뒤에 갑상선 검사를 다시 해봐야겠구나. 혹은 왜 거기에 있고 혹은 그리고 왜 커진 것인가... 혹아...........
모든 검사가 끝나고 병원을 나섰다.
건강검진을 해야 해서 오늘 아침을 굶은 터다. 게다가 갑상선에 있는 혹이 좀 커졌다고 해서 울적했다. 나는 병원 가까이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렀다. 텀블러는 이미 준비해왔지. 그렇게 따뜻한 베이글을 주문했다.
배가 고팠고 울적했는데 베이글은 따뜻하긴 했으나 생각처럼 맛있진 않았다. 여름에 뉴욕에서 먹었던 베이글 생각이 났다. 베이글 먹고 싶어 뉴욕 간거였는데 진짜 맛있게 먹었더랬지. 안에 크림치즈가 꾸덕꾸덕 잔뜩 쳐발라져있고 양파와 토마토와 또 뭐더라.. 아무튼 뭐가 들어가서 정말 맛있게 먹었는데, 스타벅스의 베이글은.. 그냥..... 베이글이었다. 물론 안에 치즈와 햄과 계란이 들어 있었지만... 나는 베이글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구나, 를 깨달았달까.
나는 잘 쉬지도 못하는 사람이고 잘 멍때리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 있는 시간을 잘 견뎌내지를 못하는 사람이야. 회사에 출근했다가 건강검진 받으러간거라 가방은 두고 갔는데, 그래도 나에겐 스맛폰이 있지. 이 맛없는 베이글을 먹으면서 나는 전자책을 펼쳤다. 읽다만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렇게 책을 읽는데, 그렇게 책을 읽는 내가 너무 만족스러웠다. 아, 하다못해 스맛폰에도 읽을 책이 있어서 이렇게 뭔가 먹는 시간을 도와준다. 나를 가득 채워주는 느낌. 내가 나를 채워주기 위해 내가 미리 준비하는 나... 이렇게 멋진 나라니. 장난 아니야 ㅠㅠ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사실 힘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려는데 너무 못일어나겠는 거다. 어젯밤 열두시 넘어 잤으니 너무 당연하지.
아니, 나는 일찍 자려고 아홉시부터 드러누웠단 말이야? 졸려서 누웠는데 으윽 잠이 안온다. 그래, 책 읽다 보면 잠이 오겠지 싶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책이 재미있어서 자기가 싫어지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아니 그런데 몇시나 됐지? 하고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어버린 거다. 으이크 이런. 내일 피곤하겠군, 하고 그제서야 잠을 청했는데 흑흑 ㅠㅠ 오늘 아침에 알람 한 번 끄고 ㅠㅠ 두번째 알람에 일어났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러면서 어찌나 힘들던지. 아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거 진짜 그만하고 싶다고 이천번 생각했다. 나 20년간 돈 버느라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왔어. 딱히 아침형 인간인 것도 아닌데. 그런데 몸이 아침형 인간에 맞춰져버리고 말았어. 싫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제 그만, 그만하고 싶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거 그만하고 싶어. 더이상 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꾸역꾸역 회사를 나왔다가 건강검진을 받고 베이글 먹으러 간 것이다. 갔다가 책을 읽으면서, 언제나 책이 준비되어 있는 멋진 나란 녀자... 하트뿅뿅.....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
여동생과 대화중에 여동생이 그랬다. '언니는 언니가 살고 싶은대로 잘 살고 있잖아, 하고 싶다는 거 다 하면서.' 라고. 엄마가 내게 했던 말도 떠올랐다. '너는 니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잖아.' 내 주변 사람들은 내게 다들 그렇게 말했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잖아, 살고 싶은대로 살고 있잖아, 필요한 거 니가 다 가져가며 살잖아, 라고.
그러고보니 그랬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고 있었다. 어릴적부터 뉴욕에 가고 싶었는데 뉴욕에 벌써 세차례나 다녀왔다. 십이년전에 만나 한결같이 좋아했던 남자와 뜨거운 연애도 했다.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낼거야, 라고 오래전부터 말하고 다녔는데, 그것도 했다. 그러고보니 나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가고 있었고,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십년간 꼬박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싫다, 중얼거리면서 출근하는 시간들이 필요했다. 졸려 죽겠는데, 그만두고 싶다고 칠만번쯤 부르짖으면서도 꾸역꾸역 직장에 나갔기 때문에, 나는 책을 사서 읽고, 여행을 가고, 풍요로운 연애도 했다. 내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내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고, 많은 것들을 하지 못했겠지.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것들을 감당해야 하는 내가 있었다.
이젠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 살기 위해 당분간 아침형 인간의 삶을 더 감당해야지. 동남아 한 달 살기를 하기 위해 아침형 인간의 삶을 좀 더 견뎌내야지. 하나를 내어주어야 하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기 싫지만 진리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