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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여, 누군가 당신 시의 결점을 지적하면 겸손하게 귀를 열고 가만히 들을 일이다. 얼토당토 않은 비판이라도, 돼먹지 못한 소리라도, 개 풀 뜯어먹는 소리라 해도 달게 들어야 한다. 독자가 당신의 시를 오독한다고 독자를 가르치려고 대들지 말 것이며, 제발 어느 날짜에 쓴 시라고 시의 끝에다 적어두지 마라. 당신에게는 그 시를 완성한 날이 대단한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독자는 그 따위를 알려고 당신의 시를 읽지 않는다.
당신이 완성했다는 그 시는 당신의 마음속에서 완성된 것일 뿐, 독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언제든지 변화하고 성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유기체인 것이다.
당신의 이름을 지우고 보더라도 분명히 당신의 시임을 알게 하는 게 최선임을 잊지 말라."

(한겨레, 안도현 '시와 연애하는 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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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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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에게 연민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겠으나, 여튼 이 시는 잠시 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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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일 전에 친구 두 명을 만났습니다. 조금 그을린 얼굴과 근육 잡힌 팔이 지난 몇 개월의 시간을 대신 말하고 있었습니다.

- 길지 않은 시간동안, 그가 왜 나를 만나고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아니 고민을 하고 있기는 한지, 구구절절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나를 친구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라고 얘기하지도 않았습니다.

- 일선에서 고생하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한 구절을 뺀 나희덕 님의 시를 헌사합니다. 시인의 시를 제멋대로 고쳐 미안하지만, 그의 백이 내게 와서 열을 덜어내었다 한들, 둘을 곱해 더 큰 수가 되었으니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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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 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는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거기 별빛으로 그대 총총 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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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향기가 나부끼니.
하늘이 나에게 정다운 사람을 내렸도다.
은근한 정을 참을 수 없어 사랑의 시를 보내오니.
바라건대 홍사가 되어 동방에 들기를 바라노라.
                        
연월일 만생(晩生) 장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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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깊어 먼 곳 나무 희미하고
적적한 빈 방에 홀로 앉아

지난 일 생각하니 설움만 그득하고
산 밖이 태산이요 물 밖이 바다로다.

구의산 구름같이
바라도록 멀었는데

달 밝은 긴긴 밤을 나 혼자는 너무 외로워.
잠들어 꿈 속에서나 그리운 그 님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잠들려 해도 잠 못드는 이내 신세.
금강령 새벽달이 저편으로 기우는데

앉았다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앉아
이리 생각해도 저리 생각해도

지는 달 새는 밤에 잠시도 쉬지않고
긴 소리 짧은 소리
소리없이 슬피 우네.

<추풍감별곡> 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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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시집살이를 훤희 들여다보는 얄궂은 재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화려하지 않은 통속적인 운율이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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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살이 노래
작자미상

형님 온다 형님 온다 분고개로 형님 온다
형님 마중 누가 갈까 형님 동생 내가 가지
형님 형님 사촌 형님 시집살이 어뗍데까?

이애 이애 그 말 마라 시집살이 개집살이
앞밭에는 당추 심고 뒷밭에는 고추 심어
고추 당추 맵다 해도 시집살이 더 맵더라

둥글둥글 수박 식기(食器) 밥 담기도 어렵더라
도리도리 도리 소반(小盤) 수저 놓기 더 어렵더라
오 리(五里) 물을 길어다가 십 리(十里) 방아 찧어다가
아홉 솥에 불을 때고 열두 방에 자리 걷고
외나무다리 어렵대야 시아버니같이 어려우랴?
나뭇잎이 푸르대야 시어머니보다 더 푸르랴?

시아버니 호랑새요 시어머니 꾸중새요
동세 하나 할림새요 시누 하나 뾰족새요
시아지비 뾰중새요 남편 하나 미련새요
자식 하난 우는 새요 나 하나만 썩는 샐세

귀먹어서 삼 년이요 눈 어두워 삼 년이요
말 못해서 삼 년이요 석 삼 년을 살고 나니
배꽃 같던 요내 얼굴 호박꽃이 다 되었네
삼단 같던 요내 머리 비사리춤이 다 되었네
백옥 같던 요내 손길 오리발이 다 되었네
열새 무명 반물치마 눈물 씻기 다 젖었네
두 폭 붙이 행주치마 콧물 받기 다 젖었네

울었던가 말았던가 베개 머리 소(沼) 이겼네
그것도 소(沼)이라고 거위 한 쌍 오리 한 쌍
쌍쌍이 떼 들어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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