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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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김영하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나 내심 궁금했다. 그래서 [퀴즈쇼]를 읽었다. 주인공 이민수의 삶을 보면서 대한민국이란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20대 중의 한 명으로서 많은 부분 공감할 수 있었다. 환경이란 상황이 꼭 같지 않아도 우린 얼마든지 닮아 있다. 내면의 생각과 감정이 닮으면 그만큼 동화되긴 쉬운 법이니까. 

아직 뭐 하나 똑 부러지게 해 놓은 일이란 없기 쉽고, 정말 내가 무엇을 진정 원하는지에 대해서도 아리송하고, 어떤 대상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끊어올랐다가도 금세 사그라들곤 하는, 지나가는 개나 줄 냄비근성을 가진 나, 내가 몸소 경험한 20대란 바로 이런 것이다. 아직은 정말 분불명하다. 생각나는 대로 써 놓고 보니 너무 부정적인 듯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사실이니까. 내 삶을 고치기 위해서 정말 시작이란 것을 하기 위해서 나는 어떤 수단을 취하긴 했었던가. 정말 어쩔 땐 생각없이 멍청하게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그 헛헛함을 싫으면서도 열심히 노력하며 살지도 않는 자신이 불만스러울 때가 있다. 청춘이란 젊음에 대해 긍정적인 부분들도 생각 안 하는 건 아니지만 부정적인 것이 힘이 더 센 듯하다. 아마도 그건 내 근성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20대 가지고 있는 '불안정'이란 공통분모에서 생기는 현상일 수도 있으리라.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흐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정작 움직이고 변하는 건 없어 보인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 흡사하다.

뭐 하루이틀 얘기도 아니지만 '많이 배운 젊은' 백수들이 우리 사회문제로 인식된 지도 이미 오래. 이민수라는 인물의 목소리와 겹쳐진 작가의 의도가 무얼까 곰곰이 생각하며 읽었다. 그런데 좀 어렵다. 그러나 '김영하다운' 도시적 감수성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초반에 특히 온라인- 사이버 공간에 대한 예찬의 성격을 띤 대목들은 깊은 공감을 끌어내게 만든다. 모니터 너머의 그 무엇을, 그 이상을 마음속으로 품어본 적이 있다면 이민수와 서지원의 내면의 감정선을 따라가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김영하의 문학을 개인적으로 얼마나 이해하며 소화시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재미는 잘 알고 있다. 

주인공에 관한 몇몇 부분은 현실적으로 떨어지는 개연성 내지는 비현실성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상당 부분 참신하고 흥미로웠다. 작가가 말하는 20대 담론을 보면서 왜 이리 수긍이 가는 건지 원.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다. 달콤한 동시에 씁쓸하기도 한 20대의 이중적인 면을 모르지 않는다. 이야기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손에 닿는 거리에 존재하는 가까운 친숙한 이야기처럼 느껴져 아무래도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야기를 읽는 만큼은 행복했다. 모든 걸 망각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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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 / 열림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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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라는 소설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들은 좋은 소리들이 있었지만 그다지 나의 관심을 끌지는 않았었다. 관심이 생기지 않아서 안 보고 있었던 소설이었다. 책을 고를 때, 유행처럼 읽게 되는 책이 있다. '남들도 많이 봤다던데. 재밌나보지?' 하면서 따라 읽게 되는 소설들 말이다. 따라쟁이도 잘만 하면 꽤 괜찮은 짓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 바다. 

책을 덮은 후에도 이야기의 여운이 가슴을 따뜻하게 데웠다. 이런 감동을 느끼고 싶어서 사람들은 책을 읽는 것이리라. 어쨌든 소설 속 등장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배경 자체가 좀 생소했던 것은 사실이다. 문화적인 배경이 달라서 왠지 재미가 떨어질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생각이 든 원인은 무엇일까. 그건 순전히 나의 편견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한다.

기억의 생명력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특히 유년시절에 관한 기억들은 더더욱 생명력이 질긴 것 같다. 여간해서 죽는 일이 없다. 신분상의 차이는 있었지만 둘도 없는 단짝이었던 아미르와 하산. 우정이란 단어로 묶어두기엔 부족함이 느껴질 만큼 하산은 꾸밈없는 헌신으로 아미르를 진실히 사랑했다. 하지만 아미르는 그렇지 못했다. 역시 사랑의 무게는 똑같을 수 없는 건가. 1975년 겨울. 하산의 위험을 목격했으면서도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는커녕 겁이 나서 도망치기 바빴다. 물론 어린아이였으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과거의 잘못으로 인해 마음의 병을 얻은 아미르. 솔직히 아미르의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나도 과거에 저지른 죄란 경험이 있어 공감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누구에게도 한번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 숨겨두고 덮어둬서 남들은 아무도 모르지만 나만이 아는 내 과거. 남에게든 본인 자신에게든 속죄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문제가 아주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어도 아미르는 여전히 마음속으로 충분히 괴로웠고 과거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벗어나고 싶다고 벗어나지는 그런 차원의 문제는 아니니까. 그랬던 아미르가 마침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결심이란 용기를 내고 죄를 보상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서 나 또한 이런 모습을 배워서 내 과거를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했다. 진정한 의미의 속죄가 무엇인지를 바바의 모습 속에서 아미르의 모습 속에서 배울 수 있었다.

세대를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연싸움, 연쫓기의 전통도 인상깊었고, 거짓말과 배신, 비밀의 순환을 마침내 속죄함으로 끊어버린 후 비로소 자유함과 순수성을 회복하고 성숙해지는 아미르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이렇듯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요새 '속죄'란 단어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곤 한다. 아예 잘못 내지는 실수를 경험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어디 그게 쉬운 말인가. 현실적으론 불가능한 소리다. 진정으로 잘못을 속죄하는 것이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는 일일 것이다. 라힘 칸이 말했듯 '다시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이란 존재한다. 그 점이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아직 다 끝나지는 않은 것 같아서. 이런 아름답고 따뜻한 감동적인 이야기는 잊을 수 없다. 시간이 흘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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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 신경림의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시
신경림 엮음 / 다산책방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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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선생님께서 엮으신 시집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 책을 읽을 마음은 아마 생기지 않았으리라. 시와는 무관하게 사는 나 같은 사람도 신경림 시인은 알고 있다. 간혹 방송에 출연하실 때 멀리서 바라보는 게 다지만 역시 시인은 달라!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생각도 표현하는 언어도 다르다는 점이 시인들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만드는 것일까.

학교에서 시험을 위해서 배우는 시를 제외하곤 개인적으로 내 스스로 시를 접해본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다. 시는 어렵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시를 접한 방식 자체가 틀려서 그런 거 같다. 공부하듯 분석하고 해석하지 말고, 소리 내어 읽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시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일 텐데 말이다. 시에 대한 이해가 좁은 편인 나지만 마음을 흔들고 가슴을 적시는 시 앞에서는 감성이 자극되는 것이 사실이다. 둔감한 사람이라도 감성이 있는 한 다 느껴지기 마련이니까.

시인들의 이름이나 대표작도 모르거나 헷갈리기 십상이다. 꼭 알아야 할 의무는 없지만 기억할 수 있다면 삶이 더 풍요로워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선생께서 책머리에 쓰신 글 중에, 시를 즐기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즐길 수 있는 사람만이 즐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 이들은 남이 맛보지 못하는 삶의 즐거움을 하나 더 가지고 세상을 사는 셈이라는 말이 인상깊었다. 정말 기억해둬야 할 말 같다. 시를 대하기도 전에 난 항상 내 빈곤한 감성을 탓하곤 했다. 이번만은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며 천천히 음미하고 천천히 생각했다. 선생님께서 덧붙이신 간명한 해설의 힘으로 한결 수월하게 시를 느낄 수 있었다.

마음결이 미세하고 섬세한 사람들이 시를 쓰거나 시를 가까이 하는 것 같다. 무턱대로 어렵다고 치부해버리거나 시 자체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버리기에 안성맞춤인 시집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누군가를 절제된 감정으로 그리워하고, 강렬하게 저항하지만 언제나 차분한 어조로 저마다의 의미를 노래하는 시가 아름답다. '처음처럼'으로 인해서 시와의 멀어진 거리가 좁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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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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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역시 오쿠다 히데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이야기였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점이 책에 대한 관심과 집중도를 좀 더 높인 면이 없지 않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일단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으니까. 작가의 책을 여러 권 읽으신 분들은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오쿠다 히데오의 매력은 재미만이 아니다. 내가 오쿠다 히데오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야기 자체와 그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뛰어나고 매번 재미와 더불어 공감과 감동을 선사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스무 살, 이라는 말이 싱그럽다. 실상은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다. 다무라 히사오는 고향인 나고야에서 도쿄로 상경했다. 번듯한 구실이야 있었다. 대학 진학을 위해 재수학원을 다녀야 했으니까.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좀 더 너른 공간으로 나가고 싶었던 이유가 진짜 이유였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야기는 다무라 히사오의 외관상 청춘의 정점인 딱 10년의 세월을 담아내고 있다. 20대 초반에서 30대를 맞이하기 바로 직전의 시기까지. 딱 그만큼만, 그것도 하루라는 일상으로 압축해서 말이다.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극적이기에 잊히지 않을 이야기들은 누구나 한두 개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삶이 극박하고 각박하더라도 그런 이야기들은 잊을 수가 없다. 세월이 아무리 지난다 해도 말이다. 평생의 추억으로 기억으로 품고 사는 것이다. 

여섯 개의 에피소드로 이어진 히사오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기도 했고 너의 모습이기도 했다. 모두의 모습과 유사한 점을 가졌기에 이렇게도 공감하게 되는 걸까. 젊다는 특권을 가졌지만 그 특권을 사용하기에 여전히 주저하고 미적대는 모습을 가진 나. 뭔가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했으나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오래 지나지 않아서 곧 알게 되는 나이. 내가 생각하는 아니, 내가 경험한 젊음은 아직 이런 모습들 뿐이다. 꿈을 버리기엔 너무나 빠른 나이이고 아까운 나이이다. 그렇지만 실패를 두려워하고 제자리걸음만 하는 모습이라 스스로도 답답하다. 그렇다 해도 꿈꾸는 건 절대 멈출 수 없다. 나이로 규정짓는 청춘의 시기는 유한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청춘의 감정은 무한하다고 생각한다.

히사오가 그랬듯, 미숙했던 내가 점점 더 어른의 생각과 모습으로 성장하기를 희망한다. 죽기까지 무한한 내적 성장을 이루는 내가 되고 싶다. 단편처럼 외따로 존재하는 듯하지만 이야기끼리 서로 맞물려져 하나의 연작소설이 만들어졌다. 소설을 보면서 덩달아 내 인생에 있어서 잊히지 않는 에피소드는 무엇이 있을까 하며 떠올려보았다. 다행이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가볍고 유쾌하면서도 진지함을 내포하고 있는 소설이 좋다. 그런 점에서 오쿠다 히데오가 단연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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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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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드문 외진 미쓰세 고갯길에서 '요시노'라는 젊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고 이 살인사건을 시점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시작은 다분히 자극적인 '살인'이란 소재를 다루고 있으나 이 소설은 궁극적으로 살인과 그 살인에 연관된 범인을 추적해 찾아내려 하거나 허를 찌르는 트릭과 능란한 솜씨로 독자들을 현혹시키는 데 중점을 두는 그런 소설은 전혀 아니었다.

신간으로 이 책이 나온 후 얼마쯤 지나서였을 것이다. 우연히 들어갔던 블로그에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읽었더랬다. 아마도 책이 나온 건 알았지만 냉큼 사서 읽을 수는 없었던 상황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 읽겠다는 마음은 단단히 먹고 있었던 터라 서평이 더 눈에 띄였는지도 모른다. 그 블로거는 아마 요시다 슈이치의 글을 흠모하는 광팬인 듯 했는데, [악인]의 초반을 읽으면서 이건 요시다 슈이치가 쓴 문체 같지 않다는 낯설음에 약간 당황했었다는,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작가 특유의 문체와 작가가 글로써 표현하고 있는 이야기의 힘에 크게 매료된 듯 역시 요시사 슈이치라며 흡족한 만족감을 글로써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보지 않은 책에 대한 호평의 글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될까 아님 독이 될까. 나의 경우, [악인]의 경우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도움이 됐다. 이야기을 읽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고 그야말로 몰입하며 이야기 자체에 그리고 책을 덮은 후에 밀려오는 감정의 파문들을 가만히 느끼며 무엇이 악인일까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할 수 있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그의 작품은 고작 [7월24일 거리]만 읽어본 게 다지만 그 작품에 드러난 감정을 표현하는 작가의 글에 마음을 빼았겼던 것이 사실이다.그런 면에서 [악인]은 정말 작가의 역량이 발휘된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선악이라는 것. 정확히 말로써 설명하기는 힘든 부분인 것 같다. 인간은 전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존재이다. 모호하고 모순적인 존재이니까. 이런 인간을 전적으로 '악인'이라고 손가락질 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을 무엇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까. 이 세상엔 간절히 누군가를 만나고 연결되고 싶지만 혼자라는 감당하기 버거운 외로움이란 것이 허락된 사람들도 있다.

그 외로움이 '악'을 키워낸 발단이라면 소설 속에서처럼 현실에서도 외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고, 그런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이다. 우리 사회에 점점 외로움이 퍼져서 범죄가 많아진다는 논리가 영 틀린 소리는 아니니까 말이다. 

살인자인 유이치와 그런 유이치를 진심으로 바랐던 미쓰요를 보면서 자연스레 내가 당사자들이 된 듯 동화되었고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다양한 시점을 활용해서 사건의 중심인물과 주변부 인물들을 넘나들며 서술하면서도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고 있지 않은 작가는 마지막 큰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대체 누가 악인인가? 살인자라서 악인은 아니라는 것. 살인을 저지른 유이치를 두둔하는 말이 아니라 살인을 했으니까 악인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살인을 안해도 인간은 얼마든지 악인이 될 수 있으니까. 나는 결코 악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

[악인]은 무엇보다 인간 본성을 다루는 작품이다. 표면이 아닌 잘 드러나지 않는 우리들의 이면의 이야기 말이다. 작가는 훌륭히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던진 질문에 답을 찾는 노력은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자연스레 축적된 나의 편견에 일말의 균열을 안겨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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