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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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다 읽은 후, 나는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새로운 작가를 한 명 더 얻게 됐다. 그것도 젊고 재능있는 작가를 말이다. 누가 봐도 명백하게, 이야기 자체의 매력이 상당하다. 나름 기대도 많이 하고 본 책이건만 그 기대를 가뿐히 뛰어넘는 이야기였다면 이 책에 대한 진솔한 감상이리라. 

9.11 테러란 말도 안 되는 일이, 역사적 사건이 전세계와 개인에게 준 충격이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어린 오스카는 이 사건으로 인해 하나뿐인 사랑하는 아빠를 잃었다. 나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해준 누군가를 잃는 거대한 슬픔과 상실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오스카의 이야기는 오스카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와 겹쳐진다. 각각 다른 시간, 다른 사건이지만 핵심은 동일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뉴욕 거리를 배회하며 다양한 '블랙'씨를 찾아다니는 소년. 참신한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넘치는 사랑스러운 오스카를 보면서 미소 짓게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죽음으로 인해 어느날 갑자기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슬픔인지는 다행히도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른다. 그래서 가끔 상상해본다. 그건 끔직한 절망이겠지. 처음엔 앞으로 어떻게 혼자 살아가야 할지 몰라서, 감당이 안 되는 두려움과 슬픔 앞에 그저 막막한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통한 간접적인 아픔이 유추되고 전달됐다 뿐이지 내가 온전히 경험한 사실은 아니다. 직접 경험한다면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상처는 그 이상이겠지. 피할 수 없어서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 세상엔 많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을 겪게되고 서서히 치유받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사랑이란 흔한 말처럼 우리를 감동시키는 말은 없다. 이것이 진실이다.  

이야기를 통해 지금 내 곁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살아 있을 때 자주 해야겠다는 걸 다시금 깨닫고 다짐하지만 실천하기란 왜 이리도 어려운 것일까. 사랑하는 데도 말이다. 읽는 순간 이야기에 사로잡혔다. 책의 구성, 편집이 주는 효과적인 역할들 또한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강력하고 진실된 이야기가 그야말로 매혹적이었다. 작가가 얼마나 뛰어난 독창성을 발휘했는지 읽어보면 알게 된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이건 걸작이다. 작가가 철학과 문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깊이있는 문학을 탄생시켰다. 슬프지만 거부할 수 없는 뭔가가 꽉 찬 소설이다. 이런 작가를 별로라며 싫어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강력한 내공을 가지신 분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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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 바이 미 - [할인행사]
로브 라이너 감독, 리버 피닉스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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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영화라면, 작품의 전체적인 만듦새가 뛰어나든 아니든 기본적으로 보통 이상의 감동을 받게 되곤 한다. 매번 그랬다. 그래서 성장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감독도 감독이겠지만, 리버 피닉스란 배우를 보고싶은 마음에서 보게 되었다. 역시 연기력이 출중했다는. 

시체 한번 찾아 보겠다고 네 친구들은 의기투합해서 난생 처음 마을을 벗어나 먼 길을 떠난다. 한마디로 모험심으로 똘똘 뭉친 소년들. 그들이 찾아내길 바랐던 대로 그들은 마침내 시체를 찾는다. 굳이 내용을 간단히 말한다면 이렇지만 어디까지나 주된 사건은 핵심을 말하기 위한 매개일 뿐이다. 이 영화가 진정 말하는 건 친구와 우정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열두 살. 그 유년시절의 순수하고 맑았던 시간을 함께 보냈던 그 기억들을 친구들을 가슴으로 추억하는 영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경험상 누구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잘 통하고 친했다 해도 지금은 전혀 연락하지 않는 과거의 친구들. 단지 과거의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친구의 얼굴이 몇몇 떠오른다. 이상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멀어진 친구와의 거리. 어린시절에 사귄 친구에게 한 것처럼, 스스럼없이 나 자신을 상대에게 보여주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평범한 것도 특별한 것이 된다. 시간과의 싸움에서 무엇이 이길 수 있을까. 소중한 의미를 가졌던 사람과 그 사람과 함께했던 기억만이 영원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네 명의 친구들이 모험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왔을 때, 마을이 작게 느껴졌던 것은 그만큼 그들이 성장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길을 떠나기 전보다는 한층 더 자란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영화가 전하는 의미가 사실적으로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지금 친구가 그립다. 만약 이 영화를 본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고 추억해준다면 싱긋 미소가 지어질 것이다. 

오래 만나지 못해도, 아니 어쩌면 평생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모르는 누군가를 만나고 사귀고 마음속에 간직한다는 게 쉬운 일 같지만 알고보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우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이 영화, 너무 좋다. 아련해지는 그 느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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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ve come to Jerusalem today as a novelist, which is to say as a professional spinner of lies.

오늘 저는 이 곳 예루살렘에, 소설가로서, 거짓말의 묘수라 할 수 있는 존재로서 와 있습니다. 
  
Of course, novelists are not the only ones who tell lies. Politicians do it, too, as we all know. Diplomats and military men tell their own kinds of lies on occasion, as do used car salesmen, butchers and builders. The lies of novelists differ from others, however, in that no one criticizes the novelist as immoral for telling them. Indeed, the bigger and better his lies and the more ingeniously he creates them, the more he is likely to be praised by the public and the critics. Why should that be?

소설가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정치가도 거짓말을 하며, 외교관도 군인도, 저마다의 상황에 맞춰 그들 고유의 거짓말을 합니다. 자동차 세일즈맨이나 외판원, 건축업자가 거짓말을 하듯이 말이죠. 그러나 소설가의 거짓말은 아무도 비도덕적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의 거짓말과 구분됩니다. 심지어 그들이 지어낸 거짓말이 크면 클 수록, 능숙하교 교묘하면 할 수록, 대중과 비평가의 찬상은 커져만 갑니다. 왜 그럴까요?
      

My answer would be this: Namely, that by telling skillful lies - which is to say, by making up fictions that appear to be true - the novelist can bring a truth out to a new location and shine a new light on it. In most cases, it is virtually impossible to grasp a truth in its original form and depict it accurately. This is why we try to grab its tail by luring the truth from its hiding place, transferring it to a fictional location, and replacing it with a fictional form. In order to accomplish this, however, we first have to clarify where the truth lies within us. This is an important qualification for making up good lies.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소설가는 효과적인 거짓말을 통해 진리를 재현하는 픽션을 만들어내고, 이로서 진실을 숨은 곳에서 이끌어내 재조명하는 작업을 해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진실을 원형 그대로 거머쥐어 묘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리를 픽션의 세계에 옮기고, 가공의 모습으로 바꾸어 진실의 끄트머리나마 움켜잡기 위해, 진실을 은신처에서 꾀어내기 위해 노력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을 이루려 할 때에는 가장 먼저 우리 내부의 어느 곳에 진실이 내재하는지를 명확히 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좋은 거짓말을 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요건입니다.
        


Today, however, I have no intention of lying. I will try to be as honest as I can. There are a few days in the year when I do not engage in telling lies, and today happens to be one of them.

그러나 오늘에 한해 말씀드리면, 저는 거짓말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저는 가능한 한 솔직하고자 합니다. 제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날은 일 년 중 며칠에 불과하지만, 오늘이 바로 그런 날들 중 하루입니다.
    


So let me tell you the truth. A fair number of people advised me not to come here to accept the Jerusalem Prize. Some even warned me they would instigate a boycott of my books if I came.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많은 이들이 저에게 예루살렘 상 수상식에 가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제가 예루살렘에 갈 경우 제 책의 불매 운동을 벌이겠다고까지 했습니다.
    
The reason for this, of course, was the fierce battle that was raging in Gaza. The UN reported that more than a thousand people had lost their lives in the blockaded Gaza City, many of them unarmed citizens - children and old people.

이러한 일들은 물론, 가자에서 벌어진 격전에 연유한 것입니다. UN은 약 천여 명에 이르는 인명이 봉쇄된 가자시에서 희생되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이 비무장 시민, 그 중에서도 어린이와 노약자들이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Any number of times after receiving notice of the award, I asked myself whether traveling to Israel at a time like this and accepting a literary prize was the proper thing to do, whether this would create the impression that I supported one side in the conflict, that I endorsed the policies of a nation that chose to unleash its overwhelming military power. This is an impression, of course, that I would not wish to give. I do not approve of any war, and I do not support any nation. Neither, of course, do I wish to see my books subjected to a boycott.

수상에 관한 공지를 받은 이후로 몇 번이고, 이러한 시기에 문학상을 받기 위해 이스라엘에 가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지 자문자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갈등을 빚고 있는 양자 중 한 편에 서는 인상을 주게 되는 게 아닐까, 압도적인 군사력을 남용한 정책을 묵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물론 이러한 인상은 제가 의도하는 바가 전혀 아닙니다. 저는 어떠한 종류의 전쟁도 용납하지 않으며, 그 어떤 국가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 책이 불매운동에 부쳐지는 것은 단호하게 원치 않습니다. 
  
Finally, however, after careful consideration, I made up my mind to come here. One reason for my decision was that all too many people advised me not to do it. Perhaps, like many other novelists, I tend to do the exact opposite of what I am told. If people are telling me - and especially if they are warning me - "don't go there," "don't do that," I tend to want to "go there" and "do that." It's in my nature, you might say, as a novelist. Novelists are a special breed. They cannot genuinely trust anything they have not seen with their own eyes or touched with their own hands.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고 끝에 저는 이 곳에 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결정의 한 가지 이유는, 너무나 많은 이들이 저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소설가들과 마찬가지로, 저는 하지 말라고 들으면 꼭 해 보고 싶어지거든요. 만약 사람들이 "거기 가지 말아요", "그건 하지 마요" 라고 제게 충고하거나, 심지어 경고 따위를 한다면, 저는 꼭 "거기 가고" 싶어지고, "그렇게 하고" 싶어집니다. 이는 제 본성이고, 어쩌면 여러분은 이를 소설가적 기질이라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가는 독특한 족속들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것이 아니고서는 쉽사리 믿으려 들지 않습니다.
   
And that is why I am here. I chose to come here rather than stay away. I chose to see for myself rather than not to see. I chose to speak to you rather than to say nothing.

그리고 바로 그러한 기질이, 제가 이 곳에 자리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멀리서 경계하고 있기보다는 여기까지 올 것을 선택했고, 보지 않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것을 선택했으며, 침묵하는 것보다, 여러분께 제 목소리를 전하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This is not to say that I am here to deliver a political message. To make judgments about right and wrong is one of the novelist's most important duties, of course. It is left to each writer, however, to decide upon the form in which he or she will convey those judgments to others. I myself prefer to transform them into stories - stories that tend toward the surreal. Which is why I do not intend to stand before you today delivering a direct political message.

그렇다고 해서 이 곳에 제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는 것은 소설가에게 주어진 중요한 책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의 판단을 타자에게 어떤 식으로 전달할지, 그 형식을 결정하는 것은 작가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을 예로 든다면, 저는 저의 판단을 가상 속 이야기에 옮겨 담기를 선호하며, 그것이 바로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직접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삼가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Please do, however, allow me to deliver one very personal message. It is something that I always keep in mind while I am writing fiction. I have never gone so far as to write it on a piece of paper and paste it to the wall: Rather, it is carved into the wall of my mind, and it goes something like this:

그러나 제게, 단 하나, 매우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제가 소설을 쓰면서 언제나 마음속에 두고 있는 그 무엇입니다. 종이에 써서 벽에 붙인 적은 없지만, 그러나 제 마음에 벽이 있다면 거기에는 분명 이렇게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Between a high, solid wall and an egg that breaks against it, I will always stand on the side of the egg."

"만일 높고 단단한 벽과 그에 부딪히는 달걀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언제나 달걀의 편에 설 것이다" 
    
Yes, no matter how right the wall may be and how wrong the egg, I will stand with the egg. Someone else will have to decide what is right and what is wrong; perhaps time or history will decide. If there were a novelist who, for whatever reason, wrote works standing with the wall, of what value would such works be?

그렇습니다. 아무리 벽이 옳고 정당하며 아무리 달걀이 틀렸을지라도, 저는 달걀의 편에 설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다른 이들이 판단할 일입니다. 어쩌면 시간이, 혹은 역사라 불리우는 것이 판단할지도 모르지요. 만약 어떤 이유에서건, 벽의 편에 서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What is the meaning of this metaphor? In some cases, it is all too simple and clear. Bombers and tanks and rockets and white phosphorus shells are that high, solid wall. The eggs are the unarmed civilians who are crushed and burned and shot by them. This is one meaning of the metaphor. 

이 은유가 혼란스러우십니까? 경우에 따라 이는 매우 단순하고도 명료합니다. 폭격기, 탱크, 로켓과 백인탄은 높고 강고한 벽이며, 달걀은 그 무기들로 불태워지고 총격을 당한 비무장 시민입니다. 이것이 제 은유의 한 가지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This is not all, though. It carries a deeper meaning. Think of it this way. Each of us is, more or less, an egg. Each of us is a unique, irreplaceable soul enclosed in a fragile shell. This is true of me, and it is true of each of you. And each of us, to a greater or lesser degree, is confronting a high, solid wall. The wall has a name: It is The System. The System is supposed to protect us, but sometimes it takes on a life of its own, and then it begins to kill us and cause us to kill others - coldly, efficiently, systematically.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좀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우리들 한 명 한 명이,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달걀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들 저마다가, 유일하고 대체할 수 없는 영혼을 약한 껍질 안에 숨기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 모두가, 정도의 차는 있을지언정 각각 높고 강고한 벽과 직면해 있습니다. 그 벽에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스템, 이라고 하는 이름을요. 시스템은 애초에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때로 자가증식을 통해 우리를 죽이기 시작하고,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를 차갑게, 효과적으로, 조직적으로 죽이도록 유인합니다.  
   


I have only one reason to write novels, and that is to bring the dignity of the individual soul to the surface and shine a light upon it. The purpose of a story is to sound an alarm, to keep a light trained on The System in order to prevent it from tangling our souls in its web and demeaning them. I fully believe it is the novelist's job to keep trying to clarify the uniqueness of each individual soul by writing stories - stories of life and death, stories of love, stories that make people cry and quake with fear and shake with laughter. This is why we go on, day after day, concocting fictions with utter seriousness.

제가 소설을 쓰는 목적은 단 한 가지, 개인의 고유한 영성을 드러내고, 그것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입니다. 이야기는, 우리의 영혼을 시스템의 거미줄에 엮이지 않도록 보호하는 경고음이자 보조등이 되어 줍니다. 저는, 소설 쓰기를 통해 개인 영혼의 고유함을 명확히 하는 것이야말로, 소설가가 이루어내야 할 소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사랑에 관한 이야기, 읽는 이로 하여금 울고 공포에 떨게 하며, 때로는 웃고 뒹굴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들을 통해서 말이지요. 바로 그 소명이, 작가로 하여금 날마다 깊은 고뇌 속에 소설을 엮어내게 만드는 이유가 되어 줍니다.  
 
My father died last year at the age of 90. He was a retired teacher and a part-time Buddhist priest. When he was in graduate school, he was drafted into the army and sent to fight in China. As a child born after the war, I used to see him every morning before breakfast offering up long, deeply-felt prayers at the Buddhist altar in our house. One time I asked him why he did this, and he told me he was praying for the people who had died in the war.

제 아버지께서는 작년에 90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퇴직 교사이셨고 불직에 몸담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대학원에 재학중이었을 때 군대로 출병되어 중국 전투지에 보내졌습니다. 전후 세대인 저는 어렸을 적, 매일 아침 식사 전마다 아버지께서 길고 긴 경독을 하시는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언젠가 아버지께 왜 그렇게 독경을 외우시냐고 여쭈었을 때, 아버지께서는 전쟁으로 희생된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He was praying for all the people who died, he said, both ally and enemy alike. Staring at his back as he knelt at the altar, I seemed to feel the shadow of death hovering around him.

아버지께서는 희생된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적군도 아군도 관계 없이. 불상 앞에 정좌한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저는 아버지 주위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느낀 듯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My father died, and with him he took his memories, memories that I can never know. But the presence of death that lurked about him remains in my own memory. It is one of the few things I carry on from him, and one of the most important.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고, 자신과 함께 기억도 같이 데려가셨습니다. 저로서는 알 길이 없는, 아버지의 기억들. 그러나 아버지를 둘러싸고 있던 그 죽음의 존재감만은 저 자신의 기억으로서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 이는 제가 아버지에 관하여 지닌 많지 않은 기억 중 하나이자, 가장 중요한 기억이기도 합니다.
  

I have only one thing I hope to convey to you today. We are all human beings, individuals transcending nationality and race and religion, fragile eggs faced with a solid wall called The System. To all appearances, we have no hope of winning. The wall is too high, too strong - and too cold. If we have any hope of victory at all, it will have to come from our believing in the utter uniqueness and irreplaceability of our own and others' souls and from the warmth we gain by joining souls together.


제가 오늘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말씀은 단 한 가지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인간이며, 국가 인종, 종교 등을 초월한 개별된 인격이며, 시스템이라 불리우는 굳은 벽을 마주한, 깨지기 쉬운 달걀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면으로 보아서도 우리에게 승산이란 없습니다. 벽은 너무나 높고, 강고하고, 차갑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단 한 가지 희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고유하고도 대체 불가능한 저마다의 영혼을 서로 공명하였을 때 얻을 수 있는 온기, 그 따뜻함에 대한 신뢰가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Take a moment to think about this. Each of us possesses a tangible, living soul. The System has no such thing. We must not allow The System to exploit us. We must not allow The System to take on a life of its own. The System did not make us: We made The System.

부디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명백한,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스템에는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스템이 우리를 착취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것이며, 시스템이 멋대로 자가증식을 계속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스템이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그 시스템을 만든 것입니다. 
  
That is all I have to say to you.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I am grateful to have been awarded the Jerusalem Prize. I am grateful that my books are being read by people in many parts of the world. And I am glad to have had the opportunity to speak to you here today.

예루살렘 상을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세계 각처에 제 책을 읽어주신 분들이 계신다는 것에, 깊은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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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상이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당연히 하루키의 수상 소식도 몰랐다.
일요일 저녁, 즐겨듣는 클래식 FM에서
우연히 하루키 관련해서 귀담아 듣다가
구글 검색창에 한번 쳐봤다가
블로그에 누가 해석해서 올려놨기에 조용히 퍼왔다.

하루키를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디까지나 그냥. 보통의 관심은 있다.

달걀의 편에 서 있겠다는 말이 인상깊었다.
수상을 두고 좀 시끄러웠었나보다.
그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난, 그저 수상소감이 궁금한 마음에 퍼온 것일뿐.
lalameans.egloos.com/4074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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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 여가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3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오세곤 옮김 / 민음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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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을 염두하고 책을 보는 편은 아니다. 희곡과의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은 까닭에 희곡은 언제나 내겐 새롭다. 이 책도 한 4년 가까이 묵혀둔 후에 가까스로 읽게 되었다면 더 말해 무엇하리. 부조리 연극이라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어본 것이 유일하다. 부조리극을 직접 눈앞에서 본다면 책과는 다른 어떤 생생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한 마음이다.  

책을 보면서 비슷한 감성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부조리는 역시 극명하게 다른 감성을 받기에 요긴한 것이 사실이다. 글을 읽는 내내 아니면 읽고난 후, "이게 뭐야! 이게 뭔가?" 싶으면서도 읽기를 멈추지 못했다. 논리적인 사고나 개연성 따위는 쓸데없는 것인 양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현실이란 삶이 부조리하기 때문에 이런 연극이 계속 지속가능한 생명부여를 받게 되는 것일까. 같은 모국어를 쓰건만 서로가 내뱉는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현실세계에서 얼마나 빈번한가를 생각해보면 부조리는 진정 참인 것이다.   

하나의 재미라는 것에도 여러 층위가 있기 마련인데, 정해진 재미를 깨는 재미가 있는 희곡집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재미와는 차이가 있으니 어쩌면 재미없다는 말이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뜻밖의 수확이라면 '부조리'라는 말이 시사하는 그 깊이가 상당하다는 것을, 약간이나마 깨닫고 느끼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인간이라서, 현실이라서 가질 수밖에 없는 부조리함이 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우린 '한계'라고 부른다. 한계를 직시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반연극을 보면서 '그래. 현실은 부조리한 것이지.'하고 고개를 끄덕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세 편의 연극들이 혁신적인 것은 알겠다. 부조리한 이야기 속에 내가 있었다. 그리고 현실과 진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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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3-31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저 오늘 이오네스크의 코뿔소보러가는데..
진짜 이 이오네스크나 베케트 희곡이 공연을 하면 극단에 따라 엄청 괜찮거나 완전 졸리거나 둘 중 하나거든요.
친구가 전에 대머리 여가수 보면서 계속 잤다고 그러던데 약간 떨려요. ㅋㅋ

거친아이 2009-03-31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연극보러 가시는구나~ 코뿔소는 어떤 내용인지 모르겠네요.
부조리연극, 제겐 좀 난해해요~ 부디 마음에 드는 공연보시기를.^^
 
평생감사 -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
전광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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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훌륭한 책이라고 해도 그 책의 좋은 영향이란 생명력은 그리 길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사람 내부에 있겠지. 금방 타올랐다가 이내 식어버리는 내 마음이 정말 싫다.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다른 모습으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내 모습은 그렇지가 못하다. 불신자처럼 사고하고 행동할 때가 많다. 다시금 마음의 재정비가 필요한 때이다. 

딱히 읽을 책이 없어서 보게 된 책이었지만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건 충분히 잘 알고 있는 말이고 질리도록 들어왔던 말이다. 하지만 그 말대로 실천하며 살고 있는가를 스스로 반문해보면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뜻대로 순순히 살아지는 것이 인생이 아니지 않은가. 경제적, 정신적, 신체적, 감정적인 문제가 곳곳에 즐비하다. 그런 복합적인 문제들 앞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 문제들과 대면하고 있는가. 불만과 불평이 입에 붙은 꼴이다. 불만을 갖는다 해서 불평한다 해서 달라지는 건 하나 없는데 매번 왜 이렇게 어리석게 행동하게 되는 것일까. 반성하는 시간이 없었고 달리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했던 연유도 있겠지만 가장 먼저 내 믿음이 떨어진 이유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내 안의 감사는 다 어디로 갔을까. 진정한 신앙회복이 이루어지고 부단히 노력한다면 평생감사하며 사는 삶도 가능하지 않을까.  

상황이 원만할 때 감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받아들이기 싫고 힘든 상황을 마주했을 때, 감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감사는 하고싶다 해서 내 마음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겠지. 악은 어리석은 것이다. 풍성한 삶을 원한다면 감사하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어렵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리라. 깨달아지는 것이 '은혜'라고 했다. 깨달았다면 거기서 그치지 말고 실천함으로 완전하게 은혜를 채워야겠다. 책을 보면 자연스레 마음이 움직이고 생각이 분명해져서 좋았다. 내 안의 불안감을 해결하고,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우선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적용, 신앙의 진화를 이루어낼 수 있도록 마음을 지키며 살아가야겠다. 마음을 헹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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