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슬라보예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 중에서)

- 서양 불교는 광란의 시장 경쟁 속도에 대하여 내적 거리를 두고 무관심할 것을 설교하는 대중 문화의 한 현상이다. 이는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듯 보이면서 자본주의 역학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완벽하게 참여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이는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적 이데올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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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에서 발췌)

-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난 이런저런 사람이라 단정적으로 말들 한다. 착각이다. 자신이 누군지를 결정하는 건 자신의 선택이다. 자신이 했던 무수한 선택들이 하나하나 모여 결국 자신이 누군지 결정하는 거다. 선택의 누적분이 곧 당신이다.

- 사람들이 선택 앞에서 고민하는 진짜 이유는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선택으로 말미암은 비용을 치르기 싫어서다.

- 이거 사실, 수용키 어렵다. 누구나 야비하고 몰염치하고 이기적이며 부도덕한 선택, 한다. 그리고 그런 선택 뒤 대다수는 사연부터 구한다. 그런데, 그랬으면 하는 자기가 아니라 생겨 먹은 대로의 자신을 덤덤하게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순간이 있다. 자신이 멋지지 않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서 멋질 수는 결코 없는 법이란 걸 깨닫는, 이거 절로 안온다. 도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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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설동훈 <강자의 횡포가 만든 차별의 언어 - '코시안'>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소속 집단의 대변자가 되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그렇게 간주하기도 한다. 특히, 특정 집단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이 작용할 경우, 개인을 집단의 성원으로 파악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은 그 대상 집단에 속한 사람들과 인간적인 만남을 할 수 없게 마련이다. 예컨대, "이슬람교도들은 과격하고 폭력적이다." 라는 부정적 선입견을 가진 사람은 특정인이 이슬람교도라는 이유로 그와의 만남 자체를 기피할 것이다. 집단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그 집단의 성원으로 인지되는 개인은, 그 선입견 속의 전체를 대변하는 하나의 사례로 환원될 뿐이다.

'죠센진' 이 편견을 담은 용어가 된 것처럼 '코시안' 도 이미 그렇게 쓰이고 있다. 정책 대상 집단을 정확히 꼬집어 지칭하는 용어는 분명히 얼마 안 되는 어휘로 많은 뜻을 포함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담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기술하는 표현은 사용하되, 적시하는 말은 만들지 않는 것이 그들을 배려하는 기본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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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호근 <이성은 더 이상 이성적이지 않다>)

동일화하는 이성과 개념은 대상의 고유한 존재들 사이의 '다른 것', 즉 '차이' 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폭력을 가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그 대상은 두려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 대상이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동일화될 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닌 '알려진 것'이 되며,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인간은 두 가지 차원에서 '낯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세계와 교섭한다. (중략) 인식이든 노동이든 주체인 인간은 자기의 틀로서 대상을 파악하거나 변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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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평양의 교통경찰 동영상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평양 트래픽 레이디스’(Pyungyang traffic ladies)라는 제목의 이 동영상은 분주한 교차로 중간에 서서 수신호를 보내는 여자 경찰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마 외국인이 안내원의 눈을 피해 몰래 찍은 듯하다.

파란 제복을 입은 경찰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자동차에 신호를 보낸다. 두 발을 모으고, 팔은 언제나 직각, 한 번의 회전으로 뒤로 돈다. 그리고 교대 시간. 다른 여자 경찰이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팔을 흔들며 들어오고, 눈을 맞춘 두 경찰은 임무를 교대한다.

대부분의 누리꾼들은 “로봇 같다”는 반응에서 그쳤지만, 상당수는 북한 체제의 특성과 연관시켜 비판적인 댓글을 올리기도 했다. “저렇게 힘주지 않아도 되는데, 여하튼 교대할 때는 웃기다.”

하지만 이런 댓글도 있었다. “우리나라 백화점 가면 비슷한 로봇 많이 있던데, 저 정도 가지고 왜 그럴까? 우리나라는 손도 이상하게 흔들고, 말투도 야리야리하던데… 둘을 비교했을 때 어떤 게 이상할지 상상해보니 웃음만 나온다.”(아이디 ‘우리나라도’, 판도라티브이닷컴)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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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읽다가 문득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 생각났습니다. 뉘앙스가 굉장히 비슷하지요. 물론, 이 글은 칼 포퍼의 글 보다 좀 더 덜사회적이고, 더개인적이지만 말입니다.

- 중세의 마녀사냥과 근대의 혁명운동을 예시로 들고 있지만, 인간 보다 신을 중시했던 중세의 사례와 근대의 사례를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는 것은 쉽게 동의하기가 힘듭니다. 귀착점은 같았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출발점은 다르니까요. 근대의 사례는 적어도 구체적 사람에서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문화혁명이나 대숙청을 혁명운동과 등치시키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 "무엇무엇 해야한다"라는 도덕적 질타로 사회가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이 글이 개인적인 수준을 벗어나 사회적으로 인용되고 받아들여질 때, 분명 사회운동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에 이용될 것이라는 우려도 이 글이 가진 약점인 것 같습니다.

- 하지만, 이 글이 제게 분명 공감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직 구체적 사람을 잊지않은 보편타당한 운동의 모습을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늘 자신을 괴롭히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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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모름)

- 사람을 인격을 가진 존재로 존재로 보는 데는 많은 시간이 투자된다. 그래서 우리는 빠른 시간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질들을 찾아 내서 그것들로 그 사람들을 규정해 버리려 한다. (중략) 병든 사람들, 몸이 성치 않은 사람들, 거지들과 매춘부들, 또는 열등하다고 여겨진 종족에 속하는 사람들은 늘 다수로부터 박해받을 위협을 안게 마련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사회에 맞설 때는 개인이고, 자연히 소수일 수밖에 없다.

- 개인을 보지 못하고 대신 인류라는 추상적 개념을 앞세우는 이들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로이 캠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인류'와 모든 그런 추상적 존재들을 미워한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과 아이들'을 미워하고 앵무새들이나 강아지들을 기른다." 정부의 몸집과 힘이 점점 커지고 갖가지 단체들이 '풍속의 감시자들'로 나서서 사회적 소수 집단들을 억압하는 우리 사회에서, 영국 시인 로이 캠벨이 한 얘기는 모두가 곰곰이 음미해야 할 화두이다.

- 추상화된 존재가 아닌 구체적인 사람을 보는 방법은 무엇인가? 한 가지 방법은 자신과 맞지 않는 다른 특질들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사랑하기 쉬운 사람들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엔 주는 자가 그것을 받는 자에게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만들려는 힘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기 중심적이다. 사랑하면서 질투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 종교적 신념에서 나온 너그러운 사랑이나 사회적 이념에서 나온 높은 사랑일지라도, 강제가 도사려 있기는 마찬가지다. 중세 서양에서 마녀 사냥에 나선 종교 재판관들은, 자신들은 그녀들의 영혼에 대한 사랑에서 그런 일이 한다고 믿었으며, 근대에 이념을 뚜렷히 밝힌 혁명들도 '인류의 이름으로'나 '인민의 이름으로'라는 구호 아래 많은 사람들을 박해했다.

-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데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너그러움이다. 그렇게 구체적 사람들을 보게 된 뒤에야, 우리는 사랑스러지 못한 사람들 대신 추상적 '인류'를 껴안는 위험을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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