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위로받을 수 있는 한국가요가 없었어요. 전 그런 게 필요했거든요. 연애 이야기가 아닌 가사. 그러다 중3 때, ‘루징 마이 웨이’, 길을 잃었다. 첫 작곡. 속에서 나오는 말들을 무조건 다 썼어요. 나는 대화가 안 되는 애니까. 대화하는 게 힘드니까. 노래로 표현하고 노래로 말을 하자.” 작곡은 어떻게 하나. “그냥 멍하니 생활하다 어느 순간 머리에 계속 맴도는 멜로디가 있어요. 흥얼거리게 되고. 그걸 한 달 동안 달고 있다가 곡이 돼요.”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쓰는 거구나. “정말 그래요. 그냥 나와요.” 작곡 배울 생각은 안 했나. “작곡을 배우면요, 작곡 배운 사람들의 느낌이 나더라고요. 전 그냥 자유롭게 쓰는 게 좋아요.” 혹시 신데렐라, 그거 나중에 보니 고칠 데 있던가. “손댈 곳 없어요. 왜냐면 그 순간에만 만들어질 수 있던 거예요. 그게 완벽하고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좀 빈틈이 있고 뭔가 부족하더라도 그 상태로 충분해요.” 그렇지. 그 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니까. 고유하지. “맞아요.” 똑똑한 놈.

내가 표현하고 싶고 고민하던 것들이 이미 40년 전에 다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고 정말 충격받았어요. 잠시지만 음악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생각도 했어요. 이미 모든 것들은 이루어져 있는데. 물론 지금의 것을 표현하자고 생각을 다잡았지만. 모든 곡들이 다 훌륭해요. 그 앨범이 내 인생 최고의 앨범이에요.

제가 밖에서는 그런 유대감을 나눈 사람이 없어요. 그런 걸 해본 게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이 사람들이 처음이었어요. 하지만 이 사람들은 밖에 나가면 그런 관계를 이미 맺고 있던 사람들이 있잖아요. 친한 친구들, 사람들. 전 이 사람들뿐인데. 이제 밖에 나가면 달라질 테니까. 그게 너무 슬펐어요.” 그런데 말이야. 모든 것에 대가가 있지. 좋은 것조차. “맞아요. 이런 것도 배웠어요. 사람들은 필요한 부분을 취하는구나. 각자 필요한 부분을 상대방에게서. 그런데 전 그런 게 익숙하지 않았어요.”

근데 음악만 아는 사람, 멋없다. 사람이 음악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거든. 음악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거지. 음악 이외 관심 가는 건. “역사. 다큐멘터리. 옛날 흑백 사진. 오래된 풍경. 그런 거. 아, 남대문 불탔을 때 정말 엉엉 울었어요. 당장 서울로 올라가 남대문 앞에서 노래를 부르자. 존 레넌의 이매진.”(폭소)

이 아이, 시기와 질투, 배신과 이별, 곡해와 비난, 실패와 좌절, 그 모두를 겪게 될 게다. 삶이, 그러하니까. 안전했던 자신만의 공간은 속절없이 침범당할 것이고 옳고 그름은 더 이상 선명하지 않을 것이며 어디까지 불가피한 비즈니스인지 어디서부터 불순한 타협인지 그 경계는 모호해질 게다. 때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요구받는 자신 사이에서 하릴없이 배회할 것이며 때로 명백했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경험들을 맞이하게 될 게다. 그때, 그렇게 모든 게 불안하고 불분명하고 불완전할 때, 모든 이의 조언과 충고와 도움이 세상 모든 방향으로 갈라질 때, 이 아이가 기억해낼 수 있었으면 한다. 장재인을 장재인 되게 한 힘은 애초 장재인 안에 있었다는 걸. 그러니 오로지 자신에게만 귀 기울이면 된다는 걸. 이 말이 하고 싶어 만났다.

(한겨레/ 김어준, 장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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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처음에도 얘기했듯이, 혼자 감정노동하고 자폭한 것처럼 느껴지는 자기혐오감의 문제는 어차피 표현의 타이밍과 수위와 방식이 적절하게 조절되기까지(뭐 조절이 된다면 분노도 아닐 테지만) 거쳐가야 하는 과정. 더욱이 이 갈등관계를 감당하든 극복하든 마감하든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하는 그 ‘훗배앓이’의 무게감이란 원래가 그만큼 힘이 든 겁니다. 그간 비굴하게 웃는 낯으로 대응하며 참아온 것이 고통이라 생각하겠지만 한편으로는 피곤해질 갈등관계를 피하기 위한 자기보호 기제가 작용한 거였다는 거죠. 충돌 당시의 화끈한 긴장감만으로 끝날 게 아니라 그 후에도 가령 반론 먹고, 복수당하고 어쩌면 격한 소통을 통한 극적인 화해 등 참으로 스트레스 받으며 풀어야 할 후속조처 인간관계가 원래 남아 있다는 것이니까요. 이러나저러나 인간관계 ‘뒷감당’ 문제는 절대적인 시간경과를 필요로 하는 거랍니다. 쿨하게 물러난 그 아이는 나한테 어떻게 다시 나올 것이냐, 두근두근두근, 내 마음의 연평도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화를 내든, 울부짖든, 얘기하기 잘한 겁니다. 어쩌면 상대는 순순히 바로 사과를 할 수도 있고요, 당장은 서로 화내더라도 나중에 웃으면서 서로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과거에 상처받은 것 때문에 내 상상력이 불안감을 더 키우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막상 사람하고 대놓고 부딪히고 싸우는 게 의외로 논리적이고 깔끔할 수도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나저나 지금 이 얘기를 해버리면 상대를 상처 입히고 또 그것이 나한테 실질적으로 안 좋게 작용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말을 해버릴 때, 솔직히 그 ‘나를 놔버리는’ 기분이 약간 짜릿하지 않았나요? (한겨레/ 임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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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케팅과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잔뼈가 굵으면서 경험하고 배운 것은 감정과 이성 둘 다 위험하다는 것이다. 데이터와 프로세스를 무시하고 본능이 시키는 대로 직관적 감정으로 고객에게 접근했다 얼마나 많은 화를 불러왔던가? 논리는 없고 기분에 좌우되는 감정 커뮤니케이션은 사적인 기분으로 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먹통으로 만들곤 한다. 우리는 우리들 머릿속 ‘뱀의 뇌’(경영 컨설턴트 마크 굴스턴)를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고 논리만 내세웠다가는 역시 쓴맛을 보기 십상이다. 데이터를 충분히 확보하고 다각적으로 분석하여 도출한 확고한 결론을 논리정연하게 설득했는데도 안되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사람은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는 이성을 지배하는 좌뇌가 작동하지만 최종 의사결정을 할 때는 감정을 지배하는 우뇌가 작동한다(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는 연구 결과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내가 일을 통해 배운 지식과 경험 중에 확실한 것은 인간은 설득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득당한 것을 ‘졌다’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세상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관계를 나쁘게 만들지 말아야 할 상대라면 설득 커뮤니케이션 따위는 버리는 편이 낫다. 차라리 주어진 상황과 관계없는 엉뚱한 말을 하는 쪽이 더 유리하다. ‘사오정 전략’이라고 할까? (한겨레/ 탁정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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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진 그의 스토리, 한참을 듣다 보니 알겠다. 사람들이 믿지를, 않았겠다. 실제 있었던 그대로를. 사연과 내막 듣다 생각나는 건, 한 가지다. 참, 억울했겠다. 대체 그 수준의 분통은 어찌 견딜까. 왜 그런 이야기 하지 않았나. “누구한테요?” 누구든. 언론이든. “그런 이야기 한다고 뭐가 달라졌겠어요. 누가 믿었겠어요.” 맞는 말인데, 사람이 억울하면 일단 하소연부터 하는데. “저 또한 그 사람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모든 걸 믿었던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하는 거죠. 그걸 억울하다고 하는 게 오히려 사람 꼴 우스워지는 거잖아요.” 이건 뭐 하도 어른스러워 거의 어리석다 할 지경이다.

이런 정도 사람이면, 어떻게든 제 역경 넘어, 마침내 제 길 가는 거, 정말이지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야 공평하다. 그리고 그런 게 드라마다. (한겨레/ 김어준-황수정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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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주의는 민주주의를 수단이자 동시에 목적으로 인식했다. 또 자유주의를 자유시장에 대한 집착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이 이념의 본질적 핵심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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