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을 읽다가 문득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 생각났습니다. 뉘앙스가 굉장히 비슷하지요. 물론, 이 글은 칼 포퍼의 글 보다 좀 더 덜사회적이고, 더개인적이지만 말입니다.

- 중세의 마녀사냥과 근대의 혁명운동을 예시로 들고 있지만, 인간 보다 신을 중시했던 중세의 사례와 근대의 사례를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는 것은 쉽게 동의하기가 힘듭니다. 귀착점은 같았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출발점은 다르니까요. 근대의 사례는 적어도 구체적 사람에서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문화혁명이나 대숙청을 혁명운동과 등치시키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 "무엇무엇 해야한다"라는 도덕적 질타로 사회가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이 글이 개인적인 수준을 벗어나 사회적으로 인용되고 받아들여질 때, 분명 사회운동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에 이용될 것이라는 우려도 이 글이 가진 약점인 것 같습니다.

- 하지만, 이 글이 제게 분명 공감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직 구체적 사람을 잊지않은 보편타당한 운동의 모습을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늘 자신을 괴롭히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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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모름)

- 사람을 인격을 가진 존재로 존재로 보는 데는 많은 시간이 투자된다. 그래서 우리는 빠른 시간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질들을 찾아 내서 그것들로 그 사람들을 규정해 버리려 한다. (중략) 병든 사람들, 몸이 성치 않은 사람들, 거지들과 매춘부들, 또는 열등하다고 여겨진 종족에 속하는 사람들은 늘 다수로부터 박해받을 위협을 안게 마련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사회에 맞설 때는 개인이고, 자연히 소수일 수밖에 없다.

- 개인을 보지 못하고 대신 인류라는 추상적 개념을 앞세우는 이들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로이 캠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인류'와 모든 그런 추상적 존재들을 미워한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과 아이들'을 미워하고 앵무새들이나 강아지들을 기른다." 정부의 몸집과 힘이 점점 커지고 갖가지 단체들이 '풍속의 감시자들'로 나서서 사회적 소수 집단들을 억압하는 우리 사회에서, 영국 시인 로이 캠벨이 한 얘기는 모두가 곰곰이 음미해야 할 화두이다.

- 추상화된 존재가 아닌 구체적인 사람을 보는 방법은 무엇인가? 한 가지 방법은 자신과 맞지 않는 다른 특질들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사랑하기 쉬운 사람들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엔 주는 자가 그것을 받는 자에게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만들려는 힘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기 중심적이다. 사랑하면서 질투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 종교적 신념에서 나온 너그러운 사랑이나 사회적 이념에서 나온 높은 사랑일지라도, 강제가 도사려 있기는 마찬가지다. 중세 서양에서 마녀 사냥에 나선 종교 재판관들은, 자신들은 그녀들의 영혼에 대한 사랑에서 그런 일이 한다고 믿었으며, 근대에 이념을 뚜렷히 밝힌 혁명들도 '인류의 이름으로'나 '인민의 이름으로'라는 구호 아래 많은 사람들을 박해했다.

-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데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너그러움이다. 그렇게 구체적 사람들을 보게 된 뒤에야, 우리는 사랑스러지 못한 사람들 대신 추상적 '인류'를 껴안는 위험을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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