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역설
샹탈 무페 지음, 이행 옮김 / 인간사랑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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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우리는 이 둘을 합해, 흔히 ‘자유민주주의’ 라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역사도, 추구하는 가치도 다릅니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이죠. 그것이 오래 전 그리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새삼스럽게도 자유주의란, 적어도 봉건주의의 몰락과 함께 등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가 멸망한 이후 봉건사회에서 볼 수 없었던 민주주의도, 자유주의와 함께 등장하게 됩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그렇게 만나, 자유민주주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전통은 ‘평등’ 입니다. 물론, 노예와 여자는 평등하지 않았지만,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을 부여받은 귀족 남자들은 평등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대의 민주주의가 아닌 직접 민주주의였고,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가 구별되지 않는 평등이었죠.
민주주의에 반하는 자유주의의 전통은 ‘자유’ 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그리고 법치(法治)를 중요시하죠.
결국, 자유민주주의에는, 때로는 양립할 수 없을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어떻게든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 라고 불리우는 국가들의 정치체제를 보면, 자유주의적 전통과 민주주의적 전통의 요소들이 각기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법치나 재산권의 인정, 등 자유주의적 전통에 비해, 민주주의적 전통은 다소 왜소한 것이 사실입니다. 더구나, 냉전의 종식과 함께 대다수의 국가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선전하고 있는 시점에서, 복지를 통해 민주주의적 전통을 유지하려고 했던 많은 국가들의 실패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구요.

저자의 문제의식은, 이와 같이, 자유민주주의가 민주주의적 전통을 잃어가며 자유주의로 기울어가는 경향에서 비롯됩니다. 저자는 자신과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여러 사상가들을 등장시킨 후, 그(녀)들을 각기 왼편과 오른편에 위치시킵니다. 오른편에는 자유민주주의의 불균형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했던 롤스와 하버마스를, 왼편에는 자유민주주의에 파산선고를 내린 슈미트가 자리하게 됩니다.

롤스와 하버마스는 위기에 처한 자유민주주의를 구출하려고 합니다. 롤스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개인 간의 합의를 통해서, 하버마스는 평등한 논의절차(심의절차)를 통해서, 자유와 평등이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슈미트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가치가 서로 상반된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균형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균형을 잃고 파산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하죠.

저자는 우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서로 완벽하게 화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슈미트의 그것이죠. 저자는 롤스와 하버마스와 같이, 자유민주주의의 완전한 균형을 가정하는 것이야 말로 민주주의를 더욱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슈미트와 같이 자유민주주의에 파산선고를 하지 않습니다. 자유민주주의가 가진 태생적인 모순과 적대를, 경쟁적 관계로 전환시키는 데에 탈출구를 마련합니다. 경쟁적 대립은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의 존재조건이라는, 경쟁적 다원주의가 그것이죠.

그리고, 현실 자유민주주의 정치로 돌아온 저자의 시선은 80년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당에 머무릅니다.
저자에게 70년대 유럽의 복지국가는, 자유주의적 가치와 민주주의적 가치가 발전적으로 경쟁하는 모델인 것입니다. 하지만, 70년대 시작된 불황과 이를 타개하고자 했던 자본주의 국가들의 방책이란, 복지의 축소, 노동권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 공공부문의 사유화, 등 자유주의적 그것이었죠. 이것을 두고 신자유주의(새로운 자유주의) 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대변하던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당의 대응입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경쟁적 다원주의에 따르자면, 좌파정당들은 자유주의적 공세에 맞서 민주주의적 공세를 벌이며 경쟁했어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80년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당들은 ‘제3의 길‘, ’중도좌파‘ 를 표방하며 변화를 꾀했습니다. 이름을 그럴싸 하지만, 이것은 실제, 자유주의적 공세에 맞선 경쟁의 포기, 즉 민주주의적 가치들에 대한 포기였어요.
설사, 이들이 진정으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한들, 그것은 롤스와 하버마스의 그것처럼 불가능한 프로젝트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완전한 균형은 불가능하며, 오로지 경쟁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할 때만이, 일시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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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자가 설정한 대립구도에는 문제는 있습니다.
소개되는 학자들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에 서로 다른 농도의 답변을 하고있지만, 그 전제로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대등한 축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이전에 자본주의가 있었습니다. 자유주의는 전혀 민주적이지 않았던 봉건사회에서 시작되었고, 민주주의는 자유주의가 봉건사회를 전복하고자 할 때, 필요에 의해서, 종속으로 등장했다고 봐야합니다. 실제 민주주의 최소의 절차인 보통선거 마저도, 자유주의 시대 이후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으니까요.
자유주의가 불러온 근대의 민주주의는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을 통해서는 자유주의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저자가 주목하는 유럽 사회민주주의당의 행보 역시도 다르게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변화는 70년대 자유주의의 강세(신자유주의) 속에서 이루어진 것인데요, 이것을 단순히 ‘자유주의에 굴복했다‘ ’민주주의적 가치를 포기했다‘ 고 볼 수는 없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분명히 그렇지만, 단순히 선택하고 포기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이들이 표방해왔던 ‘분배와 복지‘ 내지 ’노동권‘ 이라는 민주주의적 가치는, 소극적인 민주주의, 자유주의에 종속된 민주주의에 불과합니다. 이 종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70년대와 같은 자유주의의 위기 앞에서 민주주의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은 필연적으로 보여집니다. ’예정된 포기‘라고 할까요.

따라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발전적으로 경쟁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가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오히려, ‘호황과 불황‘으로 표현되는 자유주의의 허용폭 속에서, 민주주의가 일시적으로 확대되거나 축소된다고 봐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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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리맨 2020-02-23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탁월한 정리가 돋보이네요. 특히 이윤의 많고 적음에 따라 한 사회에서 허용되는 민주주의(=평등)가 달라진다는 정리가 좋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에 종속된 방식으로 나타났다는 것도 알게 되었네요